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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36 /2013.08] 기획 _ 이미지로 보는 중국 (8) 중국 민간문화유산: 보호와 전승의 어려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22 조회수 69

[Vol.36 /2013.08] 기획 _ 이미지로 보는 중국 (8)    중국 민간문화유산: 보호와 전승의 어려움

| 기획 | 이미지로 보는 중국 (8)

 

저희 『중국 관행 웹진』에서는 2013 1월부터 <이미지로 보는 중국> 칼럼을 기획하여 연재합니다. 인천대 HK사업단 및 소속 연구원들이 소장하고 있는 포스터, 사진, 그림 등의 각종 이미지 자료 중의 일부를 선정하여 설명과 함께 소개할 예정입니다. 다양한 이미지들에 내재되어 있는 풍부한 역사적 사실과 문화적 의미를 함께 읽어 나감으로써 중국 일상의 여러 단편을 새롭게 조명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중국 민간문화유산: 보호와 전승의 어려움

장정아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부교수

 

하북성 무강현 年畵

 

위 그림은 중국에서 춘절 때 붙이는 연화(年畵) 중 목판연화로 유명한 하북성(河北省) 무강현(武强縣)의 대표적 그림 중 하나이다. 무강현의 年畵는 다른 지역에 비해 농경문화를 비롯한 일상생활과 연관된 친근한 소재가 많고 색채가 풍부하며, 대체로 100위안 이하의 가격으로 비싸지 않은 편이고 지금도 목판 수작업으로 제작되고 있다. 필자는 2010년 천진대학교 冯骥才文学艺术研究院에서 국가급 무형문화유산(非物質文化遺産) 전승인들을 대상으로 수행하는 공식적 조사와 구술채록과정에 참여하여 며칠간 함께 조사기록 및 인터뷰를 하였다.

  

자금성이나 만리장성 등의 유형문화유산에 비해 상대적으로 홀시되어온 무형문화유산의 중요성이 부각된 계기는 2004년부터 시작된 한국 강릉단오제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소식 관련 논란이었다. 그 전부터 일부 민간문화 전문가들은 ‘민간문화’의 중요성과 의미,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사라져가는 민간문화를 보호해야 할 절박성에 대해 주장해왔지만 정부로부터도, 일반인들에게도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강릉단오제 사건은 민간문화와 같은 무형문화유산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강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민간문화유산(- 점차 국제적 기준에 맞춘 ‘무형문화유산(非物質文化遺産)’이라는 용어로 통일되어왔다)에 대한 국가적 차원에서의 보호 민간 차원에서의 활동이 크게 활성화되었다. 무형문화유산은 국가의 ‘문화안전’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른 것이다.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전승인 기록조사과정

 

중국정부는 2006년부터 무형문화유산 목록을 선정·공포하기 시작했는데, 이 목록은 국가급, 省市급, 市地급, 區縣급의 4급 체계로 되어있으며, 2006년 국가급 명단은 총 518항목이 선정되었다. 무형문화유산은 집단적으로 전승되기도 하고 전승인(傳承人)에 의해 전승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전승인 또한 빠르게 사라지고 있어서 보호가 시급하다는 전문가들의 요청에 따라 2007년부터 민간문학, 雜技와 競技, 민간미술, 전통수공기예, 전통의약 등의 범주에 걸쳐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대표적 전승인을 선정ᆞ·공포해 왔다. 전승인 선정 절차는 각지의 추천과 신청, 전문가의 심의와 사회적 공시 후 재심을 거쳐 최종 선정이 이루어진다. 2007 226, 2008 551명 등의 전승인 선정이 계속 이루어져 왔다. 2008년에는 한국과 일본의 경험을 참조하여 무형문화유산 전승인에 대한 보호방안을 명문화하여, 중앙에서 자금을 전달하여 각 지방에서 전승인에게 재정후원을 하도록 하였다.

 

색깔별로 다른 목판본

 

필자가 함께 조사한 목판연화 전승인은 48세의 馬習欽씨로, 국가급 전승인으로 선정된 후매년 8천 위안씩 받고 있어서 年畵작업만으로 기본 생활이 가능하며, 이것만으로도 아주 큰 발전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전승상황은 여전히 크게 열악하여서, 국가급 전승인이 아니라면 年畵작업에만 의존하여 생계를 잇는 게 불가능하다. 현재 약 21만 명의 인구가 있는 무강현에는 목판연화를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치면 100명 미만이다. 어떤 사람의 年畵는 한 장에 1위안도 안 되며, 어떤 사람들은 액자표구와 같은 부업을 하면서 간신히 생계를 잇고 있다. 馬習欽씨는 이처럼 전승상황이 안 좋다 보니, 후계자를 받을 때 거의 아무 조건도 내걸지 않고 받을 수밖에 없다고 토로하였다. “이 일을 하려는 사람이 없으니 조건이 까다로우면 안된다. 나는 후계자가 되겠다고 오는 사람들에게 돈도 안 받는다. 그저 요구하는 건 인내심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하면서 자기 머리를 써서 배워나갈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뿐이다.

 

馬習欽씨가 고안해낸 목판연화의 도안

 

이처럼 정부의 대대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를 키워내는 민간문화유산 전승은 극히 어려운 상황일 뿐 아니라, 또 한 가지 계속 논란이 되는 점은 무형문화유산의 ‘보호’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무형문화유산은 고정된 형태가 없다는 특성상 당연히 계속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또 개인의 이익과 충돌하는 상황 또한 불가피하다. “생계를 잇기도 힘든 농민들에게, 문화의 다양성을 보호하고 특정 문화유산의 표현형식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가난을 고수하라고 해야 하는가?(劉魁立, “非物質文化遺産保護: 與時間‘賽跑’”, 光明日報, 2006.2.9.)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전승인인 馬習欽씨 역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밝혔다: “민간문화는 언젠가 도태되고 없어지는 것이다. 완전히 처음과 똑같은 상태로 보존하는 건 불가능한 거다. 나는 전통을 지키면서 변화를 통해 돌파를 모색하고 싶다.”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이 무형문화유산은 완전히 ‘원래 그대로의 상태’가 불가능하며 ‘시대에 발맞추어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보호’의 대상과 의미, 어디까지 변화를 인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큰 논란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시대에 발맞추어 나아가는’ 무형문화유산의 변화는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이런 점에서 한국과 중국은 서로 오해로 인해 갈등하기보다 공동의 연구와 토론을 통해 문화유산에 대한 보호와 전승을 모색해나갈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할 때 문화유산은 각국의 문화안전을 위한 전리품이기보다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진정한 유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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