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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35 /2013.07] 자료소개 _ 晨報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22 조회수 71


[Vol.35 /2013.07] 자료소개 _ 晨報

 김지환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자 료 명 : 『晨報』 影印本 全42(32 缺本)

/저 자 : 『晨報』 編輯部 編

출 판 사 : 人民出版社

출판년도 : 1980

    : 중국어(번체)

 

 

 

『晨報』는 1916 8 15일 北京에서 창간되었으며, 창간시의 명칭은 『晨鍾報』였다. 중국이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혁이 불가결하다는 의미에서 새벽()과 종소리()을 신문의 명칭으로 삼은 것으로부터 국민 계몽을 창도한다는 지향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이 신문은 梁啓超, 湯化龍, 林長民 등 進步黨, 이후 憲法硏究會, 즉 硏究系의 機關報라 할 수 있지만, 당시 연구계 내부에서도 사상의 분화현상이 출현하여 개혁세력과 연합하여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한 일군의 세력이 있었다. 이러한 결과 『晨報』는 ‘監督政府, 擁護民權, 宣傳文化’를 기치로 5.4신문화운동과 사회개조운동을 적극 扶助하였으며, 마르크스주의 등 신사조의 소개와 전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창간 초기 李大釗는 편집주간으로서 발간사인 「晨鍾의 使命」을 발표하였다. 瞿秋白은 모스크바통신원 자격으로 정기적으로 기사를 송부하였으며, 胡適, 申府, 丁文江 등 당대의 명류들이 기고하였다. 그러나 1918 9월 段祺瑞가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한다는 기사를 게재했다는 이유로 北洋政府에 의해 강제로 정간되었으나, 같은해 『晨報』로 개명하여 속간될 수 있었다.

 

복간 이후 1919 2 7일 『晨報』는 副刊 성격의 제7()의 발행을 선포하고, ‘新修養, 新知識, 新思想’을 기치로 중국사회의 개혁을 선도함으로써 신문화운동과 사회주의사상을 전파하는 진원지가 되었다. 신문의 제7판은 전문적으로 학술이나 강연록, 문학작품을 게재하며, 신지식, 신사조를 소개하고 신문예를 제창하였으며, 구미, 일본 등의 자연과학, 사회과학의 대표적인 논저도 소개하였다. 더욱이 李大釗, 魯迅, 胡適 등이 자유논단이라는 칼럼을 통해 실험주의,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등 수많은 사조와 학설을 소개하면서, 54운동시기에 중국청년들의 각성을 촉구하는데 앞장섰다.

 

1920 8 1일 『晨報』는 胡適 등의 명의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선언」을 발표하였다. 선언의 골자는 인민에 의한 정치 없이는 진정한 공화주의를 실현하기 어려우며, 이를 위해서는 자유사상을 배양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즉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서신비밀 등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921 10 12일 제7판은 총 4면의 독립된 부록지로서 발행되어 『晨報』 副刊 또는 『晨報』 副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웠다. 이후 『晨報』 副刊은 봉건제도의 부패상과 봉건사상의 위해성을 적극 선전하면서 신문화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진원지가 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魯迅이 『阿Q正』을 연재하면서 신문의 사회적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였으며, 이러한 결과 『晨報』 副刊은 『覺悟』, 『學燈』, 『京報副刊』 등과 함께 54운동시기의 4大副刊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이후 『新靑年』 등 진보적인 혁명잡지가 속속 발간되고, 1925년 徐志摩가 편집주간에 오르는 등 新月派1)가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晨報』는 개혁성을 급격히 상실하였다. 신월파는 1923년 북경에서 설립된 우익진영의 대표적인 문학단체로서 徐志摩, 聞一多, 孫大雨, 邵洵美 등이 여기에 속하였다. 1926년 이후 『晨報』는 봉계군벌 세력에 의탁하였으나, 1928 6월 국민정부 군대가 북경에 들어오면서 일시 정간되었다. 이후 1928 8 5일 閻錫山에 의해 다시 복간되면서 일시적으로 『新晨報』으로 개칭되었으나, 염석산이 북경으로부터 철수한 이후 다시 『晨報』라는 명칭을 회복하였다. 918사변 이후 남경국민정부의 세력 하에 편입되었으며, 항일전쟁 전야에 정간되었다.

 

 


1) 新月派 : 신월파는 인도 타고르(Tagore)의 저작 『新月集』에 깊은 영향을 받아 탄생하였으며, 서구 유학생 출신이 주축을 형성하였다. 5.4신문화운동의 창도자들이 문학을 혁명하려면 먼저 전래의 낡은 형식을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시가의 창작에서 “전통시가가 지닌 낡은 격률을 타파하자”고 부르짖었다. 이에 신월파는 운문이라는 시의 본연의 특성을 잘 살리지 못하고 생경한 운율과 조잡한 형식의 시를 쓰는 것에 반대하여 중국 전통시의 운율미를 살려 현대시의 格律化率를 시도하면서 상호 대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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