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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17 /2012.01] 관행논단 _ 웨이관(圍觀)과중국의 정치관행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10 조회수 79

[Vol.17 /2012.01] 관행논단 _ 웨이관(圍觀)과 중국의 정치관행

박승준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웨이관(圍觀)’이란 ‘둘러서서 구경한다’는 뜻을 지닌 말이다. 중국인들은 길을 가다가 길거리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면 아무리 바빠도 일단 둘러서서 구경하기를 즐긴다. 한국인이라고 둘러서서 구경하기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중국인들의 웨이관은 그 정도가 우리보다 훨씬 심하다. 루쉰(魯迅) 선생은 웨이관을 버려야 할 대표적인 민족성의 하나라고 비판하면서 여러 작품 속에 웨이관을 묘사하는 장면을 삽입해놓았다. 소설 ‘축복(祝福)’에서는 아마오(阿毛)라는 인물이 죽어가는 광경을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구경하면서 처음에는 동정하다가, 얼마안가 무덤덤해지고, 나중에는 비웃는 사람까지 나오는 광경을 묘사해서 웨이관이 중국인들이 버려야 할 나쁜 습관임을 지적했다. ‘쿵이지(孔乙己)’에서도 쿵이지가 술집 주인에게 비웃음거리가 되는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구경하는 장면이 묘사돼있고, 소설 ‘약()’에서도 참수당하는 장면을 무심하게 구경하는 광경이 그려져 있다.

 

1990년대 초반에 베이징(北京)의 궁티베이루(工體北路)에서 중국인들의 웨이관의 대상이 되어본 경험을 할 기회가 있었다. 9시쯤 가로등이 꺼진 도로의 제일 바깥 차선으로 승용차를 몰고 가다가 후미등(後尾燈)이 모두 깨진 채 정차해있는 버스를 뒤늦게 발견하고 살짝 추돌하는 사고를 냈다. 이미 어둠이 깊어져서 거의 행인이 보이지 않던 도로에는 어디서들 나왔는지 금방 접촉사고 현장 주위에 수많은 웨이관런(圍觀人)들이 모여들었다. 놀라운 것은 언제 출동했는지 교통경찰도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났으나, 사고현장으로 다가오지 않고, 많은 웨이관런들이 둘러서있는 바깥에서 팔짱을 낀 채로 구경만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더 놀라운 점은 웨이관런들은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필자와 중국인 버스 운전사가 말을 나눌 틈도 없이 사고처리 결과에 대한 의견을 여기저기서 내놓는 것이었다. “승용차 운전자가 버스 운전사에게 800위안은 주어야겠다.” “아니야, 1000위안은 줘야 하겠는데…” “600위안이면 되는 거 아닌가?” 한참을 그렇게 떠들더니, 마침내 한 사람이 나서서 다가오더니 “승용차 운전자가 버스운전사에게 800위안을 주라”고 판결을 내리듯 말했다. 필자는 “아니, 왜 제3자가 끼어들어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고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랬더니 웨이관런들 사이에 술렁거림이 일더니 여기저기서 “저 외국인은 성격이 좋지 못한 사람인 거 같다”느니 “저 외국인 때려줘야 하는 거 아냐?”라는 외침소리가 들렸다. 분위기를 보니 800위안을 버스운전사에게 주지 않고는 사태가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지갑을 꺼내 800위안을 지급하고 나니 그제서야 웨이관런들은 흩어지기 시작했고, 바깥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바라보고 있던 교통경찰도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오토바이를 타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웨이관런들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마치 서양 법정의 배심원들처럼, 사건의 합의 처리의 판결은 물론, 합의금 액수까지 정해주고 흩어진 것이었다.

 

필자는 그제서야 1987 1월 후야오방(胡耀邦) 당 총서기를 실각하게 만든 중국 정치의 기제(機制)를 이해할 수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수천 만 명의 당원을 기저(基底)로 하는 피라미드 구조로 되어있다. 수천 만 당원위에 5년마다 한 차례씩 개최되는 전국대표대회(全大)에 참석하는 3000명 정도의 대표들이 있고, 그 위에 300명 정도의 중앙위원(후보위원 포함)들이 있으며, 다시 그 위에 30명 정도의 정치국원들이 있고, 그 중심에 10명 이하의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있다.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대표자는 당 총서기(總書記)가 맡고 있다. 다시 말해 2011년 현재 8000만 명이 넘는 중국공산당 당원들로 형성된 피라미드 구조의 정점(頂点)에 있는 최고 권력자가 당 총서기인데, 그런 당 총서기를 누가 실각시키고, 당의 최고 권력자의 당적(黨籍)을 누가 박탈할 수 있는지에 대해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1987 1월 당시 후야오방 당 총서기를 직위해제 시키는 결정을 내린 것은 덩샤오핑(鄧小平)과 천윈(陣雲)을 비롯한 8명의 원로(元老)들이었지만, 이들 원로들의 결정이 당 총서기를 직위 해제시키는 중국 정치의 살아있는 기제(機制)로 활성화(activate)되게 만든 것은 이들 원로들이 내세운 민심(民心)이란 것이었고, 그 배경에 웨이관 관행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었다.

 

1989 6월에 발생한 천안문(天安門) 사건은 보다 규모가 큰 웨이관 관행의 표현이었다고 진단해볼 수 있다. 당시 천안문 사건 현장에서 수없이 볼 수 있었던 것은 광장의 중심부에서 반()부패와 민주화 요구의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이 있었지만 당시 광장에 모여든, 1백만이라고 외국 미디어들이 묘사한, 수많은 시민들은 구호를 외치는 시위군중이 아니었다. 한 손으로는 아들, 딸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에는 비닐 봉투 속에 삶은 달걀과 빵과 물병을 넣고 천안문 광장으로 구경나온 웨이관런들이었다. 이들 웨이관런들은 아침이면 광장으로 모여들었고, 해가 지면 귀가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낮에는 더우니까 해가 지면 광장으로 나와 밤새도록 광장에서 지내는 사람도 많았다. 이 웨이관런들이 학생들과 중국 정치 지도부 사이에서 환호하거나 박수 치고, 때로는 시위지도부를 비판하기도 함으로써 중국 정치의 한 기제로 작용하고 있었다. 나중에 덩샤오핑을 비롯한 정치 지도부가 실탄을 장전한 총기와 장갑차를 동원해서 시위를 진압한 대상도 주로 시위지도부를 겨냥한 것이었지 웨이관런들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시위는 64일 새벽 시위지도부가 노숙을 하고 있던 인민영웅기념탑에 대한 ‘청소(淸掃)’ 작업으로 시위지도부를 유혈 해산시킴으로써 종결됐다. 시위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후야오방 당 총서기의 후임자였던 또 한 사람의 중국공산당 최고 권력자 자오쯔양(趙紫陽) 당 총서기를 직위해제 시키는 결정이 내려졌고, 그 결정 역시 덩샤오핑을 비롯한 8인의 원로들이 내렸으며, 헌법이나 당규약 어디에도 조문(條文)이 없는 정치적 결정이, 살아있는 정치적 기제로 작용해서 자오쯔양을 실각시키는 현실로 나타났다.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정치는 웨이관 관행의 영향은 차츰 엷어지고 헌법과 법률, 그리고 당규약에 따라 중국 정치가 이루어지는 방향, 즉 투명도(透明度)가 높아지는 방향의 정치적 변화가 이뤄졌다. 회의 개최 자체를 비밀로 한 채, 인민해방군 병력이 봉쇄한 베이징(北京) 서쪽의 징시(京西)빈관에서 열리던 중앙위원회 전체회의(中全會) 2000년 이후에는 개최사실 자체를 사전에 미디어에 공개하고, 회의 내용이나 대표들의 분임 토론도 내외신 기자들에게 공개하는 변화가 그 동안 진행됐다. 2012년 후반(下半年)에 베이징에서 개최하기로” 결정된 제18차 전국대표대회 역시 후진타오(胡錦濤) 당 총서기가 시진핑(習近平)에게 자신의 직위를 넘겨주기로 내정한 가운데 개최될 예정이다. 국가주석직은 2013 3월에 열리는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代)에서 시진핑에게 넘겨질 예정이며, 현재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직위도 전인대에서 리커창(李克强) 현 부총리에게 물려주게 될 예정이다.

 

그러나 중국 정치의 투명도가 완성된 것은 아니다. 후진타오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겸하고 있는 또 다른 중요 직위인 당과 국가의 중앙군사위원회 자리는 내년 후반기에도, 2012 3월에도 시진핑에게 넘어가지 않을 전망이다. 후진타오의 전임 장쩌민도 당 총서기 직은 2002년에, 국가주석직은 이듬해 3월에 후진타오에게 넘겨주었지만,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은 2004년에 가서야 넘겨주었다. 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직을 후진타오에게 넘겨준 뒤에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직만은 보유하고 있던 장쩌민은 당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 사표를 제출하는 형식으로 투표에 부쳤고, 장쩌민의 사임안을 표결에 부친 결과 무려 300표에 가까운 찬성표가 나옴으로써 장쩌민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중앙군사위원회직을 후진타오에게 넘겨주었다. 웨이관런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정치관행은 후진타오도 답습할 것으로 보이며, 이른바 “권력교체의 공백을 없앤다”는 논리에 따라 이뤄질 것으로 전망되는 후진타오의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 이교(移交)는 당 규약에 명확한 규정이 없는 가운데, 2013년 이후 ‘적당한’ 시기에 웨이관런들의 눈치를 봐가며 시진핑에게로 넘겨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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