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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28/2012.12] 논단 _ 누가 천하의 주인이 되는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17 조회수 85

[Vol.28 /2012.12] 논단 _ 누가 천하의 주인이 되는가?

누가 천하의 주인이 되는가?

안치영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

 

()나라 말 농민 봉기를 일으킨 진승(陳勝)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라는 청사에 길이 남는 명언을 남겼다. 1000년쯤 후 고려의 노비 만적의 봉기에서도 그것을 ‘표절’하였으니 그 영향을 짐작할 만하다.

 

치세(治世)에는 될 놈들 중에서 계승을 하니 씨가 따로 없다고 할 수 없으나 난세에는 천하의 질서가 요동치니 누군들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없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는 다행(?)히도 왕조의 교체가 적어 일반화하기 어려우나 수많은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한 중국에서는 난세에 천하를 얻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개국황제가 많아 유형화가 가능하다. 외부의 유목민족이 들어가 천하의 주인이 된 경우를 제하면 개국황제의 출신은 크게 봉건세족출신과 깡패출신 등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수 문제 양견이나 당 태조 이연 또는 송 태조 조광윤은 모두 세족 출신이다. 속된 말로 하면 떵떵거리며 잘 살고 큰 세력을 가졌던 자들이다. 이들은 소위 잘난 집안 출신이니 씨가 달랐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뿐이었다면 진승의 구호는 천한 불평분자들의 외침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의 개국황제에는 이들 명족 외에도 요즘 식으로 말하면 깡패나 양아치 출신에 지나지 않는 한 고조 유방이나 명 태조 주원장이 있었다. 유방이나 주원장이 있었기에 진승의 외침은 아랫것들의 바람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으며, 진승의 반란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진나라를 유방이 이어받았으니 진승의 외침은 참으로 명언이자 선견지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그래서 사마천이 『사기』에서 겨우 6개월 간의 농민반란의 수괴에 지나지 않았던 진승을 왕의 반열로 올려 세가(世家)로 기록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니 유방이나 주원장도 씨가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날조된 출생의 설화나 진명천자(眞命天子)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것이다. 요즘 중국에서 잘 나가는 역사학자 이중톈(易中天)은 먹물들은 재는 것이 많아 결정적인 선택을 할 수 없지만 이들 양아치들은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올 인을 할 수 있어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고 했다.1) 마르크스의 말대로 이들만이 진정으로 “잃을 것은 억압의 사슬밖에 없는 존재”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거저거 따지면서 비루하게 사느니 모든 것을 걸고 세게 한 방할 수 있는 심리적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는데 가진 것이 많은 먹물(문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라면 세상은 혼돈천지의 양아치 세상이 되었거나 그들이 결코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방의 능력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을 걸고 과감하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 버릴 수 있는 능력은 천하를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이지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과감한 결정을 해야 하지만 독불장군은 세상을 가질 수 없다. 세상을 가지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다. 우선 조직에는 모든 것을 걸고 희생하는 충신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영웅본색이나 대부에서 애잔하게 그려지는 깡패조직에 지나지 않는다. 천하를 얻기 위해서는 조직이 보편적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 보편적인 가치의 실현은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실은 명분과 더불어 구성원들의 이익의 균형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명분과 적당한 이익을 배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토사구팽이라고 할 수 있는 충신에 대한 배제가 필수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조직적 원리 구성과정은 조직의 형성과정에서 동시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조직의 발전과정에서 조직의 시간적 진화의 과정과 일치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한 과정을 잘 보여주는 것이 우리가 널리 읽은 <<삼국지>>의 유비의 사례이다. 삼국지에서 유비의 최초의 조직 형성은 의기투합 즉, 도원결의이다. 황족이라고는 하나 이미 퇴락하여 멍석이나 짜 근근하게 연명하고 있던 유비는 그럴 듯하게 그려지지만 맨땅에서 일어선 먼 조상 유방과 닮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유비가 일어날 수 있었던 밑천은 서당 훈장 출신 살인범 수배자 관우와 돼지 잡는 백정 장비와의 의기투합이었다. 어렵고 힘든, 가진 것 없었던 시기에 언제 어디서도 배신하지 않을 무조건적인 신뢰와 의리로 구성된 조직 형성이 핵심이었다. 이후 유비의 인품이나 뜻에 감읍하여 조자룡, 제갈량, 방통 등이 모여든다. 그것으로 보면 유비의 원래의 밑천은 강호조직이었지만 인의에 기초한 천하통일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위하여 새로운 세력이 모여들고 그러한 두 가지 조직의 결합에 의하여 드디어 천하를 삼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조상인 유방과는 달리 유비의 운명은 거기까지였다.

 

유비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한계는 기실 <<삼국지>>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제갈량과 관우의 갈등으로 묘사되는 두 세력 또는 서로 다른 조직 원리의 충돌이다. 그런데 그것은 불가피한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는 그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조정하는가 라고 할 수 있다. 제갈량과 관우의 갈등은 잘 해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갈등 자체가 아니라 유비의 태도에 있었다. 관우와 장비가 죽자 유비는 물불가리지 않고 무리한 출병을 감행한다. 그리고 그 싸움의 패전이 아니 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시작한 것이 촉으로서는 더 이상 기회를 가질 수 없게 한 결정적인 패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패전 자체보다도 유비의 태도였다. 유비는 형제의 복수를 위해 제갈량의 반대를 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촉의 현실적 상황이나 천하 형세를 고려하지 않았다. 강호의 의리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인의로 명성을 얻은 유비의 평판에 부합하는지는 몰라도 천하의 주인다운 풍모는 아니었던 것이다. 손권이 관우의 머리를 위로 보내고 조조가 그를 후하게 장례지내는 것도 모두 유비의 예봉을 막고자 했음이니 유비가 오를 공격한 것은 천하의 예측과 믿음에 부응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천하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오왕 부차나 월왕 구천과 같이 인내하고 와신상담해야 했지만 유비는 자신의 분을 이기지 못했고 의리에 따를 것이라는 천하의 예측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비하여 유방과 주원장은 냉철하고 냉혹하기까지 했다. 천하를 얻은 후에 유방은 한신과 영포, 팽월과 같은 개국공신을 가차 없이 죽인다. 주원장도 호유용이나 이선장과 같은 개국공신을 죽인다. 참으로 냉혈한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천하는 나누어가질 수 없는 것이고 천자와 세력을 다툴 수 있는 강한 세력이 존재한다면 오래지 않아 다시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냉혹함으로 발현된 천하를 독점하려는 사적 욕심이 공적인 이익에 부합한다고도 한다. 그런데 유비는 그러한 냉혹함은 고사하고 사사로운 정리를 못 이겨 대사를 어그러트렸으니 요즘 식으로 표현하며 패거리의 두목이었을는지는 몰라도 훌륭한 정치가는 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지도자는 전통적인 지도자와는 그 구성 방법이나 원리가 다르다. 그러나 과감한 결단, 의기투합할 수 있는 핵심집단과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조직의 구축과 핵심집단과 그러한 조직의 유기적이고 합리적 결합이 필수적임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새로운 것도 그렇게 새로울 것이 없고 낡은 것도 그렇게 낡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일 것이다. 외부에서의 평론과 비평은 쉽지만 실제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은 그렇지 않다. 어쩌면 먹물에게는 평론과 비평을 통하여 그것이 잘 작동되도록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역할인지도 모르겠다.

 

 


1) 이중톈(박주은 역), <<품인록>>, 에버리치올딩스, 2006, p.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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