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알림
Information / News

열린게시판

제목 [Vol.1/2010.09] 논단 _ 화교, 인천 大佛호텔 ․ 中華樓의 변천사 자료 연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02 조회수 313

[Vol.1/2010.09] 논단 _ 화교, 인천 大佛호텔 中華樓의 변천사 자료 연구1)

 

 

김창수 _ 문학평론가,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1 _ 집과 기억

 

집은 가장 이상적인 ‘기록보존소’의 하나이다. 집에는 집을 건축한 사람과, 집에서 살거나 드나든 사람들과 그들의 운명, 그 집의 안과 밖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로새겨지기 때문이다. 관광객들이 고궁과 사찰을 찾는 이유는 단지 건물의 연대기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궁궐과 절집이 아로새겨진 기억을 추체험하기 위해서이다. 집이 사라지면 집을 둘러싼 기억의 더미들, 그 장소가 지니고 있던 맥락도 흐릿해진다. 집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은 돌이나 나무와 같은 물질에 불과하다. 그러나 집이 대지 위에 세워지고 나면 집과 관련된 사람들의 삶과 운명을,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장소의 기억을 보존할 뿐 아니라 마치 음유시인처럼 방문자들에게 자신의 역사를 들려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가 고건축물의 유지 보수 혹은 복원에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오래된 집, 특히 역사적 의미가 농축된 집을 허무는 것은 가장 노골적인 문화의 파괴행위로 지탄받아야 한다.

 

인천의 일본인 조계지에 위치했던 대불호텔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2)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공터로만 남은 대불호텔의 변천사를 음미해보면 집을 세운 사람과 집을 드나든 사람들의 족적, 집이 서 있던 대지와 장소의 기억, 그리고 그 대지의 울타리인 도시의 역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대불호텔은 개항장의 해운업자였던 호리 일가에 의해 1888년에 건립되어 1900년대 초까지 운영된 인천의 대표적 서양식 숙박업체의 상호이자 그 건축물을 가리킨다. 대불호텔은 개항후 10여년간 호황을 누렸으나 경인철도 부설이후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한동안 임대 건물로 유지되다가 1918년 무렵 뢰소정(賴紹晶)을 비롯한 중국상인들에게 매각되어 중화루(中華樓)라는 중국요리 전문점으로 바뀌었다. 중화루 역시 공화춘(共和春), 송죽루(松竹樓)와 함께 인천의 대표적인 중국 요리점이었다. 해방 후 안팎의 어려움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중화루는 60년대 이후 다시 경영난에 봉착했고 한동안 공동 주택으로 남아 있다가 결국 건립 90여년만인 1978년에 철거되고 말았다.

 

대불호텔이 지닌 건축사적 의의나 문화사적 가치에 비해 본격적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불호텔에 대한 언급은 일본인들의 인천안내서와 관찬 사서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최초의 인천 안내서인 <仁川事情>(1893)에는 인천에서 영업 중인 주요 여관의 대표, 객실수와 객실료가 소개되어3) 있어 대불호텔의 영업에 관한 기초적 사실을 확인할 있다.

 

인천개항 50년을 기념하여 간행된 <인천부사 (仁川府史)>(1933)는 대불호텔에 관한 비교적 풍부한 기록이 수록된 자료이다. <인천부사>의 편찬자들은 인천항의 해운업자인 호리 리키타로와 호리상회(堀商會)의 활약상을 소개하고, ‘인천의 옛 거리(街の昔)’를 회고하는 대목에서 호리상회가 대불호텔을 설립한 배경과 시기, 그리고 영업부진의 원인 등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4) 이 기록은 최성연의 <개항과 양관역정>(1959)을 비롯한 대불호텔과 관련된 글의 기초로 사용되지만, 호텔 건립이나 폐업년도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대불호텔은 1897년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1885년에 대불호텔에 투숙했던 기록이 발견되면서 건립연도에 관한 새로운 검토가 필요한 실정이다.

 

한동수의 인천 청국 조계지 내 공화춘의 역사변천에 관한 연구(2009)는 인천청국조계지 내에 있었던 공화춘의 창건자 우희광과 건축의 특성에 검토한 논문으로 대불호텔에 관한 직접적인 연구는 아니지만, 인천 화교의 형성과정과 요식업 경영 방식에 관한 다양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 논문은 대불호텔의 건립과 영업활동, 그리고 대불호텔 폐업 이후 그 자리에 개업한 중화루의 영업활동과 관련된 자료들을 정리한 것이다. 이러한 자료의 복원은 일 개 건축물의 연대기를 넘어 개항 이후 급격히 변천한 인천의 산업사 혹은 식민도시 문화 변천사를 독해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2 _ 대불호텔 중화루 연대기

 

2.1 _ 대불호텔의 건립

 

대불호텔은 1887년경 일본인 해운업자인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 ?-1898))에 의해 건립되었고 초기 운영 역시 히사타로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5) 호리 히사타로는 나가사키 출신 무역상으로 제물포 개항 직후인 1883년에 아들 호리리키타로(堀力太郞:1870-?)와 함께 부산에서 仁川으로 이주하여 호리상회를 열어 무역업과 해운업을 시작했다.6) 히사타로는 인천으로 이주한 직후 일본 거류지 제12(현 중앙동 1 18번지 일대) 및 제24(현 중앙동 1 22번지 일대)의 부지를 경매 임대 받은 직후 무역업과 해운업을 위한 업무용 건물과 주거용 가옥을 신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호리 일가가 인천으로 이주한 이듬해인 1884년 겨울 일본의 경축일인 천장절(天長節) 행사를 세관 관리, 무역상, 유지 수십 명이 모여서 거류지 제12호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의 일대에서 거행하였다는7) 기록으로 인천 이주 이전에 상당한 자산을 축적하고 있었으며, 영사관 관리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활동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히사타로 사후에 그 아들 리키타로는 호리회조점(堀回漕店)을 통해 1898년 인천-블라디보스토크 항로를, 1899년에는 인천-오사카 항로를 개설하여 동아시아의 주요 국제항행권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1900년에는 진남포와 평양을 연결하는 항로를 열고 1901년에는 원산항로를 개척하여 한국의 연안 항해권도 독점하였다.

 

호리 리키타로는 일본이 러일전쟁을 수행할 때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때에는 소유선박 4척을 공용선으로 제공하면서 종군하였고, 평양 거류 일본인들이 고립되었을 때 직접 기선 게이사이호(經濟號)를 동원하여 일본인 200여명을 구출하는 임무를 수행한 바 있었다. 러일전쟁시에는 항해가 금지된 원산항로에 아키노우라호(秋の浦丸)를 투입하여 물자운송으로 전쟁을 지원했다. 1904 4월에는 원산에 기항중이던 두 척(五洋丸 및 秋の浦丸)의 선박이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아 격침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피해를 입은 와중에서도 호리는 기선 코운마루(幸運丸)를 투입하여 함경도 마양도(馬養島) 인근 해상에서 조난당한 킨슈마루(金州丸)를 구출해내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코운마루(幸運丸) 역시 러시아 함대의 습격을 받아 조난을 당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호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회사의 상선을 동원하여 전투로 인해 고립된 일본인들을 후방으로 수송하고 러시아 해군의 공격으로 조난당한 선박을 구출하는 등의 군사지원 임무를 자임하였다. 호리의 해운사가 한국의 연안항로 및 동아시아 주요 항로를 독점하는 데에는 일본이 수행한 전쟁을 자발적으로 지원한 공로에 대한 포상의 성격이 큰 것으로 보인다. 호리는 무역과 해운업, 호텔경영 등으로 부를 축적하여 ‘백만장자’로 불렸으며, 러일전쟁 후에는 해운업을 정리하고 부동산 투자와 금융업에 종사하면서 자산을 늘려간 인물이다.8) , 그림1 참고

그림1.PNG


호리 일가는 국제항로와 연안 해운업을 개척하는 한편 인천항을 드나드는 서양인을 위한 숙박시설이 부족하다는 점에 착안하였다. 호리 히사타로가 호텔을 건립에 착수하자 이를 환영한 것은 다름 아닌 일본 영사관이었는데, 개항 직후 외국인들을 위한 숙박시설이 전무한 관계로 영사관에서는 영사관을 외국인의 숙소로 제공하거나 다른 숙소를 소개해주는 역할을 맡아왔기 때문이다. 일본 영사관에서는 “증가하는 외국인들의 숙박 의뢰에 시달리다 못해 애로사항을 본국 외무성에 호소하고 외국인들을 위한 접대 예산을 별도로 세워주고 침구와 취사를 위한 시설을 갖출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서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仁川府史>)

히사타로가 호텔 건물을 짓기 시작한 것은 1887년경이며 적어도 1888년부터는 그 건물에서 본격적 영업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대불호텔의 건축에 관한 <인천부사(仁川府史)>의 언급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후 대부분의 논자들은 이 기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천개항 당시, 즉 메지지 16(1883) 4, 부산에서 인천으로 함께 이주해온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과 호리 리키타로(堀力太郞) 부자는 가업인 해운업을 하기 위해 함선 매입을 시작하고, 같은 해 말에는 일본거류지 제11호지(12호지의 착오),9) 지금의 본정통 1-1번지에 건물 한 채를 건축하였다. 이어 내외인 숙박에 적당한 시설을 갖춘 여관이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메이지20(1887)부터 이듬해에 걸쳐 벽돌조의 서양식 3층 가옥(現在 本町通 1-18번지 소재의 中華樓)을 새로 지었다. 상호는 호리 히사타로의 풍모를 고려하여 대불호텔(大佛ホテル)이라는 상호를 붙였다. 10)

 

 

호리가문이 호텔 건물을 신축하고 영업을 본격화 한 것은 일종의 문화적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호텔’이라는 영어권의 낯선 용어의 실체가 한국의 문화 속에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숙박시설로는 국내 상인들을 대상으로 한 객주(客主)나 서민 여행자를 위한 주막(酒幕)이 있었을 뿐이다. 객주가 보부상들의 영업소로 판매 상품을 보관하거나 분배하는 역할과 함께 숙식을 제공한 곳이라면 주막은 여행자들을 위한 식사나 주류 판매를 하면서 숙박업을 겸했다. 이에 비해 ‘호텔’은 외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숙박 전문시설이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또한 호텔은 ‘유럽적’이라거나 ‘서구적’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새롭거나 ‘현대적’이라는 의미, 그리고 시설이나 서비스가 ‘우아하고 화려하다’는 의미[luxe]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용어로 사용된다.11) - 그림2 ,그3 참고.


 그림2.PNG     그림3.PNG

대불호텔의 내부 시설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건물의 외관이나 객실내부, 서비스 면에서 당시의 일본인 상대의 여관들과는 뚜렷하게 구분되었던 것 같다.

 

제가 알기로는 설계자는 일본 사람으로 추측되며 2층 난간이 발코니처럼 되어 있고 3층에는 그리스의 破風 삼각형이 장식되어 있더군요. 2층으로 올라가면 조그마한 구석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아마 호텔 독방인 것 같아요. (중략) 한 가지 재미있는 게 생각나는데 호텔에서 사용하던 침대를 제가 사용했어요. 일본 사람들이 인천의 향토관에 유물로 보관하던 것을 해방되고 나서 제가 인천박물관에 있을 때 커다란 침대를 전시장에다 진열하기도 무엇하고 해서 관장실에 두고 사용했어요. 아깝게도 6.25 때 불타버렸는데 그 침대가 더블베드로서 아르칸사스 문양을 넣어 鑄物한 것인데 상당히 호화롭고 쿠션도 쓸 수 있는 정도로 좋았다는 기억이 남아요. 12)

 

<인천부사>의 기록대로라면 대불호텔은 1887년에서 1888년 초에 걸쳐 건축되었고, 영업은 1888년 초부터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논자들은 이 기록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유럽인들의 비망록이나 기행문에 1887년 이전에 이미 대불호텔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1845 4 5일에 인천에 온 아펜젤러나 언더우드와 같은 선교사, 1845년 봄에 한국으로 부임한 영국영사 칼스가 남긴 기록이 대표적이다.

 

 

(1) 언더우드(H.G. Underwood, 1885 4 5일 도착): 제물포항에 도착하기 위해서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기선은 낡은 체리오마루였는데, 이 배는 범선을 개조하여 몇 백 톤짜리 증기선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당시 제물포는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세운 극히 소수의 오두막집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우리는 <소위> 고급이라는 라이부츠(大佛)나 해리스(Harris)호텔에서 여장을 풀었습니다.13) 라이부츠의 침대들은 평평한 침상에 모포 한 장을 펴 놓은 것이 고작이었으며, 해리스 호텔에서는 한 쪽 구멍에서 물이 새들어 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물동이를 달아 매두는 지경이었습니다. 우리는 쿠퍼씨의 도움을 받도록 지시를 받았었는데, 그가 나귀들을 구해 주어서 우리는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14)

 

(2) 아펜젤러(G.H. Appenzella, 1885. 4 5일 도착): 끝없이 지껄이고 고함치는 일본인, 중국인 그리고 한국인들 한복판에 짐들이 옮겨져 있었다. 다이부츠 호텔로 향했다. 놀랍게도 호텔에서는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편하게 모시고 있었다.

 

(2)칼스(W.R.Carles, 1885 5월 도착): 나의 숙소는 일본인 거류지에서 단 한 채밖에 없는 2층집의 위층이었다. 앞의 창문을 통해서 바다의 전경이 내다보이며 마루 건너에 집주인과 그의 친구가 살고 있었다.15)

 

 

언더우드나 아펜젤러에 기록에 의하면 호리는 대불호텔의 건립 이전에 이미 서양인을 상대로 숙박업에 착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칼스 영사가 묵었다는 곳은 일본 영사관일 수 있으나 ‘집주인’이 숙소의 맞은편에 기거하고 있었다는 내용으로 볼 때 그 곳 역시 호리의 가옥일 가능성이 높다.

 

다이부츠 호텔에 비가 새고 있었다는 언더우드의 회고나 ‘유일한 2층집’에 묵었다고 한 칼스(Carles) 공사의 말을 종합하면 호리가 대불호텔이 위치한 자리에(혹은 인근에) 목조 2층 건물을 건립했으며, 초기의 숙박업이 그 건물에서 일정기간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들이 기록 당시의 사실과 체험 당시의 사실을 혼동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호리가 첫해에 지은 집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 가운데 개항2주년인 1884년 두 번째 천장절 행사를 치룬 뒤 고바야시(小林) 인천영사가 본국 외무성에 보고한 문서가 있다.

 

 

올해는 인천 개항 이후 인가가 점차로 늘어나 거류지 체제가 이루어진 첫해로 거류민들은 집집마다 일장기를 내걸고 인천에서 처음 맞는 천장절을 축하했습니다. 정오 12시부터 무역상들 가운데 수십 인이 뜻을 모아 제12호지 ‘호리 히사타로의 누각 위에서’16) 입식 연회를 열고 세관 관리를 비롯한 내외 동업자들을 초대하였는데, 참석한 사람이 수십 명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4시부터는 감리 인천항 통상사무 및 각국영사 등을 초대해서 밤에 수십 개의 홍등을 밝히는 등 실로 인천에는 개항 이래 보지 못한 가장 화려한 시가지 모습을 펼쳐졌습니다.

 

오후 7시부터는 영사관에서 각국영사관 직원 및 무역상 일동의 입식 파티가 열렸고 오후 10시에는 모두가 오늘을 축하했습니다. 위와 같이 천장절의 모습을 개략적으로 보고 드리는 바입니다.

-메이지 17(1884) 11 3, 인천영사 고바야시(小林)

 

 

이 보고서에서 호리 히사타로의 집을 ‘누’()로 표현하고, 수십 명이 참석한 천장절의 공식 연회를 바로 그 ‘누 위에서’ 두 차례나 개최했다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자어 누()는 일반적으로 위층이 있는 집이나 구조물을 지칭한다.17) ‘누상(樓上)’이란 2층을 말한다. 그렇다면 호리가 1884년에 지은 건물은 목조 2층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규모도 수십명이 공식 연회를 할 수 정도라야 된다. 그렇다면 칼 공사가 묵었다는 2층집에 대한 의문도 해소된다. 물론 호리가 1885년 경부터 숙박업을 시작하였다고 해서 한국호텔사의 기점을 1885년으로 소급하기는 어렵다. 왜냐면 호텔은 시설과 서비스를 아울러 지칭하는 용어일 뿐 아니라 한국의 경우 서양식 건물에서 이루어진 근대적 고급 숙박업을 지칭한다고 봐야 하므로, 일본식 목조 건물에서 이루어진 1888년 이전의 영업을 호텔 영업이라고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호리상회가 호텔업에 착수할 때는 인천항을 통해 드나드는 유럽인들이 매년 증가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개업하자마자 인천의 대표적인 숙박업소로 부각되었다. 1888년 총209명이었던 서양인의 출입항자는 1897년에 이르러 637명으로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기간 중 세 배이상 증가했음을 의미한다. (표 참조) 그런데 대불호텔의 투숙자가 서양인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기간 중 인천항을 통한 연간 입출항 인원도 4천 명에서 14천 명으로 급증하고 있어서 대불호텔을 비롯한 당시의 인천의 숙박업계는 상당한 호황을 누렸을 것으로 보인다. 경인철도 부설 이전에 인천으로 입국하는 외국인들은 교통 여건상 대부분 인천에서 하루를 머물러야 했으며, 출항자 역시 미리 인천으로 와서 배편을 기다려야 했다. 여행객의 입장에서 보면 호리 상회가 국내-외 정기선을 운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외항과 내항을 연결하는 하역 운반업도 겸하고 있어서 대불호텔에 숙박하게 되면 누릴 수 있는 이점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 때문에 대불호텔은 단시일 내에 제물포의 다른 숙박업소를 압도하면서 독점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 참고.

표1.PNG

 

 

2.2 _ 경인선 개통과 러일전쟁 이후의 대불호텔

 

1900년까지 십여 년 간 개항장의 숙박업을 주도하던 대불호텔은 경인철도의 개통으로 결정적인 변화를 맞게 된 것으로 보인다. 1899년에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우마차로 12시간 소요되던 경성과 인천은 1시간 거리로 단축되었다. 배에서 내린 여행자들은 인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출발했다. 그러나 더 결정적인 타격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떨어진 사건이다. 조선이 일본의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함에 따라 국제 항구도시였던 인천의 위상도 일본의 식민지 개척루트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인천을 드나드는 외국인은 줄어들고 일본인이 늘어났다. 일본 여행자들이 비싼 숙박료를 지불하면서 낯선 서양식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불호텔을 선택할 이유는 없었다. 대불호텔이 영업난에 곤란을 겪을 즈음 일본식 여관들이 새로 문을 연 것으로 보인다. 대불호텔은 서구열강과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서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던 시기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인천부사(仁川府史)> 편찬자들도 대불호텔이 몰락한 원인 중의 하나가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가 일본 국토의 일부”로 편입된 결과임을 지적한 바 있다.

 

메이지32(1899) 경인철도가 개통이 되자 교통이 편리해져서 여행자는 인천에서 머물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도 조선의 교통 동맥이자 국제항구로서의 면모는 유지하였으나, 드디어 러일전쟁을 고비로 조선이 보호국을 거쳐서 한일합병을 맞이하여 한반도가 일본 국토의 일부분이 되고, 사회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교통 동맥도 큰 변화를 일으켜 조선의 국제 항구였던 인천은 드디어 그 위치를 잃게 되어, 다만 조선 서부에서의 주요 국내 항구로 전락하여 국제 항구로서의 시대에 막을 내려, 그 존재 가치에 근본적 변화를 일으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위풍당당했던 건물도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서구인들도 이제 이 숙소에서 신세를 질 필요가 없어지고, 왕년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18)

 

각종 인천 안내서에 나타난 대불호텔 및 숙박업 관련 내용을 살펴보면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대불호텔의 위상변화가 생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898년까지 대불호텔은 숙박업소를 소개할 때 늘 먼저 소개되었다. 대불호텔은 일본인 거류지의 자랑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일전쟁 일어나기 한 해 전에 간행된 <仁川繁昌記>에서 대불호텔은 일본여관들 뒤에 소개되고 있다. 서구인의 출입이 줄어들면서 첨차 경영난에 봉착한 실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참고.


표2.PNG

 

대불호텔이 러일전쟁 직후 바로 영업을 중단한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1906년 동경에서 간행된 <일본여행안내 Guide-Book for Tourist in Japan> 에 인천의 여관 중 하나로 대불호텔이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08년에 간행된 <仁川開港25年史>부터는 대불호텔에 대한 언급이 사라지는 것으로 보아 대불호텔은 1907년 경 경영난으로 폐업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겠다.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차례로 승리하고 조선에서의 지배권을 확립해갈 무렵에 제국주의 시대의 상징이었던 대불호텔은 오히려 영업의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고 문을 닫게 된 것이다. 러일전쟁 기간중 인천 경제는 전쟁 특수로 인해 잠시 호황국면을 맞이했지만 곧바로 침체기에 들어갔다. 그리고 일본인의 이주는 증가했지만 대불호텔뭘을 요 고객이었던 외국인의 왕래는 급격히 감소했다. 인천에 거주하던 서구인의 숫자도 러일전쟁기를 고비로 감소한 추세를 보이는데, 이는 인천이 국제항구도시에서 일본인 중심 도시로 변모해갔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림4 참고.

사진4.PNG


 

2.3 _ 산동 노동자의 유입과 중화루의 개업

 

대불호텔이 영업부진으로 문을 닫은 뒤, 10여 년간 이 건물은 몇 차례 전세로 임대되었으나 성공한 업자는 없었던 모양이다. 당시 인천의 경제규모가 심각하게 위축된 상태에서 3층 건물 규모의 건물을 유지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대불호텔 건물이 ‘중화루(中華樓)’로 바뀐 시기는 1918년경이었다.19) 뢰소정(賴紹晶)을 비롯한 40여 명의 중국인들이 대불호텔을 인수하여 일본인과 중국 상인들을 상대로 북경요리 전문점을 창업한 것이다.20) 당시 인천에는 몇 개의 중국 요리점이 성업 중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중국요리점은 산동성 출신 우희광(于希光:1886-1949)을 비롯한 화교들이 1912년경에 설립한 ‘공화춘(共和春)’이었다.21) 공화춘의 전신은 산동회관'(山東會館)으로 알려져 있다. 산동회관은 산동성 출신 상인들의 동향인 친목회관으로 설립되었으며, 숙식을 제공하는 객잔(客棧)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22)

 

중화루는 개점하자마자 그 명성이 인천은 물론 경성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성장했다. 일본인들이 폐허처럼 방치하던 대불호텔을 중국인들이 인수하여 문전성시를 이룬 셈이다. 다음 인용문에는 중화루의 갑작스런 성공에 대한 일본인의 이중적 심사가 담겨 있다.

 

그런데 다이쇼 7, 8년경(1918-9)부터 중국인이 여기서 중국요리점을 개업하여 어떤 영문인지 크게 성공하여 인천의 중국요리점이 경성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을 정도가 되었다. 건물에는 어울리지 않는 금색으로 칠한 간판이 이국 정서를 자아낸다. 그리고 그 중 한 방에는 지금도 왕년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오래된 피아노가 취객들의 장난감 취급을 받으며 아름답게 울리고 있다. 한 때 명성을 떨친 기생이 나이 들어도 이가 빠진 입술로 아름다운 노래를 하는 듯하다. 23)

 

중화루의 성공 이면에는 인천 화교사회의 구성변화가 있었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후 조선에서 정치적 지위를 상실한 청국거류민은 패전국민으로 전락하여 화교사회도 크게 위축되었다. 1894년 이후 상당수의 유력 청상들이 인천을 떠났으며 이들이 거주하던 가옥을 일본인이 차지하게 되면서 청국조계지는 한때 잡거지로 변해갔다.24) 그러나 상당수의 화교들이 귀국했음에도 불구하고 상권회복을 위한 청상들의 노력으로 대청무역은 일정하게 유지되었으며, 1920년대 산동 화공(華工:쿨리)의 대규모 이주가 시작되면서 인천의 화교사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산동 출신 화교의 대거 이주는 1898년의 황하 대범람, 1899년과 1900년에 이은 산동지방의 극심한 한발, 군벌들의 가렴주구 등으로 인해 1910년경부터 해마다 수십만의 인구가 러시아, 조선, 몽골 등지로 이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화하는 과정에서 토목, 건축을 비롯한 각종 서비스 산업 분야에서 값싼 임금노동자를 요구한 것도 지리적으로 인접한 산동인의 조선 이주를 촉발하였다.

 

이로 인해 1918년 경 중국인 노동자는 조선 광산노동자의 18%를 점하게 되었으며, 1923 1월에서 3월까지 3개월간 1만여 명의 중국노동자가 인천항을 통해 들어왔으며, 1924년의 경우 6개월간 2만여 명의 중국노동자들이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1910년 이후 1920년대에 이르러 인천의 화교사회가 상인 중심에서 노동자 중심으로 재구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노동자들이 매월 수천 명의 규모로 이주해오면서 이들의 생활에 필요한 요식업과 각종 판매업이 증가하였다.

 

실제로 우희광이 처음 설립한 ‘산동회관’이 산동 출신 인사들의 친목단체를 겸한 식당으로 운영되다가 점차 요리점으로 바뀌어나간 처럼, 중화루 역시 청상들이 상거래와 친목을 도모하는 사교장과 음식점의 성격을 겸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화루는 폐허의 대불호텔 건물을 일약 인천의 대표적 명소로 바꾸어 놓았다. 웅장한 3층 벽돌 건물은 중국풍 간판으로 호화롭게 장식되었고, 주방에는 북경에서 초빙한 주대인(周大人)이란 요리사가 있어 개업하자마자 대성황을 이루었다. 세계 1차 세계대전의 전시 호황에 편승하여 일인은 물론 한국 사람의 출입까지 잦았고 소문이 퍼져 서울 손님까지 모여들었다고 한다.

 

뒤이어 건너편의 3층 목조 건물인 이태 호텔(Steward 호텔)는 동흥루(東興樓:훗날 상호가 松竹樓로 바뀜)로 개업하고 얼마 후에는 경동(京洞)에 평화각(平和閣)과 사동(沙洞)에 빈해루(濱海樓)등이 차례로 문을 열게 되면서 인천은 청요리의 총본산격이 되었다.

 

당시 인천부청에서 작성한 과세자료에 의하면 중화루 40,000, 동흥루 20,000, 공화춘 9,000원으로 나타나고 있는데25), 이는 중화루가 동흥루의 2, 공화춘의 4배에 해당하는 매출을 올렸던 대표적 청요리집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26)

 

이 무렵 청관과 新浦洞에만 있던 청인 호떡집이 京洞, 畓洞, 昌榮洞 등 한국촌에까지 진출하여 10여 군데가 넘었다. 한 개에 5錢하는 큼직한 호떡을 두 개만 먹으면 뿌듯한 요기가 되어 특히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27)

 

자장면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 아닐까 한다. 초기에는 인천으로 대거 이주한 산동출신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점이나 허름한 식당에서 판매된 간식이었던 것이 점차 일반 음식점에서 판매되는 과정을 밟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20년대까지만 해도 자장면의 주요 구매자는 중국인이었으며, 한국인 식당에서 조리되거나 외식의 메뉴로 확산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4 _ 중화루 위기

 

1918년 뢰소정 등이 창업한 중화루는 1931년 만보산 사건 이후 작지 않은 변화를 겪게 된다. 만보산 사건에 흥분한 한국인들의 국내 중국인들에 대한 공격이 극심해지자 중화루의 공동 창업자였던 장연독(張延讀)등이 산동으로 돌아가는 등 경영상의 변화가 있었다. 그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중화루의 경영은 뢰소정의 아들 뢰성구(賴誠久), 손자 뢰성옥(賴聲玉)에 의해 5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 그림5, 6,7,8 참고.


그림5.PNG그림6.PNG

그림7.PNG그림8.PNG

 

중화루의 위기는 해방 이후에 찾아왔다. 한국전쟁 후 화교에 대한 한국인의 시선이 부정적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한국정부의 화교차별 정책은 화교와 화상의 활동을 극도로 위축시켰다. 상당수의 화교들이 미국, 캐나다, 일본, 대만 등지로 재이주했다. 특히 박정희 정권 때 시행된 제2차 화폐개혁은 화교 자본의 근간을 뒤흔들었고,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은 화교의 경제활동을 극도로 위축시켰다. 해방 후 4만 명에 이르던 재한 화교가 약23천명으로 감소한 것은 각종 차별정책의 결과로 보인다. 창업자인 라이 가문이 1950년대에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 중화루의 옛 명성도 차츰 쇠퇴해 갔다.

60년대 이후 중화루는 청관거리가 차츰 폐허처럼 변해가는 것과 운명을 같이하면서 경영난에 빠져들어 갔고 결국 70년 초에 문을 닫게 된다. 그로부터 1978년 철거될 때 까지 중화루는 간판만28) 걸려 있었을 내부는 월세집으로 바뀌어 그때까지 남아 있던 대불호텔의 기물이나 중화루의 고급 가구들은 대부분 세입자들이 땔감으로 쓰거나 내다버렸다고 한다. 중화루가 폐업한지 10여년이 흐른 뒤인 1983, 한때 중화루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명성을 드높이던 공화춘도 문을 닫기에 이른다.

 

1980년대 초 중화루의 명맥을 잇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공화춘의 대표였던 위홍장(于鴻章)의 아들 우심진(宇心辰)을 대표로 양감민(楊鑑珉), 정관성(鄭官聲:한국인)등이 중구 중앙동 4(7-1번지)에 중화루를 재창업한 것이다. 재창업한 중화루는 한때 양감민에 의해 운영되다가 현재는 손덕준(孫德俊)사장에 의해 운영되면서 차츰 활기를 되찾고 있다. 29)

 

 

3 _ 대불호텔의 빛과 그늘

 

3.1 _ 기행시문에 나타단 대불호텔

 

대불호텔 개업으로 서양인들을 위한 숙박시설을 갖추었지만 객실 수가 11개에 불과했으므로 늘어나는 입출국자를 모두 수용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 무렵 서양인을 대상으로 한 호텔로는 중국인 이태(怡泰)의 스튜어드호텔(Steward Hotel)호텔이 문을 열었고30), 1890년경에는 헝가리인이 운영하는 한국호텔(Hotel de Corée)도 영업을 하고 있었다. 1890년경 대불호텔의 객실료는 상등실 250, 일반실 2원으로 다른 여관에 비해 높았다31). 당시 한국인 노동자 하루 임금이 23전이었던 사실과 비교해보면 숙박비가 상당히 비싼 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식 호텔 두 곳과 일본인 여관의 숙박료를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 3 참고.


 표3.PNG


한편 이 무렵 대불호텔을 소재로 쓴 한시 한편이 남아 있는데, 요코세라는 일본인이 개항장의 도시 풍경을 제재로 한 연작시인 인천잡시(仁川雜詩)에 포함되어 있다.

 

붉은 벽의 누각은 구름위에 솟아 있고,

묵어 간 나그네가 누구인지 묻지 않네.

여관 주인을 큰 부처라 받드는데,

집주인은 도주(陶走)와 의돈(猗頓)처럼 큰 재산을 이루었네.

 

一樓丹壁入雲危, 不問先知住者誰.

客舍之魁堆大佛, 家翁貨殖以陶猗. 32)

 

이 작품은 개항장의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대불호텔의 위용을 묘사하고 일본인들이 ‘인천의 위인’이라고 일컬었던 호리 히사타로의 성공신화를 예찬하고 있다. 한편 이 무렵에 인천항에서 서구인을 상대로 영업 중이던 세 호텔에 대한 새비지-랜도어(Savage-Lndor)가 남긴 기록을 살펴보자.

 

내가 제물포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는 사실상 세 곳의 유럽인 호텔이 있었다. 이 호텔들은 실재적인 면보다는 명목상으로 유럽식 호텔의 인상이 더 짙었다. 그러나 하여튼 유럽인을 위한 호텔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나는 몹시 피곤해서 어딘가를 선택해야만 했다.

 

중국인이 그 중의 한 호텔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 호텔의 소유주가 한때 미국 배의 웨이터를 했었다는 이유로 스튜어드 호텔(Steward's Hotel)이라고 불렀고 그때부터 스튜어드라는 단어는 성씨로 사용했다. 두 번째 호텔은 한국 호텔(Hotel de Corée)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것으로서 헝가리인의 소유였고, 군함이 그 항구에 기항할 때 병사들을 위해 가장 인기 있는 휴식처가 되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모든 종류의 알코올음료를 잘 갖추어 놓은 살롱이 그 호텔의 주요한 특징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터키어와 아랍어는 물론 조선말과 일본어에 이르기까지 이 지구상의 모든 언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주인의 딸이며, 가장 매혹적인 나이 어린 숙녀이며, 가장 세련되고, 교양 있는 처녀가 술잔을 카운터 너머로 건네주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호텔은 종업원들이 현대적 말씨를 사용하며, 고상한 맨션형으로서 아주 새로운 건물이었는데 일본인의 소유였다. 그가 휴식처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은 대불(大佛)호텔(일본 사람들은 다이브츠라고 발음한다)인데 영어로는 거신(巨神 : Giant)이라는 뜻이었다.33)

 

대불호텔의 개업에 대해 <인천부사>의 편찬자들은 “메이지22(1889)34) 미개했던 국토에 들어선 대하고루(大廈高樓)가 개화된 여행자들이 이국에서의 첫날밤에 편안하게 꿈을 꿀 수 있도록 제공해 준 좋은 침대와 방은 그들의 여독을 풀기에 충분했을 것이다.”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대불호텔은 서양식 건물에 고급 침구를 갖춘 객실, 피아노가 구비한 연회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서양요리를 제공하고 영어를 사용하는 종업원이 서비스를 하고 있어서 당시 일본식 여관과는 뚜렷이 구별되었을 터이다. 1901년에 인천을 방문한 프랑스 고고학자 에밀 부르다레(Emile Bourdaret)는 해변에 위치한 대불호텔의 뛰어난 조망을 특징으로 평가하기도 했다.35) 그러나 대불호텔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일본인들의 기준에서 본 것이지 실제로 대불호텔에 투숙했던 서양인들의 인상기를 보면 의외로 불평이 적지 않다.

 

새비지-랜도어: 그 이름이 주는 신성함과 아마도 그 건물의 겉모양의 깨끗함에 매혹되어 나는 운 좋게도 이 호텔을 본거지로 삼았다. 나는 천국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지만 제물포에 바로 이 거신 호텔보다 더 이 지상에서 하늘나라와 같은 거룩한 곳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 건물은 분명히 새로 지은 건물이어서 방들은 축축하게 냉기가 돌았다. 그래서 내가 침대를 살피러 다가가 보니 침대보가 다소는 의심할 정도로 깨끗함을 알 수 있었다.(중략) 그날 저녁에는 고기를 얻을 수 없으며, 상점에 있는 유일한 식료품은 작은 압착 우유 통조림뿐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한숨을 쉬면서 ‘오! 하나님!’이라고 탄식했을 뿐이었다. ......

 

그러나 조선의 혹한은 음식의 질과 다양성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일주일의 대부분을 대불호텔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는 로스비프 그리고 다음날은 무틴숍(mutinshops)이라는 이름의 정체 모를 고기 조각을 이따금 볼 수 있을 뿐이었으나, 불행하게도 너무 질겨서 셰필드(Sheffield)()의 칼로도 거의 자를 수가 없었으며, 사람의 치아나 턱이 아무리 날카롭고 강할지라도 그 고기를 씹어 먹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제물포에 거주하는 상인인 미국인 신사로부터 외식 초대를 받곤 했다. 그런 기회에 나는 그렇지 않았으면 잃을 뻔했던 식도락을 보충했다. 36)

 

이뽈리뜨 브랑텡: 그 호텔(대불호텔)의 시설들은 겉으로 보기엔 그럴싸하게 보였으나 내부를 들여다보면 실로 비참할 정도로 초라했다. 한국의 다른 객관(客館)들보다는 훨씬 뛰어났지만, 호텔 지붕은 비가 줄줄 샐 정도였다. 숙박하는 손님은 우산이 있으면 그걸 펴서 비를 막았지만 불행히도 없을 경우에는 얼마 못 가서 빗물에 온 몸이 흠뻑 젖지 않을 수 없었다. 침대는 훌륭했으나, 요리에 대해서는 차마 여기에 기록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37)

 

1890년에 호텔을 이용했던 새비지-랜도어처럼 당시 대불호텔에 투숙했던 서양인들의 불평은 제공되는 요리에 대한 것이다. 온수나 욕실이 구비되지 않은 것에 대한 불편함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비가 줄줄 샐 정도’였다는 이뽈리뜨 브랑텡의 회고는 의외인데, 아마도 그가 방문한 무렵인 1900년경에는 대불호텔의 건물은 노후화가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3.2 _ 대불호텔 투숙자 대한 일본영사관 기록 및 중화루 영업실태보고

 

대불호텔의 연대기를 작성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당시 일본측은 대불호텔을 이용했던 인물들의 동정이 상세하게 관찰하여 상부에 보고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되었다. 주목할 것은 대불호텔의 영업기간이 일본에 의한 강제병합 이전이라는 점이다. 대불호텔은 제물포 개항 직후인 1887년경 개업하여 러일전쟁 후인 1907년 무렵에 폐업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었다. 일본측은 병합 이전부터 인천 일본영사관을 통해 대불호텔에 투숙한 사람들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고 요인들의 경우 치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일본영사관이 대불호텔 투숙자의 동향에 대한 첩보를 수집하여 상부에 보고한 내용을 살펴보면, 호텔 투숙자의 인적 사항과 행선지, 특이점은 물론 심리적 상태까지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8)

 

1897 8 17, 일본 인천영사관은 러시아 장교 푸치아타 대좌가 수행원과 함께 대불호텔에 투숙한 사실을 가토(加藤) 주한일본공사에게 보고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는 “ 푸치아타 대좌와 그란드진스키가 8 16일 인천으로 와서 대불호텔에 투숙하였는데, 푸치아타는 10일간 체류할 예정이며, 그란드진스키는 4일후 서울로 돌아갈 것임. 이들을 호위하기 위해 시위대(侍衛隊)의 소위(少尉) 김유찬(金劉贊), 궁내부 주사 2, 순검 2명이 인천으로 왔”다는 내용이 골자이다. 8 18일자 보고서에는 러시아 육군 무관 1명과 병사 2명이 인천항으로 입항한 사실과 대불호텔에 투숙중이던 그란드진스키와 무관이 19일에 귀경할 예정이라는 것이다.40)

 

같은 해 10 29일에는 러시아 사관 스트레비키 일행 4명이 대불호텔에 투숙한 사실과 함께 이들 일행이 소지한 물품, 이후의 행선지에 대한 탐문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스트레비키는 사관 모습인 사람 1, 수병 2(군용 총을 휴대했음), 중국인 1명을 데리고 탄약이 든 것 같은 상자 1개를 갖고 오늘 오후 2시 이곳 대불 호텔에 들어가, 먼저 목포 행 배편을 묻고 다시 또 진남포 행 배편을 물었음. 오늘 오후 4시에 출범하는 광제호(廣濟號)가 있었으므로 그 배표를 구해서 일행이 그 배에 탔음. 그러나 배의 출범이 내일 오전 4시로 연기되었으므로 그때까지에는 또 행선지를 바꿀지도 모르겠음. 이상한 점이 있으면 즉시 보고하겠음. 이쓰이(石井) 영사는 진남포로 향했음. 41)

 

이러한 보고서는 조선 내에서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러시아측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일본의 대응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일본의 감시가 조선 내 러시아측 동향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조선 관리의 이동 상황에 관해서도 치밀한 관찰을 하고 있었다.

 

1900 2 8, 황제양위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망명했던 친일개화정객 안경수(安駉壽)가 일본에서 비밀리에 인천으로 귀국할 당시의 동정을 여러 차례 보고한 바 있다. 당시 일본 영사관 측은 안경수(安駉壽)가 인천에 도착하여 대불호텔에 투숙한 직후, 조선정부에 자수할 권유하면서 그의 반응을 관찰하였다. 안경수는 일본 공사와 영사의 보호를 받으면서 국왕의 특사를 요청할 심산으로 귀국하였으나 귀국 직후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하여 일본으로 다시 망명할 것인지 아니면 자수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했다. 그는 권총을 휴대하고 호텔 객실의 출입문이 열고 닫힐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울 만큼 극도의 예민한 상태로 조선정부의 동태를 주시하였다 한다. 안경수는 거취를 거듭 고민하다가 조선 정부의 입장이 얼마간 누그러졌다고 판단하고 관계 요로에 청원을 하여 구명운동을 할 계획을 세우고 귀경하였다.

 

[安駉壽 長門丸으로 着仁 歸國後論罪歸趨에 관한 件]

安은 예정대로 오늘 아침 長門丸으로 仁川에 도착하여 무사히 大佛호텔에 상륙했음. 다만 통역생을 시켜 자세한 방침 등을 전하고 아무런 보호도 해줄 수 없다는 취지까지도 전했는데 安이 곤란한 모양임. 이번 귀국은 日本에서도 전도의 가망이 없고 한편에서는 동인에 대한 韓國 조정의 의향도 약간 관대하게 기울어졌다고 듣고 있으니 어쨌든 일단 귀국하여 要路의 인물에게도 사정을 호소하여 국왕의 특사를 청할 생각임. 이미 金永準, 權在衡에게 보낼 서면도 준비하고 오늘 바로 우송할 각오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자수해서 무죄를 변명하여 처분을 바랄 예정임. 그 결과 流罪 징역의 몸이 되어도 어쩔 수 없다고 말했음. 동시에 또 우리 공사, 영사의 보호를 받으면 이번 귀국의 목적도 이루어질 것임. 그러나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고 한국 조정도 무사히 한국 체류를 허용하지 않으면 혹 다시 長門丸으로 일본에 가게 될 것인지, 여하튼 2, 3일 체재하여 이곳에서 상황을 살필 것임. 어쨌든 보호도 청하지 않았고, 결심도 있는지 없는지 모호한 것이 例의 조선식이어서 밝혀 낸 것이 없음. 이상 일단 보고함.

1901 6 4, 인천영사는 조선 정부의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민병석(閔丙奭)이 인천에 내려와 인천항 감리서를 방문하고, 그날 오후 인천에 내려온 법부, 내부, 농상공부의 각 주사 3명과 이곳 감리와 함께 모두 대불호텔에 모여 저녁 식사를 하고 서울로 되돌아갔다는 내용을 하야시(林權助) 공사에게 보고하고 있다.

 

[閔丙奭 大臣 下仁에 관한 件]

어제 3일 오전 중 農商工部大臣 閔丙奭이 仁川에 내려와 仁川港 監理署로 가고, 그날 오후 인천에 내려온 法部, 內部, 農商工部의 각 主事 3명과 이곳 감리도 함께 가담하여 저녁 무렵부터 大佛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오늘 귀경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과연 어떠한 용무로 인천에 내려왔는지 탐문하지 못했습니다만, 별도로 다른 외국인과 회견한 기색은 없으나 혹은 일요일을 이용해서 유람을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됩니다. 때가 때인 만큼 참고삼아 말씀 올립니다. 또 당국이 러시아 학교 졸업생 중 2명을 선발해서 러시아에 유학을 명하고 이들을 전송하기 위해 그 학교 러시아 교사 비율유프가 어제 3일 인천에 내려와 그날 當港에서 출범한 信濃川丸에 재학생 2명을 실어 釜山을 향해 출발시켰다고 하므로 이상 일괄 보고드립니다. 敬具. 1900 6 4, 領事 伊集院彦吉印

 

이러한 사료로 볼 때 일제는 개항장 인천을 출입하는 내외국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었으며, 대불호텔을 비롯한 숙박업소의 투숙자들의 은밀한 움직임도 감시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의 인천의 여관들, 특히 대불호텔의 객실은 사적 공간이 아니라, 푸코(Michel Foucault)가 말한 또 다른 ‘내부’ 즉 일종의 열려 있는 ‘감옥’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대불호텔은 외국인 대상의 고급 숙박업소였기 때문에 투숙자들의 대부분은 한국으로 입국하는 외교관이나 선교사, 조선정부의 관리, 외국군 장교들이어서 일제의 관심대상이었을 것이다.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병합한 다음 헌병이나 경찰을 통해 민간인과 여행자의 이동을 감시하는 체제를 정비하게 되는데, 개항장의 경우 강제병합이전에도 다양한 수단으로 국내외 인사의 동향을 감시하고 있었다. 대불호텔의 주인이었던 호리 가문의 주된 사업이 해운업이었던 관계로 일본 관리들과의 긴밀한 협조 체제를 전제로 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협조체제는 대불호텔의 투숙자였던 외국인이나 조선 정부의 요인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데서도 작동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고문의 내용 가운데 상당부분은 호텔종업원이 아니고서는 파악하기 어려운 은밀한 것이다. 대불호텔에 관한 일본의 관찰기록은 식민지 근대기에 있어서 그 어떤 공간도 제국주의의 시선을 비껴가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준다. - 4 참고

표4.PNG

 

개항기에 대불호텔의 출입자가 일제의 중요한 감시 대상이었다면, 1940년대 들어 일제는 전시동원체제를 강화하면서 유흥주점과 고급 요리점의 영업실태를 지속적으로 조사 보고하고 시책을 위반하였다고 판단되었을 경우 제재를 가하였다. 1941년 인천의 대표적 청요리집인 중화루와 공화춘의 출입인원과 매출액을 조사한 경기도경은 도내 주요 요리점의 전년매출, 전월매출, 당월 매출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한 바 있는데42) 인천의 주요 요리점의 출입인원과 월별 매출액은 다음과 같다. - 5 참고

 

이 보고서에 의하면 중화루의 1941 8월 매출액은 전월 및 전년 동기에 비해 감소하고 있으나 고객 수는 월 4,000명 수준으로 거의 변화가 없다. 공화춘의 매출은 1940년에 비해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고객수도 일정하게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중화루의 고객 수 대비 매출액이 공화춘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이 눈에 띤다. 이것은 두 업체의 영업방식과 관련될지 모르겠다. 즉 중화루의 출입자 1인당 평균 식대가 1.53원인 데 비해, 공화춘의 경우 1인 평균 식대는 2.70원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요리와 식사를 공화춘은 고급 요리 중심의 영업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표5.PNG

 

4 _ 식민지 근대의 유산과 가치

 

대불호텔은 인천으로 이주한 일본인 해운업자 호리 히사타로가 1887년에 3층의 서양식 건물을 건축하여, 1888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한국 최초의 호텔이었다. 호리 히사타로는 이 서양식 건물을 건축하기 2-3년 전부터 대불호텔(Hotel Daibutsu)이란 상호의 여관에서 인천항을 출입하던 서양인을 상대로 근대적 숙박업을 경영한 것으로 보인다. 대불호텔은 서세동점의 시대적 변화가 식민지 항구도시에 미칠 영향을 재빨리 간파한 한 일본인에 의해 세워져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대불호텔은 정작 경인철도가 부설되고, 러일전쟁 이후 한국이 제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시기, 곧 인천이 이른바 일본의 본격적 식민도시로 변화하는 시기인 1907년 경 경영상의 위기를 맞아 20여년간 지속된 영업을 중단하기에 이른다.

 

대불호텔의 폐업 이후 10여 년간 퇴락해 있던 이 건물은 1918년경 뢰소정(賴紹晶:라이샤오징)을 비롯한 청상인들에 의해 북경 요리 전문점으로 바뀌어 전국적 명성을 얻게 되는데, 그 중화루의 창업과 성공의 배경에는 1910년 이후 급증한 산동출신 노동자들이 있다. 산동출신 이주노동자들은 출신 지역별로 친목조직을 만들어 고용주에 대응하는 한편 그들의 미각에 익숙한 고유의 음식문화를 인천에 뿌리내리게 했다. 인천의 청요리집의 번성과 자장면의 전파는 이들에 의한 것이다.

 

해방 후 지속된 한국정부, 특히 박정희 정권의 노골적인 화교차별정책으로 인한 화교 경제의 침체와 화교사회의 해체라는 변화의 물결은 중화루의 영업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중화루를 세우고 한국 유수의 청요리집으로 발전시켰던 라이 가문이 50년대에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북경요리 전문점 중화루의 명성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1978년 대불호텔과 중화루의 성쇠를 간직해온 건물마저 철거되었다. 그런데 6-70년대에 박정희 정권의 혼분식장려정책이 고급 중국요리점의 경영을 어렵게 만들었지만 자장면 배달을 전문으로 하는 중국집과 분식점의 전국적인 확산을 가져왔다. 특히 자장면은 ‘더욱 일하는 해’와 같은 구호로 대표되는 개발독재기의 산업노동자나 일용노동자들에겐 식사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는 패스트푸드였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활성화 혹은 중화루의 명성을 계승하기 위한 화교의 노력은 1980년대에 시작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김대중 정권 이후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한도의 철폐’ 등과 같은 개방 정책의 시행, 한중수교로 체결로 인한 교류의 증가에 힘입어 점차 가시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화루의 부침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국 화교의 상업활동 정치적 요인에 의해 좌우되었다는 점이다. 국제도시 인천의 경우 다양한 경제집단과 문화가 공존할 때 그 생산성과 역동성이 높아진다는 점을 감안할 때 화교를 비롯한 다양한 이주문화가 발양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대불호텔의 복원이 지역에서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대불호텔이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라는 문화사적 의의만으로는 그 근거가 부족하다. 대불호텔의 주인 호리 히사타로와 그 아들 리키타로는 일제 식민 정책의 첨병으로 일제의 지원 아래 ‘이운사’로 대표되는 한국의 초기 해운업을 잠식하여 한국의 연안 해운업과 동아시아 주요 항구를 잇는 해운업을 독점하면서 그 부를 축적하였다. 호리 재벌이 외국인을 상대로 한 고급 숙박업에 손을 댄 것은 주력사업인 해운업을 보완하고 그 효과를 배가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일본 영사관의 현실적 요구에 부응한 결과였다.

 

대불호텔 혹은 중화루의 번영과 쇠퇴 과정을 보면 역설적인 귀감을 얻을 수 있다. 호리 가문이 처음 외국인 대상 숙박업에 대해 집중적으로 투자한 것은 상업적 동기에서 출발하였겠지만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수용하고 부응한 것이기도 했다. 식민지 개항도시의 산업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대응한 결과로 한동안 치부를 할 수 있었으나 정작 식민도시가 본격적 제국의 도시로 전락할 즈음 급격하게 몰락하고 만 것이다. 이 점에서 대불호텔의 운명은 제국주의 공간정책과 식민도시의 산업구조의 변동이 초래한 사회문화적 변화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례의 하나라 할 수 있다.

 

한편 대불호텔을 계승한 중화루는 한국 화교사회의 변천을 읽을 수 있는 시금석이다. 화교사회의 부침과 중화루의 운명이 동조(同調)하고 있으며 해방후 한국의 대 화교정책의 변천사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화루의 한세기는 산동출신 이주노동자의 역사를 외연으로 삼고 있으며, 산동의 음식문화가 한국의 산업사회의 변천에 조응하며 발전해온 자장면의 역사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중화루는 ‘다문화융합도시’ 인천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건축 문화유산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및 문헌

 

<자료>

京畿道警察部長. 時局下の民情に關する件. 1941.9.25.

국사편찬위원회.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 <한국근현대 회사조합자료>

. <한국근대사자료집성>

 

<참고문헌>

고 일. <인천석금>.경기문화사. 1955.

기독교 대한감리회. <인천서지방사>.대한감리회. 1998.

김창수. 자장면의 탄생.<한권으로 읽은 인천>. 인천발전연구원. 2005.

김창수편. <인천의 산책자>. 다인아트. 2006.

끌라르 보티에. 이뽀리트 프랑뗑.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 태학사. 2002.

발레리 줄레조 외 지음. 양지윤 역. <도시의 창. 고급호텔>. 후마니타스. 2007.

소요한.아펜젤러 선교활동의 변화에 대한 연구. 연세대 신학대학원 석사논문. 2003.

손장원. 개항기 인천의 숙박시설.<기호일보>. 2007.12.24.

신태범. <개항후의 인천풍경>.인천 향토사 연구회, 2000.

신태범, <仁川 한 세기>. 홍성사. 1983.

오가와 유조 편저. 김석희 옮김. <신찬 인천사정>. 인천학연구원. 2008.

오가와 유조 편저. 김창수 전경숙 역주. <인천번창기>. 인천학연구원. 2006.

유중하. <짜장면>. 인천문화재단. 2009.

윤일주. 한국 양식 건축의 발자취. <空間>. 1973 4월호.

이옥련. <仁川 華僑社會의 形成과 展開>. 인천문화재단. 2009.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근대문화로 읽는 한국 최초 인천 최고>. 2005.

仁川府. <仁川府史>. 1933.

靑山互惠. <仁川事情>. 朝鮮新報社. 1892

최성연. <개항과 양관역정>. 경기문화사. 1959.

한동수.인천청국조계지 내 공화춘의 역사변천에 관한 연구,<中國學報>58, 2009.

A. H. 새비지-랜도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집문당. 1999.

Emile Bourdaret. 정진국 옮김,<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 글항아리.2009.

H.G.언더우드. 김문호역. 언더우드 회상기.<한국교회사자료>

I. B. 비숍.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집문당, 2000.

 

----------------------------------------------------------------------------------------------------------------------------------

1) 본 논문은 인천대 중국관행연구사업단-인천문화재단 공동 포럼('인천 대불호텔의 근대적 가치와 화교네트워크' 201078)에서 발표한 내용의 수정본임.

2) 서양식 호텔이라는 용어는 동어반복이다. Hotel이라는 말 속에는 기본적으로 서양식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화루는 한국 최초의 호텔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간결하고 정확한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한국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라고 하는 것도 동어반복이므로 만국공원은 한국최초의 공원으로 표현하는 것이 간결하다.

3) 靑山互惠,<仁川事情>(1893),50.

4) <仁川府史>,1477-80쪽 참조.

5) 지금까지 대불호텔의 창립자가 호리 리키타로(堀力太郞)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아오야마(靑山互惠)<仁川事情>(1892)<仁川府史>의 기록으로 볼 때, 창립자는 아버지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임이 분명하다.

6) 호리 일가는 이 외에도 음료수 제조업(레몬수 사이다제조:1890), 잡화점(호리상회)도 경영하였다.

7) <仁川府史>. 363

8) <仁川府史>. 978-9

9) 호리히사타로에게 분할된 땅은 일본조계지 12호지였으므로 바로 잡는다. 조계지 11號地는 協同社에 분할되었다.

10) <仁川府史>, 794

11) 발레리 줄레조 외 지음, 양지윤 역, <도시의 창, 고급호텔>, 후마니타스, 2007. 76-77쪽 참조.

12) 윤일주, 역사적 환경의 찾아서, 한국양식 건축의 발자취, <공간>, 19734월호.

13) 라이부츠는 다이부츠의 오식(誤植)으로 보인다.

14) H.G.언더우드, 김문호 역, 언더우드 회상기, 한국교회사 자료집, 79

15) W.R.Carles, Life in Corea, Macmillan Co. London.

16) 해당 원문은 다음과 같다: 正午十二時より貿易商中有志者數十名第十二號地堀久太郞の樓上に於て立食の宴を開き海關官吏を始め內外同業者中招きに應じ來會する者數十名... -<仁川府史>. 363

17) 凡有上層者皆謂之樓 -<增修辭原>.1125.

18)19 <仁川府史>. 1479.

19) 대불호텔의 토지와 건물 소유권이 賴文藻 앞으로 사정된 것은 1922년이다. 한편 중화루의 영업 개시를 1915년경을 보는 이도 있다.(신태범, <개항후의 인천풍경>)

20) 중화루의 동업자 수에 관해서는 손덕준 회장이 장옌두의 아들에게 전해들었다고 한다.

21) 공화춘의 상호가 1912년 중화민국 건국을 기념한 것이라는 증언은 확인할 수 있으나, 중국요리점으로 개업한 시기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또한 상인집단 공화춘 현재의 선린동 38번지의 대지와 건물을 매수한 것은 1917년으로 확인되지만, 그 건물에서 음식점을 개시한 시기에 관한 문헌기록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22) 한동수,인천청국조계지 내 공화춘의 역사변천에 관한 연구,<中國學報> 58(2009).p.373.

23) <仁川府史>.1479.

24) 이옥련, <인천화교사회의 형성과 전개>, (인천문화재단, 2009). 90

25) 금시세를 이용한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중화루의 연간 매출액은 대략 16억원에 해당한다.

26) 유중하, <짜장면>, (인천문화재단, 2009). 68.

27) 신태범,

28) 중화루의 간판과 현판은 인천광역시시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29) 손덕준사장은 한때 공화춘의 주방장이었던 손세상(孫世詳)의 장남이다.

30) 인천대 전인갑 교수는 이태(怡泰)가 인명이 아니라 회사명이나 상인집단의 명칭일 가능성이 높다는 자문을 한 바 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仁川事情>(1893)을 비롯한 문헌에 따라 인명으로 처리한다.

31) 금시세를 이용한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대불호텔 상등실의 숙박료는 100,000, 일반실은 60,000원에 해당한다. (이는 일본화폐 1엔이 대략 금 1/5 돈쭝의 가치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한 개략적 환산임)

32) 橫瀨文彦, 大佛亭, <仁川雜詩>(1893).

33) A. H. 새비지-랜도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집문당, 1999), 27-36.

34) <仁川府史>에는 대불호텔이 영업한 해를 메이지 20, 21, 22년 등으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35) Emile Bourdaret, 정진국 옮김,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글항아리. 2009). 45.

36) 새비지-랜도어가 인천을 방문한 것은 18901228일이었으며, 일주일 뒤 189112일 서울로 떠났다.

37) 끌라르 보티에, 이뽀리트 프랑뗑,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태학사, 2002). 19-20.

38) 대불호텔 투숙자에 대한 인천영사관의 보고내용은 국사편찬위원회의 데이터베이스 <駐韓日本公使記錄綴>근거하여 일부를 발췌하였음.

39) 주한일본공사관기록(1897817일 오전 1120, 발신 :石井 領事, 수신: 加藤 公使)

40) 주한일본공사관기록(1897818일 오전 115, 발신 :石井 領事, 수신: 加藤 公使)

41) 주한일본공사관기록(18971029일 오후 537, 발신:幣原 領事官補, 수신: 加藤 公使)

42) 京畿道警察部長, 時局下の民情に關する件, 1941.9.25.

0 comments
작성자 패스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