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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27/2012.11] 논단 _ 역사는 미래다: 역사바로잡기와중국의 개혁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17 조회수 68

[Vol.27 /2012.11] 논단 _ 역사는 미래다: 역사바로잡기와 중국의 개혁

안치영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

 

역사가 문제다. 조어도(센카쿠열도)나 독도 문제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 우리와 일본의 갈등 등 국제적 문제와 관련하여서 뿐만 아니라 12월의 대통령선거와 관련된 국내정치 문제에서도 역사 문제가 주요한 의제가 되고 있다. 누구는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지만 과거에 대한 기록인 역사가 현실의 국제관계 뿐만 아니라 미래의 권력을 구성하는 문제와 관련하여서도 주요한 의제가 되는 것은 역사가 현재의 원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사를 보는 관점이 현재와 미래의 행위준칙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찍이 춘추시대 제나라의 권신 최서(崔抒)가 여자문제로 주군인 제나라 장공(莊公)을 시해하자 역사를 기록하는 태사가 사실대로 기록하여 살해당하였지만, 태사의 동생이 마찬가지로 기록하여 또 살해되고, 또 다른 동생이 또 다시 사실대로 기록하여 최서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역사의 엄중성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꿈적 않는 직필의 전통을 세웠으며 사마천(司馬遷)이 궁형을 받는 굴욕을 이기고 <<사기(史記)>>를 남기게 했던 것이다. 그러한 역사서술의 전통은 역사평가와 기술이 정통성의 준거가 되도록 했다. 그것은 곧 누가 역사기술의 권한을 갖는가가 누가 정통성을 갖는가를 결정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역으로 스스로 정통으로 자부하는 현실의 권력이 역사기술의 권한을 독점하도록 하는 관찬(官撰) 역사기술의 전통을 만들었다. 이는 현재까지 이어져 현대 중국에 대한 역사 해석권은 중국공산당이 독점하고 있으며, 심지어 현급 이상의 지방지조차 정부기관이 편찬하고 사적으로 편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권력이 자의적으로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전통시대에는 이후 자신의 역사기록의 자료가 되는 사초를 왕조차도 보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오직 폭군만이 사초를 본 것이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전대의 역사는 후대의 왕조에서 편찬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역사평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다만 역사를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면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기술하더라도 결국은 영원히 많은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절대 권력자였던 마오쩌둥조차 후대에 자신의 공과를 7:3으로 평가받는다면 만족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공산당은 역사평가와 기술의 권한을 독점하고 있지만 동시에 반복적으로 역사평가를 새롭게 해왔다. 1945년에 있었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와 1981년의 “건국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와 같은 당의 결정이나 반복적으로 재편찬되는 중국공산당의 역사에 대한 편찬이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들이 걸어온 과정에 대한 권위적인 평가이자 반성인 동시에 ‘역사바로잡기’이기도 했다. 자신이 역사평가에 대한 현재의 유일한 권위적인 결정자이지만 영원히 그러할 수는 없기 때문에 오류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통하여 오류를 바로잡고 현재를 재구성함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대비하는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가장 극적인 것이 중국의 개혁개방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현재의 강대한 중국을 만든 개혁개방은 알고 있지만 실은 그러한 개혁개방으로의 전환이 어떻게 가능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잘 모르고 있다. 기껏해야 덩샤오핑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개혁개방을 추진하였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개혁개방은 기존의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근본적인 전환이었다. 그러한 전환은 단순하게 기존과는 다른 정책 제시를 통해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평반(平反)’이라고 부르는 역사바로잡기가 전제되었다. 그리고 그 같은 역사바로잡기가 없었다면 개혁개방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거나 최소한 공산당이 이끄는 개혁개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호별영농제와 시장의 점진적인 확대를 통한 자본주의적 기제의 도입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런데 개혁 이전에는 호별 영농을 한 농민들과 소상인들까지 모두 개인주의자와 자본가라는 ‘꼬리표 부치기’에 의하여 사회적으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한 사회적 불가촉민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호별영농제의 허용과 시장기제의 도입은 허공의 메아리일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정책은 그와 더불어 역사바로잡기를 통하여 지주, 부농, 자본가 등의 꼬리표를 제거하고 그들에 대한 인민화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었다. 개방을 위해서는 해외화교와 홍콩, 타이완과의 협력을 필수적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홍콩이나 타이완 또는 해외에 친지가 있는 사람들을 더 이상 잠재적 간첩 용의자로 차별하지 않아야 했으며 그들에 대하여도 일반 인민들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평반’을 통한 권리제한이 폐지되었다. 우리식으로 하면 월북자 또는 북한의 탈북자나 월남자 가족들에 대한 연좌제 등 각종 제약이 폐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역사바로잡기는 개혁이나 개방과 직접 관련된 영역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화대혁명을 중심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이후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혁명과정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중국공산당의 실천의 역사 전반을 실사구시를 기치로 재평가하고 바로잡은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역사적 평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와 수반하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조치들이 뒤따랐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복권과 배상이나 보상과 더불어 업무능력이 있는 경우에는 현직으로의 복귀가 이루어졌으며, 죽은 자에 대하여는 공산당과 국가의 최고지도자들이 참석하여 장엄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그것은 억울한 희생자에 대한 해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는 그러한 비극과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의이기도 했다. 인간 사회에서 오류와 잘못은 불가피한 것이고 또 반복하여 발생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한 과오를 바로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이 덩샤오핑의 진정한 위대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바로잡기를 통하여 마오쩌둥이나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힌 사인방(四人幇)에 의하여 이루어진 과오에 대한 재평가만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도적으로 수행한 일에 대한 반성과 재평가를 한 것이 그것이다. 1957년의 반우파투쟁에 대한 재평가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반우파투쟁은 1957년 당시 중국공산당의 총서기였던 덩샤오핑에게 주요한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 반우파투쟁에 대한 역사바로잡기는 바로 최고지도자가 자신의 과오에 대하여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든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특히 권력자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개인의 과오는 자신과 주변에만 영향을 미치지만 권력자의 과오는 크게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규정한다. 과오는 피할 수 없는 것이며 권력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문제는 과오가 아니라 과오에 대한 인정과 반성을 통한 그것의 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문제나 국가적인 문제의 경우 그것을 개인의 판단과 양지(良志)에 기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기제를 통한 해결을 모색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근대시기 민주제도의 도입은 과오에 대한 인정과 반성을 통한 오류 교정의 기제를 집단적 결정으로 제도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집단적 이지(理智)가 절대선은 아니다. 근대시기 파시즘이나 전체주의는 바로 민주와 집단의 이름으로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반성을 거부하고 오류에 대한 부인이 과거 독일에서 나찌즘이 등장하게 했으며 현재 일본에서 우익이 발호하게 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중국의 개혁은 중국공산당과 중국 자신의 실천과 역사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역사에 대한 반성과 올바른 평가가 반동이냐 발전이냐를 선택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라는 것을 말한다.

 

필자는 이전의 논단에서 당태종에게는 귀에 거슬리는 간언을 하는 위징(魏徵)이라는 충신이 있었고 또 당태종이 그들 용납했기 때문에 위대한 황제가 될 수 있었다고 하였다.1) 전제시대 절대권을 가진 황제가 남의 말을 듣는 능력은 민주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지도자의 자질이라면, 집단적 이성에 의한 역사에 대한 겸허한 반성은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전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는 과거에 대한 평가일 뿐만 아니라 어떠한 미래를 열어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창()이라고 할 수 있다.

 

 


1) 중국관행웹진 vol. 7(20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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