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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34/2013.06] 기획 _ 이미지로 보는 중국 (6)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쩌둥의 홍위병 접견과 홍위병의 운명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22 조회수 258

[Vol.34 /2013.06] 기획 _ 이미지로 보는 중국 (6)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쩌둥의 홍위병 접견과 홍위병의 운명 

| 기획 | 이미지로 보는 중국 (6)

 

저희 『중국 관행 웹진』에서는 2013 1월부터 <이미지로 보는 중국> 칼럼을 기획하여 연재합니다. 인천대 HK사업단 및 소속 연구원들이 소장하고 있는 포스터, 사진, 그림 등의 각종 이미지 자료 중의 일부를 선정하여 설명과 함께 소개할 예정입니다. 다양한 이미지들에 내재되어 있는 풍부한 역사적 사실과 문화적 의미를 함께 읽어 나감으로써 중국 일상의 여러 단편을 새롭게 조명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쩌둥의 홍위병 접견과 홍위병의 운명

안치영 _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문화대혁명은 홍위병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위병운동은 1966 6월 문혁의 시작과 더불어 시작되어 문혁시기 1600여만 명의 청년학생들을 농촌으로 하방시키는 1968년 지식청년들의 ‘상산하향(上山下鄕)’운동의 시작과 더불어 그 종언을 고한다. 홍위병운동은 혼란을 통하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겠다는 즉, “천하대란(天下大亂)”을 통하여 “천하대치(天下大治)”에 이르는 마오쩌둥의 이상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1966 8 1일 청화대학 부속중학교 홍위병이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그러한 홍위병의 조반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편지를 보낸다. 또한 8 5일에는 『사령부를 포격하라: 나의 대자보(打司令部: 我的一張大字報)를 써 홍위병의 조반을 고취한다. 아래는 마오쩌둥이 대자보를 작성하는 장면을 형상화한 문혁시기의 포스터이다.

 

 

그것을 기화로 1966 8 18일부터 11월 말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천안문 성루와 광장에서 마오쩌둥은 전국 각지에서 온 홍위병 1100-1300만 명의 홍위병을 접견한다.1) 아래 사진은 마오쩌둥이 천안문 광장에서의 마지막 홍위병 접견에서 자동차로 사열하는 장면이다.

 

 

홍위병 접견에서 마오쩌둥은 자신이 홍위병완장을 찬 홍위병이 된다. 아래 사진은 1차 접견 때인 1966 8 18일 천안문 성루에서 베이징 사범대학 부속여자 중학교 학생 쑹빈빈(宋彬彬)이 마오쩌둥에게 홍위병 완장을 채워주는 장면이다. 쑹빈빈은 인민해방군 상장(上將: 상장은 평시 중국군대의 최고 계급장으로 우리의 대장에 해당함)이자 개혁초기 중공중앙 조직부장을 역임한 쑹런츙(宋任窮)의 딸이다.

 

(출처: http://www.728k6.cn/in/disp_mem.asp?page1=2&id=12712)

 

천안문광장에서의 홍위병 접견은 홍위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홍위병운동의 분화와 시작되는 계기가 된다. 마오쩌둥이 홍위병 완장을 차고 스스로 홍위병임을 자임하게 됨에 따라 홍위병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아래 그림은 마오쩌둥이 5차 홍위병 접견에서 홍위병 완장을 차고 천안문 성루에서 홍위병을 사열하는 모습이다.

 

 

초기 홍위병운동은 출신성분이 좋은 소위 홍 5(혁명간부, 혁명군인, 혁명열사, 노동자, 빈농과 하층 중농)의 자제들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그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 “부모가 영웅이면 자식이 호한이고, 부모가 반동이면 자식이 후레자식(老子英雄兒好漢, 老子反動兒混蛋)”이라는 표어로 상징되는 혈통론이다. 출신성분이 나쁘면 홍위병이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핍박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마오쩌둥이 홍위병을 접견하던 시기에, 그러한 상황의 근본적 변화가 발생한다. 문혁의 목표와 방향의 전환과 홍위병 구성과 규모의 변화가 그것이다. 홍위병 접견이 시작된 8월 당시까지 당의 일선지도부로 문혁을 이끌었던 류샤오치(劉少奇)와 덩샤오핑(鄧小平)이 비판을 받고, 10 2일에는 (공산당 내부의) 자본주의 반동노선에 대한 비판이 공개적으로 제기된다. 이에 따라 “당위원회를 걷어차고 혁명을 하자!( 開黨委革命)”는 구호가 광범위하게 유행하게 되고, 점차 조반의 목표가 공산당과 정부 기관으로 전환되게 된다. 홍위병운동의 공격 대상이 전통적인 혁명 대상인 봉건지주와 자본가 계급과 그 대리인인 지식인과 문화계 인사들에서 공산당과 정부 자체로 전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기존의 권위가 기득권을 스스로 부정하는 전대미문의 ‘혁명’이 시작되게 되며, 마오쩌둥만이 유일한 예외인 일체의 권위에 대한 부정과 비판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한 ‘혁명’은 홍위병 구성의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당과 정부가 ‘혁명’의 대상이 되자 더 이상 ‘홍색 혈통’이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그에 따라 혈통과 출신문제로 멸시되고 폭압을 당했던 학생들이 ‘해방’되었으며, 초기의 홍 5류의 홍위병과 구별되는 ‘조반파 홍위병’이 등장하게 된다. ‘조반파 홍위병’의 등장과 천안문광장에서의 홍위병 접견을 비롯한 전국적 대연합은 이중적으로 모순된 경험과 기억을 만들어 냈다.

 

천안문에서의 홍위병 접견은 전국에서 몰려든 홍위병들에게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자유를 경험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오 주석의 손님’으로서 베이징을 방문한 ‘아름다운 기억’을 만들어 내었다. 그렇지만, 전국적인 대연합의 과정에서 홍위병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이제까지 당의 공식적 선전으로는 전혀 인식하지 못한 낙후하고 후진적인 중국의 실체를 경험하게 했다. 그러한 상반된 기억과 경험은 ‘조반파 홍위병’들이 이후 한편으로는 서구적 대안을 포함한 급진적 개혁파로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강고한 마오쩌둥주의자로 분화하도록 했다.

 

다른 한편 ‘조반파 홍위병’의 등장은 초기에 무자비한 폭압을 행사했던 홍5류 홍위병들이 그들의 부형들과 마찬가지로 폭압을 당하게 했다. 그런데 그러한 경험은 역설적으로 문혁 이후, 폭력의 경험은 망각하고 억압을 당한 기억만으로 스스로가 문혁의 희생자인연하게 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뻰중윈(卞仲耘)의 죽음’이다. 베이징 사범대학 부속 여중 당 서기이자 부교장이었던 뻰중윈은 1966 8 5일 문혁시기 베이징에서 최초로 학생들에게 구타당하여 사망한 교육자이다. 베이징 사범대학 부속 여중은 중국공산당의 지도부가 위치해 있고 거주하는 중남해(中南海)에서 가장 가까운 여자중고등학교였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당의 고관대작들이 자제들의 다수가 다녔는데, 이때는 마오쩌둥의 딸 리민(李敏)과 리나(李納)는 이미 졸업하였으며, 앞의 쑹빈빈을 비롯하여 류샤오치의 딸 류팅팅(婷婷), 덩샤오핑의 딸 덩롱(鄧榕) 등이 재학 중이었다. 민주당파 지도자이자 우파로 고초를 겪었던 장보쥔(章伯鈞)의 딸 장이허()는 그의 책 『藝人의 지난 일(伶人往事)(臺北: 時報出版)에서 “교장의 머리를 찬 여학생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있지만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무산계급의 위대한 혁명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는 텔레비전 대담에서 자신의 전 가족이 문혁의 희생자라고 했다.”고 했다. 텔레비전 대담에서 자신의 가족이 희생자라고 한 것은 바로 덩샤오핑의 딸 덩롱이었다. 『예인의 지난 일』이 중국에서 판매금지된 것은 바로 덩롱이 뻰중윈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과 관련된다고 한다.

 

장이허는 『지난 일은 결코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는다(往事幷不如煙)』라는 또 다른 책을 썼다. 그러나 지난 일은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을 지라도, 권력은 기억까지도 조작해 낸다. ‘조반파 홍위병’은 문혁의 가해자였지만 동시에 가장 큰 희생자였다. 그들은 문혁시기 홍위병운동이 끝나면서부터 핍박받았을 뿐만 아니라 문혁 이후에도 문혁 시기 모든 파괴와 죄악의 원흉으로 투옥되기도 하고 직장에서도 쫓겨나는 고초를 겪었다. 그렇지만 초기 문혁 과정에서 선생을 때려죽이고 살인을 자랑하던 고급간부 자제들은 문혁의 희생자로 자임한다. 문혁 이후 복권된 부형들의 비호 하에 문혁 초기 폭력의 기억은 지워버리고 억압당한 기억만을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력이 모든 사람들의 기억을 영원히 조작할 수는 없다. 지난 일은 결코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고 권력도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1) 아래 8차 접근 포스터에는 1300만 명을 접견했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王年一(『大動亂的年代』)과 卜偉華(爛舊世界』) 1100, 廖盖隆·莊浦明(『中華人民共和國編年史』) 1200만 명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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