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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30 /2013.02] 기획 _ 동북의 오늘 (2) 중국 단동에서 네 집단의삶의 궤적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17 조회수 63

[Vol.30 /2013.02] 기획 _ 동북의 오늘 (2)    중국 단동에서 네 집단의 삶의 궤적

| 기획 | 동북의 오늘 (2)

 

인천대 HK사업단에서는 HK사업 2단계 기간(2012.09 - 2015.09) 동안 중국의 동북 지역(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을 중점 연구 권역으로 설정하여 연구조사사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에 저희 『중국 관행 웹진』은 동북 권역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유익하고 생생한 정보를 제공하고 이 지역에 대한 국내 학계의 관심을 제고하고자 <동북의 오늘> 칼럼을 기획하여 2013 1월부터 연재하고자 합니다. <동북의 오늘>에서는 이 지역에서 오랜 기간 현지조사를 수행한 바 있는 전문가들의 현지조사 경험을 바탕으로 시장경제체제의 확산과 심화에 따른 사회경제적 일상의 변화 양상을 살펴볼 것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중국 단동에서 네 집단의 삶의 궤적: 북한사람, 북한화교, 조선족, 한국사람1)

강주원 _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_ 한국 사회의 국경 만들기 현상:

  북한사람과 한국사람이 만나는 연결고리 지역 간과

 

20세기 중반 전후부터 한국 사회에는 국경으로 상징화된 비무장지대로 이루어진 휴전선이 있다. 한때 그 철조망은 한국 국민과 북한 국민에게는 넘어서는 안 되는 벽이었다. 한국 사회를 반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섬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기도 하였다. 북한사람과 한국사람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국경과 국경지역은 없었다. 그러나 21세기 전후 국경과 관련된 이미지와 공간이 한국 사회에 다양한 층위로 다가오고 있다. 판문점과 임진각, 이산가족상봉, 탈북자,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관광)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국경 넘기 연출 등에서 표현되는 국경은 단지 국경 만들기뿐만 아니라 허물기, 넘나들기가 혼재되는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2010년 휴전선, 즉 국경 가까이에서 벌어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으로 인해, 한국 사회에는 국경 통제와 관련된 국경 만들기 현상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서, 한국 사회와 연관된 또 하나의 국경에 대한 시선이 있다. 그곳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곧 국경으로 간주되는 북·중 국경이다. 한국 사회는 그곳을 북한과 중국이 만나는 지점으로 주목한다. 그리고 휴전선이라는 폐쇄된 국경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럼으로써, 중국 국경지역에서 북·중 국경을 왕래하는 북한사람의 존재를 간과한다. 북·중 국경과 중국의 국경지역에서 탈북자 이외에 북한사람과 한국사람의 연결고리를 쉽게 연상하지 못한다.

 

단동의 대형마트 주변의

북한사람들(2007)

북한사람의 명함들(2007)

 

_ 압록강을 공유하는 네 집단의 삶: 삶의 터전이자 수단

 

중국의 단동은 국경으로 상징되는 압록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북한의 신의주와 마주보고 있다. 압록강변의 양 국경지역 사람들은 물안개와 해 그리고 달을 동시에 보고 느낀다. 또한 북·중 국경조약의 특징에 근거하여 압록강을 공유한다. 그러나 두 국경 도시의 사람들의 하루 일과는 한 시간이라는 표준 시차를 두고 펼쳐진다. 또한 2000년대에 접어들어 중국 정부가 새롭게 조성한 압록강 공원은 아침과 저녁이면 사교춤을 즐기는 사람으로 넘쳐난다. 반면에 신의주는 외형상 한적한 모습이다. 단동의 관광 유람선들과 보트, 신의주의 정박된 화물선 혹은 양 국가의 국기가 선명하게 보이는 모래 채취선들만이 압록강의 풍경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양 국경지역의 사람들은 압록강에 다양한 삶의 흔적과 행위를 채워나가고 있다. 이를 빗대어 단동사람은 “압록강은 바다보다 깊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중국의 국경지역인 단동에서 네 집단은 그들 각자 또는 함께 삶의 의미를 간직하면서 살고 있다. 1992년 한·중 수교 전후부터 이들은 단동에서 삶의 궤적을 만들어왔고 만들어 가고 있다. 북·중 국경은 그들의 생활 방식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삼국의 국가 정책들에 따라 국경과 관련된 현상들은 강화 혹은 약화된다. 이와 같은 변화들은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그들 삶의 전제조건이 된다. 때로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불법, 편법, 합법, 관례)으로 북·중 국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단동에 네 집단이 존재하기 때문에 국경은 그들에게 만들기와 허물기가 가능한 대상이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을 택하건 변하지 않는 사실은 국경이 그들 삶의 터전이자 수단이라는 것이다.

 

_ 단동에서 살아가고 있는 네 집단의 범주와 거주 기간

 

네 집단의 범주는 단동에서 각각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보다는 네 집단의 관계맺음을 통해서 단동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북한사람은 북한 국적을 유지하고 단동에서 경제적 목적으로 장기 거주 또는 단기 출장을 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동에 살고 있지만, 북·중 국경을 통해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갈 계획을 가지고 있다. 북한화교는 고향은 북한이지만 국적은 중국 국민이다. 그들은 북한을 떠났지만 경제적 활동을 목적으로 북·중 국경을 넘나들면서 단동에서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조선족은 중국 국적을 가진 단동이 고향인 사람과 중국의 타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동에서 북·중 국경 혹은 한·중 국경을 활용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한국사람은 한국 국적으로 단동에서 북·중 국경을 염두에 두고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네 집단이 단동에 이주한 시기와 거주(체류) 기간을 살펴보면 북한사람은 1980년대 이후 취업으로 1-2(2년이 넘는 경우도 있음) 거주하는 사람과 출장차 오는 사람(1개월) 또는 탈북자가 아닌 불법 체류 성격이 강한 단기 체류자(3개월에서 6개월)가 대다수를 이룬다. 그리고 국경 무역과 관련되어 국경을 매일 같이 오고가는 사람들도 있다. 북한화교는 1990년대 전후 주로 북한(평양 혹은 신의주)에서 단동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1년에 한번은 북한에 갔다 오는 사람과 수시로 북·중 국경을 넘나들기 하면서 사는 사람들로 나누어진다. 또는 북한화교 신분을 포기하고 중국 국민으로 살면서 국경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조선족은 단동 토박이와 1990년대를 전후해서 타 지역에서 이주해온 조선족으로 구분된다. 한국에서 취업 활동을 하기 위해 거주를 하다가 단동에 사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사람은 단동에 약 1992년을 전후로 또는 2000년 이후부터 거주한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단동과 한국을 수시로 왕래하면서 양쪽 삶을 병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거주(체류) 기간을 기준으로 네 집단을 다시 분류하면 북한사람과 한국사람은 언젠가는 돌아갈 북한과 한국을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반면에, 북한화교와 조선족은 앞으로 살아갈 곳으로 생각하면서 단동에 터전을 만들고 있다.

 

_ 국경 넘나들기 삶의 예:

  도강증(渡江證), 압록강의 배, 핸드폰,

  한국 부부의 출산 선물로 배달된 북한의 가물치

 

수많은 물자가 단동에서 신의주로만 가는 것은 아니다. 물품과 더불어 이 다리를 통해서 사람들이 오간다. 그들 중에는 북한과 중국을 오가면서 국경 무역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양쪽의 친척 방문 겸 경제 활동을 위해 기차나 트럭 또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최소한 공식적으로 1980년대 초 북·중 관계 개선의 결과가 낳은 모습이다. 그런데 이러한 국경 왕래의 현장에서 일반적 출입국 절차와 다른 형식이 있다. 국가 간의 왕래에서 여권과 비자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북·중 국경의 경우 압록강변에 살고 있는 북한과 중국의 주민들은 도강증을 활용해서 국경을 넘나들 수 있다

 

이외에도, 공유지역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압록강에는 양쪽을 오고갈 수 있게 해주고, 강과 바다에서 만나 물건을 교환할 수 있게 해주는 배들도 있다. 이들이 담당하는 비공식적인 국경 교류가 공식적인 교류보다 많다는 점은 단동사람에게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리고 단동 국경지역에는 국경을 넘지 않아도 교류가 가능한 통신 수단이 있다. 그것도 국경을 사이에 두고 통화를 하지만 국제 전화비를 내지 않는다. 중국 요금을 내는 국내 통화 방식으로 국경 너머 신의주에서도 단동에 있는 사람들과 통화가 가능하다. 이 가운데 한글 문자 메시지가 가능한 한국산 핸드폰들은 북한사람이 선호하는 기종이다. 주로 이러한 방식에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진 특정 핸드폰 번호의 통화 불통 문제가 2010년 전후에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하지만, 2011년 단동의 일명 조선거리에는 “조선에서 사용가능한 휴대전화 판매합니다”라는 문구를 단 핸드폰 상점들이 여전히 눈에 띄었다.  

 

단동사람은 2001년 전후부터 핸드폰 사용이 활성화되었다고 기억한다. 단동에서 실질적으로 대북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북한에서 사용되고 있는 중국 핸드폰의 연락처 확보는 필수이다. 이러한 통신 수단의 존재는 한국사람이 포함된 한국어를 공유하는 네 집단이 국경 넘나들기 행위에 직간접적으로 동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사람이 실질적인 사장인 단동의 무역회사에는 북한화교가 대북사업의 일부분을 담당하고 있지만, 조선족이 연결한 북한사람과 국경 무역을 추진하고 있다. 실례로 이 회사의 직원인 단동에 거주하는 젊은 한국인 부부는 조선족의 주선으로 도강증을 가지고 국경을 넘어온 북한사람과 안면이 있었다. 그 부부의 아기가 태어난 저녁(2007), 조선족의 부탁으로 같은 회사의 동료인 북한화교가 한국인 부부의 집에 신의주에서 잡은 살아있는 가물치를 배달하였다. 이 생선은 신의주에 있는 북한사람이 압록강의 배편으로 조선족에게 보낸 것이었다. 출산 선물에는 국경 넘나들기와 관련된 네 집단 사이의 교류가 녹아있다. 이들은 직간접적으로 국경 무역 경제 활동을 매개로 연결되어 있다. 이 일화에는 도강증을 통한 단동에서의 만남, 살아 있는 생선을 운반할 수 있는 압록강의 배, 국경 무역을 위한 일상적인 핸드폰 통화, 네 집단의 연결고리 등이 함축되어 있다.

 

비공식적인 교류에 압록강 배와 핸드폰만 이용되는 것이 아니다. 압록강이라는 큰 하천이 단동시내와 신의주를 가로지르고 있지만, 단동사람과 신의주 사람은 국경을 사이에 두고 육성(肉聲) 대화와 교류를 할 수 있는 곳도 산재해 있다. 압록강의 지리적 특성과 북·중 국경 조약의 특수성 때문에, 도심의 외곽으로 나가면 압록강의 본류가 아닌 실개천(지류)이 흐르는 지역을 사람들은 만남과 교류에 활용한다.

 

이와 같은 예들은 비자와 여권만으로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통관하는 사람들의 왕래를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통계에 잡히지 않는 국경 넘나들기 행위에는 네 집단의 상호작용과 만남의 역사가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단동 국경지역은 북·중 국경이라는 경계를 넘나들며 사람들이 소통하고, 경제활동이 전개되는 하나의 장이다. 사람이 오고가는 북·중 국경 문화의 중심에는 네 집단이 있다. , 네 집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다양한 북·중 국경 넘나들기 형태들을 고려한다면, 북·중 국경지역에서 펼쳐지는 교류를 중국의 조선족과 북한화교 대() 북한의 북한사람의 인적 교류만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재고되어야 한다.

 

일명 조선(북한)거리의 핸드폰 상점(2011)

북·중 국경: 실개천이 흐르는 곳(2007)

 

_ 삶의 방식: 삼국의 연결고리 역할

 

단동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이유는 단동이 삼국의 연결고리가 되는 장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네 집단은 중국에서의 생활, 즉 중국사람들과의 관계맺음만을 하기 위해서 단동으로 이주했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단동의 국경지역의 사람들 가운데 네 집단 사이의 관계맺음에 대한 추구가 단동으로 이주하게 된 주된 요인이다.

 

한국사람은 중국 생활을 하기 위해서 단동을 찾는 것은 아니다. 중국 생활만 생각하고 왔던 그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눈은 압록강 너머 기회의 땅 북한으로 향하곤 한다. 단동에서 그들은 북한 물건과 사람들을 소개해 줄 수 있는 인맥인 북한화교와 조선족을 사귀게 된다. 나아가 그들은 북한사람과 만나 사업 논의를 할 수 있는 방식들을 알게 된다. 이러한 만남의 과정에서 단동의 국경 무역에서 북한과 한국을 연결하는 남·북 무역 혹은 삼국 무역 방식을 실전에서 배우게 된다.

 

북한화교도 단순히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북한에서 단동으로 오는 것은 아니다. 단동이 그들에게 북한과의 연결고리를 이용해서 부를 획득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단동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그들 중 일부는 본격적으로 북한사람과 한국사람을 상대로 사업 동반자로서의 관계를 구축한다. 그들은 남·북 무역과 삼국 무역 거래의 중간자 역할 혹은 북한 진출의 안내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국 체류 경험이 있는 타 지역의 조선족은 흔히 동북 3성 가운데 한국 날씨와 가장 비슷하다는 이유로 단동 이주를 이야기한다. 그들은 중국에서 중국 국민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의 직업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북한 혹은 한국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사람의 단동 거주의 주된 이유도 북한의 사업 파트너를 필요로 하는 나머지 세 집단과의 만남과 교류에 있다. 북한사람은 세 집단의 너머에는 한국이 있음을 알고 있다. 이처럼 네 집단은 중국 국경지역이라는 기반을 통해서 북한과 한국의 연결고리를 만들어감으로써 단동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김정일 사망 당시, 조문하는

단동의 북한 노동자들(2011)

김정일 사망 당시, 조화를 전달하는

북한화교와 조선족(2011)

 

 

 


1) 이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 1장과 2장의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2장은 소제목 “만남의 역사(단동의 토박이 조선족, 1990년대부터 모여든 네 집단), “삶의 조건과 양상(거주 규모와 방식, 국경을 활용한 생활 양상), “네 집단의 경제적 위치”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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