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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17 /2012.01] 기획 _ The story of SUN(孫)’s Family: 인천화교 손덕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8)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10 조회수 168


[Vol.17 /2012.01] 기획 _ The story of SUN()’s Family: 인천화교 손덕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8)

(8) 중화루(中華樓)와 짜장면

 

구술: 손덕준 _ 인천 중화루 사장 

채록: 송승석 _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

 

연재를 시작하며

인천대학교 HK 중국관행연구사업단은 화교연구의 일환으로 화교구술채록을 진행하고 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인천화교의 대표적 인물 손덕준(孫德俊)과 그의 가족이다. 어느 일개인의 가족사가 화교 전체의 기억과 역사를 온전히 담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화교 개인의 인생 궤적을 꼼꼼히 되짚어보는 것은 삶의 구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본 연재에서는 구술채록의 일부를 발췌해서 싣도록 하겠다.

 

*. 본 연재는 기본적으로 구술기록의 일부를 발췌해서 싣되, 지나치게 문맥이 어색한 부분은 임의로 수정을 가했다.

*. 문중에 말줄임표()가 있는 부분은 공개하기에 적절치 않은 부분이나 반복되는 내용으로, 구술대상자와 상의 하에 생략한 부분이다. 또한 지면의 한계로 인해 기본 내용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채록자 임의로 생략한 부분도 있다.

*. (???) 부분은 성명이나 상호명으로, 구술자가 한자표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추후에 조사를 해서 보충하도록 하겠다.

 

송승석(이하 송): 이제 중화루 얘기 좀 해주세요. 처음에 어떻게 매입하시게 된 거예요?

 

손덕준(이하 손): 사실, 난 중화루 안 사려고 했어요. 처음에 중화루는 세 사람이 동업했어요. 한 명은 한국 사람이고, 나머지는 위신천(于心辰), 양젠민(楊鑑珉). 화교야. 양젠민, 그 어르신은 인천화교협회 회장도 하셨고, 한국주재 대만 상무위원(商務委員)까지 하셨어. 한국화교 중에 대표 역할 하시던 분이야. 그 분도 아주 술 좋아하셨어. 통도 크고. 위신천씨는 공화춘 집안이야. 그 분이 돌아가시면서 중화루 지분도 3등분이 된 거지. 결국 중화루는 그 한국 분한테 넘어가고, 경영은 양젠민 회장이 맡게 되었지.

 

: 결국 나중에 주인은 그 한국분이 하시게 된 거네요?

 

: 그렇지. 대신 경영은 양 회장이 하시고. 근데 당시 양 회장, 그 분의 건강이 별로 안 좋으셨어. 그때 65세인가 그랬는데. 나중에 그 한국 사장이 양 회장한테 다시 중화루 소유권 넘겼어. 이제 중화루 명의가 양젠민씨 앞으로 된 거야. 그런데 장사는 크게 잘 된 것 같지는 않고 그저 현상유지 할 정도였던 것 같아. 그렇게 양젠민씨가 2, 3년 하다가 날 찾아오게 된 거지. 아무리 수소문해도 화교 중에 중화루 살만 한 사람이 없었던 거야. 그 어르신 날 찾아와서 하는 얘기가, “난 본래 장사할 사람 아니다. 난 건강도 안 좋고…. 그렇지만 이건 그냥 접기가 아까운 물건이다. 내가 반평생동안 심혈을 기울인 곳이다. 자넨 젊고 능력도 있으니, 네가 경영해주라. 난 이거 팔아서 노후대책이라 마련하련다.” 근데 그때 은행 대출 10억을 안고 있었어, 중화루가. 그걸 끼고 15 5천에 사라는 거야. 결론은, 내가 5 5천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거야.

 

: 그럼, 선뜻 사시게 된 거예요?

 

: 사실, 거기서 깎으면 뭘 해? “좋습니다.” 했지. 그 중개는 화교협회 회장이 했어. 그런데 막상 계약하려고 보니까, 그 어르신이 5천만 더 달라는 거야. “그럼,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저 안 사겠습니다.” 내 성격이 그래. 사실, 내가 애초에 깎아달라고 했냐고? 그럼, 없던 걸로 하재. 그러다가 한 6개월 되니까, 협회회장 통해서 다시 연락이 왔어. 그냥 15 5천에 계약하겠다고. 난 안 사겠다고 했어. 우리 와이프는 뭐 그렇게까지 할 것 있냐고, 그냥 인수하라고. 그때 화교협회 회장도 나한테 그러는 거야. “살 마음 있으면 그냥 사라. 그 어르신 자존심도 상당히 강하신 분인데 오죽하면 나한테 그런 소리 하겠냐? 그냥 계약날짜 잡아라.” 그래서 계약을 했어요

 

: 두 분 다 어려운 결정을 하신 거네요.

 

: 사실, 그 어르신 원래 자존심이 상당히 강한 분이야. 대만 국민당 출신이고. 그런 사상을 받으신 분이야. 서른 살에 화교협회 회장하셨던 분이야. 말씀도 잘 하시고. 사람 다루는 통솔력도 좋으셨고. 화교 중엔 한국 최고 대표였어. 권력이 대단했지. 파워가 있었어.

 

: 인수하시고 나서, 중화루는 영업실적이 어땠어요?

 

: 처음엔 내리 3년을 적자 봤어. 영업을 엄청 못했어. 사실, 중화루는 인천 최고의 요릿집이잖아? 덩치도 크고 말이야. 직원월급만 2,700인데, 첫 달 매출이 2,000이야. 처음 1년은 엄청 망했고, 그 이듬해는 덜 망했고, 3년째 돼서 조금 흑자 봤지. 그러니까 흑자로 돌아선 게 이제 1년 밖에 안 되는 거야. 사실, 적자가 나면, 이건 보통 힘든 거 아니야. 돈 한 푼도 못 벌고 3억씩이나 통째로 집어넣었다면 이건 보통 손해 본 게 아니야. 요즘 흑자로 돌아섰지만, 대출은 아직 다 못 갚았어. 이제 1억 갚고 9억 남았어. 자금성도 그렇고 태화원도 그렇고 그냥 겨우 겨우 버티는 거야. 물론 자금성은 「12일」에 나와서 재미 좀 봤지만. 요즘은 물가도 너무 오르고 해서 특별히 마진은 없는 것 같아.

 

: 엄살이 좀 심하시네? 하하!

 

: 엄살 아니라고.

 

: 원래 중화루는 거의 백 년 가까운 이력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중국 요릿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또 사장님 집안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연을 가지고 있는 곳이고요. 사장님 외조부께서는 그곳에서 와이당을 하셨고, 아버님도 거기서 주방장을 하셨고 또 지금은 사장님이 그곳을 직접 경영하고 계시고….

 

: 지난번에 박사님께서 그러셨죠? 옛날 중화루 현판이 인천시에 보관되어 있다고. 그게 다행이에요.

 

: . 인천시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이건 농담이지만, 그걸 가져올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 그건 우리 욕심이지요. 그럼 욕먹지. 그것보다도 하루빨리 옛날 중화루가 복원되어야 해요. 본토 앞에 주차장 있잖아요? 거기가 원래 중화루 터예요. 중화루는 복원할 의미가 있어요. 앞으로 인천시에서 중국 관광객 유치할 수 있는 부분이에요. 중화루 옛 터가 그 전에는 또 대불(大佛)호텔이었잖아요?

 

: 그렇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호텔이라고 하는….

 

: 맞아요. 대한민국 최초의 호텔이란 말이에요. 중화루 뿐 만 아니라 대불호텔 식으로 복원을 해도 값어치가 있단 거예요. 하여튼 시나 구청에서 나서서 어떻게든 복원을 했으면 좋겠어요.

 

: 제가 기록에 보니까, 대불호텔 인수해서 중화루 설립한 게 1918년으로 되어 있더라고요?

 

: 아니야. 1908년일 거예요. 중화루 백 년 넘었어요. 다시 한 번 보세요.

 

: 그 부분은 제가 좀 더 조사를 해보죠.

 

: 내가 알기로는, 그때는 일본시대 아니었어요. 1918년이면 벌써 일본한테 넘어갔을 때 아니야? 1918년은 아닐 거예요. 공화춘도 백 년 넘었어. 아니, 올해가 백 년이지. 중화민국 100년이니까. 공화춘 간판 이름이 공화국 원년 봄에 오픈했다는 의미잖아. 그러고 보니까 1908년이 맞는 것 같아. 내가 알기로는, 중화루가 공화춘보다 오래 됐거든

 

: 그건 제가 더 알아볼게요. 과거 중화루에 대해 들으신 말씀 없으세요?

 

: 사실, 저도 잘 몰랐는데, 몇 년 전에 중국 연태에 가서 연태박물관 관장했던 왕환리(王煥利)를 만났어요. 박사님도 그 일 아시죠? 그 노인네 일흔이 넘었어요. 1935년생인가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하고 나이가 비슷해. 근데 귀가 잘 안 들려요. 그래서 그 와이프가 필담을 해서 통역을 해주더라고. 그 양반이 연태에서 책을 한 권 쓴 적이 있었어요. 『烟台往事』(책의 본래 제목은 『烟台史海鉤沈』이다)라고. 그 책, 나한테도 한 권 있어요. 그 책 안에 「인천의 중화루」라는 글하고 옛날 중화루 사진, 아주 귀중한 사진 하나가 있었어요. 근데 그 사진 속에 우리 외할아버지가 있는 거예요. 난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 양반 말씀이, 그 사진의 인물들이 중화루의 주주들이었다는 거예요. 사실, 전 그때까지만 해도 금시초문이었어요. 저는 사실 몰랐어요. 대충 얘기 들으니까, 그때 중화루 구동(股東)들이 한 40명 되었대요. 대표 라오반(老板) ()이 라이()씨라는 사람이고. 왕관장 하시는 말씀이, 연태 사람이 한국에 가서 중화루를 세운 건 연태 사람의 자랑이라는 거야. 백 년 전에 한국에다 최초로 식당을 차렸다, 그런 자부심이 있더라고. 그래서 그게 작년에 연태일보(烟台日報)에도 기사가 나왔잖아요? 그걸 신문에 실어준 사람이 바로 그 왕관장이야.

 

: 공화춘 하면, 1911년 중화민국이 건국되면서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만들어진 이름이잖아요? 그럼, 중화루는 중화민국의 중화를 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 그게, 그게 아니에요. 그때 당시는 있잖아요? 중국은 이치엔 쟈오 중화(以前叫中, 이전에는 중화라 불렀어.). 그러니까 중화는 중화민국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내 생각엔, 따이뱌오 화런(代表華人, 화인을 대표한다)의 뜻이 있는 것 같아요. 그때 자세히는 듣지 못했는데 대충 그 분 얘기하시는 거 보면, 지금  연태에 중화루 주식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대요? 나한테 그러더라고. 그게 지금도 효력이 있냐고? 지금 얘기하면 구펀(, 주식)이야.

: 그걸 좀 받아오시지 그러셨어요? 아주 중요한 건데.

 

: 그걸 어떻게 그냥 달라고 그래. 돈 줘야 될 거 아냐? 또 그 사람은 그걸 기념품처럼 팔려고 하겠어? 그 주식 가치대로 받으려고 그러겠지. 안 그래?

 

: 그 사람은 그걸 어떻게 가지고 있을까요?

 

: 잘 모르지만, 혹시 옛날에 그 사람 할아버지가 중화루에 투자한 주주였을 수도 있겠지. 하여튼 잘 모르겠어. 혹시 알아? 그 할아버지가 죽으면서 “야, 니들 혹시 한국 가게 되면 물어봐라. 혹시 돈 될 수도 있다.” 그랬을지도 모르지.

 

: 그 할아버지가 구동이었을 수 있다?

 

: 그렇지. 근데 확인된 건 아니니까.

 

: 그래서 효력이 있다고 하셨어요?

 

: 아니 벌써 없어졌는데 어떻게 있다고 그래? 딱 잘라서 없다고 그랬지. 그때 당시 벌써 한국사람 손에 다 넘어갔다고 그 얘기밖에 더 할 수 있겠어요? 그 라이()씨 후손은 지금 미국에 있어요.

 

: 초창기 중화루 상황에 대해서는 들으신 게 없으세요?

 

: 장사 잘 되었대요. 그때 당시는 일본시대인데, 장사가 얼마나 잘 됐으면 중화루에 3개국 기생이 다 있었대요. 한국기생, 중국기생, 일본기생. 중화루 한 번 가려면, 돈을 자루로 싸들고 가야한다고 그랬어. 그래도 나올 때면 빈털터리가 되어서 나오는 거지.

 

: 접대하는 여자들도 있었다면, 중화루는 단순한 식당이 아니었네?

 

: 중화루는 옛날에 지금 얘기로 하면 호텔이랑 마찬가지야. 잠도 잘 수 있고 먹고 그런 자리예요. 숙박을 할 수 있었어요. 마작도 할 수 있고 노름도 할 수 있고. 3개국 기생 다 있고. 지금 중국말로 하면 커잔(客殘)이야. 객잔 역할 했다는 거야.

 

: 그럼, 공화춘도 그랬어요?

 

: 공화춘은 안 그랬어. 중화루만 그랬지. 내가 어렸을 때 생각하면, 그때 우리 외할아버지, 그 중화루에서 돌아가셨어. 출근하다가 아침에 심장 마비로 돌아가셨는데…. 나중에 우리 외할머니한테 들었는데, 중화루는 일본사람이 하던 호텔 아니었어? 그러니까 룸이 있었대. 기록에 남아 있는 게 없으니까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니까 아마도 중화루는 호텔식으로 되어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물론 추측이지. 그래야 거기서 잠도 잘 수 있고 즐길 수 있고 그러지 않겠어? 그게 3층 건물이에요. 들은 얘기로는, 1층은 식당하고 2층은 마작방, 그리고 3층은 객실이었다는 거야. 연회도 베풀고. 그러니까 중화루 드나드는 사람들은 다 무역상의 사장이나 동스장(董事長, 이사장) 같이 큰 무역회사 하는 돈 많은 사람들이었어. 상해, 북경, 홍콩의 그런 사람들이 드나들었지 않나 싶어. 내 생각이야.

 

: 외할아버님이 계실 때에도 커잔 형식이었어요

 

: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그때는 일본 시대이니까 당시에도 그렇지 않았을까? 잘 모르겠어. 사실, 나도 전해들은 얘기니까 함부로 말 못하지. 그냥 연세 많으신 분들이 하는 얘기야. 하여튼 외할아버지 사진 보니까 진짜 반갑더라고. 그게 1940년도인가 찍은 사진이야.

 

: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아요.

 

: 내가 그 사진 현상 좀 크게 해가지고 중화루에 걸어 놓았어. 박사님도 봤죠, 그 사진? 나중에 그 연태박물관 왕관장한테 편지 한통 왔었어요. 내용이 뭐냐면, 나보고 현재 차이나타운 모습을 사진에 좀 담아 달래요. 그래서 내가 사진 찍어서 보내줬어요. 보내드렸는데 그게 또 연태일보에 실린 거예요. 신문에 실렸어요. 그것도 중화루에 걸어놨어. 아마 박사님도 보셨을 거예요.

 

: 지금 대불호텔, 중화루 자리 있잖아요? 거기에 공사를 하고 있던데?

 

: 땅 주인이 건물을 짓는가 봐요. 근데 터파기하다가 공사가 중단되었어요. 땅을 파다 보니까 문화재 같은 벽돌이 좀 나왔나 봐요. 그래서 중단 상태야. 나도 들은 얘기니까.

 

: 맞아요. 유구(遺構)라고 해서 벽돌이 나왔대요. 근데 원래 중화루가 왜 헐리게 된 거예요?

 

: 그건 내가 할 얘기 좀 있는데, 예민한 문제니까 여기선 안 할래요. 하여튼 그 주주들 중화루 문 닫고 다 대만이나 미국 갔어요. 그리고 거의 폐가처럼 되었죠. 그게 나무로 된 목조건물이었는데, 사람들이 겨울에 추우니까 땔감으로 쓴다고 문짝 뜯어가고…. 문짝도 없고 벽도 나무도 하나도 없고 하물며 계단도 다 뜯어 가버렸어. 식당 식기들도 다 없어졌다니까, 글쎄. 완전 귀신 나올 것 같이 되어버렸지. 중화루는 그렇게 해서 없어진 거예요. 임자가 없으니까. 그걸 한국 사람이 샀는데 그 자재 벽돌만 허무는 데에도 엄청 돈이 들었대요. 중화루 바닥이 원래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어요. 그 큰 돌로 바닥을 깐 거예요. 벽도 뜯으니까 아주 단단하더래요. 그것만 팔아도 중화루 살 돈이 나오고도 남았대. 들은 얘기야. 어렸을 때 나도 중화루 가끔마다 갔었는데 기억나는 거 뭐냐면, 화장실에 갔는데 똥을 누면 한참 만에 풍덩 하는 소리가 나는 거야. 화장실 하나도 그렇게 깊게 파놓은 거지.

 

: 중화루 얘기를 하다보니까, 갑자기 짜장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짜장면에 대해서도 잠깐 얘기를 좀 해주세요. 짜장면은 처음에 어떻게 팔리게 된 건가요?

 

: 제가 알기로는, 옛날에 여기는 청관(淸館) 거리라고 했어요. 그때가 청나라 말기였으니까. 인천에만도 옛날에 유명한 요릿집이 많았어요, 중화 요릿집. 대표적인 게 중화루, 공화춘(共和春), 빈해루, 송죽루(松竹樓). 중화루나 공화춘 같은 경우는 다 백 년 이상 되었다고 보면 되요. 초창기 때에는 다 상당히 큰 고급요릿집들이었어요. 이런 요릿집에서 처음부터 짜장면 판 거 아니에요. 원래 짜장면이란 음식은, 솔직히 말해 서민의 음식이에요. 요리상 특히, 고급 요리상에는 못 올라가는 그런 음식이에요. 짜장면, 그게 어떻게 시작이 되었냐 하면요? 그때 당시는 배 무역을 많이 했어요. 범선타고 순풍(順風)하면 산동의 위해, 연태 같은 데에서는 인천에 금방 도착했어요. 또 당시에는 홍콩이나 상해 같은 큰 도시에서도 큰 무역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보니까…. 왜 있잖아요? 그 배 무역하면 짐꾼들 많이 필요하잖아요? 특히 산동 사람들 덩치 좋고 힘 좋았어요. 산동따한(山東大漢)이라고 하잖아요? 옛날에도 얘기한 적 있는데, 촹관동(闖關東), 촹가오리(闖高麗). 인천은 산동하고 제일 가까웠어요. 그래서 그때 당시는 일손이 많이 필요하니까, “야, 거기 중국에서 힘써봤자 돈 몇 푼 벌겠냐? 샹가오리더화(上高麗的話, 한국에 가면), 무역상들 배 짐 내려주고 그러면 벌이가 괜찮다.” 그렇게 해서 많이들 왔어요. 산동 쿨리야. 처음엔 쿨리였어요. 그때는 힘 파는 사람들을 쿨리라고 했어요. 그렇게 짐꾼으로 오면 그 사람들 무슨 큰 돈 있었겠어요? 다 힘만 파는 사람들인데. 그래도 점심 먹어야 할 것 아니에요?

 

: 덩치도 큰 사람들이니까 많이 먹어야겠지요.

 

: 그렇지. 솔직히 말해 그 사람들도 어떻게 하루 세 끼 빵만 먹을 수 있겠냐고? 그래서 맨 처음에 산동사람들끼리 초창기 때, 집에서 칼국수 썰어서 구루마 끌고 그 사람들 밥 먹이려고 간 거예요. 기름에다 그 짜디짠 춘장 볶아서 구루마에 싣고 현장으로 간 거예요. 근데 현장 가면 몇 그릇 팔릴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직접 솥단지 걸어놓고 불 피어서 했어요. 물 끓으면 거기에다 국수 삶고 그 위에다 춘장 비벼서 한 그릇씩 싸게 파는 거죠, 부둣가에서.

 

: 그러니까, 짜장면은 처음 부둣가에서 시작된 거군요?

 

: 그렇다고 봐야 해. 이쪽에서 짜장면 다 팔면, 다시 딴 데로 옮기는 거야. 그렇게 옮겨 다니면서 포장마차 식으로 한 거지. 처음에는 이렇게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장사를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보니까, 이거 장사가 잘 되는 거야. 돈이 되는 거야. 그 다음부터는 “야, 이거 안 되겠다. 중국에서 수타면 기술자 부르자.” “넌 춘장에 장만 볶아주지? 우린 거기에다 돼지고기도 좀 썰어서 넣어야지.” “그래? 너 고기 넣어준단 말이지? 그럼 난 고기에다 야채도 좀 넣어주지.” 뭐 이런 식으로 너도 나도 경쟁이 붙은 거야. 이렇게 시작이 된 거요. 그렇게 팔다가 나중에 세월 흐르다 보니까 이젠 아예 조그만 가게 차려놓고 팔기 시작한 거야. 빵집에서 분식집 같이 하는 것처럼 왕만두집, 빵집 같은 데에서 짜장면도 팔고 그런 식으로 시작한 거예요. 이거 먹어보니까 맛이 괜찮거든? 그러니까 사람들이 중화루에 가서도 “짜장면 좀 줘봐” 공화춘에 가서도 “짜장면 좀 내놔봐” 한 거지. 아무리 고급 청요릿집이지만 거기도 장사니까 짜장면 팔기 시작한 거야. 그런데 그런 데는 짜장면만 하겠어? 요리 기술자들 얼마든지 많으니까, 우동도 나오고 울면도 나오고. 그러다보니까 슬슬 시작하게 된 거지. 그렇게 세월 흐르다 보니까, 이젠 중국 요리 하면 짜장면이 된 거지. 짜장면 없으면 중국집 아니다. 짜장면이 필수가 된 거지. 옛날엔 간짜장 하면 거기에다 계란 프라이도 하나 올려줬어. 요즘엔 없지만.

 

: 그럼, 처음엔 짜장면 만들 때, 수타로 한 게 아니라 칼국수였던 거네요?

 

: 제가 개인적으로 노인네들한테 들은 얘기로는, 처음엔 수타면 아니었어요. 다 칼국수 썰었어요. 한국도 아줌마들 칼국수 하잖아요. 똑같아요. 그러다가 중화루나 공화춘에서 정식 수타면 기술자 중국에서 데려온 거요. 제대로 해주자 싶었던 거지. , 중국은 푸산라미엔(福山拉面) 유명하잖아요? 그때 당시 그 푸산(福山)에서 기술자들 많이 들어왔어요. 주방장들, 유명한 요리사들. 내 생각엔, 기술을 고급화시켜서 본격적으로 팔기 위해 정식 기술자들 초청하지 않았나 싶어요. 중국에서 사부님 한 명 오면 그 밑에 줄줄이 제자가 양성이 되는 거예요

 

: 중화루나 공화춘 같은 고급요릿집에서는 처음에는 팔지 않았는데, 손님들이 요구를 하니까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고 나중에는 잘 팔리니까, 칼국수가 아니라 정식 수타 기술자를 데려다가 수타면을 만들기 시작한 거네요?

 

: 맞아요. 그렇게 맥이 이어져 내려온 거죠. 솔직히 말해, 북경에 가면 짜장면 있어요. 아주 옛날식 짜장. 장이 아주 짜요. 그 장을 볶아가지고 야채고 오이고 뭐고 다 퍽 엎어가지고 비비는 거예요. 맛은 여기 짜장면하고는 전혀 다르죠. 아마 한국 사람들은 입에 안 맞아서 못 먹을 거예요. 그런데 요즘에는 중국에서도 한국식 짜장 인기 있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그게, 한국식 짜장은 한 백 년 넘게 여러 요리사들 손 거치면서 개발되고 연구되어 온 거에요. 질이 향상이 많이 되었다는 거죠. 요즘에는 한국식 짜장을 북경 같은 데에 역수출해요. 가끔 가다 중국에서 나한테 전화 와요. 한국식 짜장면 어떻게 하면 맛있게 할 수 있냐고. 그럼, 내가 그러지. “한국 춘장 써라.” 그게 답이에요. 정답이요. 중국의 스하이미엔쟝(四海面醬)이 아무리 백 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지만, 한국의 영화식품 사자표 춘장 못 따라가요. 사자표 춘장은 이미 세계화되었어요.

 

: 영화식품의 사자표 춘장은 얼마나 되었어요?

 

: 60년 넘었어요

 

: 60년이 넘었다고요? 그럼, 1950년부터 팔기 시작했네요?

 

: 그런 셈이죠. 옛날 60년 전만 해도 있잖아요. 한국 식당이나 가정집에서 집집마다 장 담그는 항아리 있는 것처럼, 당시 한국에서 짜장면 파는 집들도 집집마다 다 옥상이나 마당에 항아리 여러 개 있었어요. 큰 항아리.

 

: 춘장 담그는?

 

: . 춘장에는 온갖 것이 다 들어가요. 하다못해 국수 삶은 물도 들어가요. 우린 날마다 국수 삶으니까 그 삶고 난 물 있어요. 그거 하나도 안 버려요. 국수물도 오래 삶으면 이렇게 두꺼워져요. 그걸 가져다 장에 붓는 거예요. 거기에다 소금을 넣고 햇볕에 내놓으면 장이 아주 진해져요. 얼마 있으면 이스트 부푸는 식으로 부풀어요. 자연발효를 시키는 거예요. 그때 당시, 춘장만 전문적으로 만든 집도 있었어요. 춘장을 아주 많이 담가서 식당마다 자전거로 배달을 하는 거지. “어이, 여기 춘장 한 관 배달해 줘.” 한 관이면 진짜 며칠 쓸 수 있었어요. 사자표 춘장도 그렇게 생긴 거야. 사실, 그게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도 편해요. 춘장 한 번 담그려면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 일손도 많이 필요하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배달하는 집이 생겨나고 그러다보니까 사자표 춘장도 생겨난 거지. 지금은 완전히 현대식 기계화되어 가지고 전국적으로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거죠.

 

: 영화식품도 처음부터 춘장에 캐러멜을 넣은 건 아니겠죠? 그리고 옛날에 집집마다 춘장을 만들었으면 그 만드는 방식도 다 다를 것 아니에요?

 

: 그렇죠. 집집마다 장을 담그면 어떨 땐 질기도 하고 어떨 땐 짜기도 했어요. 정확하게 수치 재서 하는 건 아니니까. 기계가 하는 게 아니라 다 사람 손으로 하는 거니까. 어떨 땐 여름에 춘장이 쉬기도 했어요. 그러면 들입다 소금 넣고 그랬죠. 문제 많았어요. 옛날엔 춘장 하나 담그려면 그게 1년 과정이에요. 근데 요즘은 다 기계화되어서 숙성도 빨리 되고…. 캐러멜은 색소를 넣는 거예요. 사실, 중국 춘장이 그 정도로 까맣게 되면 못 먹어요, 짜서.

 

: 사장님 생각하시기에 짜장면은 중국음식이에요? 한국음식이에요?

 

: 난 이렇게 생각해요. 물론 짜장면이란 음식은 산동출신 화교 손에서 시작되었지만, 제일 활성화된 나라는 한국이에요. 제가 98년에 짜장면을 인천 향토음식으로 출품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내가 인천 요리사협회 인천지회 기술부장을 하고 있었어요. 기술 이사인 셈이죠. 그때 제가 이런 얘기했어요. “짜장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국에서 짜장면을 팔게 된 역사가 근 백 년 가까이 됩니다. 근데 그게 인천에서 시작이 되었다는 거 아십니까? 중국에 가면 이런 짜장면 없습니다. 내 개인적으로 봤을 때는, 이게 인천의 향토음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중국요리라고 할 수도 있겠죠.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가서 찾아보십시오. 현재 한국에서 먹고 있는 짜장면이 있나 없나?” 그랬더니 거기 모인 관계자들이 그 말 듣고 “어, 그러네. 얘기 들어보니까 맞는 얘기네. 그럼, 손덕준 이사님이 한번 출품을 하시죠, 인천 향토음식으로.” 그래서 내가 출품했어요. 내가 인천시에 향토짜장 출품해서 장려상 받았어요. 향토음식으로 지정을 받은 거예요. 솔직히 말해서, 그 덕분에 장사하는데 홍보도 많이 되었죠.

 

: 인천에 있는 중화루나 공화춘에서 짜장면 팔기 전에는 서울에 있는 큰 요릿집에서는 짜장면을 안 팔았나요

 

: 아마 서울은 인천하고 그 시기가 비슷할 거예요. 그래도 공화춘이나 중화루가 몇 년 앞설 거예요. 서울에도 옛날에 유명한 큰 요릿집 많았잖아요? 아서원도 있고, 금문도도 있고, 대관원도 있고. 아마 짜장면 판 연도로 따지면 큰 차이 없을 거예요. 다만 제가 생각할 때, 짜장면이 공화춘에서 시작이 되었다는 건 안 맞는 얘기죠. 물론 공화춘 건물이 아직 남아있어서 유리한 면은 있지만…. 물론 공화춘도 백 년 되었죠. 역사를 말할 때는 그런 식으로 표현하면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에요. 사실, 좀 우습잖아요, 그게.

 

서은미(사진작가): 제가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우선, 저도 짜장면이란 음식이 산동 출신의 화교들이 산동에서 들여와서 나름대로 새롭게 만들었다는 점에 공감을 해요. 그리고 짜장면을 먹기만 했지, 그것이 어떻게 우리 앞에 와 있게 되었는지는 몰랐는데 사장님 말씀 듣고 나름대로 공부가 많이 되었어요. 여기서 옛날 제 경험을 하나 말씀드리면, 여기 태화원 옆에 성당이 있잖아요? 저희 아버지가 거기에서 양로원을 운영하셨어요. 제가 대여섯 살 때인데, 하루는 아버지 따라서 양로원에 갔었어요. 근데 양로원에 계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제게 빵을 주셨어요. 제 기억에 그 빵이 굉장히 하얗고 컸어요. 근데 맛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왜 맛이 없느냐고 했더니, 한국 사람들 밥에다 소금 넣어 먹느냐는 것이었어요. 그걸 생각하면, 당시 화교들 주식이 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당시에 화교들 주식은 어떤 것이었어요?

 

: 맞아요. 산동 사람들은 원래 빵이 주식이에요. 근데 원래 밀가루는 비싼 재료예요. 그래서 거기에다 뭘 섞어서 빵을 만들었냐 하면 옥수수예요. 옥수수 가루. 산동지방은 원래 옥수수가 많이 나는 곳이에요. 산동성 시골에 가면 집집마다 가을에 옥수수 수확해서 말려요. 지붕 위에다. 그게 바싹 마르면 속을 까요. 알을 까는 거지. 그래가지고 그걸 맷돌에 빻아요. 그걸 섞어서 빵을 만드는 거예요. 옛날에 여기 중국 사람들 주로 먹는 반찬이 뭔지 아세요? 무를 갖다가 짠지를 만들어요. 그리고 빵만 먹으면 목이 메니까 죽을 써요. 쌀은 없으니까 좁쌀이나 다른 잡곡으로 죽을 쑤는 거죠. 아침에 중국사람 뭘 먹느냐 하면, 빵에다가 새우젓 넣은 계란찜. 아시죠? 소금에다 새우 절인 것. 한국의 새우젓하고 비슷해요. 또 삼치나 갈치 같은 생선을 소금에 절여서 쪄요. 그러니까 밥 먹을 때, 도시락 뚜껑만 열면 죽도 나오고 빵도 나오고 반찬 다 나오는 거요. 거기에다 춘장 아니면 새우젓에 대파 찍어서 먹어요. 새우젓도 찍어서 먹고 춘장도 먹고 그래요. 말씀하신 것처럼 빵에는 아무 간도 안 되어 있어요. 그냥 맹맹한 맛이야. 그걸 반찬하고 같이 먹는 거야.

 

: 당시에 밀가루가 비쌌으면 짜장면을 만드는 데에도 옥수수 가루를 넣을 수도 있었겠네요? 고급요릿집에서 팔기 전에는 주로 노동자들 상대로 부둣가에서 팔았으니까 가격이 쌌을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마도 옥수수 가루도 조금 넣었을 것 같아요. 옛날엔 보리 가루로 국수를 만들기도 했으니까. 이건 제 추측이지만, 아마 옥수수 가루도 넣고 밀가루도 제일 싼 걸 쓰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이건 정확한 게 아니니까 잘 모르겠어요.

 

: 면을 수타로 뽑는 것과 일반 칼국수하고 맛이 많이 틀리나요?

 

: 맛이 틀려요. 그리고 일반 가정집에서 주부들이라면 칼국수는 다 하잖아요? 근데 수타면은 기술자 아니면 못해요. 그래서 수타는 아무래도 고급요릿집에서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 거기에 사용하는 재료도 다르겠죠?

 

: 제가 일부러 산동 시골에 찾아가서 동네 시골 아낙네들한테 짜장면 만들어달라고 해서 먹어봤어요. 그 아줌마들 하는 거 보니까, 장에 오이도 썰어 넣고 양파도 썰어 넣고…. 재료는 정해져 있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특히, 옛날엔 야채가 철마다 다르잖아요? 지금하고는 달리. 그러니까 계절에 맞게끔 야채도 달리 넣는 거지. 어떨 때는 풋마늘을 갖다가 썰어서 짜장면 소스를 볶기도 했어요. 또 해안가에 사는 사람들은 삼치 알 같은 걸 납작하고 네모지게 썰어서 말려가지고 그걸 기름에 튀겨서 춘장에 넣어 먹기도 했어요. 맛있어요. 아주 별미야. 그러니까 재료는 고기를 넣을 수도 있고 해물을 넣을 수도 있는 거예요. 아주 다양해요. 지금도 그냥 짜장면이 있고 삼선짜장이 있고 유니짜장이 있고 그렇잖아요? 그게 다 거기에서 시작된 거죠. 제 생각은 그래요.

 

: ‘저 사람은 수타의 고수다.’ 뭐 그런 말이 있잖아요? 수타는 어떻게 그 기술의 차이를 구분하는 거예요?

 

: 그건 차이가 아주 많죠. 누가 한 시간에 몇 그릇 분량을 뽑아내느냐 하는 양의 문제도 있고, 누가 뽑은 국수 가락이 굵기도 일정하고 얼마나 쫄깃하게 뽑아냈는지 하는 질의 차이도 있어요. 그건 거짓말 못해요. 기술자는 보면 대번에 아니까. 그것에 따라서 주방장들 월급 차이 있는 거예요. 수타면에도 사부가 있고 투띠(徒弟)가 있어요. 그 제자는 뭐 하냐면, 주로 힘든 일 하는 거야. 반죽하고 두들기고. 그러다가 자기도 나중에 기술자 되는 거지. 사부는 국수 가락만 뽑는 거야.  

 

: 사장님도 어렸을 때부터 수타 시작하셨잖아요?

 

: 그랬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요즘은 다 기계화되어서….

 

: 그럼, 요즘 주방장들 중에는 수타를 못하는 사람들도 있겠어요?

 

: 많아요. 우리 가게 주방장들도 못해요. 우리 가게에서 수타 할 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제가 알기로는, 30년 전만 해도 집집마다 수타로 뽑는 경우가 많았어요. 근데 수타는 정말 중노동이에요.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이 안 배우는 거야. 이젠 맥이 다 끊겼다고 봐야지. 방송에서 가끔 수타면 뽑는 거 나오잖아요? 그거 다 한계가 있어. 바쁜데 누가 수타로 뽑고 있어. 다 기계로 뽑지. 나도 방송 많이 탔잖아요? 지금도 타고 있고. 아마 짜장면 관련해서는 내가 제일 많이 탔을 거야.

 

손만평: 지난번에 아빠랑 중국 갔을 때, 저희 아파트 앞에 식당이 있어요. 국수집인데 아빠가 거기 짜장면이 그렇게 맛있다는 거예요. 수타로 뽑는 집이었어요. 아빠 말이 자기보다 더 잘 뽑는다고. 저는 채식을 하니까 별 생각을 안 했는데, 같이 간 가족들은 기대를 많이 하고 갔어요. 그런데 짜장면 주문하니까 다 팔렸다는 거예요. 정말 잘 되는 집이었나 봐요. 그래서 그냥 일반 국수 먹고 왔어요. 그것도 수타로 뽑는 거였어요.

 

: 그것도 한국식 짜장이었어?

 

손만평: 아니요. 중국식 짜장면이었어요.

 

: 춘장도 다르고?

 

: 그건 한국식 짜장면 아니에요. 장맛도 물론 다르고. 내가 비밀 얘기 하나 할까요? 중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수타할 때, 반죽에다가 약을 넣어요. 잘 늘어지라고. 물론 당장 몸에 해로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먹는 거니까 안 좋죠. 그래서 진짜 기술자들은 약간 자제를 하는 면도 있어요.

 

: 그래도 나중엔 몸에 해로울 텐데.

 

: 내가 하나 더 얘기할 게요. 어느 갈빗집 가면 고기가 아주 살살 녹아요.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돼지고기는 원래 씹는 맛이에요. 부드러운 것도 좋지만 너무 부드러우면 의심해봐야 돼. 거기에 약품을 넣을 수도 있거든요. 내가 요리사 출신이다 보니까 좀 알아요. 그 약품이 뭐냐면 질긴 고기나 늙은 돼지를 아주 부드럽게 살살 녹게 하는 거야. 그 질긴 고기가 입에서 살살 녹을 정도면 그게 우리 위속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어? 녹지 않을까요? 그래서 음식이라는 건 원래 그대로가 좋은 거예요. 난 살살 녹는 고기 파는 집엔 안 가. 우린 그런 거 안 먹어. 그냥 생고기 먹어버리지.

 

: 방금 중국에 있는 중국집 가신 얘기 하셨는데, 그 집은 수타이기 때문에 맛있는 거예요? 아니면 장이 맛있는 거예요?

 

: 사실 맛있어서 갔다기보다는 애들한테 일부러 보여주려고 간 거야. 그 집도 점심때 먹으러 오는 사람들은 다 노동자더라고. 양이 아주 많아. 한 그릇 가지고 세 사람이 먹어도 남을 정도야. 그걸 보여주려고 간 거지. 맛은 자기 머릿속에서 맛있다 생각하면 맛있는 거고, 맛이 없다고 생각하면 맛이 없는 거야. 사실, 그 집 춘장은 볶은 게 아니라 그냥 끓인 거예요. 오이채 좀 넣어주고. 그걸 갖다 비벼먹는 거지. 그때 난 먹으면서 무슨 생각했냐면, ‘야, 이게 바로 그 인천 부둣가에서 노무자들 상대로 팔았던 면이다.’ 옛날 그 천연 춘장 맛이 나더라고.

 

: 그 집은 장사가 잘 되던가요?

 

: 아주 잘 돼요.  

 

: 식당 이름도 그냥 짜장면이고?

 

: 아니야. 라미엔관(拉面館)

 

손만평: 그래도 메뉴에는 짜장면이라고 되어 있었잖아?

 

: 그거야 자기가 그냥 짜장면이라고 부르는 거지. 한국 짜장면하고는 완전히 달라요

 

손만평: 저도 옛날에 북경에 갔을 때, 후통(胡同) 안에 있는 한 식당에 간 적이 있었어요. 역사가 200년이 넘은 식당이었어요. 나무 목조로 된 건물이에요. 거기에도 짜장면이 있어서 먹어봤는데 진짜 맛있어요. 면은 우리하고 달라서 아주 납작했어요. 또 대만에 갔을 때에도 먹어봤는데, 그곳은 장이 면 아래에 깔려 있더라고요. 야채도 좀 들어있고. 근데 거기는 맛이 없었어요.

 

: 어쨌든 현재는 사장님이 중화루를 운영하고 계시니까, 앞으로 중화루를 어떻게 발전시켜 보겠다는 그런 계획이 있으세요?

 

: 내가 요즘 뭘 느끼는지 알아요? ‘손덕준은 참 복이 많다.’ 그런 생각해. 정말 난 복이 많은 사람 같아. 지금도 방송하고 있잖아? 지금 벌써 8번인가 방송 했어. 앞으로도 두어 달 더 해야 돼. 주말에 있잖아? 가게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바로 이 집이라고. 특히, 노인네들 있잖아? 나한테 그래. “그 개그맨하고 같이 텔레비전 찍은 사람 맞지? 그럼, 이 집 맞네. 그럼 텔레비전에서 했던 그 요리 좀 해줘.” 근데 해줄 수가 없어. 메뉴에 없는 요리거든. 그 개그맨 정종철이 나한테 그러는 거야? “사장님, 왜 이렇게 좋은 요리를 메뉴판에 안 올려요?” 솔직히 말해, 귀찮아. 그게 귀찮은 일이야. 아니, 그 요리 하나 만드는 시간에 탕수육 10개 만드는데? 사실, 우리 가게들 같은 경우는 주말에는 손님들로 꽉 차. 토요일, 일요일 되면 긴장부터 돼. 오늘도 무사히 해내야 할 텐데 그런 걱정 때문에. 사람들 줄 쭉 서잖아? 그럼, 별 사람 다 있어요. 특히, 나잇살 먹은 사람들은 줄 세우면 씩씩 거린다고. 인상이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져. 세상 살다보니, 짜장면 하나 먹겠다고 줄을 세운다고 말이야. 그래도 짜장면 한 그릇 먹고 나올 때는 인상이 쫙 펴져. 왜냐하면, 생각해봐. 한 삼사십 분 줄서서 기다리면, 열은 받을 대로 받았고 배는 고프고. 그럼 뭘 먹는다고 안 맛있겠어?  

: 사장님, 제가 한 말씀 드릴게요. 사장님이 예전에 동천홍 관두신 이유가, 거기는 결혼식 손님 대상으로 짜장면하고 탕수육만 팔아서 주방장으로서의 자존심이 상하셨기 때문이잖아요? 물론 지금도 탕수육 10개 팔면 훨씬 돈이 되는 게 사실이지만, 새로운 메뉴들을 자꾸 개발하고 레시피도 체계적으로 규격화해 나가면 중화루도 지금보다는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니 내가 할 말이 없는데?

 

: 제가 예전에 북경에 있을 때 한국식 중국집에 간 적이 있었어요. 중국 사람이 하는 곳인데, 그 분이 여기 차이나타운에 와서 한국식 중국요리를 배우고 가서 그곳에 차린 거래요. 그런데 요리를 어떻게 파느냐 하면, 조그만 접시에 조금씩 내놓는 거예요.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맛보기 짜장면처럼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요리를 시키는 데에도 부담이 덜한 거지. 편하게 주문해서 먹을 수 있는 거예요.

 

: 맞아요. 그게 있잖아요. 뭐냐 하면요. 지금 우리가 파는 건 솔직히 말해 접시 자체가 커요. 중국에 가면 접시가 작아요. 그 대신 가지 수가 많지. 뎬차이(點菜)하기가 쉬워. 그럼, 이것저것 부담 없이 시켜먹을 수가 있어. 예를 들어, 탕수육 하나에 한국에서는 22천원 해. 중국에서는 6천원 밖에 안 해. 그러니까 하나 시켜먹는 대신에 같은 값에 여러 개 시켜먹을 수가 있는 거지. 한국 짜장면 그릇 보면 중국 사람들 놀래. 한국 사람들은 식사를 참 간단하게 해요. 바쁠 때면 짜장면 한 그릇에 단무지 놓고 부랴부랴 먹고 가버려. 한 그릇에 해결되는 거예요. 근데 중국 사람은 그렇지 않거든요. 불란서랑 비슷해요. 불란서 사람들 식사 한 번 하면 두 시간 걸려요. 거기에다 항상 술이 안 빠져요. 배갈 안 먹으면 맥주라도 반주로 하고 가요. 먹으면서 즐길 줄 안다는 거예요. 아마 한국 사람들이 세계에서 제일 빨리 먹을 거야. 짜장면 곱빼기 하나로 배 채우고 딱 가버려. 그거 사실 좋은 습관 아니에요. 음식은 사실 즐겨야 하는 거야.

 

: 그러니까 제 말씀은 요리의 양을 좀 줄이고 가격을 낮추면 훨씬 더 다양한 요리들을 한 자리에서 먹고 갈 수 있다는 거예요.

 

: 맞아요. 사람들이 다양하게 안 시키는 게 아니라 못 시키는 거지. 가격하고 양 때문에. 사실, 우리도 주말에 보면 제일 많이 팔리는 요리가 탕수육 하나에 짜장, 짬뽕이에요.

 

: 몇 년 전에 대만에서 교수들이 와서 인사동 근처에 있는 중국집을 간 적이 있었어요. 그 분들이 꼭 한국식 짜장면을 먹고 싶다는 거야. 그래서 갔었죠. 우리는 대접한답시고 코스요리를 시켰어요. 그럼, 짜장면은 맨 나중에 나오잖아요? 근데 요리가 나오는데 접시가 큰 거야. 그걸 계속 먹다보니까 이 사람들이 나중엔 배가 불러서 정작 짜장면은 먹지 못하는 거예요. 사실, 제가 요리 전문가도 아니고 중국집을 경영하는 것도 아니니까 뭐라 말씀드리기는 힘들 것 같고 하여튼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 그건 아니에요. 좋은 말씀 하셨어. 근데 중국요리는 있잖아요? 원미(原味)가 중요해요. 원래의 그 맛. 중국에 가면 한 칠팔십 년 된 요릿집이 있어요. 거기는 그 맛을 느낄 수 있어요. 여기처럼 전분가루 같은 것 써서 걸쭉하게 안 해요. 원래의 그 맛이 사라지거든요. 새우도 한국에서는 튀기고 볶고 하잖아요? 중국에선 그렇게 안 해요. 그냥 삶아서 나와. 원래 새우 맛을 느낄 수 있는 거죠. 고기도 마찬가지예요. 돼지고기든 쇠고기든 양고기든 원래 그 맛이 있는 거예요. 탕수육도 여기처럼 전분가루 넣어서 튀기고 하지 않아요. 근데 중요한 건, 음식은 그 나라 사람 입맛에 맞추어야 한다는 거예요. 옛날 그 맛만 고집하면 안 돼요. 자꾸 개발하고 연구하고. 퓨전요리가 되는 거죠. 그래도 우리 차이나타운은 옛날식으로 많이 하려고 해요. 그래도 연세 많으신 분들은 짜장면 하나 먹으면서 옛날보다 맛이 없대요. 옛날 맛이 안 난다는 거야. 그러면 나를 불러요. “손사장, 옛날엔 짜장면 먹으면 참 맛있었는데 지금은 별로야.” 그럼, 제가 그러죠. “어르신께서는 오늘 짜장면 드시러 오신 게 아니라 추억을 찾으러 오신 것 같아요. 사실, 옛날 짜장면보다 요즘 짜장면이 더 맛있어요.” 그건 맞는 말이에요. 단지, 옛날엔 날마다 짜장면 먹을 수 없었잖아요? 짜장면 먹으려면 큰 맘 먹고 와야 했어요. 요즘은 제일 싼 음식이 짜장면이에요. 먹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와서 먹을 수 있으니까, 자주 먹으니까 맛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죠. 한 몇 달 만에 먹어봐요. 맛있죠. 그럼, 어르신들 그냥 웃고 말아요. 여기 차이나타운은 탕수육 하나 해도 푸짐하게 해요. 남으면 싸갈 정도로. 차이나타운은 그런 재미가 있어야 되요. 어떤 분들은 서울에서 오셔가지고, 음식 먹고 싸갈 정도 되니까, 하는 말이 “여기는 기름 값 들이고도 올만하네.” 그런 사람들도 있고 별별 사람들 다 있죠. 호텔 중식당 가 봐요. 거기서 식사하고 집에 들어오면 다시 라면 끓여 먹어야 돼. 다 장단점이 있는 거죠. 그래서 차이나타운은 그걸 고집하는 거예요. 양은 푸짐하게. 또 중국 사람들 그런 것 있어요. 한국 사람들처럼 음식을 딱 알맞게 먹고 가면 서운해 해. 그래도 좀 남겨야. 예를 들어, 위해에 있는 식당에 가서 “야, 이거 땅콩 맛있네.” 그러면 땅콩 한 접시 더 내와요. 그런 인정을 느끼게 해야 돼, 식당 하는 사람들은.

 

: 그래도 차이나타운 정도 되면, 다른 중국집들에선 맛 볼 수 없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 사실 내가 태화원 시작할 때도 그런 생각했어요. 이제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먹을 수 없는 진짜 특별한 중국요리를 팔자. 그 생각 정말 많이 했어요. 사실, 10여 년 전부터 그런 아이템 생각했어요. 차이나타운 활성화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오죽했으면 우리 태화원에서 대만 채식요리를 팔았겠어요? 채식주의자들 먹을 수 있는 요리. 똑같은 탕수육, 양장피라도 중국적 특색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도입해야 해요. 근데 그러려면 뭐가 필요하냐 하면, 첫째 기술자가 필요해요. 차이나타운은 관광특구로 지정받았어요. 그래서 중국의 요리기술자들 쉽게 들어올 수 있어요. 또 제가 지금 인천관광협회 부회장이에요. 제가 제안을 많이 합니다. 인천이 다른 지역과 다르게 하려면 차이나타운을 활성화하는 게 중요하다. 사실, 인천이 특화시켜서 내세울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요? 그 중에서도 중요한 건 차이나타운이에요. 미래에 중국 관광객을 더 많이 유치하려고 하면 음식문화가 중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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