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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41 /2014.01] 기획_ 중국철도이야기 (1) 근대 철도지식의 전래와 중국인의반응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23 조회수 262

[Vol.41 /2014.01] 기획_ 중국철도이야기 (1)    근대 철도지식의 전래와 중국인의 반응

| 기획 | 중국철도이야기 (1)

 

『중국관행웹진』에서는 2014 1월부터 <중국철도이야기> 칼럼을 기획하여 연재합니다. 철도는 근대화의 상징인 동시에 제국주의열강이 중국을 침략하는 전형적인 수단이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청일전쟁, 러일전쟁, 신해혁명, 만주사변 등 역사적 사건은 대부분 예외 없이 철도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 칼럼은 기존 중국근현대사와 같은 전형적인 방식이 아니라 철도를 통해 근대이래 중국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해 보려는 취지에서 기획되었습니다. 관련 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근대 철도지식의 전래와 중국인의 반응

김지환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중국에서 철도와 관련된 지식은 언제 누구에 의해 전래되었을까? 중국에서 처음으로 철도는 언제 출현하였으며, 중국인들은 철도를 어떻게 인식하고 반응하였을까?

 

중국 최초의 철도는 1876년 영국상인집단에 의해 부설된 오송철도였다. 기존의 연구는 대부분 ‘제국주의 열강의 철도 부설에 대한 중국인민의 반제투쟁’을 강조하였으며, 예를 들면 “상해 인근의 주민들은 오송철도가 부설될 당초부터 각종 형식을 통해 분분히 반제의 기치를 올렸다”거나, 혹은 “연선 인민들의 강렬한 반대는 철도를 부설하려는 양인들의 계획을 저지하였다”는 등의 서술이 이에 속한다. 과연 당시 중국인들은 철도를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으로 여겨 이를 적대시하였을까?

 

중국에 처음으로 철도와 관련된 지식이 소개된 것은 아편전쟁 이전에 서양선교사들의 중문판 번역서적을 통해서였다. 예를 들면 귀쯔라프(Karl Gutzlaff)의 『만국지리전도집』(1839), 『무역통지』(1840), 브리지먼(Elijah Bridgman)의 『美理哥合省國志』(1938), 『지구도설』(1938), 모리슨(John Robert Morison)의 『외국사략』(1845) 등에서는 모두 철도 혹은 객차에 관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무역통지』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증기기관은 비단 증기선뿐만 아니라 기차에도 활용된다. 열차 측면의 철통에서 물을 끓여 증기로 기관을 움직이며, 기관차가 뒤로 수십 량의 객차를 함께 끌고 달린다. 한 시간에 40여리를 달리는데, 말이나 노새가 끌지 않아도 마치 날개가 달려 날아가듯 빠르다. 기차는 구덩이나 구불구불한 지역을 평평히 고른 이후에 선로를 부설해야 비로소 운행할 수 있다. 도광 10(1830)에 영국은 양대 도시 사이에 90여리에 달하는 선로를 부설하였는데, 비용이 무려 은 400만 원에 달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수도와 같이 번화한 지역이 아니면 부설하기 힘들다. 근래 서양 각국이 모두 이를 본받아 따르고 있다. 이러한 것이 중국에는 없으니 중국 역시 마땅히 이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중국인의 저서 가운데에 임칙서의 『四洲志』는 최초로 철도에 관해 소개하였다. 이 책은 머레이(Murray)의 저서인 『지리(Geography)』의 일부를 번역하여 이를 기초로 출판한 책이다. 여기서 그는 미국의 철도를 소개하면서 “수운이 통하지 않는 지역이라도 기차를 통해 육운으로 화물을 수송할 수 있다. 한 시간에 20-30리를 달리고, 산맥을 관통하는데, 열차를 운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길을 평탄하게 닦아야 한다. 기차는 막대한 인력의 소모를 절감시켜 줄 수 있다”라고 철도의 장점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번역서의 내용을 보면 번역자 역시 철도와 기차를 직접 타보거나 본 적이 없어 양자의 관계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번역하면서 기차뿐만 아니라 마차 역시 철로 위를 달릴 수 있다고 여겨, 우마차의 통행을 위해서라도 철도를 시급히 부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거나, 혹은 동절기에 하천이 얼어붙어야만 비로소 그 위로 기차가 달릴 수 있다고 묘사하는 등은 이와 같은 무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1859년 태평천국의 홍인간이 『자정신편』의 「法法類」 속에서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한 방책 29조를 제안하였는데, 여기서 서양을 본받아 철도를 부설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중국인이 자력으로 철도를 부설하고자 하는 최초의 주장이었다. 그는 외국의 사례를 살펴볼 때 철도를 통해 하루에 7-8천리를 이동할 수 있다고 다음과 같이 그 효용성을 주창하였으며, 이에 홍수전도 찬동을 표시하였다.

 

“전국 21개 성에 21개의 간선철도를 건설하여 전국의 동맥으로 삼고, 이 간선도로에 군, , 시진 및 향촌에 이르기까지 도로를 연결시킨다. 이들 도로망을 이용하기 위하여 차마에 의한 교통을 발전시키며, 외국의 기차와 같은 것을 제조하는 자에게는 특허권을 인정하고 일정 기간이 지난 다음에 비로소 타인이 이를 모방할 수 있도록 허가한다.

 

위원의 해국도지(1842)

      

 

위원의 『해국도지』(1842)와 서계여의 『영환지략』도 철도를 소개하고 있다. 『해국도지』는 미국의 사정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철도가 발달하여 한 번에 천명을 태우고 한 시간에 180리를 주행할 수 있다”라고 소개하였다. 그런데 『해국도지』에서 소개한 것이 대부분 미국의 철도였기 때문에 철도의 발상지가 영국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미국이라고 소개하였다. 어쨌든 철도의 발상국인 영국이나 기타 미국 등도 당시 철도 노선을 부설하여 기차를 운행한지가 10여년에 불과한 실정이었으므로, 중국인이 이를 소개하는데 많은 착오와 오해가 있었던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1874 12월 영국자본 오송철로유한공사(Wu-Song Railway Co. Ltd)는 철도 부설 공사에 정식으로 착수하였다. 1976 1 20일부터 본격적으로 레일을 깔기 시작하여 2 14일이 되면 이미 부설된 구간이 상해의 天后宮 지점에서 徐氏花園 부근까지로 총 노선의 4분의 3에 해당되는 작업이 완료되었다. 그리하여 당일 석탄 수송 열차를 시험적으로 운행하였는데, 기관차의 명칭은 파이오니어(Pioneers)호로 명명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중국 최초의 기차였다. 기차는 하루 여섯 차례 왕복하였으며 1리 당 매주 27파운드의 순익을 거두어 성황을 이루었다. 오송철도는 전장 14.5킬로미터, 궤도 간격은 762밀리미터였으며, 궤조(궤도 중량)는 미터당 13킬로그램이었다. 기관차는 8-9량의 객차를 끌고 달렸으며, 객차 마다 약 30명 정도의 승객이 탑승하였다.

 

중국최초의 기차 파이오니어호(기관차)

 

그러면 이에 대한 중국인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오송철도의 부설에 대한 상해주민들의 반향은 1942년에 출판된 『上海史話』에 잘 나타나 있다. 예상 밖으로 지역주민들의 반대가 거의 없었으며, 이들은 오히려 호의와 흥미를 가지고 부설공사를 지켜보았다. 『申報』와 기타 당시의 기록들도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철도가 완공된 이후 연기를 토하며 기차가 레일 위로 왕래하는 모습은 이들에게 난생 처음 목격하는 진기한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당시의 『신보』는 “상해주민뿐만 아니라 수십리 밖에서 구경꾼들이 마차와 인력거, 자전거 등을 타고 몰려 왔는데, 그 수가 매일 천여 명에 달하였다. 여기에 과일, 먹거리 등을 파는 노점상인들까지 합세하여 시장이 설 정도였다”라고 보도하였다. 철도여행은 백성들의 흥미진진한 오락거리로 일대 사건이 되었으며, 철도역 인근 지역은 예전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 적막한 곳이었으나 철도 개통 이후 일약 번화한 지역으로 변모하였다.

 

철도의 운행은 수많은 중국인들을 서양이기의 경이로움에 빠져들게 하였다. 『런던타임즈』는 당시 기차 운행에 대한 중국인들의 반향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몇 리에 걸쳐 부설된 철도는 인근 주민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며칠 만에 수만 명이 새로운 이기를 구경하기 위해 도시로부터, 농촌으로부터 무리를 지어 모여 들었다. 이들은 레일은 물론, 궤도 아래에 깔려 있는 침목 하나하나까지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철도에 대한 반감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으며, 노인도, 어린아이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계층이 하루 놀러 와서 즐겨 구경하곤 한다”

 

6 30일의 개통식에서 기차는 한 시간에 15리의 속도로 달렸다. 7 1일에는 일반 중국인들을 무료로 시승시켰으며 영업은 7 3일부터 시작하여 매일 여섯 차례 열차가 왕복하였다. 『신보』의 기자는 개통 첫날의 성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오후 한시에 이르자 남녀노소가 몰려들어 좌석은 순식간에 빈자리가 없었다. 열차가 출발하려하자 사람들이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기차를 타는 것은 여행이었으며, 상해에 살면서 일 년 내내 한 번도 외지에 나가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이 진귀한 물건을 보고, 타보기 위해 일가족을 모두 이끌고 왔다. 기차는 이전에 중국인들이 본 적이 없는 이기이므로 당연히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출발 전에 먼저 벨을 요란하게 울려 출발을 알리면 승객들이 모두 착석해야 하며, 더이상 승차가 불가능함을 알린다. 이어 기적소리가 수차례 나면서 기차가 점점 속도를 더하게 된다. 승객들의 만면에는 희색이 만연하고 기차 양 옆의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며 이를 지켜본다. 기차는 속도를 더하고 순식간에 멀어진다. 상해에서 강만까지는 거의가 면화밭인데, 여기서 일하던 사람들도 모두 일을 멈추고 이를 바라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탄성을 자아냈다.

 

이와 같이 서양의 이기인 철도에 대해 중국인들의 초기 대응은 반제국주의투쟁으로 이야기되는 바와 같은 모습이 결코 아니었으며, 오히려 새로운 이기의 등장을 큰 호기심을 갖고 지켜보았음을 알 수 있다. 오송철도의 개통 이후 상해에서는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것을 ‘遊鐵路’라고 불러 온 상해의 유행어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철도의 출현에 반감을 갖는 이들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감은 풍수지리나 기타 미신, 배외사상, 혹은 부지 매입과 관련된 현실적인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사료를 통해 살펴보면 철도의 개통이 선박 운수에 종사하는 수부와 마부 등의 영업에 타격을 주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들이 철도의 부설에 반대하였음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도의 출현은 중국 일반에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진기한 서구문명의 이기였으며, 철도여행은 중국인의 생활에 새로운 오락거리로 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서구문명은 철도라는 이기를 통해 최초로 중국인에게 가까이 다가왔으며, 근대화와 자주독립이라는 양면의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큰 과제를 중국인들에게 동시에 던져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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