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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46 /2014.06] 자료소개_인천화교협회 소장 자료 발굴을 통해 본 ‘인천화교 사화(史話)’ (3)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3 조회수 70

자료소개_인천화교협회 소장 자료 발굴을 통해 본 ‘인천화교 사화(史話)’ (3)

Episode 3. 화교묘역 : 낙엽귀근(落葉歸根)에서 낙지생근(落地生根)으로


송승석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지난 몇 년 동안, 인천화교사회는 부평가족공원 내에 위치한 중국인묘역의 개장문제를 둘러싸고 인천시와 오랜 줄다리기를 벌여왔다. 지금은 일정 정도 타결을 보기는 했지만 화교사회로서는 여전히 마뜩치 않아 보인다. 필자는 저간의 상황에 대해 소상히는 알 수 없지만, 간접적으로 관여도 해본 탓에, 그동안의 경과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다. 이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난항을 거듭하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인천시 나아가 한국사회 전체에 대한 화교들의 불신과 피해의식이 그 배경에 자리하고 있다는 게 필자의 소견이다. 적어도 중국인묘역으로만 문제를 한정해보더라도, 화교들은 자신들의 뜻과는 무관하게 몇 번의 강제이장을 겪어야 했고, 이 유쾌하지 못한 경험이 지금의 현안에 대한 불만과 경계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본래 중화의(장)지(中華義(葬)地)라고 불리는 중국인공동묘지가 인천에 조성될 수 있었던 근거는 1884년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의 매장의지 조항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조항에는 “제물포와 10여 리 떨어진 지역 이내에 화상(華商)이 적당한 산전(山田)을 선정해 공동묘지를 만들되, 그 일대는 필히 나무를 심을 수 있을 만큼 넓어야 하고, 묘지를 지킬 수 있는 가옥을 지어야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중화의지가 인천에 처음 조성된 시기는 정확치 않다. 일설에는 인천부 부내면 내리 일대에 화교들의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하나, 이에 대해서는 상기 조항의 거리 규정에 위배된다는 근거로 반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1912년에 현 인천대학교 제물포캠퍼스 자리에 중국인공동묘지가 설치되었다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는 것 같다.


여기에 필자 개인의 억측을 덧붙여 보면 이렇다.

1912년이라면 화교들이 인천에 거주한 지 30년 가까이 되는 시기이다. 그때까지 화교들이 자신들의 무덤 자리 하나 마련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은 이치상으로 적절치 않아 보인다. 가령, 일본 고베의 화상들은 고베 개항 후 2년 만인 1870년에 서둘러 중화의장(中華義葬)부터 마련했다는 것과 비교해보더라도 이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따라서 정식으로 인가받은 것은 아닐지라도 내리 일대에 중국인분묘들이 산재해 분포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 분묘의 대부분은 가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화교들에게는 타향에서 객서(客逝)해 부득이 조국으로 운구해갈 수 없었던 관들을 임시로 매장했다가 훗날 고향으로 가져가는 풍습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는 ‘잎이 떨어지면 뿌리로 돌아간다.’는 뜻의 이른바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고 하는 화교들의 속성과도 맞아떨어진다. 또한 내리에 중국인무덤들이 있었다는 것은 백범 김구 선생이 내동(내리)에 있던 감리서 옥사에서 탈옥해 “중국인묘지를 거쳐 용동 마루턱으로 갔다”는 회고에서도 일부 유추해볼 수 있고, 내리에 있던 중국인묘지 부지에 관한 사기사건을 다룬 『동아일보』 1936년 5월 12일자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현재 인천대학교 제물포 캠퍼스 일대에 조성되었다고 하는 중국인묘역의 경우에는 그 정확한 연대와 주소지가 문제가 된다. 『인천남구향토문화백과』에는, 청국인 묘지는 “원래 인천부 부내면 내동 6번지 일대에 청국인들의 묘지가 있었다가 1912년에 인천부 부내면 우각리 일대(지금의 인천광역시 남구 도화동)로 확장 이전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그림1> 仁川府 多所面 禾洞 淸國義地 測圖


그런데 <그림1>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시 중화의지는 인천부 다소면 화동에 위치해 있었고, 묘지명은 ‘청국의지(淸國義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지도 작성자는 일본인 후쿠다 규조(福田久藏)이다. 지금의 위치상으로 볼 때, 부내면 우각리와 다소면 화동은 거의 겹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당시 행정구역상의 편제와 변경 등에 대한 보다 면밀한 연구를 통해, 당시 주소지의 명확성을 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물론, 아래 <그림2>와 <그림3>의 매화장인허증(埋火葬認許證)에, ‘대정(大正) 4년(1915년) 인천 우각리 지나인 묘지’에 매장했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위 두 개의 주소가 각기 다른 위치를 표기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림2> 매장·화장 허가증<그림3> 매장·화장 허가증


또 하나 문제가 되는 것은 1912년이라는 조성연대이다. 1912년이면 중화민국이 건국되던 해이다. 그런데 여전히 ‘청국’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물론, 과도기에 관행적으로 이렇게 쓸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 지도의 작성자가 일본인이고 추정컨대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제작된 것이라면 다분히 문제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더욱이 1921년에 작성된 <그림4>의 지도에는 명확히 ‘중화의지’로 개칭된 것만 보더라도 보다 자세한 고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몫은 물론 필자에게 있을 것이다.


<그림4> 중화의지 평면도


현재의 도화동에 위치해 있던 이 중화의지는 일대가 1958년 선인재단 부지로 선정되면서 부득이 만수동으로 이전되었고 다시 1989년 지금의 부평가족공원으로 재 이장되었다. 부평가족공원 내 중국인묘역에는 6만㎡의 부지에 총 2천 860여기가 안장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다시 이 중국인묘역이 화교사회의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이다. 인천시가 이 일대를 이른바 친환경적인 휴식공간으로 조성하는 사업을 진행하게 되면서, 중국인묘역도 개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화교들은 시정부의 방침에 따르는 데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바이지만, 조상들의 무덤을 다시 건드려야 하는 난감한 지경에 당혹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상례나 제례에서 이장이나 개장의 문제는 매우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누대에 걸쳐 인천에 거주하고 있는 이른바 구(舊)화교를 언젠가는 중국으로 돌아간다는 ‘낙엽귀근’의 존재로 생각하는 경우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그들은 이 땅에서 살다가 이 땅에 묻힐 ‘낙지생근(落地生根)’의 존재이다. 그들에게 더 이상 피해의식을 갖지 않도록 하는 현명한 해법이 필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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