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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21 /2012.05] 기획 _ The story of SUN(孫)’s Family: 인천화교손덕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12)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16 조회수 124


[Vol.21 /2012.05] 기획 _ The story of SUN()’s Family: 인천화교 손덕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12)

(12)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난 아니에요!

구술: 손덕준 _ 인천 중화루 사장 

채록: 송승석 _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

 

연재를 시작하며

인천대학교 HK 중국관행연구사업단은 화교연구의 일환으로 화교구술채록을 진행하고 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인천화교의 대표적 인물 손덕준(孫德俊)과 그의 가족이다. 어느 일개인의 가족사가 화교 전체의 기억과 역사를 온전히 담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화교 개인의 인생 궤적을 꼼꼼히 되짚어보는 것은 삶의 구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본 연재에서는 구술채록의 일부를 발췌해서 싣도록 하겠다.

 

*. 본 연재는 기본적으로 구술기록의 일부를 발췌해서 싣되, 지나치게 문맥이 어색한 부분은 임의로 수정을 가했다.

*. 문중에 말줄임표()가 있는 부분은 공개하기에 적절치 않은 부분이나 반복되는 내용으로, 구술대상자와 상의 하에 생략한 부분이다. 또한 지면의 한계로 인해 기본 내용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채록자 임의로 생략한 부분도 있다.

*. (???) 부분은 성명이나 상호명으로, 구술자가 한자표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추후에 조사를 해서 보충하도록 하겠다.

 

송승석(이하 송): 지금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죠? 한국에는 자주 나와요?

 

손만홍: 일 년에 두 번 정도 나와요.

 

: 그래도 자주 나오는 편이네요?

 

손만홍: 안 오면 엄마, 아빠가 안 나온다고 난리예요.

 

: 미국 생활은 어때요? 생활하기 편해요?

 

손만홍: 저는 편한 것 같아요. 제가 지금 있는 곳이 조지아주에 있는 사바나(Savannah)라고 하는 곳인데 바닷가에요. 너무 한적하고 그래서 좋아요.

 

: 처음엔 뉴욕에도 있었죠?

 

손만홍: 처음 일 년은 뉴욕에 있었어요. 거기에서 포트폴리오 만들었어요. 제가 전공을 바꾸는 바람에 포트폴리오는 새로 만들어야 했어요. 제가 그림을 그려둔 게 없어서.

 

 

 

: 뉴욕에서의 생활은?

 

손만홍: 힘들었어요. 전에 놀러갔을 때는 그냥 좋기만 했는데, 막상 생활하려니까 전혀 딴판인 거예요. 놀러갔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막상 거기 살다보니까 그렇게 즐겁지도 않고 심신도 지치고 너무 힘들었어요.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봐도 특별한 감각도 없고. 도시생활이라서 더 그런 것 같아요. 근데 지금 있는 곳은 컨트리사이드(countryside)라서 그런지 훨씬 편한 것 같아요.

 

: 그래도 미국은 모든 면에서 여기보다 나을 듯도 싶은데?

 

손만홍: 근데 오히려 필요한 물건 같은 건 한국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옛날엔 미국 가면 이거 사와라, 저거 사와라 하잖아요? 근데 지금은 한국에 다 있어요. 먹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거 한국엔 다 있어요.

 

: 지금 다니는 대학 이름이 뭐예요?

 

손만홍: SCAD. Savannah College of Art and Design.

 

: 전공을 바꿨다고 했죠? 어떻게 바꾸게 된 거예요?

 

손만홍: 원래 한국에선 패션디자인을 전공했었는데, 지금은 순수미술 페인팅을 전공하고 있어요. 전공을 순수미술 쪽으로 바꿨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이해를 못해요. 친구들도 이해가 안 된데요. 보통은 순수미술 하는 애들이 디자인 쪽으로 빠지잖아요? 근데 나 같은 경우는 그 반대니까.

 

: 미국에 갈 결심은 언제 했어요?

 

손만홍: 제가 이대에서 졸업 작품 준비할 때인데, 작업할 공간이 학교 안에는 부족한 거예요. 그래서 친구들하고 홍대 쪽에 작업실을 하나 구했어요. 마음 맞는 친구 네댓 명이서. 작업실 한 달 쓰는데 월세가 20만원인가 했어요. 근데 졸작 준비하다 보니까 그걸 그냥 작품전만 하고 버리는 게 너무 아까운 거예요. 그래서 공모전에 한 번 출품하자 싶었죠. 그때, 신진 디자인 공모전으로는 현대백화점 C concept도 있었고 동대문 같은 데에도 있었어요. 친구 다섯 명이 모여서 아이디어도 같이 내고 해서 출품을 했는데 우리가 대상을 받은 거예요. 상금도 오백만 원이나 되었어요. 우린 너무 좋았죠. ‘이게 시작이다.’ 싶었어요. 그래서 내친 김에 같이 사업을 시작하기로 하고 동대문에 매장을 냈어요. 공모전 상금으로 부스 하나를 얻은 거죠. 근데 세상은, 사회는 너무 다르더라고요. 다들 패션디자인만 전공했으니까 회계를 아는 애도 없고 마케팅도 모르고, 광고 쪽도 모르고…. 모르는 게 너무 많은 거예요.

 

: 동대문 어디에요?

 

손만홍: 두타 건너편에 라모도 라고 있어요. 지금은 망했어요. 그 바람에 우리도 완전 억울하게 쫓겨난 거죠. 저희 옷만 달랑 들고.

 

: 결국 망한 거네?

 

손만홍: 우리 옷이 이상해서 망한 게 아니라 그 건물이 망해서 그렇게 된 거예요. 너무 운이 안 좋았던 거예요. 옷은 다 만들어 놓았는데 막상 팔 데가 없는 거 있죠? 워낙이 그 건물이 장사가 안 되었으니까. 유동인구가 거의 없었어요. 근데 학교에 있는 후배가 “저희가 이번에 축제 하는데 그 옷 파실래요?” 그렇게 제의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 고맙다.” 그래가지고 다 들고 학교에 가서 팔았어요.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우리 옷은 괜찮았던 거예요. 단지 팔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그런데다가 우리는 옷만 잘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패션디자이너이니까. 사업은 몰랐던 거죠. 수선시장가서 인테리어도 해야 되고, 공장가서 공장이랑 싸워야 되고, 천 떼러 가야 되고…. 정말 저희가 상상하지 못했던 게 너무 많은 거예요. 결국은 이건 아니다, 큰일 나겠다 싶었던 거죠. 그렇게 된 거예요.

 

: 그게 그럼 스물셋, 스물넷일 때?

 

손만홍: . 그렇게 1년을 꾸역꾸역하다가 나중에 누가 유학을 간다, 취직을 한다 해서 한 명씩 빠지기 시작하다가 결국엔 다 깨지게 된 거예요.

 

: 마음 맞던 친구들이 뿔뿔이 흩어진 거네?

 

손만홍: C concept에서도 우리한테 매장을 준다고 했었는데…. 아무튼 다들 패션디자인만 알았지, 다른 건 너무 몰라서…. 아마 다른 전공들끼리 모였으면 잘했을 텐데. 그때 공부가 더 필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 매장 한다고 할 때, 아빠는 재정적으로 좀 뒷받침을 해주셨나? 아니, 하라고는 하셨어요?

 

손만홍: 아빠는 좋아하신 것 같은데 워낙이 적극적으로 표현을 하시는 스타일이 아니시니까. 엄마는 너무 좋아하셨어요. 엄마는 잘해봐라 했어요. 처음 시작할 때 상금으로 탄 500만 원이 있었잖아요? 밑천이 있었던 거죠. 그걸로 시작하면 된다 싶었죠. 거기에다 엄마가 100만 원 보태줬고. 근데 엄마는 알고 있었대요. 우리가 다 말아먹을 거라는 걸. 그냥 땡 칠거라고 생각했대요. 엄마는 돈 보태줄 때부터 이건 본전이면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했대요. 나중에 엄마가 좋은 경험했다고 생각하라고 그러시더라고요.

 

: 내가 볼 때, 성격도 활달하고 해서 그런 쪽으로 계속 나갔으면 잘 했을 것 같은데?

 

손만홍: 그게 좀…. 우린 뭘 해도 외국인이란 신분의 제약이 있어요. 제가 원래 공모전 신청할 때도 제 이름으로 내고 싶었지만, 외국인 신분이기 때문에 안돼요.

 

: 그래요? 아니, 공모전에도?

 

손만홍: 공모전 지원 자격에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라고 되어 있어요. 전 그 ‘누구나’에 해당이 안 되는 거예요. 오히려 그 딱 한 줄이 제 발목을 잡는 거죠. 지원서 받는 사람이 그러는 거예요. 외국인은 공모전 자격이 안 된다고.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난 상 안 받아도 된다. 그냥 지원해서 심사라도 받겠다.” 그래도 안 된대요.

 

: 그럼, 공모전에는 다른 사람 이름으로 냈어요?

 

손만홍: . 어떻게든 저 스스로 해보려고 했었는데…. 그 외국인이란 신분 때문에….

 

: 그래서 미국으로 간 거예요? 그럼, 처음 미국 갈 때는 패션디자인을 더 공부하려고 갔겠네?

 

손만홍: 그랬죠. 특히, 전 마케팅 관련해서 공부를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가니까 마케팅 프로그램이 없는 거예요. 제가 원하는 거 공부하려면 유럽으로 가야 하는 거였어요. 그런데 저는 영어도 잘 못하는데 다른 외국어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게 정말 상상이 안 되는 거예요. 제대로 공부하려고 했으면 벨기에로 갔어야 하는데, 벨기에는 벨기에 말이 있을 거 아니에요? 거기는 네덜란드어하고 불어를 사용한다고 하는데. 전 정말 엄두가 안 났어요. 너무 두렵더라고요, 유럽은. 그래서 일단 뉴욕으로 가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러던 찰나에, 제가 다니던 이화여자대학교하고 NYU(뉴욕대학)가 자매결연이 되어 있었는데, NYU에서 여름 계절학기 수업으로 Art in New York이라는 교환프로그램을 개설했어요. 수업은 미국에서 하고 학점은 이대에서 받을 수 있는 그런 수업이었어요. 거기에 제가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예요. 거기서 Photography 수업을 들었어요. 그때 너무 좋았어요. 45일 동안 미국에 있었는데 그때 너무 인상이 좋았어요. 그땐 정말 친구들이랑 갤러리며 미술관이며 정신없이 돌아다녔어요. 학교에서 슬라이더로만 봤던 사진들이랑 현대미술 같은 걸 직접 다 내 눈으로 본 거예요. 슬라이더로 보면 잘 와 닿지 않거든요. 근데 실제로 보니까 진짜 ‘아트란 대체 뭘까?’ 그런 원초적인 질문이 생각나더라고요.

 

: 내가 미술 쪽은 문외한이라서 자세히는 물을 수 없을 것 같고…. 순수미술 쪽으로 바꾸게 된 계기는 뭐예요?

 

손만홍: 그 다음에 또 계절학기로 Art in New York을 다시 들었어요. 그땐 정말 미국에 있는 현대미술하고 순수미술 다 본 것 같아요. 그때 서양미술 하시는 저희 교수님이 우리를 크리스토퍼라는 미국 교수님한테 데리고 가셨어요. landscape art 쪽에선 굉장히 유명하신 분이에요. 백남준 아시죠? 그 분이랑 친구예요. 아주 유명한 아티스트예요. 그 크리스토퍼 교수님이 2주 동안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며 다 보여줬어요. 정말 쉬지 않고,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그때 제가 그 교수님한테 전 이름이 누구누구고 화교라고 자기소개를 했어요. 그러니까 “어, 예전에 너 기사를 봤다. 네 이름이 기억난다. 그때 아주 인상이 깊었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옛날 대학 때 제가 어떤 외국잡지하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 잡지 이름이 뭐였더라? 타임지 비슷한 거였는데…. 암튼 그때 아빠가 인터뷰하라고 해서 한 거였는데, 그 기사를 그 교수님이 본 거였어요.

 

: 어떤 내용의 인터뷰였어요?

 

손만홍: 화교에 대해서 물어보는 인터뷰였어요. 그걸 보신 거예요. 너무 인상이 깊었다고.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전 패션디자인만 생각했지, 다른 분야의 미술은 거의 생각 안 하던 때였어요. 아트는 그냥 대단하다고만 생각했지 제 분야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그 교수님 때문에 점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런데 나중에 패션디자인 공부하러 뉴욕에 갔는데 막상 제가 공부하고 싶은 수업은 없는 거예요. 학교에 제가 원하는 프로그램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있으면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죠. ‘순수미술을 해야 되겠다. 지금 아니면 배울 기회가 없겠다.’ 그래서 포트폴리오 만들면서 순수미술 쪽으로 바꿨어요.

 

: 그럼, 앞으로도 계속 순수미술 쪽으로 할 거예요?

 

손만홍: 전 그러고 싶어요. 근데 돈도 벌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패션하고 순수미술, 두 가지 전공을 다 살릴 수 있는 그런 일을 하고 싶어요.

 

: 미국생활이 한국생활보다 편하다고 했잖아요?

 

손만홍: 저도 의외인데 사실 그랬어요.

 

: 그건 무엇보다 그곳에서 자기가 원하던 공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생활하는 데에도 활력이 생기는 거지. 근데 한국에는 부모님도 계시도 동생들도 있고, 또 여기가 고향이니까 가끔 향수병 같은 것도 있었을 텐데?

 

손만홍: 저한테도 homesick이 있었어요. 처음엔 아주 심했어요. 거기 사람들 얘기로는, 향수병은 3, 3, 3개월, 3년 단위로 주기적으로 온다고 해요. 저도 초창기 때는 아주 심했어요.

 

: 객지에서 혼자 생활한다는 게 그리 녹록치는 않지.

 

손만홍: 전 대학교 1학년 2학기 때부터 집 나와서 살았어요. 왜냐하면, 지하철로 인천에서 신촌까지 통학하는데 그게 장난이 아니에요. 특히, 우리처럼 미술 쪽 전공하는 학생들은 항상 짐이 많아요. 지하철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그래서 ‘아, 진짜 이거는 아니다!’ 싶었죠.

 

: 혼자 독립하려는 핑계는 아니고?

 

손만홍: 아니에요. 진짜 그랬어요. 암튼 학교 근처에 여성전용 기숙사에 방 한 칸짜리 얻어서 들어갔어요.

 

: 아빠는 순순히 허락하셨어요?

 

손만홍: 내가 나가겠다고 선언하니까 아빠는 서운해 하셨죠. 나갈 때, 아빠가 그랬어요. “네가 사는 곳은 네 집이 아니다. 집은 바로 여기다.” 그래서 우기다시피 해서 나왔어요. 그때부터 자취생활 하기 시작한 거예요

 

: 아마 아빠는 제일 큰딸이고 하니까 여러 가지로 애틋하고 이런 게 있었을 거야. 그래서 내보내고 싶지 않았을 것 같아. 그래도 집안의 장녀이고 하니까 아빠도 은근히 기대감 같은 게 있었을 것 같은데?

 

손만홍: 글쎄…. 별로 기대는 안 했던 것 같아요, 제 느낌엔. 제가 특별히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었고….

 

: 꼭 공부가 아니래도 큰딸이니까….

 

손만홍: 처음에 저희 아빠는 저보고 대학 안 가도 된다고 했어요. 굳이 가려면 중국에 있는 대학 가라고. 한국 대학은 가지 말라고. 제가 지금 생각해보면요. 제가 한국 남자 사귀어서 한국 사람하고 결혼 할까봐 그랬던 것 같아요. 근데 이대 합격했을 때는 정말 좋아하셨어요.

 

: 남학생이 없는 여대라서 좋아하셨나?

 

손만평: 그때 기억나요. 제가 인터넷으로 합격자 명단 확인했거든요. 합격했다고 하니까 아빠는 처음엔 안 믿으시는 거예요. 거짓말 말라고. 잘못 봤을 거라고. 명단에 나와있는 걸 직접 보고도 못 믿으시더라고요. 그러더니 약주 한 잔 드시고 오시더니 새벽 두 시에 할머니한테 전화해서는 애가 대학 붙었다고 얼마나 자랑을 하시던지….

 

: 아빠는 한국 남자친구 사귀는 거 싫어했어요?

 

손만홍: 처음엔 싫어하셨어요. 약주 드시고 오시면 맨날 하시는 말씀이 “한국남자 만나지 마라.”였어요. 거의 우리를 세뇌시키다시피 했어요.

 

손만평: 저도 남자친구 처음 데리고 왔을 때 분위기가 되게 안 좋았어요. 한국 남자란 이유로. 그래도 한 3년 넘게 사귀니까 이제는 좀 마음을 여신 것 같아요. 지금은 “오군, 오군”하고 부르는데 처음엔 정말 싸늘했어요. 처음에 제가 남자친구 데리고 왔는데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 거예요. 그냥 “아버지는 뭐 하시고?” 간단하게 그런 질문 몇 번 하고는 끝이에요. 한국남자라서 싫었던 거예요. 지금은 마음을 여셨지만….

 

손만홍: 원래 아빠는 가부장적인 생각이 강하신 분이세요. 그런데다가 한국남자에 대한 인상이 별로였는지, “한국남자 만나지 마라. 한국남자한테 내 딸 시집보내기 싫다.

 

: 그럼, 대학 4년 동안 남자친구 한 번도 안 사귀어 봤어요?

 

손만홍: 남자친구 없었어요. 정말 없었어요. 저는 정말 관심이 없었어요.

 

손만평: 그래도 대학 졸업할 때쯤엔 좀 있었잖아?

 

손만홍: 심지어는 얘(만평)가 그랬어요. 남자를 왜 그렇게 못 사귀느냐고. 혹시 쌍꺼풀 수술해서 남자 운이 없어진 거 아니냐고. 옛날 쌍꺼풀 하기 전에는 못생겼지만 그래도 그때는 남자친구가 주위에 많이 있었는데, 챙기는 사람이 있었는데 쌍꺼풀 한 순간부터 남자가 없다고. 얘가 막 놀리고 그랬어요. 자기는 쌍꺼풀 수술 안할 거라고 그러면서. 근데 진짜 그랬어요.

 

손만평: 사실 저도 쌍꺼풀 수술 했잖아요.

 

: 넌 쌍꺼풀 수술 왜 했어? 언니는 그렇게 놀렸으면서.

 

손만평: 그게 그렇더라고요. 많은 사람들한테 좋게 다가가려면 쌍꺼풀 수술 하는 게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밖에 없었어요. 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언젠가 한번은 미용실에 갔는데, 드라이 해주던 미용실 언니가 갑자기 울면서 뛰쳐나가는 거예요. 제 눈이 째려보는 것처럼 보였던 거예요. 이건 정말이에요. 그래서 생각했죠. ‘내가 본의 아니게 남한테 상처를 주는구나.’ 눈이 너무 매서우니까. 저는 웃는다고 웃는데 그게 남들 눈에는 항상 비웃는 것처럼 보였던 거예요. 안되겠다 싶었죠. 그래서 가장 유명한 강남 성형외과에서 했어요. 그랬더니 인상이 아주 부드러워지더라고요. 남자친구도 알아요. 수술 한 거. 내가 그래요. “오빠, 내가 쌍꺼풀 수술했으니까 오빠 남자친구 됐다. 아니면 그냥 좋은 여동생으로 끝났을 걸?” 오빠도 그랬을 것 같대요.

 

손만홍: 거기다가 우리 셋은 다 눈꺼풀이 눈을 찌르는 스타일이었어요. 눈도 조그맣고. 제가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엄마가 “너 쌍꺼풀 해야겠다.” 하시고는 병원에 데리고 가셨어요.

 

: 엄마는 쌍꺼풀 있잖아

 

손만홍: 엄마도 한 거예요. 거기에도 일화가 있어요. 엄마가 쌍꺼풀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상담도 받고 했는데, 하루는 아빠한테 물어봤나 봐요. 쌍꺼풀 하고 싶다고. 그러니까 아빠는 대번에 하기만 하라고, 그럼 당장 이혼이라고. 그러면서 막 싸우시는 거예요. 그런데 아빠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엄마가 과감하게 하고 오신 거예요. 눈에 붕대 붙이고. 아빠가 막 열이 받아가지고…. 근데 나중에 붕대 푸니까 점점 예뻐지셨어요. 붓기가 빠지니까. 엄마가 그래요. 아빠도 좋아하신다고. 전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했는데, 얘도 처음엔 싫어했어요. 자기는 절대 안 하겠대요. 근데 얘가 홍대 들어갔잖아요? 홍대엔 특이한 애들 많잖아요? 꾸미기 좋아하는 애들도 많고. 거기에 자극을 받았나 봐요. 얼마 있다가 했어요. 전 옷도 아주 튀게 입는 편이에요. 야광치마 같은 것도 입고. 아주 희귀하게 하고 다녔어요. 그럼, 제가 얘한테 물어요. “언니 어떠니? 괜찮아?” 이상하다고 말할 거 뻔히 알지만 남들 얘기를 듣고 싶은 거예요. 얘는 항상 그래요. “거지같아.” 근데 얘도 홍대 다니면서 2학년 쯤 되니까 슬슬 제 옷을 입기 시작하더라고요. 제 옷은 다 튀는 옷들이에요.

 

손만평: 그게 다 이유가 있어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있다가 대학이라고 들어갔는데, 학교에 워낙 튀는 애들이 많은 거예요. 그리고 그게 좋아 보이는 거예요. 이게 개성을 표현하는 거다 싶었던 거죠. 그래서 언니 옷을 하나둘씩 주워서 입고 학교 가면 반응이 너무 좋은 거예요. 홍대에서는 그게 그냥 평범한 옷인 거예요. 더 심한 애들도 많았으니까. 나중엔 그렇게 입는 게 아주 자연스러워졌어요. 오히려 그렇게 안하면 어울릴 수 없는 분위기, 그런 게 있었어요.

 

손만홍: 제가 하루는 신촌에서 얘를 봤는데, 처음엔 제 동생인지 몰랐어요. 집에 가려고 버스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저 멀리서 “지에지에(姐姐)!”하고 부르는 거예요. 제 바지랑 모자랑 코디해가지고 나왔는데…. 정말 놀랐어요. 맨날 나보고는 뭐라고 했으면서, 자기는 뒤에서 몰래 몰래 입고 다니고….

 

손만평: 어쩔 수 없네요. 지금 이 부분은 제가 임의대로 빼도록 하겠습니다.

 

: 신촌 바닥이 사람들을 여럿 버려놓았어. 근데 지금은 남자친구 있잖아요? 중국친구라고 했던가?

 

손만평: 아빠는 지금은 한국 남자친구든 중국 남자친구든 상관 안 하시는 것 같은데, 찐쿵(만홍 중국 남자친구의 애칭)은 별로 탐탁해 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게 중국 남자친구라서가 아니라 그냥 딸 뺏긴다는 그런 심정이 있는 것 같아요.

 

: 그렇지. 그게 아빠 마음일 거야. 그런데 아빠가 한국 남자친구 사귀지 말라는 건 아마도 아빠 경험에서 나온 것일지도 몰라. 내가 볼 때, 화교사회를 들여다보면 화교남자가 한국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경우는 많아. 근데 반대로 딸을 한국남자한테 주는 경우는 별로 없었어, 과거에는. 그건 뭐냐면, 정말 가부장적인 생각에서 나온 거지. 가령, 한국여자를 데려오는 건 화교들 입장에서 보면, 우리 집안사람 만드는 거야. 중국사회의 일원이 되는 거지. 근데 반대로 내 딸을 한국 집안에 시집보내면 그건 한국사람 만드는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아. 한국 사람한테 내 딸을 빼앗기는 것 같은 그럼 느낌이 드는 거지. 그래서 경계를 한 측면도 있는 것 같아.

 

손만홍: 맞아요. 그런 것 같아요.

 

손만평: 하루는 제가 아빠한테 이런 얘기를 했어요. 아빠가 생각하는 효녀는 무엇이냐고. 시집 안 가고 가게에서 그릇 닦아주고 그릇 치워주는 게 진정한 효녀냐고.

 

손만홍: 저희 어렸을 때는, 가게 바쁘면 엄마가 저희를 불러요. 내려와서 그릇 닦으라고. 저희가 수저 물기 닦고 반찬 담고 도와주고 그랬어요. 완전히 일꾼이었어요. 그럼, 아빠는 굉장히 좋아했어요. 가족들이 서로 도와주고 그러는 게 효자다. 그런 의식이 아주 강했어요. “야, 남들 봐라. 걔네는 딸들이 와서 바쁘면 도와주고 뒷바라지 해주는데. 왜 너희들은 안하냐?” 저희가 그냥 놀고 있는 걸 아주 싫어하셨어요. 그래서 얘가 어느 날 그 얘기를 한 거예요. 아빠한테 정말 효녀란 뭐냐고.

 

손만평: 평생 가게에서 일 도와주고 그릇 치우고 시집 안가고 노처녀 될 때까지 있는 게 효녀라고 생각하느냐고. 그러니까 아빠도 아무 말씀 못하시더라고요. 심지어는 제가 딸들이 얼마나 더 클 수 있고 재능을 얼마나 더 발휘할 수 있는지 도와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왜 여기다 묵혀두려고 하느냐고, 왜 발목을 잡으려고 하느냐고. 거의 막말을 하다시피 했어요. 그땐 저도 어렸을 때니까 천지분간 못했을 때고…. 우리 아빤 여자가 나서는 거 아주 싫어해요. 사회생활 하겠다고 하면 못하게 하고 그랬어요.

 

: 그럼, 만승이 경우는 달라? 만승이가 뭘 하겠다고 하면 다 들어주고 그랬어?

 

손만평: 그럼요.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다 해라. 뒤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고.

 

손만홍: 제가 아르바이트 하고 싶다고 하면 무슨 큰일 날 것처럼 난리가 나요. 엄마는 딸이 하고 싶다는데 좀 시켜봐라 하시죠. 그러면 아빠는 “집에도 일거리가 널려 있는데 왜 남의 집 가서 일해?” 당신 딸이 남의 집에서 일하는 것처럼 생각해서인지 아주 싫어하셨어요. 사실 전 경험도 쌓고 그러고 싶었는데. 그러다가 제가 패션학원 다닐 때 6개월 동안 공백 기간이 있었어요. 그때 우기고 우겨서 신포동에서 아르바이트 한 적 있었어요. 제가 일하고 있는데 아빠가 보지 않는 척 하면서 자꾸 그 앞을 왔다 갔다 하시는 거예요. 그때 월급 70만 원인가 받았어요. 첫 월급 탔을 때, 제가 아빠 선물로 빨간 가디건 사 드렸어요. 아빠가 원래 빨간색 좋아하시거든요. 처음엔 누가 이런 거 사오라고 했냐고 막 뭐라 그러시는 거예요. 그랬는데 주무실 때에도 그걸 입고 주무시는 거예요. 이튿날에는 가게에 나가서 사람들한테 막 자랑하시고. 저흰 어렸을 때니까 아빠의 그런 행동이 정말 황당한 거예요. “뭐야, 아빠 왜 저래?” 지금이야 그 마음 알지만….

 

손만평: 근데 진짜 전에 아빠 인터뷰 했을 때, 말씀으로는 만승이가 가업을 이어야 하니까 고생도 좀 해봐야 한다고 그랬는데, 실제로는 안 그래요. 만승이가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서 방학 때 가게에서 일을 했어요. 월급 받고 말이에요. 근데 하루는 중화루에서 다들 바빠서 난리치고 있는데, 아빠가 부르더래요. “야, 만승아! 이리 와봐.” “왜?” 하니까, 잠깐 앉아서 쉬라고 그러대래요. 인터뷰에서는 아들 뭐 이렇게 얘기하는데, 사실은 안 그런 거예요. 자기 아들이 일하니까 그게 싫은 거예요. 이건 모순 아니에요? 가르치려면 확실히 가르치던지…. 우리 아빤 그런 게 있어요.

 

: 솔직히 그게 아버지들 마음 아니겠어? 그리고 보통 남자들이 속마음하고 겉으로 표현하는 게 좀 다르잖아. 거기다가 아빠는 열다섯, 열여섯부터 남의집살이를 했단 말이야. 일을 굉장히 힘들게 하셨잖아. 그러니까 자식들만큼은 힘든 일을 시키지 않으려고. 자식이 힘들게 일하고 있는 거 보면 그게 가슴 아픈 거지. 어떻게든 감싸 안고 싶고. 그런 마음 아니겠어? 그러니까 너희들이 일해서 옷이라도 선물하면, 앞에서는 이런 거 왜 사왔느냐고 나무라지만 뒤에서는 고맙고 대견하게 생각하시는 거고. 난 어느 정도 아빠 마음이 이해될 듯도 싶은데?

 

손만평: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그러면 만승이한테 안 좋아요. 하루는 가게가 너무 바빠서 제가 일을 도와준 적이 있었어요. 그릇 닦고, 컵 닦고. 제가 혼자 일을 다 했어요. 저야 뭐 워낙 단순하니까, 제가 맡은 일을 그냥 한 거죠. 근데 만승이가 뭐라는지 아세요? “지에지에, 하지 마. 지에지에가 하면 아줌마들 놀아.” 이러는 거예요. 벌써 자기가 사장 포스 내는 거예요. 그 몇 달 동안 걔가 뭘 보고 배웠는지 알만 하잖아요?

 

손만홍: 효녀 얘기 나오고 나서 그 다음부터는 아빤 저희한테 일 안 시켜요.

 

손만평: 근데 엄만 시켜요

 

: 내가 볼 때, 아빠는 아빠 형제들이나 당신 자식들에 대한 사랑, 애정이 정말 남다른 것 같아. 그게 어떤 형식으로 표출되든 말이야. 그러니까 삼촌이나 고모들 같은 경우에도 다 데리고 있잖아. 어떤 방식으로든. 또 좀 먼 친척도 데리고 있고. 심지어 엄마네 형제들까지도 데리고 있고. 그게 쉬운 일이 아니야. 인터뷰 중에 아빠가 제일 중요하게 말씀하시는 게 바로 형제고 가족이야. “힘들 때 서로 도와줄 수 있는 게 바로 가족이고 형제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해. 그건 그렇고, 본인은 앞으로 어떻게 살 생각이에요?

 

손만홍: 저는 지금 항상 긴장 속에서 사는 것 같아요. 얼른 졸업해서 자리 잡고 영주권도 받고 싶고…. 그래서 늘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요. ‘멀지 않았다. 조금만 더 고생하자.’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근데 제 남자친구랑 얘기하면, 얘는 무슨 믿는 구석이 있는지 자신감이 넘쳐요.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항상 그래요. “방법은 다 있다.”고. 근데 저는 고민도 많고 긴장도 많이 하고, 뭘 하기 전에는 생각도 많이 하고…. 그런 스타일이에요.

 

: 남자친구는 전공이 같아요?

 

손만홍: 그 친구는 산업디자인 쪽이에요. 자동차 디자인. 근데 그 친구도 예고를 나와서 그림도 잘 그려요.

 

: 그 친구는 미국에 오래 있었어요?

 

손만홍: 저하고 비슷해요. 중국에서 대학까지 마치고 왔으니까. 졸업시기도 같아요.

 

: 특별히 긴장감을 갖는 게 그곳이 미국이라서 더 그런 걸까? 만약 한국에서 똑같은 공부를 하고 똑같은 고민을 한다면 긴장감이 덜 하지 않았을까? 특히, 외국에서 살다보면, 난 여기서 어떻게든 버텨 내야 하고, 살아나가야 되고, 반드시 내 계획에 따라서 됐으면 하고 혹시 안됐으면 어떻게 하지? 라고 하는 그런 게 있을 같아요.

 

손만홍: 그런 측면도 있어요. 암튼 유학생들은 다들 법적으로 비자 유효기간이 있고, 언어의 장벽도 있고, 그 나라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는데도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고. 뭐 그렇죠. 그렇지만 미국은 이민사회라서 그런지 어느 정도는 오픈 마인드인 것 같아요. 내가 능력이 있으면 안 될 것도 없는…

 

: 만일 한국에 있었으면 일자리를 구하는데 있어서도 좀 더 제약이 많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손만홍: 음…. 제 생각엔, 한국이 조금 더 외국인이라는 조건을 보다 명쾌하고 뚜렷하게 표현한다고 해냐 되나? 물론 미국도 마찬가지지만, 거기는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외국인이라서 안 된다는 생각보다는 ‘네가 능력만 있다면 내가 국적을 주마.’ 이런 식이죠. 생각의 방식이 좀 다른 것 같아요. 근데 한국은 ‘한국 피가 아니면, 혈통이 같지 않으면 안 돼. 한국인이 아니면 안 돼.’ 그런…. 미국에서는 내가 필요하면, 능력만 있다면 그게 누구든 영주권 주고, 더 노력하면 시민권도 주고…. 그런 기회가 열려 있는 것 같아요.

 

: 미국에서는 대만 친구도 있고 중국 친구도 있고 한국 친구들도 있을 거 아니에요?

 

손만홍: 근데 화교 친구들은 없어요.

 

: 미국에도 한국에서 건너간 화교들이 많은데?

 

손만홍: 제가 지금 다니는 대학에 들어갈 때, 입학전형을 담당하시던 분이 화교분이셨어요. 그때 전 뉴욕에 있었기 때문에 인터뷰를 전화로 했어요. 근데 그 분이 저한테 궁금한 게 있대요. 뭐냐고 그랬더니, 네가 한국에서 태어났는데 왜 국적이 대만으로 되어 있냐는 거예요. 그게 정말 궁금하셨나 봐요. 알고 보니, 그 분도 화교였던 거예요. 처음엔 영어로 중국말 할 줄 아느냐고 해서, 전 중국말, 한국말 다 한다고 하니까, 대번에 중국어로 인터뷰를 시작하는 거예요. 정말 친절했어요. 저도 무척 반가웠어요.

 

: 대만 친구들도 많죠?

 

손만홍: 대만에서 온 친구도 많고 중국에서 온 친구들도 많고. 우리 학교가 학장은 미국분이시지만, 학교 이사장은 홍콩 할머니예요. 그 분이 학교를 창설하셨어요. 창설된 지가 30년 넘었을 걸요.

 

: 그럼, 다른 학교보다 중국학생들이 특히 더 많겠네?

 

손만홍: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대륙도 많고 대만도 많고. 처음엔 30명 정도였는데, 그 다음은 50, 또 그 다음은 70. CSA, KSA 같은 유학생 커뮤니티 같은 게 있는데, 규모도 조금씩 커지고 있어요.  

 

: 동아리 모임도 해요?

 

손만홍: 저는 솔직히 여기도 갔다가 저기도 갔다가 완전 깍두기예요. KSA에 가서도 구경하고 CSA에 가서도 구경하고.

 

: CSA?

 

손만홍: CSA CHINA, KSA는 코리아. 신입생 들어오면 정보도 주고 교통 같은 것도 알려주고 그런….

 

: 그럼, CSA는 중국대륙학생들만의 모임이에요? 아니면 대만 친구들도 같이?

 

손만홍: 신기한 게, 다른 학교는 대만 애들은 대만 애들 따로, 중국 애들은 중국 애들 따로 이렇게 분리가 되어있는 게 보통이거든요. 근데 우리 학교는 의례적이나마 모임을 같이 해요. 물론 그 안에서 다시 대만 따로 중국 따로 이런 게 있지만…. 그래도 어떤 일을 할 때는 서로 도와주고 같이 하고 그래요. 그게 참 신기해요. 저도 가끔 설날 같은 때, 같이 어울리기도 해요. 가서 만두도 집어먹고. 근데 가끔 저보고 애들이 놀래요. 한국말 했다, 중국말 했다 그러니까. 도대체 넌 어디서 왔냐고? 네 정체가 뭐냐고? 사실, 처음 만났을 때는 제가 하는 중국어가 억양이 좀 틀리니까 중국대륙 애들 중에는 제가 중국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애들도 많았어요. 언젠가 한번은 제가 할머니랑 통화를 했어요. “할머니, 나 방학했으니까 한국 들어간다.” 근데 할머니가 못 알아듣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할머니한테 푸통화(普通話)로 말을 한 거예요. 하도 중국 애들하고 있다 보니까 푸통화가 익숙해진 거예요. 그래서 다시 산동어로 “후이갸(回家, 본래 중국어 발음은 후이쟈)”라고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중국 애들이 웅성웅성하는 거예요. “도대체 무슨 말이지?” 그런 반응이었어요. 산동 사투리였으니까. 난 사실 말해놓고도 미처 의식을 못했어요. 제 남자친구가 그걸 보고 너무 웃겼다는 거예요. 걔네들은 내가 산동 사투리를 할 줄 안다는 걸 상상도 못했던 거예요. 국적은 대만인데 말은 산동 사투리를 쓰고, 또 한국말 했다가 중국말 했다가 그러고. , 근데 화교를 영어로 뭐라고 해요?

 

: Chinese overseas

 

손만홍: 저는 그 단어를 몰라서 자기소개를 할 때, 항상 부연설명을 많이 했어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국적은 대만이다. 우리 조상은 중국에서 왔다.” 이렇게요. 미국 선생님들은 그걸 그렇게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사람들이 미국엔 너무 많으니까. 근데 동남아 애들은 무척 신기하게 생각해요.

 

: 이건 좀 다른 얘기인데, 그 말 들으니까 갑자기 생각나서 질문하는 거예요. 여기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 가운데 대륙에서 온 젊은 친구들 많잖아요? 그 친구들에 대해서 특별히 생각한 게 있어요? 아니면, 별다른 느낌이 없어요?

 

손만홍: 어울려 본 적이 없어서….

 

 

 

 

: 잘 어울리지 않게 되나 보죠?

 

손만평: 몇 분 빼놓고는…. 중국 분들 말씀하시는 거죠?

 

: 그렇지. 너희 가게에 일하러 온 중국대륙 사람들.

 

손만평: 대개는 아줌마들 밖에 없어요. 제 또래는 없어서…. 그리고 만나서 딱히 얘기할 게 좀 없어요. 뭘 부탁할 때나….

 

손만홍: 제가 대학 다닐 때 중국에서 온 유학생들 보면요. 뭐랄까, 이질감 같은 게 느껴졌어요. 제가 끼지 못하는 어떤 서먹서먹한…. 한국친구들은 저한테 그래요. “야, 너 중국말 할 줄 알잖아? 얘기해봐.” 그런데 뭔가 다른 문화에서 온 것 같은 그런 느낌 같은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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