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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20 /2012.04] 관행논단 _ <전통>, <근세>, <유교적 근대>를 넘어, <근대 동아시아>의 관행연구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16 조회수 66

[Vol.20 /2012.04] 관행논단 _ <전통>, <근세>, <유교적 근대>를 넘어, <근대 동아시아>의 관행연구로

 

안승택 _ 지역문화연구소

 

역사인류학자 잭 구디는 ‘낭만적 사랑’, ‘지참금/신부대 혼인관행’, ‘국가로부터 자율적이려는 (시민)사회’ 등의 검토를 통해, 세계질서의 진정한 경계는 유럽―및 현대적 의미로 미국―과 그 외 세계 사이가 아니라, 유라시아와 그 외 세계 사이에 놓여있었다는 논의를 전개하였다. 이 유라시아 세계는 대하천 유역의 식량생산경제와 도시발달, 고도의 문자능력과 전문적 지식(및 이를 담당하는 계층)의 분화, 국가의 발달과 국제무역 등을 통한 세계적 통합 등 특징에 의해 그 외 세계와 구분된다. 여기에는 우리가 아는 소위 ‘문명세계’―이 진술에서 마야ㆍ잉카ㆍ아스테카 문명이 애매한 위치에 놓이게 됨은 유감이다―의 거개가 포함되니, 유라시아라는 세계사적ㆍ문명사적 공간의 중요성은 구디만 아니라 많은 학자들이 주목해왔던 바이기도 하다.

 

주지하듯이 이 유라시아라는 세계-문명 공간의 인식틀은, ‘격리된 동양(과 그 외 세계들)에 대한 서양의 침입’과 같은 구도가 아니라, 그러한 ‘통합된 세계-문명 공간 내에서의 중심이동’이라는 구도로 세계질서의 변화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가장 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인식은 아직은 거대담론 차원에서의 문제제기와 세계사적 운동에 대한 서술을 중심으로 일부 지역에 대한 국지적 실증사례가 드문드문 보족되는 수준에 머무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글에서는, 동아시아 차원의 사회사적ㆍ문화사적 운동에 관심을 지닌 한국문화 연구자로서, 아직은 단상 수준이지만 이러한 논의의 함의와 관련한 몇 가지 생각들을 적음으로써 미력이나마 학문적ㆍ시대적ㆍ지역적 구분을 넘는 소통을 향한 보탬이 되고자 한다.

 

이러한 일련의 논의는 우선 ‘전통’과 ‘근대’의 이분법에 바탕을 둔 전통사회론ㆍ전통문화론에 대한 재고를 촉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통설적으로 한국사회의 근대기점에 대해서는 1860년대설, 개항설, 갑오개혁기설 등이 제출되어 있으며, 여기에 일제시기의 토지조사사업(1910년대)이나 공업화(1930년대)를 강조하는 반론이 제기됨으로써 기본적인 논의구도를 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그 자체로 별도의 대단히 복잡한 논의를 필요로 하지만, 이 글의 맥락에서는 그러한 ‘근대적인 것’의 대립물로서 그에 선행하는(것으로 상정된) ‘전통적인 것’의 성립시기 및 그 질에 관한 논의가 중요해진다.

 

기존 한국사회 근대기점 논의의 연장선을 따라가다 보면, ‘강남농법’과 ‘신유학’의 도입을 핵심으로 삼는 동()아시아 차원의 운동에서 이 ‘전통사회’의 특질을 찾는 이해를 만나게 된다. 이러한 설명은 여말선초 시기 그 도입이 시작되어 16세기에는 지배질서로서 전사회적인 확립을 보고, 1718세기에 동요하기 시작하여 19세기에는 새로운 체제로 전환이 시작된다는 파악을 통설로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입론은 상기한 반론의 제기자들, 그리고 양측 모두에 일정한 회의를 제기하며 사회사적 혹은 민속적 수준에서의 변화에 주목하는 논자들에 의해, 그 도입-확립-동요-전환의 시기를 지나치게 이르게 설정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성리학적 지배질서의 확립에 의한 한국사회의 유교화는 17~18세기에나 전사회적으로 확산되거나, 심지어 특정 측면에서는 19세기나 20세기 들어 오히려 강화되는 양상도 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후자의 성격에 주목하는 논자들은 17세기에 진행되는 생산관행에서 병작제(竝作制)의 보편화, 상속관행에서 장자우대상속제로의 전환, 각종 의례관행에서의 유교화, 그리고 이를 뒤따르는 친족관행에서 소종(小宗)의 대종화(大宗化)나 동족마을의 확산 등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만일 이들 경향이 19세기와 20세기를 거쳐 오히려 강화되는 양상조차 확인된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한국사회에서 유교화와 근대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병행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 한국사회의 유교적 성격이 가치나 관행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사회의 ‘전통’을 형성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한 세대 전의 학계에서 ‘자본주의 맹아’로 포착되었던바 한국사회의 새로운 ‘근대적’ 성격이 이 유교화의 확산과 동시에 진행된 사상(事象)들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한국사회에서 ‘전통’과 ‘근대’는 점점 더 구분하기 어려운것이 되어간다. ‘전통’이란 모름지기 수백, 수천 년을 거슬러 확립된 것이라는 ‘전통’론의 거죽에 박힌 단단한 옹이들을 제거하고, 오히려 ‘전통’이란 ‘근대’에 대한 대응의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전통의 창안(invention)’론에서 (최소한 지금보다) 더 많은 참조의 지점들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동아시아사에서 ‘근세’(near modern)라는 시대설정은 이러한 ‘전통’과 ‘근대’의 모호한 구분 사이의 더 모호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근대’ 이전에 존재했던 ‘근대’와 다른 사회질서를 표상한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내적발전 과정상의 하나의 ‘단계’로서 별도의 원리로 제시되기보다는 ‘이전’의 ‘다른’ 것이라는 관점에서 포착되기에, 그것이 다시 그 이전―소위 ‘중세’―의 사회질서와 어떻게 다른 질을 갖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에서 현저한 결함을 노정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근대’가 내적발전 과정상의 새로운 단계가 아니라 외래적인 어떤 질서의 도래와 관련되어 설명되기에, 그 이전시기에 나타났던 내적발전 과정상의 ‘새로움’이 그다지 새롭게 보이지 않았던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소위 말하는 ‘근대’란, 프랑스 인권선언의 자유ㆍ평등 사상이나 일물일권적인 배타적 소유권 개념으로 대표되는 법제체제, 보통선거에 의한 대의제나 공화국으로 대표되는 정치체제, 산업혁명이나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경제체제, 보통교육으로 대표되는 교육체제 등과, 그 밖의 여러 가지 것들의 총체적 구성물이다. 그러나 가령 ‘식민지 근대’에서처럼 그 모든 것이 부재한 곳에서도 존재하는, 마치 유령처럼 사실상 존재가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근대의 ‘유령적’인 성격은 ‘근대’뿐만 아니라 ‘근대성’ 나아가 근대와 근대성에 대한 ‘논의’ 자체도 일방적으로 수입되는 것이기 십상이었던 한국이나 동아시아의 상황에서 점점 더 그것을 괴물로 만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근대’라는 녀석이 몸집을 불려나갈수록, 그 대립물로서의 ‘전통’ 역시도 여기저기 정확히 시공간 좌표를 알 수 없는 지점들까지 빨아들이며 몸집을 불려왔다. 그것은 근대 ‘이전’의 모든 것이면서, 따라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들 존재 없는 존재로서의 ‘근대’와 ‘전통’ 사이에 놓인 것으로서의 ‘근세’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근대적 세계의 도처에서 산업자본주의나, 공화국이나, 자유인권선언의 정신에 입각한 법제가 없는 근대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문제는 우리가 이들 사회를 ‘전근대’나 혹은 ‘근세’로 개념화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국적으로 또는 국지적으로 보자면 ‘근대’가 아니지만 그것을 ‘근대’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는 사회질서들을 확인하게 된다. 요는, ‘근대’는 일국적 또는 국지적 차원에서 지표적으로 확인될 수 없는 현상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일국적 차원에서의 ‘근대’ 개념을 전제로 설정되는 ‘근세’라는 시대구분 역시도 문제적인 개념인 것이 아닐까?

 

이러한 ‘전통’과 ‘근대’ 그리고 ‘근세’ 사이의 착종된 관계들에 대한 생각은, 한국사에서 ‘근세’라는 용어가 기피되고 있는 현상에 눈길이 머물게 한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근대’의 부재와도 일정한 상관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앞서 살폈듯이 한국사회에서 근대기점에 관한 통설적 논의들이 제기하고 있는 1860년대나 1870년대 혹은 1890년대는 새로운 사상이 떠오르고 있는 시기이지 체제화된 질서로서 그것이 확립된 시기는 아니다. 기실 토지조사사업이나 식민지 공업화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 반론이 성립하게 된 것도, 이 통설 자체가 어떤 확실한 지표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통설의 기초가 약하기에 반론도 쉽게 성립하고 또 나름의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주변으로 시야를 돌려보면, 이웃한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신해혁명 이후의 중화민국과 메이지 유신 이후 중앙집권적 통일 일본국가의 수립이 근대와 전근대를 가르는 하나의 기점이 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한국사회에서는 어떠한가. 한국사에서는 그러한 분기점이 부재한가? 그렇지는 않다.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전문에 의해 이러한 ‘동아시아의 근대’에 상응하는 해결책을 마련해놓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이념은 법리적으로라기보다는 정치적으로 선포된 것으로, 다양한 법령의 법원(法源)이라는 면에서 보면 한국의 법제는 임시정부보다는 오히려 조선총독부에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현실에 가깝다. 또 근대 한국사상(韓國史像)은 기본적으로 그러한 정치적 선언 이전에 이미 성립을 보았고, 그 후 근현대사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기에 국사(國史)조차 이 선언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문제는 ‘국사’라는 제도가 그것을 형성한 관행에 지배되면서 이 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진술은 그 자체로는 ‘국사’의 이념과 제도, 실천에 대한 찬성 또는 반대의 뜻을 함축하고 있지 않다―이다. 그런 한편에서 최근 한국사학계 일각에서는 장기19세기나 장기근대, 또는 유교적 근대 등과 같이 기존의 시대구분 설정을 뛰어넘으려는 논의의 틀도 제시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두 가지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하나는 자꾸 이러저러한 애매한 기준들과 모호한 지표들로 논의만 복잡하고 결론은 나지 않는 논의를 중단하고, 대한민국 헌법전문의 정신에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한국사에서의 근대기점으로 못 박는 길이다. 이는 일본이나 중국, 혹은 다른 국가들이 지닌 기존의 통설들과 역사인식론 상의 공통의 지반을 확보함으로써, 그 어떤 이론(異論)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발판을 구축하고, 그 다음 단계의 학문적 도약을 준비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단지 여기에는 일정한 단서가 필요하다. 가령 앞서도 적었듯이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 법원(法源)의 많은 부분이 임시정부보다는 총독부에 기대어왔던 현실로 인하여, 사회도처에서 많은 자기부정이 요구되고, 또 나아가 일종의 역사적인 재-정체화(re-identification)나 심지어 자기왜곡을 수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특히 그 역사상(歷史像)을 만드는 과정에서 끊어진 단절지점들을 잇고 연결된 지점들을 깨는 작업이 개재하게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는 역사가의 작업으로서는 큰 부담이 될 것이다.

 

다른 하나의 길은, 동아시아사에서 기존에 ‘근세’로 개념화해왔던 시기를 ‘근대’의 기점으로 설정하고, 이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유라시아라는 세계-문명 공간에서 근대세계질서의 도래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유럽의 절대왕정과 동아시아의 소위 ‘유교적’ 국가들이, 유럽에서의 인클로저와 동아시아에서의 사적토지소유관념 강화가, 그 내용적 차이에 대한 인식을 전제하면서 연결되고, 또 가령 낭만주의와 고증학과 같은 그 밖의 많은 사상(事象)들이 그 세계-문명 공간 전체의 변화라는 틀 속에서 포착될 수 있을지 모른다. 요는, 우리가 맞닥뜨린 과제는, 서양의 ‘근대’와 동양의 ‘근세’를 재검토함으로써 서구적 근대성에 대응하는 흐름이 동양에도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한데 어울리고 엮임으로써 유라시아라는 세계-문명 공간에서 새로운 근대적 세계질서가 부상하고 있었음을 설명해내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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