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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2/2010.10] 논단 _ 중국-유럽 간 문화적 관계의 변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02 조회수 44

[Vol.2/2010.10] 논단 _ 중국-유럽 간 문화적 관계의 변천

중국-유럽 간 문화적 관계의 변천*

브룬힐트 슈타이거 (Brunhild Staiger)

목승숙 _ 인천대학교 HK연구교수 옮김

 

중국과 유럽이 처음 만난 지 2000년이 지났다. 일반적으로 대략 1500년까지는 주로 중국이 유럽에 영향을 준 반면에(꽤 많은 중국 발명품들이 서구로 유입되었다), 그 이후부터는 중국 내 유럽의 영향력이 꾸준히 커지기 시작했다.

 

중국과 유럽의 최초의 직접적인 만남은 몽골 시대(13-14세기) 때 기독교 성직자들이 처음 유럽에서 중국으로 보내졌을 때 이루어졌다. 16세기 말-17세기에는 예수회 수도사들의 중재로 서양의 과학이 중국에 알려졌다. 라이프니츠와 볼테르와 같은 철학자들은 중국을 이상 사회의 모델로 삼았고, 이러한 견해를 곧잘 예수회 수도사들이 이상화시킨 중국 관련 보고에서 끌어냈다. 18세기 유럽은 중국 취향의 시대(The Age of Chinoiseries), 이러한 취향은 미술공예품(: 도자기와 가구)과 정원, 건축에 영향을 끼쳤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중국에 대한 유럽의 태도는 완전히 변하게 되었다. 중국은 더 이상 이상적인 사회가 아니라, 서양의 현대화와 혁신이 필요한 비문명화 된 나라, 퇴행적이고 독재적인 잔인한 국가로 간주되었다. 이 점에서 중국은 그저 서양의 경제적 관심과 정치적 파워 게임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아편전쟁에서 중국은 무력에 의해 문호를 열게 되었고, 서구 열강들은 특정 지역에서의 자유 무역과 기독교 전파, 일명 개항장 거주, 북경 외교 대표부와 같은 특권들을 확보하였다. 19세기 말 경 중국은 서구 열강들에게 영토를 내주도록 강요받았고 중국의 자치권은 상당 부분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에게 서구 제국주의는 군사적 침략과 경제적 지배뿐만이 아니라,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리기는 했어도 문화적 현대화도 의미했다. 처음 서양 문화는 개항장에서 널리 퍼졌고, 그 곳에서는 서양 학교, 현대식 신문 및 잡지뿐만 아니라 서양 건축, 패션, 서구식 생활 방식과 같은 전형적인 개항장 문화가 출현하게 되었다. 그 외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중국의 전통적인 구조가 지속되었다. 중국에 외교 관계를 위한 사무소(總理衙門)가 처음 설립된 것은 1861년이었고, 190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공식적인 외교 사무소가 세워졌다. 서구가 군사적, 기술적으로 우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중국은 1860년대에 들어서 점차로 서양에 대한 정책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개방적인 그룹들은 중국을 현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고, 외세의 침략에 대항할 수 있는 서양식 무기와 기계, 배들을 생산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른바 자기강화(自强)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대중적이지는 않았지만, 일부 특수학교들에서는 서양 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곧 최초의 중국 학생들이 유럽과 미국으로 보내졌다. 학문에 제한을 두고 실용적인 것만을 서양으로부터 배우려는 태도는 “근본원칙에서는 중국의 학문, 실용적인 응용에서는 서양의 학문(中學爲體,西學爲用)”이라는 슬로건으로 집약되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세기전환기에는 서양 철학 및 문학 작품들의 광범위한 번역이 시작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발전을 촉진시킨 것은 1890년대 말에 영향력을 얻게 된 개혁 운동이었다. 자기강화 운동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개혁파들은 광범위하게 제도 개혁, 법 개혁, 교육 개혁을 요구했다. 개혁파들은 비록 유교적 전통을 깨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서구 이념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자들이었다. 이러한 발전의 토양은 선교집단, 특히 신교도들에 의해 준비되어왔는데, 이들 신교도들은 복음 전도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행의 현대화와 서구 지식의 확산에 힘썼다. 그들의 활동에는 번역, 책과 정기간행물의 발간(실제로 이들 중 일부는 개혁 운동의 동인이 되었다), 학교와 병원 설립 등과 같은 일들이 속했다

 

의화단 사건 이후 개혁은 한층 강화되었다. 그 중 가장 영향력이 컸던 개혁은, 1905년의 전통적 시험 방식의 철폐와 서구의 지식과 문화를 가르치는 근대적 학교의 도입이었다. 당시 문학과 연극, 예술 분야에서 서구의 영향력은 꾸준히 증가하였고, 서구에서 현안이 되고 있던 온갖 사회적, 철학적 이론들이 논의되고 동화되었다. 이러한 추세가 최초로 정점에 달한 시점은 일명 신문화운동(1915-1921) 시기였고, 이 시기에는 유교로 대표되는 중국 전통 문화에 반대하는 지적 혁명이 진행되었다. 신문화운동의 주창자들은 민주주의와 과학에 기반하는 현대화를 선전하였지만, 운동에 그칠 뿐 현실성이 없었던 목표는 곧 정치화되었으며 신독재정권들(한 편에서는 민족주의 정권(국민당), 다른 한 편에서는 내부적으로 공산주의 세력)이 들어서게 되었다.             

 

민족주의 정부는 이념적으로는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들을 선전하였지만, 현대화 프로그램과 관련해서는 전적으로 서구 모델에 의존하였다. 서구의 교육을 받고 돌아온 유학생들은 행정, 경제, 과학, 기술, 교육 분야에서 그들이 해외에서 배웠던 것을 적용하였고, 도시에서는 패션, 댄스, 스포츠, 음악, 영화, 연극 등과 관련해서 도처에서 서구식 라이프 스타일이 득세하였다. 게다가 기독교 선교사들이 굉장히 늘어나서, 당시 그들은 사회적 활동에서뿐만 아니라 교육, 특히 고등 교육 분야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다. 상당수의 종합대학과 단과대학들이 기독교(대개 신교) 학교였고, 교직원들 중 약 3분의 1이 외국인이었다

 

1949 10 1일 중국인민공화국의 설립 이후, 서구 문화의 영향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1950년대에 현대화의 모델로 여겨서 소비에트 연방과 우호 관계에 있던 시기에, 중국은 소비에트 연방 및 그 위성국들과 밀접한 문화적 유대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 유대는 중국-소비에트 연방 불화 이후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의 문화적 영역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문화혁명의 보호 아래 완전히 격리된 상태에 있었다. 서방 세계와의 관계는 1978년 중국이 개방 정책을 시작하고부터 비로소 서서히 재개되었다. 중국과 유럽 국가 모두 주로 경제적 관계 -중국은 유럽으로부터 현대 기술과 기술 노하우를 유입하는 데에, 유럽은 중국 시장을 획득하는 데- 에 관심이 있었고, 문화적 교류는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되었다. 예술 전시, 연극 공연, 영화 주간 혹은 출판물 등을 포함하는 좁은 의미에서의 문화적 교류는 민감한 사안으로 남았고, 유럽 국가들은 늘 중국 공산당의 완고한 보수주의적 문화 정책을 고려해야만 했다. 이와 유사하게 공산당은 주로 과학 및 기술적 성과들은 인수하되 서구의 가치와 이론들은 제외시키려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중국의 정치 체계를 사장시킬지도 모를(1989 5/6월 학생 운동 시기에 나타난 것과 같은) 서구의 자유주의적인 영향들은 금지되었다. 기독교, 이슬람교의 전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십년간 중국의 문화적 풍경에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1980년대에는 여전히 부르주아적인 자유주의와 “퇴폐적인” 서구 문화에 반대하는 캠페인들이 벌어졌지만, 1990년대에는 엄청난 개방주의와 서구 문화에 대한 관용이 한층 두드러졌다. 서구의 문학과 최신 영화들, 서구의 예술과 음악 외에도 서구 사회과학의 새로운 이론들이 널리 알려졌다. 1990년대 이후 중국과 유럽의 관계는 감지될 정도로 돈독해졌고, 중국-유럽간 문화적 만남도 보다 유연해지고 그 어느 때보다 더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은 <CHINA aktuell> 2004 6월호에서 발췌번역한 것이다. 원문은 2004년 북경에서 개최된 국제문화포럼을 맞이하여 리즈 몬(Liz Mohn)과 중국 문화부 부장 쑨자정(Sun Jiazheng)의 주도로 귀터스로의 베르텔스만 재단을 대신해 함부르크의 아시아문제연구소(Institute of Asian Affairs)가 작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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