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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44 /2014.04] 자료소개 _ 인천화교협회 소장자료 발굴을 통해 본 ‘인천화교 사화(史話)’ (1)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3 조회수 43

| 자료소개 | 인천화교협회 소장자료 발굴을 통해 본 ‘인천화교 사화(史話)’ (1)


송승석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연재에 앞서

 

인천대학교 HK중국관행연구사업단은 2013년 11월 12일 인천화교협회와 정식 조사업무협약을 맺고, 협회 내에 소장되어 있던 화교 관련 미공개자료의 전수조사 및 전산화작업에 착수했다. 이번 조사 작업이 성사되기까지에는 인천화교협회에 대한 3년여의 지난한 설득작업이 선행되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에 소재한 화교협회 가운데 자신들이 소장한 자료 전체를 일반에 공개한 전례가 없는 터라, 인천화교협회로서도 이번 일은 여간 부담이 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자료의 상당부분이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은 화교사회 내부의 예민한 문제들을 담고 있어, 공개를 결정하기까지에는 화교협회를 비롯한 화교사회 전체의 치열한 논의와 신중한 판단이 뒤따랐을 줄로 안다.

 

이번 기회에 협회 지도부와 화교사회 전체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하고 싶다.

 

6개월에 걸친 인천화교협회 소장 자료에 대한 조사 작업은 현재도 진행 중에 있다. 자료목록작성 작업과 전산화를 위한 스캔 및 사진촬영 작업은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지만, 원본 자료의 보존을 위한 수장고의 설치, 자료에 대한 검토와 연구, 화교연구자 및 일반시민을 위한 자료집 출간과 자료전시회 그리고 궁극의 목표라 할 수 있는 화교역사박물관 건립 등 산적한 후속작업은 여전히 많은 시일을 필요로 하고 있다.

 

자료에 대한 소개는 면밀한 고증과 체계적인 분석이 전제된 위에 이루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은 시점에 일부 자료나마 지면에 올리는 것은 섣부른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번 기회를 통해 많은 석학제현의 도움을 받아 자료조사의 완성도를 높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본다.

 

1년의 기한을 목표로 구성되는 이번 기획은, 자료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과 기초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인천화교의 삶과 기억을 가벼운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내보고자 한다.

 

기탄없는 질정과 따뜻한 가르침이 절실하다.


Episode 1.  우리탕(吳禮堂) ― ‘Spanish Lady’의 분노


오늘은 우리탕(吳禮堂, 1843∼1912)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우리탕은 제물포(인천)해관 창립멤버 8인 중에 유일한 중국인 직원(幇辦, Assistant)이었고, 1883년 견미조선보빙사(遣美朝鮮報聘使) 수행원(隨員, 통역담당)의 일원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인천해관을 그만 둔 후에는 인천에 정착하여 대부호로 군림했다는 사실 등과 함께 한국의 근현대사 내지 인천향토사에서 간혹 언급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화교사회 특히, 인천화교사회에서 그를 기억하고 있는 이는 의외로 드물다. 외부적 명성에 비해 내부적 인지도는 그리 높지 않은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화교이야기의 첫 꼭지를 우리탕으로 잡은 것은, 자료조사 작업 중에 우연히 그와 관련된 두 통의 흥미로운 편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편지의 내용은 우리탕의 미망인 아말리아(Amalis Amador C. Woo, 1863∼1939)가 자신의 (시)조카인 우루셩(吳魯生)에게 인천외국인묘지에 건립된 남편의 묘비 설치비용의 절반을 청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1914년 2월 10일자 편지(1)


1914년 2월 10일자 편지(2)


1914년 2월 10일자 편지(3)



동봉된 명세서(1)


동봉된 명세서(2)


이와 관련된 구체적 설명에 앞서, 잠시 인천외국인묘지에 대해 짚고 넘어가기로 하겠다.


인천의 청학동 일대를 돌다보면, 한쪽 구석에 고즈넉이 자리한 ‘외국인묘지’를 발견할 수 있다. 지금은 거의 방치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제대로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형편은 아니지만, 그 안에 잠들어 있는 외국인들(66기)을 추념하기 위해 세워진 각양각색의 묘비만으로도 이곳은 마치 조각품 전시장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한적한 공원의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본래 인천외국인묘지가 건립된 곳은 지금의 인천시 연수구 청학동 53번지가 아니라, 각국의 조계들이 위치해 있던 인천시 중구 일대였다. 정확한 주소는 인천시 중구 북성동 1가 1번지이다. 첨언하자면, 1914년 3월 30일에 비로소 완성된 북성동 묘지가 1965년 5월 25일 현재의 청학동으로 이장되어 새롭게 조성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개항장 인천에서 활동한 해관원, 의사, 선교사, 사업가 등 주로 서양인들의 무덤으로 알려진 이곳에 중국인 우리탕이 함께 안장되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인천 거주 중국인이라면 응당 도화동(현, 인천대학교 제물포캠퍼스 일대)에 소재한 중국인 의장지에 매장되는 게 도리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탕(吳禮堂) 부부의 묘(왼쪽이 우리탕, 오른쪽이 아말리아) <서은미 작가 제공>


우리탕이 외국인묘지에 안장된 연유에 대해 몇 가지 억측을 늘어놓자면 이렇다. 우선, 우리탕이 죽고 나서 미망인이 된 그의 스페인 출신 아내 아말리아의 뜻이 강하게 작용했을 수 있다.(그녀 역시 결국은 이곳에 묻혔다.) 그녀가 먼저 제안한 것인지 아니면 인천의 서양인사회(Western Community)의 제안에 그녀가 동의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러한 개연성은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실제로 아말리아가 당시 우루셩의 제물포 재산관리인 Tien Tchi Fang(한자 불명)에게 보낸 1914년 7월 10일자 편지를 보면, 한때 세창양행(Edward Meyer & Co)의 직원이었던 헤르만 헨켈(H. Henkel)이 양자(아말리와 우루셩) 사이에서 묘비 건립 비용부담과 관련해 중재에 나섰음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둘째, 우리탕의 인천사회에서의 교제 범위가 동족인 화교 커뮤니티보다는 주로 서양인 커뮤니티에 치중되었던 탓에, 그 스스로 이곳에 묻히기를 유언으로 남겼을 가능성이다. 가령, 인천 최초의 외국인 전용클럽이라 할 수 있는 제물포구락부가 1901년 발족되었을 당시에 우리탕 부부도 60명의 회원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한때 프랑스 파리에서 댄서로 활동했다고도 하는 ‘스페인 레이디’ 아말리아의 플라밍고는 제물포구락부에서 열리는 각종 만찬회와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빠져서는 안 될 클라이맥스였다고 한다. 이만큼 그들 부부의 서양인 커뮤니티와의 교류는 활발했던 반면, 화교사회와는 그다지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지는 못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아말리아와 우루셩이 우리탕의 유산을 두고 법정에서 소송을 불사할 당시, 이와 관련한 기사를 실었던 매일신보(每日申報) 보도(1913년 2월 8, 9, 11, 27일)를 일별하면, 화교들이 오히려 이들 부부에 불리한 증언을 일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인천 답동성당 건립(1889)을 위해 부지의 일부를 희사했다는 소문이 나돌 만큼(사실, 우리탕은 싸리재三里寨를 포함한 이 지역 일대에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추측되는 그가 중국 전통의 민간제례에 근거한 중국인 매장방식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의 묘비 앞에 깔려 있는 가톨릭 풍의 대리석 십자가만 보아도 그렇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이는 모두 필자의 단순한 억측에 불과하다.


각설하고, 편지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넘어가보기로 하자.

이번에 발견된 두 통의 편지는 발신인이 모두 아말리아로 되어 있고 수신인은 각각 그녀의 조카 우루셩의 제물포 재산관리인 그리고 인천중화상회로 되어 있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 두 통의 서신은 모두 하나의 사건 즉, 고인이 된 우리탕의 묘비 건립에 따른 소요 비용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탕 묘비 건립에 들어간 총 비용 2,127.51엔 가운데 절반을 우루셩이 부담하기로 약조해 놓고도 이에 대한 약속이행에 불응한 채 제대로 정산하고 있지 않은 바, 미불금 833.75엔을 빨리 갚으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앞서도 잠깐 거론했던 양자 사이의 유산상속분쟁과 그 결과에 대한 아말리아의 분노 그리고 조카에 대한 서운함이 짙게 배어 있음을 능히 짐작해볼 수 있다. 청구 비용 가운데 자신이 우루셩의 모친 장례비 조로 상하이(上海)에 송금했던 비용까지 재청구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양자 사이엔 감정적 앙금이 여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산분쟁은 결국 1913년 2월 25일 양측이 공히 절반씩 상속받는 것으로 판결이 났지만, 아말리아 자신은 이번 판결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판결이 있고 1년여가 지난 시점인 1914년 7월 10일자 편지의 내용을 보게 되면, 조카 우루셩의 제물포 대리인격인 Tien Tchi Fang과 그의 동조자로 나선 칼 볼터 상사(Carl Wolter & Co., Edward Meyer & Co.의 후신으로 추측됨)의 매판(買辦) Wang Xing Ho(한자 불명)가 재산분쟁 및 묘비건립비용의 미지급 등 모든 문제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녀의 편지에 따르면, 본인이 아픈 틈을 타 남편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다시피 한 이들에 대한 분노가 편지 곳곳에 드러나 있고, 향후 이 빼앗긴 재산이 과연 상하이에 있는 우루셩 및 그의 친척들을 위해 정당하게 관리되고 있는지 예의주시하겠다는 경고의 메시지도 함께 들어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 두 사람에 대한 뒷조사를 통해, 이들이 우루셩 몰래 동순태(同順泰)로부터 67호에 걸친 다량의 가옥을 담보로 2만 엔을 빌린 사실과 재산의 일부를 자신들의 공동명의로 돌려놓았다는 사실을 알아냈음을 적시하고 있다. 따라서 묘비 건립에 소요된 총 비용의 절반을 하루속히 갚지 않으면, 이러한 사실을 세상에 밝힐 수도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인 셈이다.


1914년 7월 24일자 편지

그러나 이 편지를 포함해 1914년 6월부터 여러 통의 편지를 Tien 앞으로 보냈건만, 그에게서 아무런 회신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1914년 7월 24일 제물포중화상회에 이에 대한 중재를 요청하는 편지를 띄운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아마도 당시 중화상회는 이러한 사적 분쟁이나 다툼에 있어 일정정도 중재나 조정의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후,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이 되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또한 편지에서, 아말리아는 우루셩과는 달리 자신은 죽을 때까지 상속재산의 일부라도 처분할 뜻이 없음을 명확히 했지만, 결국 얼마 안 있어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던 저택 ‘우리탕(吳禮堂)’마저 요시다 히데지로(吉田秀次郞)란 일본인 사업가에 헐값에 넘겨야 할 만큼 그녀의 말년은 두 차례 화마(火魔)에 시달려 끝내 스러져버린 자신의 저택처럼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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