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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46 /2014.06] 기획_중국철도이야기 (6) 일본의 침략정책과 철도 궤간 : 한반도철도와 안봉철도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3 조회수 235

기획_중국철도이야기 (6)

일본의 침략정책과 철도 궤간 : 한반도철도와 안봉철도


김지환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철도 궤간이란 레일의 넓이(폭)를 가리키는 말로서, 궤간이 결정되면 기차는 반드시 여기에 맞는 기종만이 운행될 수 있게 된다. 철도의 부설에서 궤간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는 철도의 수송능력 등 경제적 효율성뿐만 아니라, 인접한 타국철도와의 상호 연동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정치, 군사적 문제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러시아가 시베리아철도를 부설하는 과정에서 과거 외국의 침략을 경험한 바에 비추어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프랑스나 독일 등과는 상이한 궤간을 선정한 사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러면 한반도철도의 궤간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결정되었으며, 그 함의는 무엇인가? 1945년 8월 15일 한국철도의 총 연장은 6,407킬로미터로서, 이 가운데 표준궤 선로가 5,038킬로미터로 88%, 협궤 선로가 801킬로미터에 상당하였다. 이로부터 한반도철도는 당시 일본에서 채택하고 있던 50파운드 궤조(미터당 레일의 중량)와 협궤 선로가 아니라 중국의 간선철도와 직접 연결될 수 있는 75파운드 궤조와 표준궤 선로를 기본적으로 채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반도철도와 만주, 중국철도와의 연결을 지향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 배후에는 바로 일본제국주의의 강력한 정책적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1896년 7월 17일 한국정부는 철도국을 설립한 후 <국내철도규칙>을 제정, 반포하여 모든 철도의 궤간을 표준궤로 부설한다고 선포하였다. 당시 한국정부는 중국의 간선철도가 모두 표준궤를 채택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인선철도의 부설권을 소유한 미국 역시 표준궤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표준궤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관파천 이후 시베리아철도를 광궤로 건설하고 있던 러시아가 압력을 넣어 결국 1896년 11월 15일 한국정부는 철도를 광궤로 부설하기로 방침을 개정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미국과 일본이 이에 적극 반대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은 한국에 500만원의 차관을 제공하기로 약속하면서 철도 부설권을 확보한 결과 다시 표준궤의 채택을 선언하였다.


그렇다면 일본은 한반도철도의 궤간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논의를 진행하였으며, 최종적으로 표준궤를 채택하기로 결정한 것은 어떠한 지향을 내포하는 것일까? 일본에서는 러일전쟁 이전에 이미 러시아와의 군사적 충돌을 상정하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한반도철도를 시급히 부설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반도철도의 궤간을 둘러싼 논의가 심도있게 진행되었다. 한편에서는 러시아와의 충돌에 대비하여 신속히 철도를 부설해야 할 필요성과 함께 부설 자금의 부족과 한정된 여객, 화물을 이유로 궤간 1미터의 협궤를 채택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는 일본 국내와 동일한 것으로서, 일본의 궤조와 차량을 신속히 전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의견은 일본참모본부 등이 제기한 것으로서, 러시아와 일본의 경쟁이 전쟁으로 비화될 경우 신속히 대응해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제기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부철도주식회사 사장 시부사와 에이이치(涉澤營一)는 경부선철도가 대륙철도와 연결할 수 있는 국제간선으로서의 위상을 갖추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궤간을 반드시 표준궤로 부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장기간 견지해 온 일본의 국책과 일정 정도 부합하는 측면이 있었다. 다시 말해 1902년 일본내각회의가 한반도 간선철도를 만주로 연장하여 아시아대륙철도의 간선으로서 위치시킨다는 국책과 합치되는 것이다. 즉 한반도철도와 대륙철도의 연계를 명확히 지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찍이 1894년 9월 한국 주둔 일본군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총리 이토 히로부미에게 제출한 상주문에서 “부산-의주 사이의 철도는 동아대륙으로 통하는 대도로서, 장래 중국을 횡단하여 인도에 도달하는 도로(철도)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더욱이 “의주로부터 철도를 연장하여 만주를 횡단하는 것은 兵略上, 商略上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하며, “조선철도와 만주철도를 통일적 지휘 및 관리 하에 두어 경영하고, 설비를 일치시켜 전시의 요구에 부응해야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상주문에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한반도철도의 국제적 역할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으며, 대륙침략정책의 일환으로서 위치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설비의 일치’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궤간의 통일은 이미 한반도철도를 표준궤로 부설해야 한다는 지향성을 명확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11년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군사상의 요구에 기초한 조선, 만주에서의 철도 경영 방책 의견서>에서 시베리아철도의 복선화가 완공된 이후 만주지역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러시아는 개전 후 140일 만에 100만 명의 병력을 하얼빈까지 수송할 수 있지만 일본의 능력은 50만 명의 병력과 병참을 수송하는데 불과하다는 우려를 표명하였다. 이와 같은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은 한반도철도 및 안봉철도, 나아가 만주북부철도를 병력 수송을 위한 일대 간선으로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일찍이 1903년 12월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이듬해인 1904년 2월 일본은 한반도철도의 군사적 역할에 주목하고 병참총감 아래 임시군용철도감부를 특설하고 경의선철도의 기공을 결정하였다. 1904년 4월 하순에 일본군은 압록강 연안까지 진격하여 강북에 포진한 러시아군을 격퇴한 이후, 5월 초순 다시 봉황성으로 진입하면서 병참용으로서 안동현과 봉황성 사이를 연결하는 수압식 경편철도를 부설하기로 결정하고 즉시 기공에 착수하였다. 일본은 철도의 신속한 부설을 위해 임시철도대대를 조직하였는데, 이 부대는 7월 12일 안동현 철일포에 상륙하여 8월 10일 기공에 착수하였다. 마침내 11월 3일 안동현에서 봉황성 사이의 철도 전선을 완성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안봉철도의 기원이다.


안동의 안봉철도 역사


안봉철도는 러일전쟁시기 일본제국주의가 군용 석탄을 채굴하기 위한 목적에서 무단으로 본계호탄광을 점거하는 동시에, 여기에서 채굴된 석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임시로 부설한 철도였다. 이 철도는 봉천을 출발하여 渾河堡, 陳相屯, 石橋子, 本溪湖, 橋頭, 草河口, 鳳凰廳을 거쳐 안동에 이르는 총 연장 303.7킬로미터, 궤간 0.762미터, 1미터당 궤조(중량) 12.5킬로그램의 협궤 경편철도였다.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일본은 안봉철도를 종래의 협궤로부터 한반도철도 및 만주철도를 잇는 표준궤로 개축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안봉철도는 이와 같은 인식과 정책 하에서 부설된 철도로서, 일본, 한국, 중국동북지역을 연결함으로써 아시아에서의 간선교통로로서의 역할과 성격을 명확히 지향하고 있었다. 안봉철도의 개축에는 군사적 목적뿐만 아니라 상업적, 경제적 목적 역시 매우 중요한 요소로 고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안봉철도의 실용적 기능을 제고할 수 있도록 개축할 필요가 있어 명치 38년(1905) 12월에 북경담판에서 이러한 목적에 근거하여 청국과 교섭을 진행하였다. 여기에서 일본은 안봉철도를 상공업 발전 및 화물 수송을 위한 기능을 제고하도록 개축하여 경영할 수 있는 권리를 확인하였다.


안봉철도 노선도


안봉철도의 개축은 단순히 안동과 봉천을 연결하는 일 구간으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일본-한국-중국동북(만주)-유럽으로 이어지는 간선철도의 일부로서 효용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경부철도와 경의철도는 일본의 대륙침략정책과 표리의 관계 속에서 부설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미 중국철도와의 연계를 전제로 한 국제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 안봉철도의 개축은 일본의 대륙침략정책이라는 정략적 기능뿐만 아니라, 후발자본주의 국가로서 일본의 경제발전과 시장의 확대를 위한 상략적 기능을 제고하기 목적에서 추진된 것이다.


1907년 일본이 중국과의 사전 협의과정도 없이 안봉철도를 개축하기 위한 토지를 사전에 확보한다는 구실로 사유지를 무단으로 점거하자 중일 간에는 안봉철도를 둘러싸고 첨예한 갈등이 시작되었다. 중일 간에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안봉철도를 개축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에 대항하여 1907년 2월 3일, 중국군기처는 외자를 도입하여 신민에서 법고문까지, 여기에서 다시 遼源州와 치치하얼에 이르는 철도를 부설하여 만몽에서의 권리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만주에서 중국이 철도를 부설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를 제기하며 이를 좌절시키고자 하였다. 1909년 8월 6일 일본내각은 <안봉철도 개축 및 길장철도 차관 세목에 관한 건>을 통과시키고 “안봉철도의 개축은 조약상 보장된 일본의 권리에 속하는 사항일 뿐만 아니라 군사상, 경제상 하루라도 조속히 실행해야 한다. 특히 이 철도는 한국철도를 남만주철도와 동청철도 양 철도와 연계함으로써 부산을 최남단 종점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교통의 대도로서, 일본제국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올 것이다. 청국정부가 조약상의 권리를 무시하고 있는 현실에서....제국정부는 개축공사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결의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09년 9월 4일 체결된 간도협약에서 일본은 간도를 중국의 영토로 인정하였으며, 그 대가로서 중국은 만주에서 일본의 철도 부설권 및 경영권의 확대를 상당 부분 받아들였다. 9월 5일 중일 양국대표는 북경에서 안봉철도와 관련된 협상이 평화적으로 마무리되었다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중일 간 갈등을 유발했던 안봉철도의 개축 문제는 일본의 희망대로 처리될 수 있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반도철도 및 안봉철도는 부설의 과정에서 일본의 정책적 고려가 깊이 반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대륙침략정책의 일환으로서 만주 및 중국으로의 연계를 이미 전제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본-한국-중국동북(만주)-유럽으로 이어지는 교통수단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정책을 지탱하기 위한 불가결한 토대가 아닐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후발 자본주의국가로서 일본의 경제발전과 시장의 확대를 위한 기초로서 한반도철도와 안봉철도의 연결이 매우 시급한 과제였음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방침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존에 군용철도로서 부설된 협궤의 안봉철도를 개축하여 일본의 상품을 봉천까지 신속히 운반할 수 있는 유통망을 부설하는 것이 불가결하였던 것이다. 일본은 대륙침략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이와 같은 政略的, 商略的 간선철도의 완성과 더불어 만주지역에 대한 일본의 지배력를 제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임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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