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알림
Information / News

열린게시판

제목 [Vol.45 /2014.05] 기획_중국철도이야기 (5) 간도협약과 길회철도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3 조회수 160

[Vol.45 /2014.05] 기획_중국철도이야기 (5)

 간도협약과 길회철도



김지환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일본제국주의는 역사적으로 타국에 대한 지배와 약탈의 수단으로 철도를 이용하였으며, 따라서 철도 부설권과 경영권의 장악은 일본의 대륙침략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일본은 만주를 중국 본토로부터 분리하여 자신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철도 부설권과 경영권의 획득과 확대를 주요한 침략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1896년의 청러밀약을 통해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의 만주 통과 노선인 동청철도의 부설권과 함께, 철도 연변의 30리 이내에서 광산 및 기타 권리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획득하였다. 러시아가 동청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사실에 대해 일본참모본부는 “이 철도를 통해 유럽령 러시아의 군대를 극동으로 수송하려는 계획에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러시아로서는 극동에서의 형세가 용이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우수리 철도대대를 여단으로 확장하고, 나아가 극동의 병력을 증가시키고자 한다”라고 지적하였다. 이렇게 볼 때, 일본군부는 동청철도가 가지고 있는 정치, 군사적 성격에 주목하여 우려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외무성 내에서는 동청철도의 정치, 군사적 측면보다는 오히려 그 경제적 효과에 주목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일본은 삼국간섭 직후부터 중러 간의 철도 연결 노선의 부설, 즉 동청철도의 부설에 대해 인식하고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여론은 동청철도가 시간 및 운송비 등에서 경쟁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철도 부설 이후 동아시아 무역과 운송이 모두 이 철도로 집중될 것을 우려하였다.


동청철도가 갖는 정치, 군사적 성격을 제외하고도 이 철도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 효과는 일본의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즉 시베리아철도와 동청철도가 완성된 이후 이 철도는 유럽과 동아시아 간의 물자 운송을 독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만주에서 생산된 물자의 운송을 독점할 가능성도 있었다. 철도 부설권의 확대와 그것이 가져오는 효과는 철도 연선지역에 대한 경제적 예속뿐 아니라 나아가 정치, 군사적 세력권의 형성을 위한 기초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일본에서는 동청철도의 부설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으며, 나아가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으로 하여금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 바로 간도의 영유권 문제였다. 간도지방은 중국과 한국과의 국경이 분명하지 않고, 인구가 희박하며 토지가 비옥하였다. 1712년 청조의 강희제는 백두산 일대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烏喇總管 穆克登을 파견하여 국경 설정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부여하고 조선과 교섭하도록 하였다. 목극등은 조선의 군관과 함께 두만강과 압록강의 분수령에 이르러서는 마음대로 정계비를 세운 후 조선에 통고하였다. 그런데 정계비에 기재된 “동쪽은 土門으로 정한다”는 구문에 대해 중국은 土們은 圖們江(두만강)과 동음어로 도문강을 가리키는 것이며 따라서 도문강 이북이 바로 중국의 영토라고 주장한 반면, 조선은 토문강과 도문강은 실질적으로 전혀 별개의 강으로 토문강 이남이 조선의 영토라 주장하면서 이후 한중간에 논쟁이 계속되었다.


청일, 러일 양대전쟁을 거치면서 동아시아의 정세가 급변하고,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면서, 간도에 대한 중한의 교섭은 중일 양국 간의 외교문제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조선통감부는 간도파출소를 설치하였으며, 이에 대해 중국 측은 영토 주권의 침해라는 이유로 강렬한 이의를 제기하였다. 조선통감부는 간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천명하고, 따라서 간도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단호한 결심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중일 간에 만주에 관한 여러 중요한 교섭이 교착상태에 있었으며, 이를 원만히 해결하는 일은 만주에서 일본의 장래를 위한 기반을 확립하는데 최대의 현안으로 간주되었다.


1908년 4월 7일, 일본정부는 주중공사를 밀사로 보내 국경분쟁에서 조선민의 보호를 담보로 중국과 교섭하도록 하였으며, 간도문제는 부득이할 경우 도문강을 국경으로 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09년 2월 6일, 주중 일본공사 이주인 히코키치(伊集院彦吉)는 청조외무부에 <동삼성육안>을 제출하고, 동북에서 일본의 철도 부설권 및 광산권의 확대를 대가로 간도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을 인정할 수 있다는 뜻을 전하였다. 결국 청조는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는 대가로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1909년 9월 4일, 마침내 중일 양국은 간도협약을 체결하여 “청한 양국의 국경을 도문강으로 하고, 일본제국정부는 간도를 청국의 영토로 인정하며, 장래 길장철도를 연장하여 한국 회령에서 한국철도와 연결하도록 한다”라고 규정함으로써 정식으로 길회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부여하였다. 일본은 간도협약을 통해 간도의 영유권을 중국에 넘기는 대가로 만주에서 철도의 부설권, 특히 길회철도의 부설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만주사변 직후인 1931년 12월 관동군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돈화-도문 간의 철도를 조속히 부설하여 완성하도록 지시하였으며, 마침내 1933년 2월에 길회철도 전노선이 개통되었다. 이와함께 도문에서 조선의 웅기, 나진, 청진 등에 이르는 새로운 노선도 부설되었다. 길회철도는 길장철도의 연장선상에서 부설된 만주 횡단철도로서, 일본은 20여 년간 꿈에 그리던 일만 간의 최단노선을 마침내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길회철도의 완성은 일만선 경제블럭의 형성과 동아시아의 정치, 군사적 역학구도에 중요한 전기를 가져다주었다.


길회철도 길림역


일본제국주의가 철도 부설권을 장악하고 확대함으로써 만주를 중국 본토로부터 분리하고 이를 일만선 경제블럭으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는 바로 소련이었으며, 철도부설권의 확대에 가장 큰 장애는 동청철도였다. 만주에서는 북만주의 화물을 블라디보스톡항을 통해 이출하고자 하는 동청철도와 대련항으로 흡수하려는 남만주철도 사이에 소위 화물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으며, 특히 대두, 두박, 소맥, 소맥분, 두유에서 경쟁이 가장 치열하였다. 비록 러일전쟁의 결과 일본은 러시아의 세력을 북만주로 후퇴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 동청철도 본선이 러시아의 수중에 남아 있는 한 러시아의 재기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길회철도의 부설이 추진되면서 완공시 이것과 연결할 종단항구의 건설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에 적합한 항구로서 나진과 청진, 그리고 웅기 등 북선의 3항이 거론되었으며, 일본정부는 종단항을 선정하기 위한 본격적인 검토에 착수하였다. 결국 길회선의 핵심종단항으로서 나진이 선정되었는데, 그 배후에는 일본군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일본군부는 국방상의 관점에서 볼 때도, 중국에 있는 대련항보다는 조선 북부의 나진항을 선정함으로써 유사시 만주와 일본은 최단거리로 연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견지해 왔다. 그리하여 “만몽의 화물을 나진에 집중시켜 블라디보스톡에 대항해야 하며, 이를 통해 전시에 일본의 경제적 독립을 보장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특히 육군성 내의 일부 ‘나진론자’들은 웅기의 경우 소련의 연해주 및 훈춘과 맞닿아 있어 유사시 적의 위협에 노출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종단항으로서 부적합하며, 따라서 나진을 종단항으로 결정하고 동시에 나진-회령 사이에 직통철도를 부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진항(1920년대)


길회철도 전선의 개통은 만주의 수출입루트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기존 30여 년간 만주의 물류 유통은 크게 보아 대련과 블라디보스톡의 양대 수출 계통에 의존하였는데, 여기에 길회철도의 개통과 종단항으로서 나진항이 선정되고 웅기, 청진 등이 보조항으로서 신증설되면서 큰 변화가 발생하였다. 길회선의 부설과 종단항으로서 나진항을 선정한 것은 만주 물동량을 선점함으로써 블라디보스톡항의 기능을 저하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제국주의는 길회철도의 부설을 통해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가 획득한 동청철도의 경제적 효용성을 현저히 저하시켰으며, 사실상 동청철도에 대한 소련의 관심을 저하시키데 성공하였다. 길회철도의 완성과 나진항의 발전으로 인해 기존 블라디보스톡항의 번영이 급속히 쇠퇴하면서, 기존 무역 중심지로서 훈춘의 지위 역시 급속히 쇠락하였다. 반면 길회철도를 통해 조선으로 물자가 밀려들면서, 무역 중심지로서 도문의 지위가 크게 제고되었다.


길회철도를 통한 일본의 만주진출의 구상도


0 comments
작성자 패스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