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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2/2010.10] 논단 _ 한국 화교에게 중화민국이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02 조회수 110

[Vol.2/2010.10] 논단 _ 한국 화교에게 중화민국이란?

송승석 _ 인천대학교 HK연구교수

 

오늘날 중국대륙을 제외한 해외 각지에 거주하는 중국인의 수는 대략 6천만 명을 헤아린다. 이 가운데 타이완, 홍콩, 마카오 등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제외한다 하더라도 그 수는 약 3천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족히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고도 남을만한 거대한 인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들을 일반적으로 화교(華僑)라 통칭해 왔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이들 해외 거주 중국인을 특별히 화교와 화인(華人)으로 구분하고 있다. 화교는 해외에 거주하면서 ‘중국’ 국적을 소지하고 있는 이들이고, 화인은 거주국 국적을 취득한 중국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구분에 따른다면 현재 해외 거주 중국인의 구성 비율은 화인이 90%이고 화교는 10%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3천만 명의 해외 거주 중국인들 가운데 2 7백만 명은 거주국의 국적을 취득하고 있고, 나머지 3백만 명 정도만이 ‘중국’의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한마디로 화교에서 화인으로, 낙엽귀근(落葉歸根)에서 낙지생근(落地生根)으로 그 개념이 바뀌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추세이다.

 

이렇듯 거주국의 국적을 취득한 화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선, 거주국 내에서 자신의 생업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거주국 국적을 취득하는 것이 아무래도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와 관련해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역사적 사실이 하나 있는데, 바로 중국의 분열이다. 국공내전이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돌아가면서 ‘중국’은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대륙과 국민당이 지배하는 타이완으로 분열된다. 본국의 분열은 곧바로 해외 거주 중국인사회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가운데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국적선택의 문제이자 동시에 그들의 국가정체성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물론 이들 가운데에는 어느 한쪽의 국적을 취득하거나 유지한 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예 거주국의 국적을 선택했다. 이들이 거주국 국적을 취득하는 데에는 중화인민공화국정부의 이중국적에 대한 불인정 역시도 한 몫 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렇듯 해외 중국인사회가 화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로 변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이러한 흐름과 역행하듯 화교사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집단이 있다. 바로 한국의 화교사회이다.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의 상당수는 현재 시점에서도 ‘중국’ 국적 특히, 중화민국 국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는 매우 특수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이 모두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 일부는 거주국인 한국으로 귀화하여 한국 국적을 소지하고 있는 이도 있고, 1990년대 이후 새롭게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한 이들도 있다. 여기에 한중수교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소지한 채 한국에 거주하는 이른바 ‘신()화교’까지 포함한다면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자 수는 더욱 늘어나게 된다. 오늘날 한국에서 유학, 결혼, 취업 등의 이유로 거주하고 있는 신화교가 수십만에 달한다는 점에서 볼 때도 그 존재가치는 오히려 구()화교보다도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누대에 걸쳐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른바 구화교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앞서 말했듯이,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은 세계 여타 지역의 중국인과는 달리 이른바 ‘중국’ 국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화교’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렇듯 특수하고 예외적인 화교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우선, 역사적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882년을 기점으로 한반도에 이주하기 시작한 초기 중국인은 스스로를 청국이라는 종주국의 신민(臣民)으로 인식했다. 이는 동남아시아나 미주지역으로 건너간 중국인(대부분은 쿨리)이 청국으로부터 기민(棄民)으로 인식되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다. 따라서 기민시되어 왔던 다른 지역의 중국인들이 거주국에 동화되어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는 게 보다 유용한 측면이 있었다면,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은 오히려 중국인 신분을 유지하는 가운데 조선에서 생활하는 게 보다 유리한 측면이 있을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러한 추론에 근거한다면 한국의 중국인사회가 왜 ‘화인’사회가 아닌 ‘화교’사회를 형성하게 되었는지 그 단초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청조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된 후에도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은 청국의 신민에서 중화민국 국민으로의 신분이동 외에는 여전히 ‘중국인’의 지위를 유지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조선 거주 화교들이 조선인들과는 달리 연합국으로부터 전승국 국민의 대접을 받게 된 것도 그 하나의 예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1949년 이후 ‘중국’에 두 개의 정부가 존재하면서 시작된다. 그 이전에도 중국에서는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이 있었고, 국민당정부가 왕정위(汪精衛)가 이끄는 남경정부와 장개석(蔣介石)이 이끄는 중경정부로 나뉘어 대립하는 등 분열적 상황이 지속되었지만 ‘중화민국’이라는 국체와 양립하는 또 다른 국체가 수립된 적은 없었다. 따라서 이 시기까지만 해도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은 중국과 중화민국을 동일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은 더 이상 이러한 동일시를 허락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도 해외 거주 중국인들은 국적선택의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다른 지역의 중국인들은 어느 한쪽의 국적을 선택하거나 아예 거주국의 국적을 선택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인들만이 유일하게 중화민국 국적만을 고수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동아시아냉전체제라는 거대 기제가 작동하고 있었던데 힘입은 바 크다.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는 동아시아냉전체제에 휩쓸리게 되면서 공산화된 중국대륙과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고 같은 반공진영에 속한 중화민국(타이완)의 영향 하에 전적으로 놓이게 된 것이다. 따라서 국적 선택에 있어 한국화교의 선택지는 타이완의 중화민국과 거주국 대한민국 외에는 달리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아예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 거주 중국인이 거주국인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것도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까지도 한국화교의 영주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외국인의 한국국적 취득에 대해 한국정부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이렇게 볼 때, 사실상 한국화교의 국적 선택지는 타이완에 정부를 두고 있는 중화민국이 유일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정황 속에는 분명 불가피한 측면이 존재한다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다. 1992년 한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했다. 이른바 한중수교 이후, 한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한국화교들의 활동영역도 중국대륙으로 확장되었고 자연 그들의 국적 선택지의 하나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새롭게 부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화교 가운데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한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유가 무엇일까?

 

중화인민공화국이 통치하는 중국대륙은 한국화교들의 고향이다. 반면, 그들의 국적지인 타이완은 사실 그들과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는 생경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타이완에 소재한 중화민국의 국적을 고수하고자 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이념적 공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한국화교의 대부분은 냉전체제에 따른 한국사회 내 반공이데올로기 강화와 중화민국정부의 지속적인 반공정책 및 반공교육의 영향 속에서 생활해 왔다. 특히, 중·노년층의 경우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증이 팽배해 있고 이것이 곧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다.

 

둘째, 가족을 중심으로 한 타이완과의 친연관계이다. 과거 한국화교는 중국대륙과의 단절, 한국정부의 각종 법적규제와 사회적 차별로 인해 중화민국을 또 하나의 생활터전으로 삼게 되었다. , 상당수의 한국화교 자제들이 타이완으로 유학을 가 그곳에서 결혼과 취업 등으로 생활기반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들이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새로 취득하게 되면 그것이 곧바로 타이완에 있는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불이익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팽배해 있는 게 현실이다. 사실, 이는 우려의 차원을 넘어 일부 현실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셋째, 해외여행의 상대적 부자유이다. 한국화교들이 해외로 출국할 시에는 아직도 중화인민공화국 여권보다는 중화민국 여권이 상대적으로 편리하고 유리하기 때문이다. 물론, 중화민국 국적이 세계적으로 공인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일부 화교들이 해외에서 난민취급을 당한다거나 매번 비자를 받아야 하는 불편함이 상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중화인민공화국 여권보다는 상대적으로 편리한 게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이유들이 그들로 하여금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취득을 주저하게 하는 또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그들의 중화민국 국적 고수에 대한 근거를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 ‘중화민국’은 단순히 국적 소재지란 물리적 차원을 넘어서 있다. 만일 중국이 하나이고 그것을 대표하는 정부가 중화민국이 아니었다면 한국화교는 중화민국을 지지할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타이완만을 영토로 하는 중화민국이라면 더 이상 ‘조국’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대륙을 포함한 중화민국이기 때문에 조국이 될 수 있었고 그러한 국가이미지를 타이완의 중화민국정부가 제공했기 때문에 그들을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 한국화교가 상상하는 조국 ‘중화민국’이란 대륙을 포함한 중화민국, 중국전역을 영토로 하는 중화민국이었다. 이러한 국가이미지는 거의 대부분이 중국대륙 출신인 한국화교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한국화교는 그동안 고향인 중국대륙에 대해 강렬한 향수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1949년 국공내전의 패배로 중화민국정부가 타이완으로 철수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중국대륙의 영토를 회복하여 중국대륙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중화민국정부의 주장은 한국화교의 희망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2000년 타이완 총통선거에서 위와 같은 희망을 안겨주었던 국민당이 아니라 타이완의 독립을 주창하는 천수이볜(陳水扁)이 총통에 당선되자, 그들의 중화민국에 대한 조국의식은 급격하게 스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그들이 지지하는 중화민국이란 이념적·현실적 실체로서의 어느 한쪽의 중국이 아니라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고 그것을 구현해 줄 수 있는 상상의 ‘중국’이었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타이완이란 실체로서의 현재의 중화민국은 단지 삶의 편의를 위해 선택한 국적지에 지나지 않을 뿐 더 이상 자신의 희망을 구현해 줄 수 있는 ‘중국’은 아니다. 따라서 타이완의 중화민국을 과거의 중화민국처럼 자신의 ‘조국’으로 인식하는 한국화교는 적어도 더 이상은 늘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현재의 타이완 정부가 국민당 정부라 할지라도. 또한 향후 한국화교사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변모하게 될 지는 함부로 예단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필자는 현재의 4세대, 5세대 젊은 화교들 가운데에는 한국으로 귀화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나 결국 한국의 중국인사회도 ‘화교’사회에서 ‘화인’사회로 전환될 것이라는 조심스런 예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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