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알림
Information / News

열린게시판

제목 [Vol.26 /2012.10] 논단 _ 시진핑(習近平) 언론 ‘실종’ 소동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17 조회수 65

[Vol.26 /2012.10] 논단 _ 시진핑(習近平) 언론실종소동

안치영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

 

중국의 차기지도자로 확실시되는 시진핑이 9 2일부터 14일까지 2주 가까이 언론에서 사라졌다. 더구나 9 5일에는 예정되어 있던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과의 회담과 리셴룽 싱가폴 총리와의 회담을 취소하고 9 10일에는 덴마크 슈미터 총리와의 회담을 취소함으로써 시진핑의 언론 ‘실종’은 온갖 추측을 낳았다. 운동 중의 가벼운 부상설에서부터 보시라이(薄熙來) 사건 처리에 대한 불만을 품은 군부인사의 공격에 의한 교통사고설, 심장병설, 18차 당 대회의 인사 안배에 대한 불만으로 인한 태업설과 정치투쟁설 등이 그것이다.

 

9 15일 시진핑이 중국농업대학에서 열린 「전국과학보급 활동」에 참석하여 ‘실종’ 상태를 끝냄으로써 그러한 추측 중 상당수는 그야말로 억측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시진핑 실종의 원인은 여전히 미스터리이다. 그것은 지도자의 신변과 관련된 문제를 비밀로 하는 중국정치의 특성과 관련되지만 언론 ‘부재’에 대한 읽기와도 관련된다.

 

_ 언론 보도에서 ‘부재’ 읽기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코드네임 콘돌』을 본 사람들은 비밀은 대부분이 언론에 보도된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다만 횡간에서 그것을 읽어 내느냐가 문제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정보기관의 산하기관으로 언론분석을 하는 레드포드는 중동의 모 국가에서 쿠데타가 발생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올렸다가 동료들은 모두 살해당하고 자신도 쫓기는 신세가 된다. 자신의 상급기관에서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는 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언론보도를 통해 읽어내었기 때문이다.

 

언론에서 비밀을 읽어내는 것은 영화상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중국에서 문혁 전 정치국후보위원과 중앙선전부장을 지낸 루딩이(陸定一)의 부인 옌웨이빙(嚴慰)도 문혁시기 베이징의 친청(秦城) 감옥에 감금이 되어 있었다. 옌웨이빙은 오랫동안 남편과 더불어 선전계통에서 일을 했었다. 그런데 옌웨이빙은 1971년 린뺘오(林彪) 사건이 발생하고 10여 일이 지났을 때 감옥에서 큰소리로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조사반에서 이상하게 생각하여 묻자 당에서 큰 일이 발생했다고 대답했다. 당시 린뺘오 사건은 비밀로 붙여져 있어 당의 최고층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감옥에 갇힌 옌웨이빙이 그 사실을 알리 만무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당의 선전업무에 종사했던 옌웨이빙은 “당의 최대의 기밀이 모두 신문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문혁시기 『인민일보』에는 “마오() 주석을 수령으로 하고, ()부주석을 조수로 하는 당 중앙”이라는 표현이 관용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옌웨이빙은 당연히 있어야 할 “린 부주석”이 어느 날부터 빠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감옥의 스피커에서 「삼대규율과 여덟 가지 주의할 점(三大紀律八項注意)」 노래를 계속 틀자 당내에 규율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 출현했는데 그것이 린뺘오라는 것을 추론했던 것이다.

 

이것은 중국에서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없다면 다시 말해서 부재로부터 중대한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1982년 이후 중국은 집단지도체제를 형성하였으며 최고지도부는 주기적으로 대외적인 활동을 수행한다. 그런데 그러한 활동주기에 이상이 발생한다면 무엇인가 중대한 일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더구나 시진핑과 같이 권력승계가 임박한 민감한 시기에 외빈과의 중대한 약속을 깨고 사라진 것은 더욱 많은 억측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덩샤오핑(鄧小平), 천윈(陳雲), 리펑(李鵬), 후진타오(胡錦濤), 황쥐(黃菊) 등 중국의 최고지도자들이 일정기간 언론에서 사라진 적이 있으며 그 때마다 다양한 억측이 나돌았다.

 

_ 후진타오(胡錦濤) 1개월 ‘실종’

 

별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후진타오도 1998 1 1달간 언론에서 사라진 적이 있다. 그때는 필자가 베이징에서 연수와 조사를 하고 있는 기간이라 신문과 중국의 종합뉴스인 CCTV 7시 뉴스를 보려고 노력했었다. 1월 중순인지 말쯤인지 후진타오가 보이지 않는 것을 불현듯 발견하였다. 다시 찾아보니 1997 12 22일 『인민일보』에 등장한 후 한 달 넘게 사라졌다가 1998 2 10에야 다시 출현하였다. 그래서 당시 대학원에 다니던 중국 친구들에게 물어보았다. 처음에는 외국인이라 대답을 꺼리던 친구들이 네 가지 설이 있다고 했다. 시간이 흘러 모두 기억은 나지 않지만, 건강 이상설, 정치투쟁설, 업무상 필요 등이었다.

 

티베트 서기를 역임했던 후진타오의 고산병으로 인한 건강 문제는 과거에는 많이 인구에 회자되던 문제였다. 또한 장쩌민(江澤民)과는 다른 계통 출신으로 덩샤오핑과 원로들이 지명한 차기 후진타오에 대하여 장쩌민 계통에서 못마땅해 한다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후진타오의 ‘실종’은 그렇게 전문적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의 중국인의 정치적 민감성만 갖는다면 감지할 수 있는 중대한 ‘부재’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재에 대한 몇 가지 시나리오가 이미 내부적으로는 광범하게 유통되고 있었던 것이다.

 

후진타오의 출현 이후 후진타오가 1998 3월 새로 구성되는 9대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준비 작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대외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다고 알려졌다. 사실에 대한 확인은 오랜 시간 이후 『후진타오 연보』가 출판된다면 알 수 있겠지만 현재로는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다. 사실 중국에서는 지도자들이 중대한 일을 준비하기 위해 공개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여기에서 ‘부재’ 읽기가 복잡성을 가지게 된다.

 

_ 시진핑 ‘실종’의 원인?

 

시진핑은 후진타오의 경우와 달리 중대한 외사 활동을 갑자기 중단한 돌발 상황이었다. 후진타오의 경우 부재가 좀 더 장기화 되었다면 주목을 받았겠지만, 중국 내부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시진핑의 경우는 중대한 약속을 깬 것이었기 때문에 짧은 ‘실종’에도 불구하고 많은 억측이 나돌았다. 그러면 시진핑 ‘실종’ 원인은 무엇일까?

 

중대한 정치적 문제와는 무관하다는 것이 시진핑의 ‘실종’ 기간 중 ‘보도’되었다. 9 10일 중앙당교의 『학습시보(學習時報)』에 실린 「시진핑의 9 1일 중앙당교 추계 입학식 연설」 전문이 그것이다. 『학습시보』에 시진핑의 연설을 실은 것은 시진핑의 ‘실종’이 정치적 원인과는 무관하다는 중공당국의 의도적인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외교부 홍뢰이(洪磊) 대변인이 시진핑 ‘실종’에 대한 외신의 질문에 “진지한 질문을 하라”고 면박을 주었지만, 시진핑의 ‘실종’에 대한 외신의 추측에 중공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중앙당교의 신문에 시진핑의 연설을 실음으로써 한편으로는 평상적인 기조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정치적 문제가 없음을 밝히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시진핑이 사라졌을까? 추정할 수 있는 결론은 사소한 건강상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중대한 건강상의 문제가 있다면 후계자로서 안정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재고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사소한 문제인데 왜 중대한 외빈과의 약속을 어기면서 억측을 초래하게 하였을까? 사소한 문제인데 행동을 부자연스럽게 하는 건강상의 문제가 그것이 아닐까? 보도되는 바와 같이 수영장에서 넘어졌다거나 허리가 삐었다거나 한다면 행동이 부자연스러워 외빈을 만나는 것이 불편했을 것이다. 역으로 추론하면 시진핑으로 예정되어 있는 승계가 18차 전당대회에서 이루어진다면 시진핑의 ‘실종’은 행동이 불편한 사소한 건강상의 문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0 comments
작성자 패스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