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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37 /2013.09] 기획 _ 이미지로 보는 중국 (9) 기억의 퍼즐: 중화루(中華樓)의 또 다른 이야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23 조회수 71

[Vol.37 /2013.09] 기획 _ 이미지로 보는 중국 (9)    기억의 퍼즐: 중화루(中華樓)의 또 다른 이야기

| 기획 | 이미지로 보는 중국 (9)

 

저희 『중국 관행 웹진』에서는 2013 1월부터 <이미지로 보는 중국> 칼럼을 기획하여 연재합니다. 인천대 HK사업단 및 소속 연구원들이 소장하고 있는 포스터, 사진, 그림 등의 각종 이미지 자료 중의 일부를 선정하여 설명과 함께 소개할 예정입니다. 다양한 이미지들에 내재되어 있는 풍부한 역사적 사실과 문화적 의미를 함께 읽어 나감으로써 중국 일상의 여러 단편을 새롭게 조명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기억의 퍼즐: 중화루(中華樓)의 또 다른 이야기

송승석 _ 인천대학교 HK교수

 

 

개항과 더불어 청국 지계(地界)가 설정(1884)되면서 인천에는 청국의 거상(巨商)이나 쿨리(Coolie, 苦力)들의 출입이 빈번해졌다. 그러면서 자연적으로 그들의 술이나 음식이 들어오게 되고 급기야는 그것들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업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노동자나 영세상인 대상의 이른바 호떡집이나 만두가게는 물론이고, 거대 무역상들을 주요 고객으로 하는 대규모의 청요릿집들이 인천에 차례로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공화춘(共和春)을 필두로 중화루(中華樓), 동흥루(同興樓, 후에 송죽루 松竹樓), 빈해루(賓海樓), 평화각(平和閣)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당시 이러한 청요릿집들은 인천을 내왕하던 중국 무역상들이 사업정보를 교환하거나 사업파트너를 만나 거래를 성사시키는 장소로 널리 활용되었다. 한마디로, 단순한 음식점의 차원을 넘어 사교의 중심이자, 거래의 현장으로서 그 역할을 다했던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전반의 격동기에도 꿋꿋이 버텨나가던 이들 청요릿집들은 중반의 고비를 넘지 못하고 점차 쇠락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하나둘씩 전열에서 이탈해나갔다. 물론 여기에는 화교들의 말 못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1950년대 무역업 중심의 화교경제에 대한 한국정부의 각종 규제와 차별도 한 몫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왜냐하면, 인천 청요릿집은 상당부분 중국인 무역업의 흥망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 사라진 청요릿집들 중에서 중화루에 관한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해보려 한다. 유독 중화루만을 거론코자 함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송죽루나 빈해루 등은 그 사라진 유형의 건물뿐만 아니라 무형의 기억마저도 이제는 좇을 수가 없다. 공화춘의 경우에는 짜장면의 원조라는 증거 불충분의 기억에 의지해 짜장면박물관이란 이름을 내걸고는 있지만, 더 이상 삶과 생업의 공간에서 탈락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에 비해 중화루는 건물은 사라졌으되, 흐릿하나마 그 기억을 복원할 수 있는 인적 계보가 조금은 남아있다. 위의 사진이 그 기억의 단초를 제공한다.

 

중화루는 본래 한국 최초의 호텔이라는 다이부츠(大佛)호텔을 인수해 개업했다. 일본인 부자(父子) 호리 규타로(堀久太郞)와 호리 리키타로(堀力太郞)에 의해 일본조계지 입구에 세워진 3층의 건물을 화교들이 인수해 중국 요릿집을 창업했다는 것은 한때 조계지였던 이곳이 이즈음에는 잡거지(雜居地)로 화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사진에서 보다시피, 다분히 일본풍이 물씬 배어있을 법한 건물의 외장을 중국풍의 금빛 장식으로 새롭게 도색했다는 것은 일본인 호텔이 중국인 요릿집으로 바뀌었음을 상징적으로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中華樓’ 현판 좌우로 보이는 ‘中華北京’과 ‘特等料理’란 간판은 이곳이 베이징 요리를 주 메뉴로 하는 고급 청요릿집임을 시사하는데, 이는 한편으로 베이징 요리가 산동의 루차이(魯菜)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또 있다. 당시로서는 생소했을 법한 ‘CHUNG HUALOO CHINESE RESTAURANT’란 영어 현판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화교들의 증언대로라면, 중화루는 호텔을 인수해서인지 1층은 음식점, 2층은 마작방, 3층은 객실이었고, 이곳을 드나드는 다양한 외국인들을 접대하기 위한 각국의 기생들이 상주했다고 한다. 물론, 주요 고객은 중국인과 일본인들이었겠지만 이 현판을 통해 개중에는 얼마 안 되는 서양인도 드나든 것이 아닌가 하는 유추도 가능할 수 있겠다. 아무튼 국제도시로서의 인천의 성격을 조금은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본래 인천 관내 박물관이나 도서관, 기타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중화루 사진들은 지금의 이 사진과는 달리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건물만을 피사체로 한 것들이었다. 이 귀중한 사진의 발굴과 확인에는 중국 옌타이박물관의 관장을 역임했던 왕환리(王煥利) 선생과 연세대 유중하 교수 그리고 현 중화루 사장 손덕준씨의 역할과 노력이 컸다.

 

사람들의 모습이 사진 속에 있고 없음은 이 중화루 건물이 전에는 한국 최초의 호텔 자리였고, 한때 유명했던 청요릿집이었다는 역사적 기억을 되살리는 데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다만, 화교들의 주요 생업이었던 요식업의 운영방식과 관련해서는 하나의 시사점을 제공해준다고 할 수 있다.

 

특이하게도 이주 초기 화교들이 창업한 대부분의 청요릿집은 처음부터 지분할당과 이익배당을 전제로 한 동업의 형식을 띠고 있었다. 언뜻 보면, 지금의 주식회사 형태와 유사해 보이지만 이는 사실 중국 고래의 행업방식에서 연유한 것이다. 중화루의 경우에도 산동성 푸산현(福山縣) 출신 동업자 40여 명의 공동출자를 통해 시작되었고 이들의 공동경영으로 운영되었다. 이 사진 속의 인물들은 그들 중의 일부이다. 이들을 통칭 구동(股東, 지금의 주주)이라 한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앞서 말한 중화루의 인적계보를 느슨하게나마 추적해볼 수 있는 인물이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 동글이 안경에 하얀 창파오를 걸친 왕영성(王榮盛)이란 이가 바로 그이다. 그는 한때 빈해루의 구동이었고, 중화루로 옮긴 뒤에는 구동 겸 대외영업을 담당하는 이른바 와이당(外當)이었다. 화교 1세대라 할 수 있는 그에게는 왕연신(王衍信)이란 딸이 있었고 그의 남편은 지금의 중화루를 경영하고 있는 손덕준(孫德俊)의 부친인 손세상(孫世祥)이다. 손세상 역시도 한국생활의 절반은 중화루 주방에서 보낸 이였다. 그러고 보면, 중화루는 손덕준의 가계(家系)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중화루의 역사적 면면을 복원하고 공적 기억을 회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오히려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화교들의 소소한 삶의 일면과 기억을 회복하는 차원에서는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그 기억의 퍼즐 한 조각을 꿰어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이 사진은 참으로 흥미로운 자료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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