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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38 /2013.10] 논단 _ 삼십년 하동(河東) 삼십년하서(河西)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23 조회수 91

[Vol.38 /2013.10] 논단 _ 삼십년 하동(河東) 삼십년 하서(河西)

안치영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조교수

 

나는 드라마를 좋아한다. 근년에는 많이 보지 못하지만 이전에는 중국의 사극을 즐겨봤다. 그 중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은 청나라의 옹정(擁正)황제에 대한 『옹정왕조(擁正王朝)』와 당태종에 관한 『정관지치(貞觀之治)』였다. 물론 나도 역사와 드라마가 다르다는 것을 분간할 수 있지만, 이미지화된 드라마를 통하여 훨씬 더 생생하게 역사상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 중 『정관지치』의 한 장면은 오래도록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당 태종이 조회 중 위징(魏徵)의 반대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내실로 뛰어 들어와 칼을 빼들고 이놈을 죽이겠다고 흥분하며 뛰어 나가려고 하자 장손(長孫) 황후가 큰 절을 하며 “폐하께서 명신을 얻은 것을 경하드립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실제 역사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장면이겠지만 그만큼 당태종과 위징의 관계를 잘 묘사한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당태종과 위징에 대하여는 『중국관행웹진』 2011 3월호 “좋은 지도자의 조건: 당태종과 위징” 참조). 그러한 관계는 위징 사후 당태종이 직접 비문을 써 주었다가 비석을 부수게 하고, 이후 다시 비석 세우게 한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당태종이 싫은 소리를 듣기 좋아하는 괴팍한 취미를 가져서도 아니고 분노가 없어서도 아니며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어도 그것을 절제하였던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황후가 당태종이 절제하도록 하지만 결국은 스스로의 절제와 열려진 귀가 당태종을 청사에 빛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절제할 수 있고 열려진 귀를 가지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흔한 덕성이 아니다. 더구나 만인의 생사여탈권을 가졌던 황제에게 그것을 기대하기란 더더욱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제시대에도 황권을 제한하는 제도를 만들고 역사 기술이라는 최종적이고 영속적인 평가를 통하여 절제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제도는 역사적으로 유효하였는지는 몰라도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많은 한계가 있었다. 제한적인 제도적 기제와 개인의 덕성에 기댄 권력자의 자기 절제만으로는 그렇게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중국사상의 수백 명의 황제 중에 성군으로 불리는 황제가 불과 몇몇에 불과하다는 사실로 잘 웅변된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로의 변화 조류에 따라 중국과 동아시아 사회도 민주를 보편적 가치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한 민주는 인간 존엄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권력에 대한 전통적 절제의 방법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지도자 개인의 자기절제가 아니라 제도와 절차를 통한 권력에 대한 제한을 통하여 그들이 절제하고 귀를 열도록 강제하는 것이 민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는 탁월한 지도자들의 시혜나 선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시행착오를 통한 상호간의 인정과 암묵적인 합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혹자는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시행착오의 과정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국의 정식국호는 중화인민공화국이지만 건국과정에서 중화인민민주공화국으로 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물론 민주가 빠진 것은 민주를 부정해서가 아니라 민주와 인민이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고 간명하게하기 위해 현재의 국명으로 확정하였다. 민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는 선언만으로 실행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이다.

 

1957년 공산당에 대한 정풍운동 과정에서 잘 알려진 “쌍백운동”을 통하여 당 외부의 인사들에게 자유롭게 공산당을 비판하도록 했지만, 마오쩌둥은 곧 바로 안면을 바꾸어 그것이 숨어있는 뱀을 굴에서 유인해 내기 위안 ‘양모(陽謀)’였다고 하며 반우파투쟁을 시작했다. 그 결과 더 이상 공산당 외부에서 비판의 자유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사상 가장 큰 비극을 초래하는 대약진운동에 대하여 당시 정치국위원으로 최고 지도자 그룹에 속해 있던 펑더화이(彭德懷)가 비판하자 반당으로 규정하고 광범위한 반우경투쟁을 전개했다. 그에 따라 더 이상 공산당 내부에서도-심지어는 최고지도부 내부에서도 비판과 반대의 목소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중국사회에 전대미문의 비극을 초래한 문화대혁명이다. 문화대혁명 중 당시 중국의 2인자이자 국가주석이었던 류샤오치(劉少奇)가 ‘배신자이자 간첩이자 노동자의 적’으로 ‘영원히’ 숙청되었다. 그런데 류샤오치는 1959년 펑더화이 비판과 숙청에 적극적이었던 인물의 하나였다. 문화대혁명 중 류샤오치의 비극적인 죽음은 그를 체제의 가장 비극적인 희생자인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중국에서는 류샤오치의 숙청을 중화인민공화국사상 가장 억울한 사건이라고 한다-기실 그 자신이 자신의 죽음을 초래한 체제의 일부였으며 심지어는 가해자이기도 했다.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는 그것이 영원할 줄 안다. 그러나 그 영원은 그렇게 길지 않다.

 

문혁을 시작할 때 마오쩌둥이 “우리 곁에서 잠자고 있는 후계자로 길러지고 있는 흐루시초프 같은 인물이 있다.”고 했을 때 류샤오치는 그것이 자신을 가리키는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겨우 3개월 후 류샤오치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고 또 2년여 후에는 문자 그대로 ‘영원히’ 숙청되었다. 숙청 후 이듬해 비극적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영원히 숙청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치적으로 ‘영원’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불과 12년 후인 1980년 ‘영원’히 숙청된 류샤오치에 대한 완전한 복권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중국 사람들이 즐겨 쓰는 “삼십년 하동(河東) 삼십년 하서(河西)”라는 표현이 있다. 삼십년은 황하의 동쪽이고 삼십년은 황하의 서쪽이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상이 주변보다 높아 하도(물길)가 번번하게 변하는 황하의 특성상 어떤 지역이 황하의 동쪽이 되었다가 황하의 서쪽이 되었다가 하는데 그것처럼 인간의 운명도 변한다는 것이다. 민주는 역사의 변화, 운명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제하고 관용하는 것이다. 처지는 항상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조심하고 전전긍긍해야 하는 것이다.

 

최근 시진핑(習近平)은 “권력은 인민이 부여한 것(權爲民所賦)”이라고 강조한다. 권력의 원천이 인민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말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특히 정치가들의 정치적 수사를 믿을 만큼 바보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말보다는 행동을 보아야 한다. 중국공산당의 지도부가 있는 베이징의 중난하이(中南海)의 입구에는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爲人民服務)”라는 커다란 구호가 새겨져 있고, 인민해방군도 늘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고 외친다. 그렇다고 그들이 “인민에 대한 봉사”를 자신들의 이익보다 더 중시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민에 대한 봉사”를 외치고 “권력은 인민이 부여한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농민반란이 왕조교체의 가장 중요한 동인이었던 중국의 역사 경험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결국 장기적이고 최종적으로는 인민이 권력의 안정을 규정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아는 것으로 충분하였다면 그렇게 빈번하게 농민반란이 발생하지도 중국의 왕조가 그렇게 빈번하게 교체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국의 위험을 경고하는 충신을 능지처참하고 구중궁궐에서 태평성세를 노래하는 아첨꾼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숭정제(崇禎帝)는 경산(景山)에서 목을 매다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성군이 대부분 왕조초기에 나타나는 것은 자신들이 천하의 영원한 주인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천하 인심의 변화와 예측 불가능한 운명을 인식할 때는 근신할 수 있지만, 그것이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할 때는 자만하게 된다. 황하의 물길은 세월이 흘러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물길이 바뀌지 않겠다고 믿을 바로 그 때에 흐름을 바꾼다. 소리 없이 흐르는 황하의 하상에는 거대한 변화를 초래할 보이지 않는 퇴적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권불십년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으면 그것이 영원한 줄 아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어리석음일까!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http://tangchao.baike.com/article-93890.html

중국관행연구사업단 자료센터소장 “문혁시기 포스터”

http://www.ctps.cn/photonet/product.asp?proid=1672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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