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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34 /2013.06] 자료소개 _ 日本關東憲兵隊報告集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22 조회수 62

[Vol.34 /2013.06] 자료소개 _ 日本關東憲兵隊報告集

 박경석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자 료 명 :『日本關東憲兵隊報告集』

    : 吉林省案館, 廣西師範大學出版社 編

출 판 사 : 廣西師範大學出版社

출판년도 : 2005

총서사항 : 1-4(84)

    : 중국어(간체)

I S B N : 9787563354023

 

 

본서는 일본의 關東憲兵隊가 미처 소각하지 못하고 남겨 두었던 案資料를 吉林省案館과 廣西師範大學出版社가 정리하여 2005년에 출판한 자료집이다. 유사한 案資料로는 학계에 처음 제출된 진귀한 역사자료로서, 일본의 중국 침략과 중국의 항일 투쟁을 연구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동북의 사회와 경제를 살펴보는 데에도 매우 유용하다.

 

1905 9, 러일전쟁이 끝나고 러시아는 패전으로 인해 遼東半島의 조차권과 長春에서 旅順口까지의 철도를 일본에 양도하였다. 일본은 12월 淸政府를 강박하여 중국동북문제에 관한 중일 ‘조약’을 맺고, 정식으로 남만주 철도 및 부속 재산과 특권을 접수하였다. 이와 동시에 중국 동북에 파견했던 헌병을 ‘關東憲兵隊’로 정식 개편하고, 關東總督에 직속하게 하였다. 憲兵隊의 본부는 旅順口에 두었고, 만철 연변의 遼陽、奉天、鐵嶺、安東、長春에 分隊를 설치하였다. 성립 이후, 관동헌병대는 “교민 보호와 일본권익 유지”를 명분으로 치안 및 첩보 활동을 전개하였다. 동북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각 분야의 정보를 수집하였고, 동북 전체를 무장 점령하기 위한 준비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소련에 대한 첩보 활동에도 종사하였다.

 

1932년 관동헌병대는 關東軍 別動隊의 하나로서, 사령부를 瀋陽으로 옮겼고, 만주국 성립 이후에는 長春으로 옮겼다. 관동헌병대 사령부 아래 總務部、警務部 등의 기구를 설치하였고, 만주국 各省에 헌병대를 설치하였으며, 各縣과 중요 도시에는 憲兵分隊、分遣隊를 설치하여, 완전한 조직 계통을 형성하였다. 만주국 형세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그 권력이 강화되었고, 동북지역의 모든 경찰조직을 총괄적으로 지휘하는 권한을 획득하였다. 관동헌병대는 이후 지속적으로 중국동북에 대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抗日運動을 진압하는 책임을 담당하였고, 이를 위해 治安을 집행하고, 정치경제정보를 수집하고, 항일 첩보원을 수사하여 체포하고, 기밀을 보호하고 만주국 군정요인을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5 8 15,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관동헌병대도 전체가 소멸되었다.

 

1945 8월 일본이 투항하기 직전 관동헌병대는 사령부의 案을 매우 급하게 소각하였다. 소련군이 예상 밖으로 신속하게 진공함에 따라, 관동헌병대는 미처 소각하지 못한 案을 땅에 묻었다. 해방 후, 미처 소각하지 못하고 땅에 묻혔던 案文件이 발굴되었다. 1982년 이들 案이 吉林省案館에 접수되었다.

 

본서는 吉林省案館에 보관되어 있던 일본 관동헌병대 사령부 案의 일부를 체계적으로 편집해 놓은 案資料集이다. 수록된 案에는 關東憲兵隊의 각종 월간보고, 반월간 보고, 10일간 보고, 일일보고 등이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思想對策月報」, 「通信檢閱月報」, 「無線電監聽月報」, 「思想戰情報月報」, 「情報月報」, 「謀略月報」, 「鐵警軍情報月報」, 「防諜月報」, 「蘇聯調資料月報」, 「東蘇蘇蒙情報月報」, 「蘇軍軍情月報」, 「兵要地圖調月報」, 「駐滿美國領事館月報材料」, 「軍紀風紀月報」, 「警備月報」, 「思想宗警察月報」, 「軍事警察月報」, 「高等警察月報」, 「傳染病、火災月報」, 「西南地區肅正月報」, 「討伐旬報」, 「國內情勢調月報」, 「國際形勢月報」, 「特別搜日報」, 「治安旬報」, 「蘇聯旬報」 등등 50여 종류가 있다.

 

『日本關東憲兵隊報告集』은 현재 제4집까지 편찬되어 있는데, 1(18)에는 주로 ‘思想 對策’ 관련 각종 보고서가 수록되어 있고, 2(19)에는 주로 軍紀風紀, 防諜, 戰時 상황, 전염병, 討伐, 治安 , 특별 정보 수집 등에 관련된 보고서가 수록되어 있으며, 3(24)과 第4(23)에는 각종 電報나 書信과 같은 우편물 및 정기간행물에 대한 검열과 관련된 광범위한 보고서가 수록되어 있다.

 

‘思想 對策’은 관동헌병대가 정치 탄압과 사상 통제를 실시했던 기본 수단이었다. 그 주요 목적은 항일세력을 소멸시키는 것이었다. 관동헌병대 각지 분대의 활동 정황이 보고의 형식을 통하여 관동헌병대 총사령부에 보고되었기 때문에, 엄청난 수량의 案資料가 형성되었다. 통상적인 정황 아래에서, 이런 보고는 아래 몇 가지 분야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일반 상황, 國共 및 소련과 일본공산당의 활동 상황, 중국공산당 및 항일단체의 활동 상황, 공산주의 선전 활동, 공산주의 선전 방지 노력, 공산당 및 기타 조직의 활동 정황, 기타 참고 사항 등등이다.

 

관동헌병대는 ‘思想 對策’, ‘防諜’, ‘治安 肅正’ 등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전보, 서신에 대하여 엄격한 검열을 시행했다. 전보는 주소와 성명을 포함한 全文을 기록했고, 암호나 은어가 사용된 전보를 색출하려고 노력했다. 서신은 검열을 통해 문제가 있다고 인정된 것은 몰수하여 기록해 두었다. 「通信檢閱月報」는 각지의 헌병대가 사령부에 당월 통신 검열 정황을 보고한 것이다. 이런 보고는 대개 세 부분으로 나뉜다. 일반 상황, 우편물 검열과 전보 검열 등이다. 당월 검사한 우편물과 전보의 수량, 문제가 있는 우편물과 전보를 소개하고, 이른바 문제가 있는 우편물의 검열 정황을 중점적으로 보고했다. 여기에는 발견 시간과 장소, 발신인, 수신인, 우편물의 내용, 처치 의견 등이 포함되어 있다. 관동헌병대가 문제가 있다고 여긴 우편물은 항일의 내용이 있는 우편물, 시국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우편물, 일본군의 군기 해이를 반영한 우편물, 일본군의 편성과 장비, 군대 행동, 군사 연습 등을 드러내는 우편물 등등이다.

 

‘防諜’은 관동헌병대의 중요 임무이다. 9·18사변 후, 일본이 동북 전체를 점령했다. 국내적으로 보면, 華北에 구멍이 뚫린 것이고, 수시로 침략을 당한 위험성이 생겨난 것이다. 국제적으로 보면, 소련이 일본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국민당의 정보원과 소련의 정보원은 끊임없이 동북으로 들어가 정보를 정탐하였고, 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조직도 항일선전과 무장투쟁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형세에 직면하여, 관동헌병대는 ‘방첩’ 사업을 강화하였고, 각지 헌병대는 매월 사령부에 ‘방첩’ 정황을 보고하였다. 「防諜要報」의 형식으로 ‘防諜’ 방법과 조치를 소개하였다. 「防諜月報」는 일반적으로 4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첫째, 소련정보기관에 대한 활동 정황 및 소련 정보원 체포 정황에 대한 보고이다. 둘째, 중국공산당의 군사, 사상 선전, 첩보, 경제 등 각 분야 활동 정황에 대한 보고이다. 셋째, 국민당정부의 ‘만주국’에 대한 책동 정황에 대한 보고이다. 넷째, 기타 각국 정보 수집 정황에 대한 보고이다.

 

관동헌병대의 활동은 매우 광범위했다. 동북지역에서 만주국의 경찰기관을 통일적으로 지휘했고, 각지의 경찰사무는 모두 사령부에 보고되었다. 「鐵警軍情報月報」, 「警備月報」, 「思想宗警察月報」, 「軍事警察月報」, 「高等警察月報」 등이 이에 속한다. 또한, 헌병대는 관동군과 합동으로 동북에서 ‘討伐’, ‘肅正’ 및 치안 유지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관련해, 「西南地區肅正月報」, 「討伐旬報」, 「治安旬報」 등의 報告가 생성되었다. 일본은 소련으로 침입할 계획을 세웠고, 따라서 관동헌병대는 소련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데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진주만 사건 후에는 미국에 대한 정보 수집도 강화했다. 이 분야의 보고로는 「蘇聯調資料月報」, 「東蘇蘇蒙情報月報」, 「蘇軍軍情月報」, 「駐滿美國領事館月報材料」, 「蘇聯旬報」 등이 있다.

 

관동헌병대의 보고는 일반적으로 각 지방 헌병대에서 생성되어 관동헌병대 사령부로 보고된 것이다. 따라서 관동헌병대의 각종 보고, 해당 기구 활동 정황 보고, 해당 기구에서 수집한 정보의 原件과 자료는 매우 사실적이다. 각지에서 수집한 항일 표어, 구호가 모두 있는 그대로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통신 검열’ 관련 보고서에 적혀 있는 우편물의 내용은 모두 당사자들이 적은 것으로 당시의 역사 실태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관동헌병대의 보고는 그 내용이 광범위하다. 다양한 각도에서 1930~40년대의 중국사를 연구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해당 보고서가 일본의 중국 침략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의 중국 침략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하고, 중국인의 항일투쟁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항일투쟁사를 연구하는 데에도 매우 의미가 크다. 뿐만 아니라, 당시 동북지역의 사회와 경제를 연구하는 데에도 진귀한 사료이다. 관동헌병대는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위하여 각종 정보를 광범위하게 수집하였고, 이런 정보 자료가 대량의 사회경제사 자료로 남아 있는 것이다.

 

(賓長初/張志, 「日本關東憲兵隊報告集』及其史料價, 『抗日戰爭究』 2006年 第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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