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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35 /2013.07] 기획 _ 이미지로 보는 중국 (7) 문화혼종과 인종잡거 그리고위계(位階)와 차별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22 조회수 40

[Vol.35 /2013.07] 기획 _ 이미지로 보는 중국 (7)    문화혼종과 인종잡거 그리고 위계(位階)와 차별

| 기획 | 이미지로 보는 중국 (7)

 

저희 『중국 관행 웹진』에서는 2013 1월부터 <이미지로 보는 중국> 칼럼을 기획하여 연재합니다. 인천대 HK사업단 및 소속 연구원들이 소장하고 있는 포스터, 사진, 그림 등의 각종 이미지 자료 중의 일부를 선정하여 설명과 함께 소개할 예정입니다. 다양한 이미지들에 내재되어 있는 풍부한 역사적 사실과 문화적 의미를 함께 읽어 나감으로써 중국 일상의 여러 단편을 새롭게 조명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문화혼종과 인종잡거 그리고 위계(位階)와 차별

송승석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인천시 중구(中區).

구한말 제물포(濟物浦)란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이 지역은 언젠가부터 한국의 근대를 상징하는 하나의 역사적 기호가 되었다. ‘제물’이란 이름답게, 개항 이후 이 지역은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수많은 인()과 그들이 몸에 지니고 들어오는 각종 물()로 넘쳐났다. 지금은 차이나타운이나 근대역사문화의 거리 따위로 부르는 조계(租界)가 이곳에 설정된 것도 그 즈음이다.

 

개항장과 조계지로 상징되는 옛 제물포의 흔적을 좇아 이곳을 찾는 이들이라면, 그곳에 가 닿기 위해선 필시 신포시장을 가로지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다 알 것이다. 구한말 물길을 통해 건너온 수많은 사람과 재물이 한데 어울려 흥청거리던 신포시장은 과거의 영화를 다시금 누려볼 요량인지 지금은 이름을 살짝 바꿔 신포국제시장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신포국제시장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신포시장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신포시장은 개항 이후 백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인천 최초의 근대적 상설시장으로 한때 어전(魚廛)과 계전(鷄廛)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이곳은 닭강정집과 횟집이 즐비하고 그중 몇 집은 인천에서 꽤 이름이 나 있기도 하다.

 

연전에 필자도 민어회로 유명한 어느 횟집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런데 횟집 앞에서 우연히 재미있는 조형물 하나를 발견했다.

 

 

창파오(長袍) 차림에 과피마오(瓜皮帽)를 눌러쓴 중국인 남성이 벌여놓은 채소 좌판 옆에서 기모노 차림의 단아한 일본인 부인과 아이와 함께 온 조선인 아낙이 물건을 고르고 있는 모습. 시장 뒷골목에 위치해 사람들 눈에 잘 띠지 않지만, 필자에게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는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조형물이다.

 

먼저, 좌판에 널린 물건들을 보자. 양배추, 피망, 당근, 토마토, 양파, 우엉 등 모두 소채류이다. 신포시장 홈페이지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19세기 말 문을 연 신포시장은 본래 푸성귀시장이었고, 시장 안 스무 곳에 달하던 채소가게의 주인은 모두 중국인 화농(華農)들이었다고. 일반적으로 초창기 인천에서 활동하던 화교들 대부분은 무역업을 중심으로 한 화상(華商)들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10년대에 들어서면 농업도 화교의 주요 직종 중의 하나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재배하는 야채의 대부분은 농업공의회(農業公議會)라고 하는 농산물공동도매시장을 통해 조직적으로 판매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인천에서 소요되는 야채의 70%를 화농들이 제공했다고 하니, 사실상 조선의 야채시장 전체가 바로 이들 농업에 종사하는 화교들에 의해 독점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가령, 인천에서 고리대로 큰돈을 벌어들이기도 했던 우리탕(吳禮堂)은 부평에서 소사에 이르는 지역에 거대한 우리탕농원(吳禮堂農園)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신포시장은 농업공의회를 통해 도매된 농산물이 소매로 거래되던 곳이리라.

 

그럼, 이들 화농들이 취급하던 야채를 구매하러 신포시장을 찾는 고객들은 주로 어떤 이들이었을까? 조형물의 설명에 따르면, 고객은 주로 서양인과 일본인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중국인 장사치로부터 우엉을 건네받는 일본 귀부인의 손길은 매우 익숙한 듯 거침이 없어 보인다. 반면, 조선의 아낙은 아이의 채근에 못 이겨 토마토를 집어 들긴 했지만, 냉큼 사지는 못한 채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있다. 왜일까? 우선, 신포시장이란 공간이 그 조선 여인에겐 와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낯선 공간이었을 수 있다. 다양한 인종과 민족들이 서로의 물건을 사고파는 열린 공간이었지만, 정작 조선인에게만은 자신들의 터전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열리지 않던 공간일 수도 있었겠다는 말이다. 또한 화교가 내다파는 양파, 양배추, 토마토, 피망 따위가 어린 아이에겐 단순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을지 모르지만, 여인에겐 매우 생경하고 난감한 것들이었을 게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들은 하나같이 조선인들에게 그리 익숙한 야채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화교 아니, 신포시장은 적어도 조선인에겐 매우 불친절한 곳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토마토를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자꾸만 움츠려들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풍족하지 못한 삶이었을 것이다.

 

본래 이 조형물의 제작 의도는 중국인, 일본인, 조선인이 함께 어울렸던 지난 역사를 통해 현재 신포시장이 지향하는 국제화의 역사성을 담보하고자 했음이리라. 그렇다면, 그 소기의 성과는 충분히 거두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문화혼종의 공간, 다양한 인종의 잡거 공간으로서의 신포시장 나아가 인천 중구라고 할 때, 혼종과 잡거 안에 내재된 또 다른 고립과 차별도 유념해서 보아야 할 것이다. 지난 날 조선인이 겪어야 했던 고립과 차별이 지금은 화교들에게 전이되어 재현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한때는 인천의 행정, 금융, 경제, 문화, 교육의 중심지였으나 지금은 도시개발의 뒷전으로 밀려나 가장 낙후한 지역의 하나가 되어버린 인천의 중구. 지난 30년 동안 퇴락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정체와 서행만을 반복했던 이 지역이 원활한 소통을 통해 뻥 뚫린 대로를 다시금 질주하기 위해서는 혼종과 잡거 안에 지속적으로 개입될 수 있는 차별과 고립을 해소할 수 있는 길부터 먼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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