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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45 /2014.05] 자료소개_인천화교협회 소장 자료 발굴을 통해 본 ‘인천화교 사화(史話)’ (2)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3 조회수 100

자료소개_인천화교협회 소장 자료 발굴을 통해 본 ‘인천화교 사화(史話)’ (2)


Episode 2. 오례당(吳禮堂)1) ― 담걸생(譚傑生)과 어깨를 나란히!


송승석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청나라는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을 통해, 지금의 인천 선린동 일대 구릉지에 약 5,000평 규모의 전관조계(專管租界)를 설정하게 된다. 1884년 4월 2일의 일이다. 청관(淸館) 혹은 ‘중국동네’ 정도로 불리다가 오늘날에는 속칭 차이나타운(일명, 中華街)이라 불리는 지역이 바로 이곳이다. 엄격히 말해, 전관조계와 거류지는 구별되어야 마땅하나 당시에는 이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없었던지, 이 일대를 ‘청국거류지’라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불과 3년만인 1887년 7월 13일, 청나라는 조선인 거주지였던 싸리재(내동과 경동 부근) 일대에 자신들의 두 번째 조계지를 획득하게 된다. 청상(淸商) 가운데 인천에 상점을 개설하고 무역을 벌이는 자들이 급증함에 따라 기존 ‘청국거류지’가 포화상태에 이르고 말았다는 게 그 이유였고, 앞선 <인천구화상지계장정> 제1조가 그에 대한 법적근거가 되어주었다. 이른바 3,800여 평에 달하는 ‘삼리채청상지(三里寨淸商地)’가 바로 그것이다.


仁川淸國居留地年稅表(일부)


仁川三里寨淸商地年稅表(일부)


이상 두 개의 문건 즉, 【인천청국거류지연세표(仁川淸國居留地年稅表)】와 【인천삼리채청상지연세표(仁川三里寨淸商地年稅表)】는 바로 1908년(光緖34년) 현재, 이 두 지역에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던 화상(華商)들에게 부과된 지세(地稅) 관련 세액표(tax table)이다. 조계지역 내 모든 토지는 거주국정부와의 임대협정을 거쳐 자국민에게 불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따라서 청국거류지와 삼리채청상지 두 지역의 화상 부동산 역시 엄밀히 말해 소유라기보다는 영구임대에 가까운 것이라 볼 수 있다. 여하튼 인천중화회관(仁川中華會館)이 작성한 이 세액표는 지주명호(地主名號), 지단호마(地段號碼), 면적(面積), 세액(稅額)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간단한 설명을 붙이자면, 지주명호는 해당 부동산의 소유주 이름이고, 지단호마는 부동산 소재지 즉, 자호(字號)에 해당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면적은 ㎡로 계산했고, 세액은 친절하게도 조선구폐(朝鮮舊幣, 文)와 일본폐(日本幣, 錢)로 환산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우선 인천청국거류지에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화상으로는 왕흥륭(王興隆), 서성춘(瑞盛春), 유성인(裕盛仁), 서공순(西公順), 동순태(同順泰), 금성동(錦成東), 영래성(永來盛), 관홍거(關鴻?), 장삼유(張三維), 이태(怡泰), 이생(怡生), 겸익(謙益), 광조당(?兆堂), 의생성(義生盛), 복리(福利), 유풍덕(裕豊德), 쌍성태(雙盛泰), 유길성(劉吉盛), 왕유경(王裕卿), 북방회관(北幇會館), 장계평(張?平), 황흔연(黃欣然), 동청철도(東淸鐵道) 등 22개이고, 이들이 불하받은 총면적 약 5,000㎡(1,500평 가량)의 토지 및 가옥에 부과된 지세는 조선구폐로 총 140,846문(文)이다. 그리고 이들이 실제 납부해야 할 세액은 존비금(存備金)의 2/3에 해당하는 9원 38전(일본폐)이다. 반면, 인천삼리채청상지에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화상으로는 오례당(吳禮堂), 쌍성태, 순리호(順利號), 북방회관, 취현당(聚賢堂), 동서원(東瑞源), 길성호(吉盛號), 화성동(和成東), 공원리(公源利), 양태당(梁胎堂), 관홍거, 장유산(張維山), 의생성, 광방공소(廣幇公所), 서성춘, 유성인, 동순태, 덕흥(德興), 이태, 겸익 등 도합 20개이고, 이들이 소유한 총면적 약 11,000㎡(3,300평 남짓) 토지의 연 과세액은 총330,094문이다. 물론, 이들이 실제 납부해야 할 세금은 존비금의 2/3인 22원 7푼 5리이다. 면적상으로만 보더라도, 이들이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은 청국거류지 5,000여 평의 1/3 이상이고, 삼리채청상지 3,800여 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청국거류지 가운데 동순태(同順泰)가 동청철도(東淸鐵道) 다음으로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과 삼리채청상지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1,800여 평의 토지를 오례당이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익히 아는 바와 같이, 동순태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정부에 차관을 제공했을 정도로(물론, 이는 청 정부를 대신해 명의만 빌려준 것이다.), 무역업과 금융업 그리고 부동산업에 있어 조선 내 제일의 상사(商社)였다. 특히, 동순태의 CEO 담걸생(譚傑生)은 1924년 현재 서울지역 개인납세자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조선 내 최고의 갑부이기도 했다. 따라서 1899년 인천에 제물포분호(濟物浦分號)를 설치하고 활발하게 사업을 벌였던 동순태가 청국조계지 내에 700㎡ 남짓의 땅을 소유하고 세금으로 25,000문 정도를 냈다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오히려 이채롭다면, 동청철도가 청국조계지 내에 800㎡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일지도 모르겠다.(이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한 연구가 필요할 듯하다)


淸國居留地 內 同順泰 不動産


오히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오례당의 부(富)이다.

오례당은 삼리채청상지 가운데 운(雲), 등(騰), 성(成), 여(呂), 생(生), 탕(湯), 건(建), 동(同), 성(盛), 흥(興), 족(足), 실(實), 진(振), 긍() 등 21개 자호(字號)를 아우른 약 6,000㎡(1,800평 남짓)를 소유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지세가 218,640문이나 되었다. 적어도 인천으로만 지역을 한정한다면, 오례당은 동순태보다 8배가 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역시 8배 이상의 세금을 내고 있었다. 한마디로, 당시 인천화상 제일의 갑부는 오례당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또 하나 흥미로운 일은, 오례당이 삼리채 일대의 거의 모든 토지를 자신의 소유로 하고 있던 반면에 정작 청국거류지 내에는 단 한 평의 땅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점일 게다. 이는 당시 화교사회와 오례당의 소원했던 관계를 추측해 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됨직하다. 앞서도 말했듯이, 삼리채청상지는 청 정부가 청국거류지의 포화상태를 염려해 새롭게 요구한 조계지였다. 그렇지만, 이 지역은 청국거류지와는 달리 조계로서의 면모를 갖추지 못한 채 대부분 채마전으로 전용되고 있었다. 일명 ‘오례당농원(吳禮堂農園)’이 그 예증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삼리채 조계지역에 오례당이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이것이 곧 그가 화교사회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조선체류기간의 대부분을 제물포해관의 일개 직원으로 근무했던 그가 어떻게 일거에 막대한 거금을 마련해 이렇듯 광대한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었는지는 정확치 않다. 다만, 1913년 2월 8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의 [不知鹿在誰手]란 기사에 따르면, 오례당이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프랑스의 로 후작이란 이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이 역시 사실의 진위여부를 정확히 판별할 길은 없다. 그러나 오례당의 유산을 둘러싸고 그의 부인 아말리아와 조카인 우루셩 간에 벌어진 재산분쟁을 다룬 이 연재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바로 오례당이 남긴 재산이 100만 원에 육박한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 제일의 갑부였다고 할 수 있는 동순태 담걸생의 재산이 서울과 인천 등을 합해 도합 200만 원(일설에는 400만 원) 정도였음을 감안할 때, 그 절반에 해당하는 막대한 자산인 셈이다. 결국, 오례당은 적어도 재산면에서는 담걸생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해도 과한 말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돈이 전부였을까? 그가 자신의 동족인 화교 및 그 공동체와 일정정도 거리를 둠으로 해서 잃어버린 것이 오히려 더 많지는 않았을까? 궁금하다.



1) 지난 <중국관행웹진> 4월호에서 吳禮堂을 ‘우리탕’으로 표기하였으나, 이번호부터는 인명이나 상사명을 한자독음으로 표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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