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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43 /2014.03] 기획 _ 중국철도이야기 (3) 철도 부설을 둘러싼 찬반의 논쟁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26 조회수 145

[Vol.43 /2014.03] 기획 _ 중국철도이야기 (3)    철도 부설을 둘러싼 찬반의 논쟁



김지환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중국 최초의 철도인 오송철도의 레일이 청조에 의해 해체되고, 기관차는 장강에 던져버렸음은 이미 전호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이와 같이 오송철도의 부설이 중국철도의 발전으로 직접 연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중국사회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오송철도의 부설을 계기로 중국에서는 기존의 서양이기를 소개하는 정도의 차원에서 이제는 양무파 관료들을 중심으로 철도 부설의 필요성이 적극 제기되었으며, 이는 다시 청조조정을 중심으로 한 권력 수뇌부까지 철도 부설을 둘러싼 찬반의 격론에 휩싸이게 하는 차원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더욱이 오송철도가 부설되고 중국 최초의 기차인 파이오니어호가 실제로 이 노선 위를 운행함으로써 중국에서도 철도의 부설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심어주게 되었다.


최초로 오송도로공사가 철도 부설을 위해 부지를 매입하고 공사를 진행한 것이 이미 1860년대의 일이었으며, 이를 목도한 청조의 관료들 사이에서 중국도 자력으로 철도를 부설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철도 부설을 주창한 주도 세력은 바로 양무파 관료군이었으며, 특히 이홍장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철도 부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는 이홍장 예하의 관료 가운데 일찍부터 철도 부설의 필요성을 인식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홍장

설복성


설복성은 일찍이 「創開中國鐵路議」라는 문장을 발표하여 철도는 상업과 운송, 군사의 이동에 매우 편리하다는 주장을 개진하였다. 설복성은 광서 6년(1880년)에 이홍장에게 시급히 철도를 부설해야 할 필요를 상소하였다. 마건충은 이홍장의 막료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철로론」, 「借債以開鐵路說」 등을 발표하여 외자의 도입을 통해 철도를 부설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종천위는 「中國創造鐵路利弊論」을 발표하고 은행을 개설하여 국채를 발행함으로써 철도를 부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중국이 스스로 철도를 경영함으로써 양인들의 이권을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영향 하에서 이홍장은 철도 부설의 필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동기는 주로 군사적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이홍장이 “철도를 부설하면 동서남북으로 교통이 편리하게 되어 적이 침입해 오더라도 병력을 집중하여 이에 대응할 수 있다”라고 강조한 것으로부터 잘 알 수 있다. 1870년대 이홍장이 철도 부설을 주창한 것은 주로 일본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이 있었다. 1871년 일본이 청조에 통상조약의 체결을 요구하자 이홍장은 상소를 올려 “듣건데 일본이 서양과 조약을 체결하여 기계, 병선을 구입하고 무기와 철도를 부설하여 서양 각국의 기술을 습득하고 있어 중국의 우환이 되고 있다”라고 주의를 환기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유구사건과 대만사건이 발생하자 이홍장은 일본의 세력 팽창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면서, 무엇보다도 海防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 때 좌종당과 이홍장을 중심으로 해방과 육방, 즉 해군과 육군의 양성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선인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논쟁은 중국의 주적이 어느 나라인가로 확대되었다. 좌종당은 청의 주적은 러시아로서 이를 방비하기 위해서는 신강 수복이 시급하며, 이러한 이유에서 국방예산 역시 육방과 육군의 양성에 우선적으로 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이홍장은 일본이 주적이며, 따라서 이를 방비하기 위해서는 해방과 해군의 양성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74년 12월 이홍장은 『籌議海防折』에서 “내지에 철도가 있으면 하루 만에 천수백리를 달릴 수 있어 수송에 편리하다”는 뜻을 상주하였다. 이와 같이 이홍장이 철도 부설을 주창한 것은 특히 대만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차에 오송철도의 부설은 이홍장으로 하여금 중국철도 부설의 필요성을 한층 강하게 인식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1875년 오송철도의 부설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이홍장은 공친왕 혁흔에게 철도의 부설이 필요함을 상주하였다. 이에 대해 혁흔은 자신도 이홍장의 건의에 찬성하지만 조정대신들 가운데 수구파들이 철도의 부설을 반대하여 대신회의에서 찬동을 얻기 쉽지 않다고 회답하였다.


대만사건 직후인 1876년 12월 16일 복건순무 정일창도 대만은 사면이 바다로서 적이 어느 곳에서나 배를 정박하여 상륙할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철도의 부설을 통해 신속히 병력을 이동시켜 집중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이후 1877년 7월 20일 정일창은 다시 철도의 부설이 대만의 군사적 방비에 절실함을 조정에 상주하였다. 이홍장을 중심으로 한 양무파 관료들의 철도 부설 주장은 청조조정을 비롯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료들 사이에서 찬반의 격론을 야기하였는데, 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1880년 11월 양무파 관료인 유명전이 청조에 철도의 부설을 상주한 사건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1880년에서 1887년까지 양무파와 보수파 사이에는 철도의 부설을 두고 격론이 전개되었다.


유명전은 시급히 철도를 부설하는데 자강의 길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철도는 운송과 상업, 광업, 교통 등에 널리 유용함을 지적하였다. 그는 철도가 개통되면 동서남북이 서로 통하게 되어 적이 침략할 경우 비록 만 리나 떨어진 곳이라 할지라도 철도를 통해 병력을 며칠 만에 집중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더욱이 중국이 모두 18개성을 가지고 있어 병력이 적지 않으며, 군향도 부족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철도를 통한 병력의 신속한 이동과 집중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그는 구체적으로 남로와 북로 양 철도 노선의 개통을 주장하였다. 즉 남로 가운데 한 노선은 청강으로부터 산동을 거치는 노선이고, 다른 한 노선은 한구로부터 하남을 거치는 노선으로서 모두 수도에 도달하도록 하자는 주장이었다. 이와 함께 북로는 수도로부터 동쪽으로 성경으로 통하고 서쪽으로는 감숙으로 통하는 노선이었다.


유명전의 주창에 대해 가장 먼저 반대를 제기한 사람은 수구파인 내각학사 장가량이었다. 유명전의 상소에 대해 장가량은 “철도 부설은 문을 열어놓고 도적을 부르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일단 유사시 외국군이 침입해 들어오기 편리하며, 평화시에는 외국인들이 상품을 가져오고 저렴한 중국의 상품을 싣고 가기 편리하여, 지방의 구석구석까지 양인들의 족적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淸江으로부터 수도에 이르는 1천 수백 리의 철도 노선이 가옥과 전지, 분묘, 교량 등을 침범하고 상호 소통을 저해하게 될 것이라 주장하였다. 또한 이 길로는 차마와 사람이 다닐 수 없어 결국 백성을 해롭게 할 뿐만 아니라, 부설을 위한 비용이 천만 량에 달하여 국고의 낭비를 초래할 것이라 주장하면서, 철도 부설을 금지시켜 줄 것을 상주하였다.


한림원 侍讀學士 주덕륜도 철도의 개통으로 말미암아 기존 운수업에 종사하고 있던 백성들의 생계가 박탈되어 관이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셈이라 하여 반대하였다. 통정사 유석홍도 철도의 부설은 백해무익하다고 주장하면서, 기차는 서양의 이기로서 중국이 본받아서는 안 되며 본받을 수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서양은 천주 예수를 받들고 산천의 신을 알지 못하나 중국은 역대로 명산대천에 제사드리고 있으므로, 철도 부설을 이유로 이를 훼손하여 굴을 뚫고 파괴하는 것은 산천의 신을 어지럽히는 일로서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며 반대하였다. 어사 홍량품과 侍講 장해언 등과 군기대신 등도 유명전이 철도 부설을 상소한 것에 대해 수천만량에 이르는 비용을 서양으로부터 차입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고 하며 반대하였다.


바로 다음 달인 12월에 이홍장은 유명전이 주장한 남로와 북로의 개설은 군사적 방비를 위해 매우 긴요한 일임을 상주하면서 장가량의 주장을 비판하였다. 이홍장은 만일 철도의 부설이 위험하다면 왜 프랑스, 미국, 러시아, 독일이 모두 영국을 모방하여 자국의 철도 부설에 힘쓰겠는가라고 반박하면서 철도를 통한 병력의 이동은 군사적 방비를 위해 불가결한 조치임을 역설하였다. 이와 함께 유사시 철도가 오히려 열강의 군대를 불러들이게 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그럴 경우 철도의 일부를 파괴해 버리면 기차가 발이 묶여 전 노선이 무용하게 되어 이를 방비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홍장은 철도의 부설이 민전과 분묘, 가옥 등을 침범할 것이라는 장가량의 우려에 대해 “철도의 부설을 위해서는 편도 7척, 왕복은 1장 2척이면 충분한데, 이미 확보하고 있는 남북의 官道가 2, 3장, 혹은 4, 5장에 이르고 있음에 비추어 관도의 절반만을 이용하더라도 철도를 부설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청조조정을 비롯한 수구파 세력이 반대한 주요한 이유는 철도의 부설이 자신들의 생존 기반인 봉건적 자연경제의 기초에 타격을 주지 않을까 우려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논쟁에 대해 서태후는 조정대신들의 중론을 수렴한 결과 부설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철도 부설 논쟁이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철도 부설에 대한 필요성이 종식된 것은 물론 아니었으며, 오히려 철도 부설의 필요성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중국관민들 사이에서 더욱 널리 확산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1883년부터 1887년까지 철도 부설에 관한 이차논쟁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중국의 정치, 군사적 환경이 급변한 데 주요한 원인이 있었다. 즉 1884년 청프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에 중국인들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철도의 부설이 불가결함을 절실히 인식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러시아의 변경 위협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면서 철도를 통한 병력 수송에 한층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정관응은 중국이 철도 부설을 주저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철도의 부설을 통한 이익을 열거하였다. 이와함께 러시아가 시베리아철도의 부설에 이미 착수한 사실에 주목하여 이것이 완공될 경우 러시아에서 중국의 신강, 이리, 길림 등 동삼성에 불과 며칠이면 도달할 수 있게 된다고 우려하면서 변방으로의 철도 부설을 주창하였다. 탕진도 중국이 지나치게 海防에 치우치고 있다고 우려하면서 철도의 부설을 통해 변방의 방비에 나서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특히 그는 시베리아철도가 완공되면 러시아의 수도로부터 훈춘까지 불과 보름이면 도달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진규 역시 서양의 전기와 선박, 기차 등이 중국으로 유입되는 것은 중국의 화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역설하였다. 1883년 6월 22일, 이홍장은 철도의 부설은 부국강병의 요체이며, 바다에 함선이 있고 육지에 철도가 있으면 외인들이 감히 쉽게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1884년 9월 13일, 서치상은 철도의 부설을 위해서는 수천만 량의 경비가 소요되어 백성들의 원성이 클 것이며, 서양이 틀림없이 교회의 증설을 요구하게 될 것이라 주장하였다. 더욱이 철도의 부설이 군사적 방비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철도는 어느 한 구간만 훼손되더라도 운행될 수 없기 때문에 수천리에 달하는 철도를 어떻게 다 지키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 더욱이 철도의 운행으로 말미암아 마소 등 기존의 교통운수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실업자로 전락할 것이며, 이는 결국 국가 전체에 해가 될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에 이홍장은 철도의 부설 경비는 서양으로부터 차관의 형식으로 2천만 원을 도입하여 10년으로 나누어 상환하면 된다고 하며, 석탄과 철을 개발하고 철도를 부설하여 상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족 실력자인 좌종당 역시 1885년 7월 27일 철도의 부설은 마땅한 것이며, 백성이 이를 통해 부유하게 되고 국가는 철도를 통해 강성해 진다고 하며 이로움이 크고 해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철도를 부설하여 남북을 소통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좌종당의 상주는 이후 이홍장과 순친왕이 해군아문을 창설하는데 적지 않은 힘이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청프전쟁은 철도 부설에 관한 본격적인 찬반의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중국철도의 부설을 위한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전쟁을 기점으로 청조 역시 군사력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으며, 이를 위해 철도의 부설이 불가결함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중국의 정치, 군사적 환경의 변화는 철도 부설 논쟁에서 양무파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으며, 이는 중국철도의 부설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청프전쟁은 청조로 하여금 해군력의 취약성을 절실히 일깨워 주었으며, 이러한 결과 1885년에 총리해군사무아문을 설립하여 해군관련의 업무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해군아문의 설립은 이홍장과 좌종당 등 양무파 관료들의 주장이 청조에 의해 수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885년 공친왕 혁흔(奕?)이 사직하고 순친왕 혁환(奕環)이 총리해군사무아문의 대신으로 이홍장, 증기택이 방판대신으로 임명되면서 이때부터 철도는 신속히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중앙에서는 혁환, 증기택이 지지하고 지방에서는 이홍장과 대만순무 유명전 등이 남북에서 호응하여 중국의 철도 부설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였다. 1886년 순친왕은 천진을 시찰하면서 이홍장과 철도에 관해 논의하고 철도의 부설이 시급하다는 사실에 공감하였다.


청조는 이전에 해체된 바 있는 오송철도를 20년만에 다시 부설하게 되는데, 이는 철도의 부설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대세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896년 철도대신 성선회는 청정에 차관의 도입을 통해 오송철도를 재차 부설해야 한다고 주청하였다. 이러한 결과 1897년 4월에 오송철도의 부설에 착수하여 1898년 7월에 ?藻濱까지 노선이 부설되었으며, 다음해 겨울에는 오송, 포대만까지 총 15.87킬로미터가 완공되었다. 열차는 보산로를 출발하여 天通庵, 강만, 高境?, 張華濱, ?藻濱, 오송진을 거쳐 포대만에 이르렀다. 오송철도는 1903년 청조정부가 영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여 호녕철도를 부설하면서 차관의 담보로 제공되었으며, 이후 호녕철도 지선으로 변경되었다.


철도의 부설에 관한 논쟁이 지속되는 가운데에도 청일전쟁 이전까지 당서철도, 진고철도, 관동철도, 대만철도가 속속 부설되면서, 1881년부터 1894년의 13년 동안 부설된 철도는 총연장이 300킬로미터에 달하였다. 철도의 부설은 정치, 군사, 경제적 환경의 변화에 발맞추어 불가피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으며, 바야흐로 중국철도는 본격적인 발전과 도약을 준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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