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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39 /2013.11] 논단 _ 1884년 ‘최약국명안(崔藥局命案)’의 진상 추적(追跡)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23 조회수 88

[Vol.39 /2013.11] 논단 _ 1884최약국명안(崔藥局命案)’의 진상 추적(追跡)

권인용 _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최약국명안’이란 1884년 한성(漢城)의 최씨네 약국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가리킨다. 이 명안은 한국근대사 특히 한국근대언론사에서 자못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신문기사 내용의 진위 여부에 대하여 공권력이 개입된 한국 역사상 최초의 필화사건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역사적 상징성이 있다. 스토리 자체도 상당히 극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본 건이 ‘최초의 필화사건-최약국의 총소리’라는 제목으로 1996 3 29 KBS에서 방영된 「역사추리」의 소재로 다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만 그 내용에 부정확한 장면이 많았다는 점은 무척 아쉬웠다. 물론 이 명안에 관한 기존의 연구 자체에서 비롯한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관련연구와 방송내용 모두 이 사건에 관한 이해에서 많은 오류가 있지만, 가장 두드러진 문제는 당시 청나라의 외교권 전반을 장악하고 있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의 역할에 관한 과대평가였다. 예를 들어, 위 「역사추리」에서 이홍장으로 분장한 연기자가 몹시 화가 난 듯 험악한 표정으로 범인의 진상 파악을 명령하고, 조선 측에 두 장의 외교문서를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 화면은 그 문서를 클로즈업시켰다. 그런데 필자가 특별히 주시한 결과 그 문서는 이홍장이 보낸 것이 아니었다. 두 장 모두 청나라의 주조선 총판상무위원(總辦商務委員) 진수당(陳樹棠)이 조선의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김병시(金炳始) 등 조선의 당국자에게 보낸 조회(照會) 형식의 외교문서였다.

 

이홍장이 외교문서를 보내는 것은 매우 특별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외교문서의 수수에는 응당 상호 격()을 따져야 한다. 당시 이홍장과 동격은 조선 국왕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과 관련해서 이홍장이 고종(高宗)에게 평행(平行)문서인 자문(咨文)을 보낸 적은 없다. 이러한 간단한 원리 파악과 기본적인 확인 작업도 진행하지 않은 채 이홍장의 이른바 외교문서 발송이라는 가설이 기존의 관련 연구에서 거의 정설처럼 통용되었다. 또 진상 파악 지시도 그 맥락이 실상과는 크게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의 사건 추적 과정에서 거론할 것이다.

 

기존의 관련 연구가 극히 개략적이고 제한적이며 부정확한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가용 자료의 제한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료의 한계에 돌파구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자료가 『청계주한사관당안(淸季駐韓使館檔案)1)이다. 기존의 자료 외에 특히 이 당안(檔案)을 통하여 필자가 재구성한 ‘최약국명안’의 추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2)

 

1884 1 2(음력. 이하 동일) 22시가 조금 지났을 때였다. 종로 일대에 자리 잡은 한 약국에서 돌연 몇 발의 총소리가 심야의 정적을 요란하게 깨웠다. 주위의 시민들이 급히 달려가 보니, 주인 부자가 쓰러져 있었고 범인은 달아난 뒤였다. 주인 최택영(崔宅英)만이 다음날 기적적으로 소생했을 뿐 그 아들은 끝내 사망했다. 목격자인 점원 두 사람은 일관되게 범인을 당시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병사 3명으로 지목하였다. 청심환(淸心丸)의 품질 문제로 인한 실랑이 과정에서 갑자기 총격을 가하고 칼을 휘둘렀다는 공술이었다. 조선의 통리아문(統理衙門)은 당시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淸軍)의 총지휘관인 제독(提督) 오장경(吳長慶)에게 조회를 보내 범인색출에 협조를 구하였다. 얼마 후 오장경은 용의자 3명을 체포했다면서 확증이 나오는 즉시 법에 따라 처벌할 방침임을 통보하였다.

 

한편 이 사건의 대강은 『한성순보(漢城旬報)』의 연속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사건 다음날 발행된 『한성순보』 제10호에서 당시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 병사 3인의 범행으로 보도하였다. 1 11일 발행된 제11호에서는 후속기사로 청군(淸軍)의 병영에서 ‘살인범’ 중국 병사 3명을 자체적으로 참수하였음을 알렸다. 1884년 정월 초이튿날 밤에 조선의 도성 한복판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살인사건은 열흘도 되지 않아 이로써 종결된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사건은 그 후 ‘의외’의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먼저 진수당은 『한성순보』에 후속보도가 나온 지 약 2주 뒤인 1 25일에 이홍장에게 품문(稟文)을 올려 범인이 청병(淸兵)이 아닐 가능성을 강하게 개진하면서 방영(防營) 원세개(袁世凱)와 함께 전면 재조사할 생각임을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이홍장이 승인의 비문(批文)을 작성하여 범인이 과연 청병인지 여부를 조사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비문은 3 13일에 진수당에게 접수되었다.

 

3 18일 진수당은 『한성순보』의 주관 부서인 박문국(博文局)과 통리아문 및 군국아문(軍國衙門)에 비슷한 내용의 조회를 보내 『한성순보』가 무슨 근거로 범인을 청병으로 지목한 것인지 문의하였다. 그런데 진수당은 이 조회의 도입 부분에서 13일에 확실한 조사를 지시하는 이홍장의 ‘칙()’을 받았다고 기술하였다. 한편 26일에는 심야의 통행금지와 범인 검거 현상금을 내거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2장의 고시(告示) 게재에 조선 측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하여 진수당은 독판 김병시에게 조회를 발송했다. 그런데 이 조회의 도입 부분에서는 아예 이홍장의 ‘차칙(箚飭)[=찰칙(札飭)]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는 진수당이 천진해관도(天津海關道) 주복(周馥)에게 보낸 비공식적 서신에서는 오히려 이홍장에게 비문을 받은 사실을 정확하게 밝힌 것과도 크게 다르다. 조선 측이 그 진위를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이홍장에게 받은 비문이 졸지에 찰칙으로 바뀐 셈이다. 비문과 찰칙 간의 무게감의 차이3)는 조선 당국자도 모를 리 없었다. 최소한 ‘미필적 고의’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진수당은 조선 당국에 보내는 외교문서에서 교묘한 ‘조작’을 통해 이 모든 외교적 조치가 북양대신 이홍장의 강력한 의지의 소산인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최대한의 외교적 압력을 가하는 효과를 도모했던 것이다. 당시 청나라의 대외관계 전반을 장악하고 있던 이홍장의 ‘관심’ 앞에 약소국 조선은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측은 사실상 살해범이 청병이 아니라 중국인을 가장한 조선인일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하는 고시를 한성의 각처에 게시하고, 또 『한성순보』에도 전재(轉載)하는 ‘양보’가 불가피했으며, 기사 작성에 관여한 일본의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는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나 귀국하는 선에서 당시 한중 양국관계를 긴장시켰던 필화사건은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이상 ‘최약국명안’에 관한 기존 연구에서 이홍장의 선도적인 역할을 비롯하여 통설적인 설명과 다른 내용을 중심으로 실상을 추적해보았다. 다만 필자의 초보적인 검토에 의하면, 이 사건은 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 이노우에의 귀국은 본건의 종결과는 거리가 멀다. 그 이후에도 진수당은 원세개와의 협력 하에 조선에 더 압박을 가하여 끝내는 관련자들을 일제히 소환하여 조선과 청의 공동 심리(審理)가 열리는 등 사건의 파장은 상당 기간 그치지 않는다. 이러한 남은 문제를 포함해서 이 명안의 진상과 배후 등의 문제에 관해서는 여전히 다각적인 접근과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http://cafe.naver.com/art33/612

http://blog.naver.com/boomboy?Redirect=Log&logNo=150154143627

 

 


1) 이 사건과 직결되는 자료가 이 案 내의 「朝漢城藥局崔宅英命案辦理卷」(1)(2)라는 두 개의 문건이다. 모두 128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 달한다. 여기에는 1884 1월부터 5월까지 청나라의 각급 관원 사이에, 그리고 조선과 청나라 양국 관원 사이에 주고받은 稟文, 批文, 箚飭, 公函, 移文, 照會, 照覆, 告示, 咨文, 供述, 檢案書, 讞案 등 실로 다양한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2) 이하 사건의 추이에 관해서는 권인용, 1884년 ‘崔藥局命案’의 해체와 재편」, 『史叢』 80, 2013 참조.

 

3) 批文은 稟文에 대한 短文의 약식 답변서이고, 札飭은 稟文에 대한 답변 혹은 그와 상관없이 하달하는 短文 혹은 長文의 공식 명령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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