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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18 /2012.02] 관행논단 _ 말레이시아 화인사회의 바바논야(Baba Nonya) 문화: 말라카의 사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16 조회수 304

[Vol.18 /2012.02] 관행논단 _ 말레이시아 화인사회의 바바논야(Baba Nonya) 문화: 말라카의 사례

홍석준 _ 목포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말레이시아의 다양한 민족 중에서도 원주민인 말레이인과 이민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화인의 종족 정체성은 역사 · 문화 · 경제 ·사회와 함께 변화를 겪었다. 말레이인과 화인의 갈등은 경제발전과 함께 종족간의 종교적 · 관습적 마찰과 정치 참여 및 소득 분배를 둘러싼 불화와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발전과 반비례하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외부적으로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 말레이시아 화인사회의 특징은 첫째, 고유한 문화적 전통과 정체성으로 낮은 문화적 동화는 종족적 경계를 더욱 명확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둘째,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자기 종족집단의 문화적 정체성을 표방하는 정당을 갖고 있는 말레이시아 화인들은 말레이계 정당과 연립정부를 결성함으로써 국가권력의 일부를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다. 셋째, 말레이시아 화인사회의 계급구조는 전통적인 중국 사회와 뚜렷한 차이가 있다. 넷째, 말레이시아 화인사회는 다양한 방언 집단들로 이루어진 다양하고 복합적인 구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는 말레이시아 화인사회의 대립과 연합의 주요한 역사적 배경이 되고 있다. 한 마디로 말레이시아에서 화인의 종족 정체성은 말레이인들과의 정치적 제휴 및 연대를 통해 교섭과 타협의 과정을 거쳐 형성, 변모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박사명 외 2006).

 

말레이시아 인구에서 화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25%에 달한다. 이는 말레이인과 함께 가장 중요한 종족집단의 하나로 화인이 말레이시아 문화, 정치, 경제적인 측면에서 다른 동남아시아의 화인과 구별되는 독특한 배경이 된다. 말레이시아의 종족 갈등의 심화는 영국식민지 기간에 더욱 심했다. 영국의 식민정책은 ‘정치는 말레이인, 경제는 화인’이라는 형식의 묵시적 합의였으나 화인들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영역까지 확대했고, 말레이인들 역시 정치력을 이용하여 경제 분야까지 잠식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두 종족 집단 간에 갈등과 분열이 상존하게 되었다. 화인들을 둘러싼 내외적인 요인들은 화인들의 정체성 형성과 변화의 원인이 됐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말레이시아 사회의 변화 역시 가지고 왔다.

 

말레이시아에서 말라카가 차지하는 위치는 독특하다. 말라카는 말레이 문화의 원천이면서 화인들의 고향으로 인식되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말라카는 말레이시아의 역사, 문화, 그리고 음식의 측면에서 가장 풍요롭고 다채로운 문화를 보유한 곳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말라카라는 이름은 한 그루의 나무 이름을 딴 제국의 명명법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것은 1396년에 수마트라를 탈출한 빠라메스와라 (Parameswara)라는 한 왕자에 의해 명명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원래 말레이 반도의 작은 어촌이었던 말라카는 독특한 역사적 경험과 고유한 문화적 상황의 영향으로 급속한 변화를 겪게 된다. 항구도시로서의 말라카는 말라카 해협을 왕래하던 아랍인, 인도인 상인들과의 교역을 통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자신의 문화적 환경에 맞게 변조시키면서 자생적인 문화를 창출하였다. 말라카가 항구도시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역사를 대표적인 상징으로 하는 관광지로 변모한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말라카 동북부 지역의 부낏지나(bukit cina)라 불리는 곳에는 중국 동남부 지역에서 장기간에 걸쳐 이주해 온 화인들의 공동묘지가 넓은 규모로 펼쳐져 있다. 서북부 지역에는 인도인 이주자들이 인도문화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말레이 문화와의 혼합으로 고유한 인도계 문화가 말레이 문화와 적절하게 혼합되어 독특한 말라카 힌두 문화의 일종인 씨띠(chitty) 문화가 형성되었다. 남부 지역의 해안가를 따라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문화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성채와 건축양식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홍석준 외 1997).

 

말라카는 원래 말레이 반도의 작은 어촌들에 불과했지만, 역사적으로 동서양의 중계무역을 담당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면서부터 항구도시로서의 특성이 가미되어 세계에서 가장 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된 도시로 성장, 발전하였다.

 

말레이시아의 역사적인 항구도시 말라카는 1403년에 건설되었다. 그 해는 중국 명나라의 제해권이 확대되고, 정화(鄭和) 300 2 7천명의 대함대를 이끌고 인도와 아라비아, 동아프리카까지 7번의 항해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국 선박은 말라카를 반환점으로 삼았고 그 너머까지 진출하지는 않았다. 북방의 위협에 직면한 명나라 조정이 내부로 관심을 돌린 1433년에는 말라카로 오는 중국 선박의 수와 횟수, 규모 등이 현격히 줄어들었다.

 

항구도시에 기반을 두고 구축된 말라카 왕조는 오늘날 말레이 세계의 원형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슬람교가 유입되어 술탄제가 확립된 말라카 왕국은 외래문화가 수용, 통합되는 과정에서 혼합 문화가 일찍부터 발달되어 왔다. 말라카 해협을 통해 항구로 밀려들어온 다채로운 외래문화는 토착문화와 접촉, 변용되어 말라카 항구도시문화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 일본, 유라시아 각 지역, 아메리카, 유럽을 연결하는 중계무역항 말라카는 중국과 일본이 세계를 상대로 직접 무역에 나선 이후에도 비중은 약화되기는 했지만 소멸되지는 않았다. 영국의 식민시기에 페낭과 싱가포르에게 종전의 기능과 역할을 빼앗기기는 했어도 한동안 동서의 문물이 교환되는 중계무역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페낭에 이어 싱가포르와 수마트라의 아체(Ache)가 인도의 구자라트와 벵골 무역의 거점으로 부상하면서 말라카의 위상은 서서히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말라카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어 해협식민지의 일부로 전락하게 되었지만, 최근 관광을 통해 말라카의 역사와 문화는 다시 만들어지고 있다.

 

말라카는 동서 문명의 교차로에서 중계무역항으로 성장하면서 독자적이면서도 고유한 문화적 환경을 만들어냈다. 몬순 계절풍을 이용하여 동서로 무역선이 왕래해 왔다. 이 도시들은 천혜의 자연을 활용한 문화 중개자의 역할을 담당해 왔고, 바다의 실크로드에 필적하는 해상 고속도로로서 동서 문명이 이곳을 통해 다양하고 복합적으로 교차한 역사도시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한 때 인구가 10만을 넘은 적도 있었던 말라카는 1511년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면서 인구 3만의 도시가 되었지만 국제 무역에서 차지한 비중과 그 영향력은 지대한 것이었다. 말라카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이주와 문화교류뿐 아니라 세계무역의 자연발생적인 교차점과 합류점으로 자리 잡았다. 북으로는 인도차이나 반도, 서쪽으로는 말라카 해협을 중심으로 인도양으로 이어지는 해양 너머로 남아시아, 남쪽으로는 수마트라와 자바, 싱가포르의 인도양, 동쪽으로는 남중국해를 거쳐 동중국해를 지나 조선과 일본으로 연결되는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연결하는 말라카 해협을 통해 인도와 중국과 동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문물이 이 항구도시로 들어왔다. 이곳에서는 각지의 산물이 교류되면서 중계 무역항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말라카는 동남아시아 해상 네트워크를 통해서 다른 항구도시와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인근의 내륙 왕국과의 육상 네트워크에 둘러싸인 거점이기도 했다. 말레이 반도 내의 육상 네트워크와 말라카 해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해상 네트워크의 접점이거나 양자의 사이에서 이를 연계하는 기능을 수행했던 이 도시들은 사람과 물건, 정보가 집결되는 거점으로서, ‘만남과 교류의 기능’을 수행했다. 내륙의 왕국들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 있으면서 해역을 통해 펼쳐지는 장대한 해상 네트워크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지의 도시들과는 다른 역사와 문화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해역 세계’에 속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Hamashita 1994).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지닌 말라카의 현대적인 도시문화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다문화 간의 조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말라카는 서쪽으로 인도양과 동쪽으로는 남중국해를 연결하는 중계무역항으로 바다의 실크로드를 왕래하던 상인 집단의 이주와 정착에 의해 독특하면서도 고유한 도시문화를 형성하였으며, 서양의 식민지 지배를 거치면서 다양한 문화적 색채가 서로 혼합되어 나름대로의 ‘말라카다움’ 또는 ‘말라카 스타일’(cara Melaka)을 만들어낸 항구도시로 알려져 있다. 일찍이 작은 어촌에서 바다의 실크로드의 중심지를 거쳐 해협식민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복합적인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환경 속에서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해 온 페낭은 현재 살아있는 역사문화의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시험하고 있는 중이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1992년 말라카를 공식적으로 말레이시아의 역사도시로 명명한 바 있다. 이 도시는 다종족 사회로서의 특성이 잘 보전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도시의 문화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다종족의 특성은 말레이인, 화인, 인도인, 토착 원주민, 그리고 식민 모국에서 이주하여 정착한 서양인들의 후예들의 문화적 영향에 의해 형성되었다. 말레이인들이 신봉하는 이슬람의 영향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 도시의 종교적 색채는 기본적으로 이슬람, 도교, 힌두교, 기독교 등의 다종교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최근 말레이시아에서 말라카의 위상은 말레이시아 연방정부와 주 정부의 관광산업의 확대로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이 도시의 주민들은 역사와 문화를 재구성하는 관광산업의 활성화를 통해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판매하는 행위’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다종족으로 구성된 인구구성은 외국인 관광객의 눈길을 끄는 관광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다.1)

 

말레이 문화의 원류로 알려진 말레이 술탄제(Sultanate)의 최초 발생지이자 화인과 말레이인의 통혼으로 만들어진 바바논야(Baba Nonya)2) 문화는 말라카의 역사와 문화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유럽인의 식민 지배가 본격화되기 전까지 세계적인 국제 무역항으로 각광을 받았던 말라카의 역사와 문화는 유럽인의 출현으로 인해 부침을 거듭해 왔다.

 

바바논야 문화는 말레이 문화와 중국 문화의 혼합을 통해 만들어졌다. 다시 말해 말레이 문화와 중국 문화의 혼종을 통해 말레이시아 문화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말레이풍의 꽃 장식과 중국풍의 봉황 무늬와 색채가 한데 어우러져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3) 현재 바바논야의 대부분은 말라카와 페낭, 싱가포르 등지에 거주하고 있으며 지금도 말레이인과 중국인이 결혼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들을 바바논야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 이유로는 요즘은 말레이인과 중국인이 결혼할 경우에 자녀들이 자연적으로 무슬림이 되기 때문이다. 당시 바바논야들은 지금과 같이 부모를 따라 무슬림이 되지 않았고, 종교적으로도 말레이 문화와 중국 문화를 두루 수용했다. 바바논야는 독특한 말레이어를 구사하는 특징을 지닌다.

 

바바논야들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식사를 할 수 있는 ‘똑 빤장(Tok Panjang)’이라고 부르는 긴 식탁에서 식사를 하곤 했다. 똑 빤장에는 중국풍의 봉황과 말레이시아의 꽃 문양이 그려진 화려한 그릇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바바논야들이 만든 타일에는 다산, 풍요, 번영 등의 의미를 담은 다섯 가지의 과일을 그려 넣어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침실의 구조는 중국의 전통적인 침실 구조와 많이 닮아 있고, 이곳도 역시 말레이식 디자인에 중국풍의 색깔과 재료를 입혔다. 화인들은 붉은색과 금색을 좋아해 가구마다 금색을 입히길 원했다고 한다.

 

말라카의 바바하우스는 현재 부띠끄 호텔로 사용되는 중앙 앞마당이 있는 전통적인 형태의 4채의 집으로 이루어져 있는 관광 유적이다. 바로크와 팔라디오 형식으로 지어진 이곳은 전통적인 문양인 벚꽃 무늬와 새 문양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단단한 나무의 가구들로 전통적인 바바논야의 생활양식을 그대로 나타내 주는 건물이다.

 

말라카는 중국과 오래된 문화적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 명나라 함대장인 정화는 16세기 때 300배의 선박에 3 5천 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말라카를 첫 방문한 바 있다. 또한 말라카는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영국 등의 서구세계와의 교역을 통해 서구 문명을 일찍 전수 받았기 때문에 바바논야 문화에 서구 문화의 영향이 많이 가미된 것이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바바논야 문화는 한 마디로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자춤 공연은 중국 색채가 강한 공연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말레이 문화, 인도 문화가 섞여 있다. 음력 설 행사에는 말레이시아 국왕부처를 비롯해, 총리 부부, 말라카 주정부 장관 부부 등 고위 공직자들이 참석하여 홍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무대에 올라 화인들의 새해축제를 함께 즐긴다. 말레이시아인들의 협력을 위한 행사로 기획된다. 자선단체를 위한 기부금 전달식 후 열린 퍼레이드 행사에는 중국, 말레이, 인도, 바바논야, 포르투칼인등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약 15개에 달하는 무용단 출신의 2천여 명의 인원이 동원됐다. 중국 드럼, 인도 드럼 등의 연주와 우수, 중국 오페라의 공연으로 이루어진 행사는 말레이시아어로 모두 함께 말레이 노래를 부르면서 불꽃놀이로 마무리된다.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는 만다린 오렌지, 미네랄워터, 카레밥, 망고주스 등이 들어있는 선물꾸러미가 배포된다.

 

 

이런 점에서 바바논야 문화는 고유하면서도 독특하다. 한 예로 춘절을 들 수 있다. 말레이시아 화인들에게 있어 춘절 역시 중국의 춘절과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말레이시아 화인들에게 춘절, 즉 음력 1 1일은 가장 성대하고 민족적 특징이나 문화가 잘 드러나는 행사이다. 이 날은 중국인들이 가장 중시하는 전통 명절로, 화인들에게도 가장 중요하게 치러지는 명절이다. 설날은 준비 시간이 길뿐 아니라 보통 정월 보름까지 설날의 분위기가 이어진다.

 

설날 준비는 대개 한 달 전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은 붉은 색의 옷을 사고, 가정에서는 대청소를 하며 붉은 등, 붉은 기, 붉은 색의 플라스틱이나 종이들로 집안 곳곳을 장식한다. 붉은 색 옷을 입고 붉은 색 장식을 하는 이유는 붉은 색이 악귀를 내쫓는다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또한 창문에는 행복, 부유, 장수를 뜻하는 글자들을 붓글씨로 써서 붙여 놓는다. 중국 설 전야에는 모든 친지들이 모여 함께 준비한 음식을 먹는다. 이날에는 밤을 새우는 데, 이는 밤을 새움으로 부모가 장수하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밤을 새우면서 주로 마작을 하는데 자정이 되면 새해를 알리는 폭죽들이 터지며 불꽃놀이가 시작된다.

 

중국 설날 아침을 알리는 해가 뜨면, 모든 가정들은 다시 바빠진다. 제사를 위한 초와 향을 피우고, 새 옷을 입고 새해 인사를 나눈다. 꽁시파짜이(恭喜發財)라는 새해 인사를 하는데, 이 말은 새해에는 돈을 많이 벌라는 뜻이다. 설에 세배는 빠질 수 없는 풍경이다. 세배를 하고 나면 중국 역시 세뱃돈을 주는데 결혼한 이들이 아직 미혼인 사람들에게 준다. 중국에서의 세뱃돈은 축복과 행운을 바라는 뜻으로 붉은 색 봉투 앙빠오에 넣어 준다. 세뱃돈을 줄 때 홀수의 액수는 주지 않는데, 홀수는 불길하다고 믿는 관습 때문이다. 요즘에는 세뱃돈 대신 컴퓨터, 핸드폰 등을 주기도 한다.

 

중국의 설날이면 어김없이 수많은 폭죽이 터진다. 이때 터지는 폭죽의 양은 직접 보지 않으면 상상을 못할 정도로 많은데 하늘을 가득 메우는 뿌연 연기와 폭죽 터지는 소리가 가히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주로 음력 초하루 자정부터 터트리기 시작해, 춘절 마지막 날인 정월 대보름날 가장 피크를 이루는 폭죽놀이는 예부터 지난 일 년의 좋지 않았던 묵은 때를 벗어버리고 나쁜 기를 좇아 복을 불러들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불꽃놀이뿐만 아니라, 용춤이나 사자춤과 같은 중국 전통 춤도 공연되어진다. 특히 사자는 예로부터 악귀를 물리치는 동물로 믿어져 왔으며, 사자춤의 내용 역시 어느 시골 사람이 사자탈을 쓰고 악귀와 싸워 물리친다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사자춤 공연은 가정집, 회사, 호텔, 쇼핑단지 할 것 없이 공연되어지기 일쑤이다. 중국 설날의 이벤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오픈 하우스이다. 오픈 하우스를 통해 주위 친척이나 친구, 이웃들을 초청하여 함께 음식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나누는데, 이 때 부를 상징하는 만다린 귤을 서로 선물한다.

 

말레이시아 화인들은 설을 맞아 풍성한 음식을 장만한다. 그 중에서도 설 음식하면 이상(yee sang)이라는 음식이 대표적이다. 이상은 날 생선과 갖은 야채와 소스를 버무린 것으로, 먹기 전에 젓가락으로 높이 음식을 집어 올리는데, 이 말은 번영과 장수를 의미한다. 높이 들어 올릴수록 이번 한 해 더 많은 부와 풍요로움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말레이시아의 최대 항구이자 관광도시인 말라카(Malacca)는 말라카 해협을 기점으로 지난 1516세기를 풍미했던 해상 실크로드의 동방 거점이자, 19세기 서방 세력들이 동양으로 들어오던 시점까지 말레이 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 도시로 자리해 왔다.

 

 

‘조화의 거리’ 즉 하모니 스트릿(harmony street)이라고도 불리는 ‘항 저밧 거리(Jalan Hang Jebat)’의 용커 스트리트(Jonker Street)는 바바논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문화 현장이다. 용커 스트리트에는 화인 문화와 말레이 문화의 혼합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바바논냐 전통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은 100년이 넘는 중국인들의 말레이 반도 이주사를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박물관에는 중국인들이 사용했던 가구를 비롯해 요강, 침대, 생일에 먹는 음식, 결혼 예복 등이 전시되어 있어, 바바논야들의 당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융커 스트리트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인 쳉훈텡(Cheng Hun Teng) 사원과 깜뿡 끌링 모스크 그리고 인도인의 힌두 사원이 아주 근접한 거리 내에 공존하고 있다. 쳉훈텡 사원은 15세기 초반에 지어진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 사원으로, 명나라에서 직접 자재를 가져와 지었다고 한다. 내부에 정화의 원정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있다. 또한 깜뿡 끌링 모스크(Kampung Kling Mosque)가 있다. 끌링은 인도계 무슬림을 의미한다. 1749년 완공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모스크이며, 수마트라 양식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다른 모스크와는 달리 동양적인 색채가 묻어난다. 힌두 사원은 힌두교 관습에 따라 특정 시간에 맞춰 예배가 진행되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문화적 혼종성을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가 바로 말라카의 민족 구성과 그로 인한 문화 형성이다(King and Wilder 2003 참조). 해협 식민지였던 말라카에는 오래 전부터 이곳에 정착하여 살아온 뻐라나깐이라 불리는 독특한 종족집단이 있다. 이들은 화인과 말레이인의 문화적 요소들이 적절하게 결합되어 형성된 문화를 지니고 있다. 또한 주로 포르투갈인들과 말레이 혈통이 상호 혼합된 유럽인들이 존재하며, 인도네시아 출신 말레이인과 말레이 반도 출신 말레이인이 통혼을 통해 만들어낸 자위 뻐라나깐 문화, 그리고 인도인과 말레이인 출신 조상들이 통혼을 통해 이룩한 인도 무슬림의 문화가 존재한다. 그리고 인도인 바바 또는 말라카 치띠(chitty)라고 불리는 종족집단을 들 수 있는데, 그들은 힌두교 전통을 지닌 인도인 혈통을 지니고 있지만 토착 말레이 문화에 상당 분분 흡수, 통합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Clammer 1980, 1986; Nagata 1979: 25-49).

 

말라카의 말레이 문화는 전통적으로 현대 말레이 문화의 근본 토대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Kessler 1992: 146). 이는 통치자와 백성 사이의 관계에 기초하고 있으며, 말라카 술탄의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모델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말라카 술탄제의 헌장들은 말라카의 중요한 역사적 시기와 당시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이 어떻게 전승되었는가를 알려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하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말라카의 전통적인 술탄제라는 정치체로부터 영향을 받은 말레이 문화 또는 말레이 정체성은 고정되거나 동질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라기보다는 교섭이 가능하고 개방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현재까지도 지속적인 변화의 과정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김영수 외 2001). 특히 최근에 말레이시아 연방정부와 말라카 주정부의 관광정책은 말라카의 말레이 문화를 비롯한 여러 종족집단의 문화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는 그들의 민족정체성이 변화된 문화적 환경 속에서 적절하게 적응 또는 통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이 구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문화적 조건이 되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조건은 말라카의 문화적 혼종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김영수 외, 2001, 『동남아의 종교와 사회』, 오름.

박사명 외, 2006, 『동남아의 화인사회』, 전통과 현대.

홍석준 외, 1997,『동남아의 사회와 문화』, 오름.

Clammer, John R., 1980, Straits Chinese Society, Singapore University Press.

Clammer, John R., 1986, Ethnic Processes in Urban Melaka, In Raymond L. M. Lee (ed.), Ethnicity and Ethnic Relations in Malaysia, Northern Illinois University, Center for Southeast Asian Studies, Monograph Series, Occasional Paper No. 12, pp. 47-72.

Hamashita, Takeshi, 1994, The Tribute System and Modern Asia, In Japanese Industrialization and the Asian Economy, A. J. H. Latham and Heita Kawakatsu (eds.),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Kessler, Clive S., 1992, Archaism and Modernity: Contemporary Malay Political Culture, In Joel S. Kahn and Francis Loh Kok Wah (eds.), Fragmented Vision: Culture and Politics in Contemporary Malaysia, Sydney, Allen and Unwin, pp. 133-157.

Nagata, Judith A., 1979 Malaysian Mosaic: Perspectives from a Poly-Ethnic Society, Vancouver,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Press.

 

인터넷 사이트 자료

 

http://blog.naver.com/akcenter/80107888064 

http://blog.daum.net/chinesemeeting/15711883


1) 2008년에 말레이시아의 말라카는 페낭과 함께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말라카와 페낭은 장구한 역사와 다채롭고 풍부한 문화유산을 보유한 역사문화도시로 널리 알려져 왔다. 문화적 다양성과 종족적 복합성을 특징으로 하는 동남아시아 지역 중에서도 ‘진정한 아시아’ 또는 ‘작은 아시아’로 널리 알려진 말레이시아의 말라카와 페낭은 오래 전부터 중국으로부터 화인(華人)들이 이주하여 정착한 지역으로 알려져 왔고, 말레이인과 화인들의 통혼으로 만들어진, 나름대로의 고유하면서도 독특한 혼합 문화(mixed culture)를 특징으로 하는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의 현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특히 2008년 이후 말레이시아 정부는 말라카와 페낭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기념하기 위해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하고,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2) 중국에서 이주해 온 화인 남자와 현지의 말레이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뻐라나깐(peranakan)으로 불리는데, 이 중에서 남자는 바바(baba), 여자는 논야(nonya)로 불린다. 이 둘을 합쳐 바바논야라 부르기도 한다. 이 말은 명나라 공주가 말라카의 술탄에게 시집을 오면서부터 말레이인과 중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을 통칭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따라서 바바논야란 말레이시아에 이주해 온 화인들의 후예로 현지인 말레이계 여자들과 결혼하여 낳은 자녀들을 통칭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바바논야 문화는 말라카에서 시작된 것으로 유명하다. 예로부터 말라카 지방은 타 문화 수용성이 높은 데다 화인 이주민들의 영향을 받은 바바논야 문화는 독특하고 개성 있는 문화양식을 만들어 냈던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뻐라나깐은 중국과 말레이의 혼합 문화 및 종족을 뜻하는 말로 보통 중국인 남성과 말레이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을 일컫는다. 여기에는 다양한 종족들의 문화가 섞여있다. 쩡허의 원정 이후로 동남아 각지에 진출한 화인 상인들은 자기 고향을 떠나왔지만 자신의 뿌리에 대한 애착과 엄청난 부를 일구어 냈다는 자부심이 강했다고 한다. 여기에 그들의 다양한 문화까지 녹아들어 ‘뻐라나깐’이라는 독특하면서도 고유한 문화가 탄생했다.

 

3)  예컨대 논야 커바야(말라카 논야의 전통적인 의상)는 중국문화와 말레이문화의 혼합 의상이다. 중국에서 온 것이라고 해서 배척할 일이 아니다. 중국의상과 말레이의상의 분위기를 조화롭게 착용하는 것이 바바논야 의상의 특징이다. 또한 논야의 카드 놀이 게임도 유명하다. 이는 논야들이 바깥세상에서 마땅히 할 일이 없다보니 집안에서 주로 이런 카드게임을 즐겼다고 한다.원래 바바논야 문화는 말라카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페낭과 싱가포르로까지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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