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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44 /2014.04] 기획_중국철도이야기 (4) 동청철도와 중러관계의 변화 : 연러거일에서 연일거러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3-03 조회수 95
기획 | 중국철도이야기 (4)


동청철도와 중러관계의 변화 : 연러거일에서 연일거러로


김지환 _ 인천대학교 HK 교수





근대 제국주의의 식민지 및 반식민지에 대한 침략을 “철도와 은행을 통한 정복(Conquest by railway and bank)”으로 비유할 정도로 철도는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적인 도구와 표현이었다. 일찍이 동청철도의 부설과 러시아의 만주 침략에 앞장섰던 러시아 재무상 비테(Witte)는 철도야말로 중국을 평화적으로 정복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또한 러시아의 황태자는 동청철도가 완성되고 나면, 10년이나 20년 안에 만주는 잘 익은 과일처럼 러시아의 손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라 낙관하였다.



마관조약 (시모노세키조약, 1895년 4월 17일)


청일전쟁과 그 결과로 체결된 마관조약 이후 제국주의가 중국에 투자한 새로운 투자항목이 바로 철도였으며, 이는 외국 자본의 추세가 고정성의 투자로 향하고 있음과 더불어 식민지화의 성격이 일층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철도는 결코 중국 공상업이 발전한 결과가 아니라 제국주의가 중국을 분할한 결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동청철도는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삼국간섭의 대가로 청조로부터 획득한 권리이며, 赤塔에서 시작하여 만주리, 하얼빈, 綏芬河를 거쳐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 이르는 총연장 1760킬로미터의 시베리아철도 만주 통과 노선을 가리킨다. 1896년의 청러밀약은 동청철도에 대한 러시아의 배타적 부설권을 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철도 연변의 30리 이내에서 광산 및 기타 권리에 대한 러시아의 독점적 권리를 설정하였다. 이와 같이 러시아는 동청철도를 기반으로 만주, 즉 중국 동북지역에서 자국의 세력권을 확대해 나갔으며, 중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해 나갔던 것이다.


청일전쟁 이전까지 열강 가운데 중국에 대한 투자가 가장 많은 나라는 영국이었으며, 중국의 대외무역에서도 가장 큰 교역 상대국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과 삼국간섭의 과정에서 영국은 전통적인 러시아의 남진 저치 정책의 일환으로서 러시아와 이해가 상충되는 일본과 협력관계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삼국간섭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에 대한 영국의 외교관계의 강화는 중국의 외교전략에 민감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하여 중국의 러시아에 대한 접근은 바로 이와 같은 전통적인 중영관계의 변화 속에서 등장한 것이며, 나아가 영러 간의 전통적인 대립관계를 의식한 중국 자신의 고유한 외교전략인 이이제이 정책, 즉 영국과 대립관계에 있던 러시아를 끌어들여 영국과 일본을 견제하려는 정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청일전쟁의 승리에 도취된 일본에서는 승전의 대가로 중국영토를 할양해야 하며, 그 위치는 요동반도로 해야 한다는 여론이 충만하였다. 1895년 1월 27일 히로시마에서 열린 일본의 어전회의에서 외무성이 요동반도의 할양 방안을 제출하자, 적지 않은 참석자들은 금주로 할양지를 확대할 것을 주장하거나, 심지어 산동반도의 전체로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하였다.


일본이 요동반도를 조차할 움직임을 감지한 러시아는 청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의 중립적 태도에서 적극적인 개입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4월 11일의 러시아 어전회의에서 비테는 “일본이 전쟁을 발동한 이유는 우리나라가 시베리아철도를 부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남만주를 점령하려는 계획은 러시아에 일대 위협이 아닐 수 없다.....현재의 상황에서는 일본의 만주 점령을 단호히 저지하는 것이 유리하다. 러시아로서는 일본이 남만주를 점령하는 사태를 용인할 수 없다”라고 하여 요동반도의 반환을 주장하였다.


러시아 재무상 비테(Witte)


중국에서는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세력 확대에 대비하기 위한 방안이 활발하게 제기되었는데, 러시아와 연합하여 일본에 대항해야 한다는 주장이 가장 많았다. 1895년 5월 16일 유곤일은 상소문에서 ‘연러거일’의 주장을 상주하면서 “왜국이 강성해지는 것을 러시아가 바라지 않기 때문에, 왜국이 우리 동삼성을 침범하는 일은 러시아에게 가장 달갑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동삼성은 러시아와 연대할 수 있는 지역이며, 이럴 경우 왜는 감히 동삼성을 탐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총리아문은 이홍장을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시키도록 결정하였다. 그런데 대관식에 이홍장의 참석을 적극 추진한 사람은 바로 주중 러시아공사 카시니였다. 청조 내에서는 서태후와 이홍장이 연러거일의 대열에 가장 적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홍장이 러시아로 출발하기 전에 서태후는 그를 불러 장시간 이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이후 이홍장은 공개적으로 “서양과 연합하여 동양을 견제하는 일이 이번 방문의 요책”임을 강조하였다. 이로부터 볼 때, 서태후와 이홍장의 회합에서 이미 청러밀약에 대한 기본적인 방침과 합의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러시아는 청러밀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동청철도의 부설권을 요구하면서, 그 근거로서 군사력의 신속한 수송체계를 거론하였다. 러시아 재무상 비테는 이홍장에게 “청일전쟁이 발발한 후 우리는 블라디보스톡에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철도교통이 결여되어 행동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군대가 중국을 원조하기 위해 길림에 도착했을 때 전쟁은 이미 끝나버린 상태였다”라고 하여 철도 부설권의 필요성을 강변하였다.


이홍장은 일기에서 “나는 산재한 영토와 섬을 가진 영제국보다 러시아제국이 일층 강고하며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러시아가 우리 내정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우리는 강고한 동맹국을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고 기술하였다. 이렇게 볼 때, 중국이 청러밀약을 통해 러시아와 군사동맹을 체결한 사실은 청일전쟁을 겪으면서 내부적인 필요성에 근거한 강력한 의지가 실현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러시아의 주된 관심은 동청철도 부설권의 획득이었기 때문에 양자가 동청철도 문제를 통해 군사동맹을 체결하는 것은 필연적인 진행이었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는 비밀리에 이홍장을 궁중으로 불러 동청철도 부설문제를 협의하였다. 여기서 러시아는 땅이 넓고 사람이 적어 결코 타국의 영토를 한 치도 침범할 뜻이 없으며, 동청철도의 부설을 통해 유사시 신속히 병력을 이동시켜 중국을 원조할 수 있다는 뜻을 전하였다. 조약 체결 이후 이홍장은 귀국 길에 주위의 사람들에게 “이 조약으로 인해 앞으로 20년간 중국은 안전할 것”이라고 자랑하기까지 하였다.


러시아외상 무라비요프는 독일의 교주만 점령을 러시아가 중국의 여순이나 대련을 태평양함대의 근거지로 확보할 수 있는 호기라 주장하였으나, 비테는 “우리는 중국의 영토 보전을 주장하였고, 이 주장에 의해 일본으로 하여금 요동반도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중국영토를 보전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라고 이에 반대하였다. 비테에 의하면, “여순과 대련을 조차할 경우 이 지역을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 이들 지역과 연결되는 동청철도의 지선을 부설하는 것은 불가결하다. 그 지선이 인구가 조밀한 만주를 가로질러 청조의 발상지인 봉천을 거쳐 부설되어야 하며, 이는 틀림없이 중국일반에 극도의 반감을 유발할 것”이라는 점을 환기하였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외무대신에 따르면 러시아가 이 항구를 점령하지 않으면 영국이 이를 탈취하려 한다는 정보가 있다”라고 하여 외상의 손을 들어 주었다. 결국 12월 12일 러시아함대는 여순과 대련을 점령하고 말았다.


1898년 1월 27일, 주러시아 중국공사 양유는 니콜라이 2세를 방문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의 군함이 여순을 점령한 것은 타국의 점령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강변하였다. 더욱이 이 자리에서 니콜라이 2세는 동청철도의 연장 문제를 제안하였다. 3월 3일, 러시아는 정식으로 여순과 대련의 조차 및 철도의 연장 요구를 총리아문에 제출하고 5일 내에 회답을 주도록 강박하였다. 이에 총리아문은 허경징을 흠차대신으로 러시아에 파견하여 교섭하도록 하였다. 허경징은 3월 12일 러시아외상 로바노프를 방문하여 이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로바노프는 압록강에서 우장 일대의 적당한 지점을 선택하여 여기에 철도를 연장하여 접속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3월 15일 니콜라이 2세는 허경징을 불러 러시아의 여순, 대련항 조차는 양국의 이익과 중국의 보호를 위해 불가피함을 설명하였다. 이 자리에서 무라비요프는 만일 3월 27일까지 조약이 체결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고 협박하였다. 이러한 협박 속에서 1898년 3월 27일, 이홍장이 청조를 대표하여 러시아와 여순, 대련의 조차협정에 서명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25년간 여순, 대련의 조차, 둘째, 여순 항구에 군사시설의 설치, 셋째, 동청철도의 간선에서 여순, 대련으로 연결되는 지선의 부설권 등이다.


특히 조약의 제8조는 “청국정부는 1896년 동청철도공사에 부여한 특허권을 본 조약을 조인한 날부터 적용하여 금후 이 철도 간선의 한 역에서 대련만까지, 필요시 이 철도 간선에서 또다시 영구 및 요동반도 연안에 이르는 연결 지선을 부설한다”라고 규정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침략의 과도한 속도는 동방정책의 핵심적인 대상지인 중국관민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 일으켰으며, 러일 간의 대립 구도를 격화시키면서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급격히 재편하게 되었다. 즉 “일본에는 공러적(恐露的) 분위기는 있었어도 반러적 경향은 없었다. 만일 러시아가 극동정책을 비테가 해 나가는 정도로만 했다면, 즉 평화적 침략의 범주에 머물렀더라면 아마도 러일전쟁을 회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테의 평화적 침략정책은 1898년 러시아가 3년 전 일본을 구축한 요동반도의 일부를 스스로 조차함으로써 소실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는 1898년 5월에 동청철도의 부설 공사에 착수하여 1903년 7월에 완공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얼빈은 완연히 근대적인 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동방의 모스크바로서 극동 경영의 거점이 되었다. 1898년 9월, 러시아는 여순에 관동성을 설치하고 총독을 파견하여 지역 관할권을 행사하였다.


동청철도 만주리역


그러나 요동반도의 조차 이후 중국에서 러시아의 세력은 쇠퇴의 일로를 걷게 된다. 러시아가 여순, 대련을 조차한 이후에 중국은 이전의 친러적 환상을 깨고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비로소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를 견제하기 위해 오히려 다른 제국주의의 힘을 끌어 들이자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청조 내부의 변화로부터 명확히 알 수 있다. 과거 연러를 주창했던 유곤일은 연영의 주장으로 입장을 선회하였고, 장지동은 영국 및 일본과의 연합으로 주장을 바꾸었으며, 유신파의 강광인, 양심수 등도 영국 및 일본과의 연합을 주장하였다. 사회진화론을 주창했던 엄복도 이전의 中露交誼論에서 일변하여 러시아의 음모를 폭로하며, 영국, 일본, 미국과의 공조를 부르짖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청조의 지배계급뿐 아니라 일반의 여론을 잘 반영하는 것으로, 청러밀약을 통해 나타난 러시아에 대한 믿음, 즉 연러의 환상에 대한 자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給事中 장중신은 상주를 통해 “러시아의 감언이설이 바로 근본적인 화근이다.....조속히 영국, 미국, 일본과 동맹을 체결하고, 나아가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동맹을 체결하여 각국이 상호 견제하도록 하여 러시아의 침략을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월 28일 중국과 러시아가 여순, 대련의 조차조약에 서명한 다음날 영국은 위해위 조차의 요구를 총리아문에 제출하였다. 이 때 철도대신 성선회는 공공연히 위해위를 영국에 조차하여 러시아를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함께 유곤일, 장지동, 왕문소 등도 모두 연영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결과 4월 2일 총리아문은 영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위해위의 조차를 허가하였으며, 7월 1일 정식으로 조차조약을 체결하였다.


한편, 만주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권리가 강화되면서 만주에서는 ‘拒露運動’이 속속 전개되었다. 금주의 주민들은 러시아 세력의 확대에 항의하여 항연, 항량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러시아군이 이를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1899년 중러 간의 여순, 대련 조차 협약 시에도 동북 인민들은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주에서는 6천 명 이상의 러시아군인과 노동자, 6만 명 이상의 중국노동자들이 철도 부설 공사에 종사하였다. 1898-1900년 동안 이들에 대한 공격이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며, 심지어 1899년에는 대포까지 동원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지방 행정당국은 이들의 공격을 부추겼다. 뿐만 아니라 군사시설과 역사 건축에 필요한 도로 및 부지의 매입 시에 러시아인에 양여하는 것을 철저히 반대하였다. 반러적인 목단 총독은 우장의 영국회사들에게 석탄지대의 조차를 허용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청조의 각료들이 친러그룹에 등을 돌리면서 마침내 이홍장은 8월에 해임되고 여순 조차 시 함께 조인한 장음환도 9월에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길림과 치치하얼에서는 러시아당국자들과 우호관계에 있던 총독들이 소환되고 총리아문은 반러적 인물들로 속속 채워졌다. 남아있던 친러 성향의 관료들도 서둘러 자신들의 성향과 정책을 전환하였다.


1898년 가을부터 중국과 일본 사이에 본격적으로 화해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일본참모본부는 비밀리에 神尾光臣, 梶川重太郞, 宇都宮太郞 등을 중국에 보내 “청일전쟁은 시행착오였으며, 일본은 중국과 동맹관계를 희망한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일본특사의 감언이설에 당재상 등은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가”라고 감격하였다. 1898년 가을, 이토 히로부미가 중국을 방문하자 청조 내에서는 “중국외교에서 가장 좋은 방책은 연일이다”, “일본과 연합하여 신정을 추진하자”는 주장이 비등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중국황제의 극진한 대접 속에서 중국학생들의 일본 유학 등을 약속하면서 청일전쟁을 통해 형성된 중국일반의 적대감을 해소하는 데 적극 나섰다.


1900년 의화단사건이 일어나자 북경 외곽의 러시아정교회는 불탔으며 러시아상인들은 생명의 위험을 본국에 보고하였다. 러시아공사관은 관군이 의화단 편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간주하여 공사관의 병력을 증원해 주도록 본국에 요청하였다. 이미 중국정부와 관민들은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주요한 역량을 반러운동에 집중하였으며, 중국의 외교노선도 이를 반영하여 러시아의 이익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비록 러시아는 단기적으로 요동반도를 조차하고 이를 통해 중국에서의 이권과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였으나 그 결과 중국인들의 전면적인 저항운동에 직면하게 되었다. 중국의 저항과 열강 간의 이해 충돌이라는 총체적 모순은 결국 1905년의 러일전쟁으로 폭발하였으며, 그 결과 러시아의 동방정책은 총체적 실패로 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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