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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37 /2013.09] 논단 _ 8·15에 다시 생각하는 동아시아 역사 갈등과 역사 화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23 조회수 60

[Vol.37 /2013.09] 논단 _ 8·15에 다시 생각하는 동아시아 역사 갈등과 역사 화해

박경석 _ 인천대학교 HK 교수

 

_ 8·15, 역사 갈등, 역사기억

 

금년에도 어김없이 8·15 광복절이 다시 돌아왔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역사문제를 둘러싼 갈등 양상도 여전하다. 동북아시아에서 역사 갈등의 문제는 전문적인 역사가의 역사서술이나 해석이 아니라 ‘집단적 역사기억’의 차이에서 비롯된다.1) 이런 역사기억은 다양한 ‘매개물과 메커니즘’을 통해 형성되고 작동된다. 역사교과서, 역사 도서, 역사교육 ; 기념일 및 기념행사, 기념관과 같은 유무형의 기념물 ; 다큐멘터리, 영화, TV 역사드라마, 소설과 같은 대중매체가 역사기억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역사 기억의 매개물들 중에서도 전쟁기념관은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기억의 장소’로서, ‘기념관’과 ‘전쟁’이라는 양 측면에서 역사기억의 핵심 문제이다.

 

중국 베이징에서 남서쪽 교외로 한참을 가다보면 獅子像으로 유명한 盧溝橋라는 고풍스런 다리가 나온다. 그 옆에는 비교적 한산한 주변 환경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그것이 바로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이하 ‘항전기념관’)이다. ‘항전기념관’은 중일전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1937 7 7일 盧溝橋事件의 50주년 기념일(1987 7 7)에 개관하였다. 전쟁이 발발한지 50년이나 지나고 전쟁이 끝난 지도 40년 넘게 지난 그 시점에서 새삼 대규모의 ‘항전기념관’이 건립된 경위는 무엇일까?

 

_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1982)와 ‘항전기념관’의 건립(1987)

 

사실 중일전쟁은 중국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매우 중대한 사건이고, 결국 항일전이 중국혁명의 승리, 즉 중국공산당 중심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진작부터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기억할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실제 전쟁의 참상에 대한 중국 인민의 생생한 기억과 이를 기념하려는 욕구는 정치권력의 압력과 설득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다. 중국정부가 이렇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경제개발을 위해 현실적으로 일본과의 경제교류와 국교정상화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애초에 盧溝橋 부근에는 초라한 ‘橋史資料陳列館’ 밖에 없었다. 이것은 본래 1189년에 세워진 이 다리의 오랜 역사를 기념하는 전시관이었고, 전쟁과 관련된 盧溝橋事件은 盧溝橋 역사의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이런 소규모 전시관이 본격적으로 중일전쟁을 기념하는 대규모 기념관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그 발단을 제공했던 인물은 胡喬木(1912~1992)이었다. 오랫동안 中國社會科學院 院長을 역임하고 중국공산당 정치국 위원까지 지냈던 당대의 문필가이자 정치가인 胡가 1983 12 29일 盧溝橋와 ‘橋史資料陳列館’을 시찰한 자리에서 대규모의 항일전쟁 기념관을 지어야 한다고 제안하였고 이것이 발단이 되었다. 그의 제안은 1982년 ‘일본 역사교과서 파동’으로 인한 중일 간 역사 갈등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1982 7, 일본 문부성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진출”로 고치고, ‘남경대학살’, 731 세균 부대, 일본군 ‘위안부’와 같은 일본군의 만행을 삭제하거나 희석시키라고 지시했다는 소식이 알려짐에 따라, 한국과 중국에서 반일 여론이 들끓었고 양국 정부도 일본정부에 강력하게 시정을 요구하였다. 胡喬木은 분명 이런 역사 갈등의 연장선에서 대규모 전쟁기념관의 건립을 제안하였고, ‘항전기념관’은 역사 갈등이 낳은 산물이었다.

 

_ ‘항일기념관’의 반일 내러티브와 역사 갈등의 ‘악순환’

 

이후 전국 각지에 이런 대규모 항일전쟁 기념관이 20개 넘게 세워졌다. 한국의 독립기념관도 중국의 ‘항전기념관’과 마찬가지로 1987년에 준공되었는데, 건립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던 것도 1982년 일본 역사교과서 파동이었다. 역시 두 기념관의 전시에는 자연스럽게 반일정서를 자극하는 내러티브가 짙게 배어난다. 당시 한국과 중국의 정치권력에게는 대내적 국가통합을 위해 역사기억 속의 ‘적대적 상대’를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아무튼 일본에서 비롯된 역사 갈등이 한중일 간의 적대적 역사기억을 보존하고 확산시키는 기념관을 낳았고, 그 기념관이 다시 역사 갈등의 저변을 확산시키고 강화시키는 형국이었다. 역사 갈등이 역사 갈등을 증폭시키는 ‘악순환’이다.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日帝의 주요 고문 사례들  - 『獨立紀念館展示品圖錄(2002)

 

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항전기념관’을 비롯한 다양한 매개물을 통해 전쟁에 대한 참혹한 이미지와 기억이 중국인의 마음에 남아 있다. 전쟁에 관한 중국인의 트라우마가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 전쟁에 관한 내러티브와 기억을 통해 일본에 대한 정치적 분노가 시간을 뛰어넘어 계승되고 공간을 넘어 전달된다. 따라서 중국인의 눈에 비치는 여러 가지 일본상은 전쟁의 기억으로 환원되기 쉽다.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과거의 전쟁에 대한 기억이 역사 교과서 문제나 야스쿠니신사 문제 등의 요인에 의해 활성화되어 ‘살아있는 역사 갈등’으로 증폭된다. 이는 한국에서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고, 이런 현상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를 거의 일상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_ 전쟁 희생자에 대한 진정한 배려와 역사 화해

 

근대 이후의 갈등이나 역사분쟁에서 일본의 책임이 매우 크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신속한 근대화의 성취가 제국주의로 이어졌고 이것이 주변국에 엄청난 고통을 야기했던 것이 분명하다. 역사분쟁도 일본의 우익 보수 세력이 대두하면서 불거졌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결자해지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결국에는 3국이 협력하여 화해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이런 인식 아래 몇 가지 대안의 방향을 모색해 본다.

 

첫째, 전쟁에 대한 역사기억이 누구를 위한 누구의 기억인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에는 정치적, 사회적 욕구가 역사기억을 압도하고 있고, 국가주의와 영웅주의의 이미지가 강하게 배어있다. 이는 결국 인류 역사에 매우 많이 존재했던 ‘집단에 의해 강요된 개인 희생의 역사’를 미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정치 과잉의 상태는 동북아시아 역사기억의 특징이자 문제점인데, 이런 정치 과잉에서 벗어나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전쟁의 희생자에 대한 진지하고도 겸허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정치적 오용을 거부하고, 국가주의와 영웅주의 이미지에 가려 무수한 이름 없는 삶을 하찮은 것으로 바라보게 해서는 안 된다. 모든 형태의 전쟁 피해자에 대한 진정한 배려를 통해 이를 치유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둘째, 정치, 사회적 지배담론에서 벗어나려면, 역사 기억의 다양성이 확보되고 이것이 활발하게 소통되어야 한다. 많은 매개물이 역사 기억을 일정한 곳에 가두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집단기억 메커니즘 속에 오래 살다보면 거의 같은 생각을 갖게 된다. 특정한 역사기억이 마치 의무처럼 강요된다.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기억 간의 경쟁과 소통이 필요하다. 사회적으로 기억 간의 마찰을 용인하는 태도나 분위기가 필요하다. 다양한 생각과 방식으로 과거를 기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국제적으로도 단절과 배제의 방식을 버리고, 경쟁하고 화해하는 역동성이 갖추어져야 한다. 다양한 견해의 소통이 필요하다. 특히 전쟁기념관도 전쟁의 희생을 재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한다. 직접 참여하고, 체험하고, 생각할 수 있는 공간과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역사 기억이 정치 사회적 차원에서 문화적 차원으로 발전하여,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

 

셋째, 역사 기억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과거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고, 과거의 사건은 어디까지나 지나간 일이므로 딱 그 만큼만은 거리를 둘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서는 그 만큼은 망각도 필요하다. 사람들이 과거 조상의 일을 마치 자기 일로 여기는 데에는 내셔널리즘의 영향이 크다. 우리는 흔히 ‘내셔널리즘에 압도된 역사 기억이나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을 듣게 되는데, 과거에 대한 일정한 ‘거리 두기’는 바로 내셔널리즘이 압도하는 역사기억에서 벗어나는 구체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또한, 다양성 확보 차원에서 전문적인 역사학이 역사기억을 견제하거나 비판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보다 적극적으로 기억을 독려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과거와 현재가 분리되어 있지 않은 기억과 달리, 역사학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변화와 차이를 민감하게 인식한다. 역사학은 임의적인 기억을 교정할 수 있는 ‘비판적’ 메커니즘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1) 각국의 8·15를 기념하는 양상도 다양하다. 남한은 광복절로 기념하고 북한은 ‘민족해방기념일’로 기념한다. 일본은 ‘종전기념일’로 여기고, 중국은 8·15를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날로 여기지만 공식적인 항일전쟁승리기념일은 일본이 항목문서에 서명한 다음날인 93일이다. 러시아와 몽골, 필리핀도 9 3일을 전승기념일로 삼았고, 미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은 일본이 연합국과 항복 문서에 조인한 9 2일을 전승기념일로 삼았다. 홍콩은 8 15일을 기념했었으나 중국에 귀환된 후 중국의 예를 따르고 있고, 대만은 1945년에 일본투항의식이 크게 열렸던 10 25일을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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