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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20 /2012.04] 관행논단 _ 조선후기 선영(先塋) 조성의관행과 산송(山訟)의 확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16 조회수 52

[Vol.20 /2012.04] 관행논단 _ 조선후기 선영(先塋) 조성의 관행과 산송(山訟)의 확산

김혁 _ 부경대학교

 

우리말에 ‘척()을 진다’는 말이 있다. 원수가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척()은 법정에 함께 선 원고와 피고를 가리킨다. 한국 사람들은 되도록이면 법정에 함께 서는 것을 꺼렸다. 송사를 벌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지목되면 사회적으로 매장되었다

 

그럼에도 사회적 분쟁은 벌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많은 송사도 뒤따랐다. 시대마다 가장 빈도 높은 송사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그 당시 사람들의 집중된 관심사가 무엇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16세기에는 ‘노비송(奴婢訟)’이 가장 성행하였고, 17-18세기에는 ‘전답송(田畓訟)’이, 19-20세기 초에는 송사 중에서 ‘산송(山訟)’이 가장 빈번하였다. 이런 송사의 주제는 그 시대 사람들의 욕망이 분출하였던 자리이며, 그 사회체계의 가장 약한 고리이기도 하였다.

 

16세기에는 양반들에게 노비들은 재테크를 위한 주요한 대상으로 여겨졌다. 당시는 노비 노동을 기반으로 한 농장제가 주요한 경영형태였다. 청빈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던 퇴계 이황조차 400명이 넘는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의 70-80퍼센트가 노비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어쨌든 당시에 노비가 사회적 욕망의 대상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 여기서 얼마나 많은 노비를 확보하느냐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농업 생산방식에서 노비보다는 전답을 더욱 중요하는 쪽으로 변모하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노비를 기반으로 한 당시의 농업경영은 노비들에 대한 고정적인 지출 때문에 양반들을 파산으로 내몰았다. 따라서 그 대안으로서 새로운 농업 경영방식인 병작제가 성행하게 되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병작제는 지주와 작인이 일정 토지에 함께 기여하고 수확에서 기여한 몫만큼 가져간다는 뜻이다. 그 결과 노동력 수급보다는 경작지의 확보가 더 큰 관심의 초미였다

 

그렇다면 19세기 이후에 어째서 산송이 가장 빈번한 송사가 되었을까? 20세기 초 연활자로 간행된 많은 간찰 서식집에는 상대 집안의 산송(山訟)은 어떠하냐고 근심스럽게 묻는 안부 편지가 으레 끼어 있었다. 묘소를 산소라고도 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산()”은 묘()와 동의어로 쓰였으므로, 산송은 곧 ‘묘()를 둘러싼 송사’였다. 이와 같이 당시 어느 집안에서 산송과 연관되어있지 않은 집안은 거의 없었다. 산송이 19세기를 특징짓는 대표적인 사회현상이었음에 틀림없다.

 

산송이 만연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현재 크게 두 가지 갈래의 연구 성과가 있다. 산림의 사유화로 인한 경제적 이익 추구에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는 주장(김선경, 전경목, 한상권)과 유교적 장묘문화의 확산과 종족 질서의 확립이라는 사회적, 사상적 배경에 원인을 두는 주장(김경숙)이 대립된다. 어느 쪽이 더 근본적인 원인인지에 대해서는 단언하기 쉽지 않다. 두 가지 경향이 복합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양반들이 산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7세기 이후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원래 산지는 공유지로서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고 공동으로 이용하는 대상이었다. 그런데 양반들이 산지를 점유하는 관행은 매우 복합적인 문화적 맥락에서 시작되었다. 조상숭배를 위한 명분은 사족뿐 아니라 전 사회계층이 공감하는 문화이며, 나아가 정부에서도 사족층의 사회적 신분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이념이 구체화되고 물질화된 것이 바로 선영 경관이다. 선영 경관은 봉분(封墳)과 묘표(墓表), 송추(松楸)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시 사족들에게 선영을 조성하고 수호하는 일은 자기 문화의 독자적인 표현이었으며 가시적인 표지였다. 이러한 표지를 통해 자기 집안을 하나의 결합체로 통섭해주는 한편, 다른 집안이나 계층과 자신을 차별되도록 고안된 발명품이었다.

 

그리고 선영 경관의 확산에는 이와 연관된 도교 혹은 풍수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은 조상의 죽은 육신과 후손의 길흉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다루는 여러 가지 이론들은 한마디로 조상의 시신이 잘 썩어야 하고, 드러난 뼈가 후손들과 감응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영이 위치해야 하는 곳은 조상의 시신이 잘 썩을 수 있도록 자연 환경들을 잘 고려하여야 했다.

 

우선 이런 선영 경관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토지가 필요하였고, 묘를 지키는 묘지기가 필요하였다.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하면 선영의 수호는 실직자의 관품을 기준으로 보수(步數)에 의거하여 정해진 매우 좁은 영역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이후 양반들은 법전에 정해놓은 보수 규정을 넘어 수호 영역을 점차 확대하려 하였다. 이것은 묘가 죽은 사람의 집이라면 사방에는 그 집을 보호할 담이 있어야 한다는 관념과 통해 있으며, 이 네 개의 담으로 이루어진 영역을 사산국내(四山局內)라고 하였다. 왼쪽에는 청룡, 오른쪽에는 백호, 뒤쪽에는 조산(祖山), 앞쪽에는 안산(案山)을 일컫는 곳으로 묘에서 앉거나 서서 보았을 때 보이는 모든 곳이었고, 이 안의 모든 권리는 그 묘를 설정한 집안에게로 돌아갔다. 숙종 2년 에는 이러한 관행적인 권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선영을 안정적으로 경영하기 위해서는 토지를 확보하는 것 이외에도 선영을 관리할 인원이 필요하였다. 선영을 수호하기 위한 인력은 묘직(墓直), 산직(山直), 재직(齋直), 마름(舍音), 수호군(守護軍), 수직군(守直軍), 묘하동(墓下洞), 묘촌(墓村) 등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이들 중 묘직, 혹은 산직 등은 대개 주인가로부터 떨어져서 묘역 근처에 거주해야만 했다. 묘직은 ① 제물(祭物) 및 기명(器皿)의 관리, ② 산소 주위의 소나무나 잡목 관리, ③ 제사의 보조 등 다양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따라서 묘직은 묘 자체의 관리를 포함하여 제사 준비를 위한 일체의 보조 업무를 총괄하였다고 하겠다.

 

묘직들은 대체로 잔호(殘戶)에 불과하였기에 국가가 부과하는 각종 군역이나 잡역까지 지게 될 경우 그들의 농업경영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곧바로 유리도산(遊離倒産)하게 되어 있었다. 이들의 농업경영이 깨지면 그 피해는 다름 아닌 사족에게 돌아가게 된다. 따라서 사족은 이들의 농업경영을 보조해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들에게 부과된 역()을 막아내지 않고서는 선영 수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묘의 주인은 이들을 역으로부터 보호할 것을 묘가 있는 관내의 수령으로부터 보장받고자 하였다. 이때 이들이 보호할 수 있는 묘직의 수는 권력과 비례하였다. 예를 들어 송시열(宋時烈)의 묘를 수호하는 묘지기가 30-40명이라면, 이황의 선산 묘역에는 10, 권벌의 묘역은 3-4명이다. 이 인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수령과 그 집안이 타협한 결과 그때 그때 정해졌지만 그래도 일정한 상한선은 있었다

 

한편 사족이 자신의 선영으로 산지를 점유하기 이전에, 그곳에서 땔나무를 하던 산 아래 촌민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사족이 산지를 선영으로 정하기 전부터 살아왔던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사족이 산지를 점유하고 그곳의 송추(松楸)를 보호하는 일이 그들에게는 기존의 생활터전을 빼앗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사족들이 송추를 보호하는 데에 촌민들은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도움 없이 송추를 보호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사족들은 이들을 탈역시키고 그 대가로서 자신의 송추를 보호하도록 요청하였다. 이 마을을 묘촌(墓村)이라고 부른다. 묘촌이 없다면 선영의 송추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모집하여 형성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19세기에 이르러 사족들이 선영을 조성하고 경영하는 일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랐다. 무엇보다 사족 인구가 자연적으로 증가하는 한편, 사회적으로 편입되어오는 수도 적지 않았다. 이와 아울러 유교의 이념은 사회의 보편적 가치로서 하층민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장지의 부족을 초래하였으며, 특히 같은 선영을 공유하고 있는 동일 문중 내의 산송은 더욱 증대되어갔고, 앞서 언급하였듯이 산송은 두드러진 사회현상으로 드러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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