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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47 /2014.07] 기획 _ 중국철도이야기 (7) 한반도와 만주를 철도로 연결하는압록강철교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4 조회수 65

[Vol.47 /2014.07] 기획 _ 중국철도이야기 (7)    한반도와 만주를 철도로 연결하는 압록강철교

김지환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전락시킨 이후 한국철도를 만주철도와 긴밀히 연계시켜 대륙철도로 통하는 간선을 구축하기 위한 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1909 3 30일 일본내각회의에 제출된 <한국병합에 관한 건> 3조에서 “한국철도를 제국철도원의 관할로 편입하고, 철도원의 감독 하에 남만주철도와 긴밀히 연계시켜 일본과 대륙철도의 통일 및 발전을 도모한다”라고 규정한 사실로부터 잘 알 수 있다. 안봉철도는 한반도철도와 대륙철도를 잇는 연계철도로서, 일본은 한국, 중국 동북지역을 연결하는 아시아 간선철도의 부설을 지향하고, 이를 통해 자국의 군사적, 경제적 이해를 확대하고자 의도하였다.

 

그런데 새로운 간선교통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중한 간을 가로질러 압록강을 횡단할 수 있도록 철교를 가설하는 일이 불가결하고도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일본제국주의에게 압록강철교의 가설은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역을 연결하여 신유통로를 구축한다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압록강철교는 1909 8월에 착공되어 1911 10월 말 완공되었다. 압록강철교의 가설은 기존 압록강 양안 간 수운을 통해 물류를 유통하던 방식으로부터 안봉철도를 통한 육상운송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박을 통한 수운으로부터 철도를 통한 육운으로의 전환은 어떠한 배경과 목적에서 추진된 것일까?

 

압록강철교에 대해서는 안봉철도의 부설을 관장했던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작성한 『압록강교량공사개황』에 가설의 경위와 공사 진행 과정 등 일련의 상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기존 압록강 양변지역에서는 선박에 의한 수운을 통해 물류의 유통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자연지리적, 기후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교통상 종종 장애가 발생하였다. 압록강은 통상 7월 초순부터 8월 하순까지 우기에 해당되어 홍수가 빈번히 발생하였으며, 이 때 목재나 가옥 등이 유실되어 떠내려 오는데, 유속이 매우 빨라 사실상 선박의 운행이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또한 매년 12월 초순부터 다음해 3월 말까지는 동계에 해당되어 결빙으로 인해 선박의 운행이 불가능하였다. 이밖에도 결빙기와 해빙기를 전후한 각 10일 동안에는 거대한 유빙이 떠다니며 흘러 내려오는데, 서로 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 정도였다. 이와같이 일년 중 절반 정도는 사실상 선박을 운행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국경간 화물 운송의 안정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철교의 가설과 직통철도의 부설이 불가결하였던 것이다.

 

신의주에서 안동현을 바라보며 찍은 압록강의 결빙 모습

 

조선총독부 역시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후 경성-의주 간 철도(경의선 철도)를 부설하였으나, 이 철도의 종단인 압록강은 만한 간의 교통에 다대한 장애가 될 뿐 아니라, 안동현과 봉천 간의 철도 부설을 통해 유럽과 아시아교통을 연계하는 정책에 일대 장애가 되고 있다. 따라서 하루라도 조속히 이 철교를 부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1904 7월 임시군용철도감부는 압록강의 도강점을 결정하여 경의선 철도의 종단으로 결정하고, 의주-안동현 부근 양안의 지형 및 기술상의 제반 조사를 실시하였다.

 

1905 2월 철교의 가설을 위해 설계 및 예산상의 계획을 세우고, 동시에 하저지질 조사, 수심 측량, 유수량의 관측 등을 실시하여 7월 설계도 및 예산서를 확정하고, 이를 일본참모본부에 제출하여 10월에 재가를 받았다. 당초 압록강철교는 부설 방법을 둘러싸고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안이 상정되어 심의에 부쳐졌다.

 

첫째, 단선철도교로 가설한다.

둘째, 복선철도교로 가설하고, 이 중 한 선을 인도로 대용한다.

셋째, 단선 철도의 양측에 인도를 가설한다.

 

이상의 세 방안 가운데 첫 번째 방안은 사람의 왕래를 위해 인도교를 별도로 가설해야 하는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반대에 부딪혔다. 두 번째 방안은 후일 철도의 왕래가 증가하여 복선의 필요성이 대두될 경우 바로 이에 대응할 수 있어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다액의 예산과 오랜 시일이 소요되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세 번째 방안은 가설 비용이 적지 않지만 후일 복선이 필요할 경우 인도의 폭을 늘려 복선화할 수 있으며, 경비에서도 두 번째 방안보다 저렴하다는 점이 고려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결국 세 번째 방안에 따라 철교를 가설하기로 결정하였다.

 

더욱이 철교가 遊氷과 홍수 등의 압력을 견딜 수 있도록 견고하게 가설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에 합당한 교각을 축조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06 9월 임시군용철도감부가 폐지되고 이 사업을 통감부 철도관리국이 계승하여 조사를 진행한 결과 1907 5월 교각의 기초를 모두 철근 콘크리트로 통을 만들어 땅 속에 묻고 기초를 시공하는 潛函工法으로 가설하기로 설계를 변경하였다.

 

구체적인 기초공사의 개요를 살펴보면, 먼저 평균 50척에 달하는 견고한 지반으로 형성되어 있는 지질 위에 통형 상자 구조물을 침하시켜 여기에 異形煉瓦石을 채워 넣고, 상부 5-6척은 단단한 석재를 사용하여 축조한 이후 틈새를 콘크리트로 메우도록 하였다. 상부에는 반원형의 아치형 곡면구조로 연결한 후 상부에 교각을 축조하도록 하였다.

 

이 밖에도 압록강철교는 당초의 고정식 철교의 설계를 변경하여 개폐식 철교로 가설하였는데, 이러한 사정에 대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철교를 회전식 개폐교로 가설한 까닭은 당시 영국의 구축함이 압록강을 항행하도록 하기 위해 영국의 요망에 따라 건설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개폐식 압록강철교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1908 1 9일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桂太郞)에게 보고한 문서에 설계를 변경하게 된 경위가 잘 기록되어 있다. 압록강철교를 부설해야 할 필요성은 러일전쟁 중 일본의 임시군용철도감부에 의해 제기되었다. 임시군용철도감부는 논의를 거쳐 고정식의 철교를 가설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후 철도관리국도 이 계획을 승계하였다. 그러나 북경주재 영미 양국공사가 주중 일본공사에게 예정가교 지점은 안동시가 및 각국거류지의 하류에 위치하고 있어 이 곳을 출입하는 선박에 지장을 초래할 것을 우려하여 철교를 개폐식으로 가설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이와 함께 가능하다면 철교의 가설 지점을 상류로 이전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통감부는 미국, 영국 등의 통상상 이익을 존중하는 취지에서 철교의 설계를 개폐식 가교로 변경하기로 하고, 이러한 의견을 일본외무성에 건의하였다. 결국 일본정부는 논의를 거쳐 1908 11월 선박 항행의 편의를 위해 압록강철교를 개폐식으로 가설하기로 결정하고, 이에 따라 1909 3월에 설계 변경을 완료하였으며, 6월에 공사를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마침내 8월 가설공사에 착수하였다.

 

1909 6 19일 통감부는 훈령 제16호를 발포하여 통감부 철도청 압록강출장소를 설치하고 같은 해 7 1일 업무를 개시하였다. 같은 날 용산 철도청 내에도 임시사무소를 설치하여 업무를 시작하였으며, 8 1일 신의주 압록강안청사로 이전하였다. 12 16일 관제 개정의 결과 철도원 한국철도관리국 압록강출장소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910 2 10일 압록강 건설사무소로 개칭하였다. 한국 병합 이후인 1910 9 12일에 이르러 종래 한국을 조선으로 개명하고 1910 10 1일 조선총독부 철도국 압록강건설사무로로 개칭되었다.

 

마침내 1911 10월 압록강철교가 완공되었으며, 이는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역이 철도를 통해 직통으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존 수운을 통한 물류의 유통이 철도를 통한 육상운송으로 전환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압록강철교의 완공을 통한 한반도와 만주의 철도 연결은 일본, 한국, 중국 동북지역을 연결하는 아시아의 간선 교통로가 탄생하였으며, 이를 통해 새로운 유통망이 출현하였음을 의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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