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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1/2010.09] 논단 _ 중국 종교 문화에서의 폭력 (Violence in Chinese Religious Culture)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02 조회수 138

[Vol.1/2010.09] 논단 _ 중국 종교 문화에서의 폭력 (Violence in Chinese Religious Culture)


Professor Barend J. ter Haar _ Leiden University

송요후장호준 역 _ 인천대학교 HK연구교수


1 _ 예비적 고찰

중국 사회가 사회적 조화에 기반하고 있고 따라서 평화적이라는 점을 넌지시 부각시키고자 하는 취지의 진술들이 중국을 두둔하는 대중적인 문헌들에서 여전히 종종 발견된다(최근의 예로는, Li, 583-603을 보라; 초기의 수정주의적인 업적에 대해서는, Lipman and Harrell, passim을 보라). 흔히들 중국의 역대 왕조는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군사적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견해들은 대부분 이데올로기적 주장에 지나지 않지만, 중국 사회 및 역사 전문가들은 연구 주제를 정할 때 그러한 주장뿐만 아니라 보다 폭넓은 청중들로부터 그들이 받는 반응에 의해 영향을 받으면서, 그들이 연구하는 것은 이러한 배경과 배치(背馳)된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데올로기적인 민감함과 분석상의 복잡함으로 인해, 가장 일반적인 접근 방식은 그 주제를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것이었다. 이 글에서 논의할 주된 내용은 아니지만, 우리 [서양] 사회에서 존재했던 다양한 종류의 폭력이 과거의 중국에도 만연했다는 –– 그리고 아마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다는 –– 점을 직시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지배계층 이데올로기의 중요한 부분이었던 사회적 조화(지금도 그런 것처럼) 현존하는 사회적 긴장을 은폐하고 상당한 정도의 폭력에 의해 유지되어야 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었다: 이러한 폭력은 가족 및 사회 통제 등의 영역에서 모든 종류의 폭력을 허용하는 법률 체계를 통해서 유지되었다(Johnston, passim; ter Haar, 2000, 123-140; ter Haar, website).

우리가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gender)적으로, 그리고 심지어는 교육적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똑같은 살인(killing) 행위지만, 우리가 그 행위를 용인하지 않을 때는 폭력이라 부르고, 그것이 국가에 의해서 행해지는 경우에는 (심지어 그 죽임의 대상자가 무고한 사람인 경우라도) 법적 처벌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폭력을 논할 때 실제폭력과 상징적 또는 은유적 폭력으로 구분할 수도 있겠고 또한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도 가능하다. 따라서 폭력과 종교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중국의 종교적 전통에서의 폭력의 위치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될 수 있다. 폭력을 쉽게 은유적으로 –– 그래서 폭력이라고 이름 붙이지 못할 정도로 비실제적인 것으로 –– 정의할 수도 있다. 고유(固有)한 종교 관행들(practices)을 반영하지 않는, , 규범으로부터 일탈된 일반적인 행위로 기술할 수도 있다. 물론 누가 이 고유한 관행들(practices)을 정의하는지 그리고 또 정의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는 별도로 다뤄야 할 문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우리는 여전히 중국의 종교 문화에서는 물론 중국 사회에서 여러 형태의 폭력이 담당하는 역할에 대해 충분한 조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폭력을 어떤 사물이 원래의 또는 자연 상태로부터 실제적, 상징적 또는 은유적으로, 특히 이 글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육체를 수반하는, 물체의 변화로 폭넓게 이해하고자 한다. 폭력은 무장 전투, 신체 불구화 및 절단 등의 처벌, 식인주의 관행(practices), 모든 형태의 살해 등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된다. “죽이는행위는 중요한 형식의 폭력이지만, 그것은 절단과 같은 매개적 행위를 포함하기 마련이다. 같은 행위가 어떤 맥락에서는 우리가 [서양에서] 말하는 폭력으로 불릴 수도 있고 다른 맥락에서는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중국 고유의] 토착 용어를 무시하지는 않겠지만, 이것을 나의 분석적 이해의 근간으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지면이 허락하는 한, 어떤 실천적 관행(practice)의 전반적인 문화적 맥락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비엘리트 집단과 실제 관행(actual practices)에 대해서 보다는 엘리트 집단과(또는) 규범적인 접근방식에 대해 훨씬 더 나은 정보를 얻고 있다. 비엘리트 집단으로부터는, 전반적인 농민 대다수보다는 특정 유형들의 주변적 집단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이 분야에서의 기존 연구에 대한 요약이라기보다는 미개척 영역에 대한 연구의 첫걸음에 해당하는 것이다. 1)


다양한 무기에 의해 자행된 폭력적인 (과격한) 행위들이 반드시 폭력으로 여겨지는 게 아니라 적절한 행위 형식으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서양에서는] 폭력으로 볼 수 있지만 중국 문화에서는 그렇게 간주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이 많다. 그 역의 경우도 존재한다. 십자가에 매우 고통스럽게 매달려 있는 예수를 숭배하는 로마-카톨릭의 관습(custom)이 그 하나의 예일 텐데, 후기 제국시대 중국의 비()기독교도들에게 이는 아주 끔찍한 것이었다(Mungello, 29-30). 따라서 토착적인 관점에 대해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 무엇이 폭력()일 수 있는지에 대해 폭넓게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전혀 폭력적으로 보여지지 않은 행위들, 또는 폭력성이 인지되지만 그것이 순기능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행위들이 있었음을 살펴볼 것이다. 또한 귀()에 의한 폭력과 같이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지만 자연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폭력도 존재했다. 마지막으로, 폭력과 관련된 모든 종류의 기적 이야기들 또는 가혹한 처벌이 이루어지는 저승에 대한 묘사를 단순히 상징적 또는 은유적인 것으로, 즉 실제적이지 않아서 폭력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고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곧이어 살펴보겠지만, 그러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폭력은 그 이야기의 청자(聽者)들에게는 지극히 실제적이어서 그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며 또한 역으로 그들의 세계관 때문에 그 이야기를 실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폭력은 또한 매우 생생하고 현실적인 관점에서 의례를 통해 묘사되고 재현되기도 한다. , 죽은 자, (), 그리고 살아 있는 자의 세계가 그렇게 엄격하게 분리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의 일반적인 맥락에서 명백하게 폭력적인 것으로 구성되지는 않았던 많은 [폭력적인] 관행들(practices)이 있다: 예를 들어, 피를 흘리는 고기를 제물로 바치는 것, 폭력적인 자기저주를 수반하는 맹서(盟誓), 종교적 또는 사회적 목적으로 자기 신체를 절단하는 것, 그리고 전족(纏足; 전족이 종교적인 관습은 아니었지만, 이는 중국 문화에서 오랫동안 폭력이 폭력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 명백한 예라 할 수 있다). 불교와 일부 도교적 전통에서의 동물 제물과 같이 종교적 맥락에서 정상적으로 인정되던 폭력적 행위를 부정적인 견지에서 해석하고 재현했던 대응 담론(對應談論 counterdiscourses)도 있었다.

이 글에서 나는 광의의 폭력이 중국의 종교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심지어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수도 있다는 점을 밝혀보고자 한다. 비록 이 글에서는 과거 시제의 문장을 주로 사용하지만, 여기서 논의되는 많은 관습들은 지난 몇 십 년간의 종교적인 탄압과 자율적인 세속화 과정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중국의 전통적인 종교문화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의 일부분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폭력적인 죽음으로부터 창조된 피조물들이 종교적 숭배의 중심적인 대상이 되었다. 인간의 목숨을 위협하는 많은 것들이 악마의 폭력적인 공격이라고 상상되었으며, 이 악마의 폭력은 종교적 의례의 일부분인 대응하는 폭력을 통해 물리쳐야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폭력적인 처벌을 가한다는 위협은 모든 종류의 경제적, 사회적, 법적 합의들은 물론 도덕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결정적인 제재(制裁 sanction)였다. 폭력에 관한 현상을 분석함에 있어서 제기되는 하나의 문제는 전통 중국에서 종교적인 차원이 많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관행들에 널리 침윤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주 실제적인 차원에서 볼 때, 황제와 그의 지역 대리인인 지현(知縣)에 의한 정치적인 행위는, 그들이 정치적 권위와 정통성의 궁극적인 원천인 천명(天命)을 받들고 있는 이상, 종교적으로 [, 종교를 통해] 지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다시 다양한 의례와 의례화된 행위들을 통해 표현되었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하늘에 의해 감시되고 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믿음이 만연해있었기 때문에, 처형은 가능한 한 성장의 시기인 봄과 가을이 아니라 휴지기(休止期)인 가을과 겨울에 행해져야 했다. 이 글에서는 전통적 문화 중 아주 명확하게 정치적 차원은 종교 문화와 폭력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기에 별도로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또는 종교적이라고 하는 이러한 구분이 전적으로 근대적인 구분이라는 점은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흔히 중국이라고 부르는 지리적인 공간에는 다양한 종교적 전통이 집결해있다. 그 종교적 전통에는 본 논의의 핵심 대상인 토착적인 종교문화로부터 불교 및 도교적 전통(양자는 기원후 2세기 말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니교와 기독교(양자는 여러 차례 중국에 들어왔다가 사라졌는데, 기독교는 6세기 말 이래로 계속 머물러왔다)와 같이 비교적 후일에 수입된 종교들이 포함된다. 이슬람교은, 페르시아 및 위구르족의 군대와 정치 고문들의 형태로, 몽고의 지배와 더불어 비로소 중국에 전면적으로 들어왔다. 18세기에 만주족의 군사적 팽창으로 인해 중국 제국에 이슬람족 집단이 더욱 유입되었다.


2 _ 토착적 정의들

중국어 단어 중에서 서양의 폭력/violence”와 일대일로 대응하는 동의어는 없지만, 그 현상에 대한 담론을 구성하는 용어들은 매우 많다. 제국 시기는 물론 오늘날에도 경멸적인 의미에서의 폭력에 대해 말할 때 가장 기준이 될 수 있는 용어는 폭()이다. 이 단어는 원래 하늘로부터 비를 얻고자 하는 목적에서 의사(擬似)-자살의 형식으로 자신을 햇빛에 과도하게 노출시키는 관습을 의미했다. 이 의례를 행했던 사람은 항상 통치자나 관료였으며, 원래는 왕 그 자신이었다. 이 관습의 기원은 상()(BC 1550년경-BC 1045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후 후속 왕조를 거치면서 서로 다른 형식으로 기록되었다. 오늘날에는 날 일()자가 덧붙여져서 폭() 자가 그러한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Schafer, 130-184). 이 글자는 이미 기원전 3세기 후반에는 과도한 폭력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그 때까지 폭() 자는 예를 들어 부당한 행정적 조처나 부적합한 통치자의 폭력을 지칭했는데, 부당한 통치자는 적법한 새 통치자에 의해 처벌되거나(zhu; ) “멸망되기(mie; ) 마련이었다. “폭발하다를 뜻하는 동음이의어 폭() 역시 태양에 몸을 그을리며 비를 기원하는 의식을 뜻했던 pu()/bao()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이는 명백히 그 글자의 원래 의미가 직접적으로 진화한 것이다. 이 글자의 용법은 무엇보다도 대나무 깨뜨리기를 뜻하는 오래된 관행, 폭죽(爆竹)”이라는 단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후에 소음, , 연기 등을 가지고 사악한 귀()를 놀라게 하여 쫓아내기 위해 행해지는 폭죽놀이의 폭죽이라는 단어는 이렇게 생겨난 것이다(폭죽과 도교 의식에 관해서는, Boltz, 241-305를 보라). 확실히, 모든 폭력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른 형태의 분석적 단어로, 흔히 문() 자와 함께 긍정적인 반대말로 쓰이는 무() 자를 들 수 있다(몇 가지 논의들에 대해서, Feuchtwang, passim; Rand, 171-218; Turner, 285-324를 보라). 이 두 글자는 “(정당화된) 무력에 의한 폭력”()“(적절한) 우주관의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무력에 의한 폭력”()에 내포된 행위들은 과도한 폭력”()으로 분류되는 많은 행위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따라서 ()” 자는 이러한 행위들의 본질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서로 반대되는 말들의 조합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그 행위의 적법성에 관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보면, ()적 행위들은 더 큰 우주론적 형태()를 확립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폭력적인 행위들이었던 것이다.


구타, 약탈, 살생(殺生) 등과 같이 다양한 형식의 폭력을 지칭하는 특수한 용어들이 많이 있다. 보다 일반적인 분석적 용어들은 폭력 그 자체 보다는 (chaos)”을 그 핵심적 관심사로 삼는 경향이 있다. 반란의 문제는 반란이 수반하는 폭력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야기하는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서의 난()에 관한 것이다. 최소한 의식(儀式), 설화(說話)적 맥락에서 난() 자와 긍정적으로 상응하는 글자는 료()이다. ()는 문자 그대로 시끄럽고 떠들썩한것을 뜻한다. (明淸) 시기의 종교문화에 관한 문헌에서, () 자는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조합의 형태를 띠고 등장한다: 열뇨(熱鬧 renao; 뜨겁고 시끄러운), 요방(鬧房 naofang; [신부의] 방에서 소란을 피우는) 요천궁(鬧天宮 nao tiangong; 천궁에서 법석을 떠는). 문자 그대로는 시끄러운을 뜻하지만, 이 글자 료()는 소음과 난폭한 행위에 의해 사물의 정상적인 질서가 뒤집힌 상황을 나타낸다. 여기에는 강한 의미의 잠재적인 폭력이 내포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 다음에 긍정적인 결과로 전환된다(Jordan, passim; Chau, passim; 필자는 현재 연구가 진행 중이다). () 자는 열기, 열광으로 이해하는 게 좋을 것이다. 여기서 은 불을 통해서든 또는 폭죽을 통해서든 귀()를 쫓아내는 중요한 방법이다. 어떤 면에서는, 열뇨(熱鬧)라는 단어는 폭()을 문화적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_ ()와 관련된 세계관


3.1 _ ()와 신()

오래 전부터 중국인들은 생명에 대한 위협을 귀()의 공격으로 보거나 또는 신성한 것에 의한 처벌로 간주했다. 이는 기원전 12-11세기의 상대 시기의 갑골문에도 이미 명확히 드러난 바 있지만, 기원전 3세기 무렵에 의학 서적과 천문()력이 발명, 보급되면서 귀()와 관련된 세계관이 더 널리 만연하게 되었다. 이 피조물들의 끔찍한 외양과 행위는 이들 서적에서 매우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예를 들어, () 치우(蚩尤; Chiyou)는 그의 육체가 황제(黃帝)에 의해 완전히 난도질 당하는 끔찍하게 폭력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되며, 선혈이 낭자한 그의 내장은 (고대 중국의 정치경제적 체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섬서성 남부의 염호(盐湖)가 되기에 이른다(Chen, 318-320).


()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피를 필요로 했다. 나중에 불교의 영향으로 인해 귀()의 습격에 어떤 목적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의 폭력은 도적적으로 일정한 목적이 없이 행해졌다. ()와 관련된 세계관에서 중심적인 것은 귀()들의 폭력적인 공격과 ([맞닥뜨리다] 또는 [어기다]으로 불리는) ()와의 맞닥뜨림에 대한 믿음 또는 두려움이었다. 사람들은 이들 귀()를 피할 수도, 폭력을 동원하여 대항할 수도 있었고, 또는 살아 있는 인간 병사들처럼 병적에 올려질 수도 있었다(Feuchtwang, passim). 마찬가지로 귀()의 비위를 맞출 수도 있었다. 이 귀()들의 일부는 원래 보통 전쟁이나 기근에 의해 또는 출산 때나 살인 등에 의해 순탄하지 않게 횡사한 사람들인데 항상 많은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3-4세기 경 초기의 도교 논객들은 생기가 없는 생명력(; qi)을 남겨둔 채 전쟁터에서 횡사한 장수들에 대한 신앙집단들(cults)을 격렬하게 비판했다(Stein, 65-66). 원래 이들 집단들은 고정된 영토 단위를 기반한 것이 아니라 카리스마적인 망자(亡者)들에 대한 숭배를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었지만, 대략 10세기 무렵부터 이 분파들은 점점 지역 단위 조직화의 중심체로 기능하기 시작했다(ter Haar, 1992, 349-396). 거의 동시에 독각귀(獨脚鬼; One Legged Demon)와 같이 원래 인간이 아니었던 귀()들을 숭배하는 새로운 형태의 분파들이 생겨났으며, 독각귀를 숭배하는 집단은 나중에 중국 남부에서 무상(無常) 종파(cult)가 되었다. 이 무상(無常) 종파는 특히 오랫동안 여성 강간을 옹호하는 등 상당히 폭력적인 측면을 유지해왔다(von Glahn, passim). 폭력적인 귀()는 이렇듯 단순히 실존했던 생명체이었던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서 동원될 수도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일 수도 있었다.


비록 장기적으로는 폭력적인 귀()의 역할이 더 추상적인 위협 정도(치료의 傳承들에서처럼)로 이해되는 경향이 생겨났지만, 폭력적 귀() 그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사람들의 생각/상상을 지배했던 귀()의 한 종류가 태세(太歲 the Great Year), 백호(白虎 the White Tiger), 또는 천구(天狗 the Heavenly Dog)와 같은 별자리와 관련된 귀()들이었다. 제국 시기에 걸쳐, 사람들은 그 별자리들이 하늘에 나타나면 죽음과 파괴가 뒤따른다고 생각했다. 그 별자리들이 언제 출현할지를 예언하는 것은 점성술사들의 중요한 임무였고 또한 그 것들을 驅逐하기 위해 다양한 의례들을 치렀다(Hou Ching-lang, 193-228). 후일에 비적 두령들은 그 별자리들의 이름을 따서 그러한 신격에 내재되어 있는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이미지를 활용하고는 했다(ter Haar, 2000, passim). 이와 관련된 관습이 11세기에 생겨나서 그 다음 수 세기까지 유행했는데, 그것은 바로 종규(鐘馗; Zhong Kui)라고 알려진 귀()의 형상을 재현하고 육신화(肉身化)하는 것이었다. 종규는 원래 귀()를 쫓아내는 데 사용되던 나무 조각이었지만, 나중에는 귀()를 죽이며 돌아다니는 칼을 지닌 붉은 얼굴의 맹렬한 무인으로 그려졌다(Éliasberg, passim). 16세기 이후의 사찰 행렬에는 역병의 신()들이 육신화된 것으로 알려진 수호(水滸) 비적 집단의 주요 인물들을 재현한 일군의 사람들도 포함되었던 것 같은데, 그러한 집단들은 귀()로 상징된 실제 비적이나 질병을 가져오는 다른 귀()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역 공동체를 방어해준다고 생각되었다(근대 시기의 타이완에 대해서는, Sutton, 124-138 and passim). 적어도 귀()를 동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어떤 귀()를 현신(顯身)시키거나 재현하는 것은, 그 귀()를 길들인다기 보다는 그 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끎으로 해서,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폭력적인 성향을 동원하는 방법 중의 하나였다: 물론 희생자들의 생각은 달랐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모든 신격들이 폭력적인 기원을 지닌 귀()적인 피조물들이 변형된 것으로 보여질 수 있는 반면에, 그 폭력적인 기원은 이후의 신화에 의해 은폐될 수도 있다. 이 은폐 과정이 완전히 성공적인 경우는 드물었고 또한 우리가 그들의 폭력적인 기원을 재구성할 수 없었다고 할지라도, 신들은 보통 그들의 역사 과정 속에서 훨씬 존경 받을 만한 삶을 확보하곤 했다. 신격들은 그들의 칭송으로 얼룩진 전기에서 결혼을 할 수도 있었고, 신의 폭력적이고 무절제한 면은 그의 조력자들에게 떠넘겨질 수도 있었다. 어떤 신의 성공속에 내포된 귀()적이고 폭력적인 면을 보상하기 위해서, 문헌 저자들은 신의 도덕적인 특성을 특별히 강조하곤 했다(ter Haar, 1990, 349-396).


3.2 _ 신들을 표현하기

신들은 종종 무인들로 표현되는데, 이러한 형상화 과정에서 본래의 귀()적인 존재가 지녔던 폭력이 길들여지고 변형된다. 이 호전적인 본성은 무기를 통해 표현되지만, 가끔은 폭력적인 속성 중 일부가 신의 붉은 얼굴로 가시화되기도 한다. 이들 호전적인 신들은 성()벽 위에 나타난다고 상상되거나 또는 직접적으로 야만족 침략자나 비적들에 대항하여 군사적 행동에 참여하거나 겁을 주어 그들을 쫓아 버린다고 생각되었다. 지역의 영매(靈媒)들은 그러한 신들의 호전적인 자태를 중시하면서 그 신들의 존재를 재현했다. 그들은 피와 땀에 흥건히 젖을 때까지 날카로운 무기로 스스로의 몸을 자해하고는 했으나, 아마도 신들린 덕택에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그 영매는 그런 상태에서 귀()와 싸울 수 있었고 또한 폭력적인 공격으로부터도 안전했다(Elliott, 52-56, 73-79 and passim).


고대 중국에는 종교적인 숭배와 주술적인 목적을 위해 상()을 만드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 이 상들은 생명력()을 불어넣는 의례를 통해서만 생명을 부여 받을 수 있었는데, 그 의례는 몇 방울의 피를 눈, 입에, 또는 내장(실제나 상징적인 것) 그리고 살아있는 작은 생명체를 넣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렇듯, 신들 자신들의 경우에서처럼, 그들을 창조해내는 근저에는 폭력적인 행위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상()에게 능력을 부여하는 행위는 요술이라는 비난를 야기시켰는데, 이 요술과 관련된 현상에서는 어디에서 실제적인 행위가 끝나고 어디에서 공포가 시작되는지가 항상 불분명하다. 일례로, 사람들을 죽이고 기()를 훔쳐간다고 여겨졌던 떠돌아다니는 마술사들에 대한 공포를 들 수 있다: 이 요술사들의 역할은 19세기에 기독교 선교사들이 계승하였다. 이 생명력은 임산부 몸 안에 있는 태아나 건조시켜서 가루로 만들어진 어린 애, 또는 출생일시에 의해 결정되는 고유한 [사주]팔자의 형태를 띨 수도 있다. 이러한 공포 때문에 요술사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체포되어 지역 주민들에 의해 또는 지현(知縣)에 의해 재판 과정도 없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또한 어떤 집의 거주자를 해치거나 심지어는 죽일 목적으로 그 집에 상()을 묻기도 했다. 이러한 요술에 대항한 싸움은 그 상()들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파괴하는 것이었다(ter Haar, 2006, 95-106; Mollier, 2008, 79-94). 이러한 관행들에서 그 상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폭력적인 기원에 대한 믿음은 비난의 초점이 되었는데, 그러한 비난으로 인해 폭력적인 방법으로 주술을 박해하는 현상이 초래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예를 들어 1839년 남경 인근 지역에서도 발생했다: 어떤 소년이 농사를 짓는 나이든 여자를 추호노파(秋胡老婆; 그 지역에서 악마를 일컫던 이름)라고 고발한 것이다. 그녀는 곧장 지현에게 끌려갔으며 그녀의 귀()적 본성을 밝혀낸다며 자행된 고문 끝에 숨을 거뒀다(ter Haar, 2006, 61-64).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새로운 종교적 집단에 대한 박해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요술에 대한 박해가 일반적으로 지역 차원에서 선동되고 지역 공동체 자체에 의해서 이루어진 반면에, 종교 집단들에 대한 박해는 국가에 의해 선동되었지만 지역 공동체에 의해 수행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유배되고 그들의 삶이 뿌리째 뽑혔다(좋은 예들은, Kuhn, passim).


3.3 _ 구마(驅魔)와 보호(保護)

이미 아주 초기의 증거에서, ()의 공격에 대항하는 대응폭력(counterviolence)은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기원후 1세기에 신년(新年)마다 제국(帝國) 조정(朝廷)에서 수행된 대규모 구마(驅魔) 의식(儀式)에서 마귀와의 싸움을 연상시키는 12 (spirits)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되었다; “네 시체를 그들이 불에 그슬리기를! 그들이 너의 해골을 찢어발기기를! 그들이 너의 살점을 떼어내기를! 그들이 너의 허파와 내장을 떼어내기를!” 구마(驅魔) 관행들은 귀()들을 죽이는 동물들과 활과 화살을 필두로 하는 다양한 무기들에 의지하고 있다(Harper, 159-172; Poo, 79-83, 138-141). 그 이후에 있어서 도교에서의 구마(驅魔) 관행은 매우 유사한 측면들에서 귀()들을 다루었다. ()들은 사로잡히고 나서 곧 바로 처벌, 심문 또는 죽여야 했다. 이것은 많은 학문적 관심을 받고 있는 도교적 차원의 것이 아니었는데, 이는 우리(서양의 지식인들)가 하나의 종교문화에 대해 기대하고 있는 것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Mollier, 2008). 구마(驅魔)에 쓰이는 재료들은 법적 관행에서 사용되는 것들보다 훨씬 광범위해서, , 열과 소음(별개로 그리고 폭죽 같이 불꽃놀이의 형태로), 모든 형태의 (채찍, 막대기 그리고 멍석까지 사용하는) 구타(毆打), 참수(斬首)와 교살(絞殺), 등등(Elliott, passim).


()들에 대한 불교적 접근 방식은 조금 달랐다. 도교 의식(儀式) 수행자들처럼, 그들은 넓은 범주의 비인간적(非人間的) 존재들을 본질적으로 귀()라 정의했는데, 여기에는 인간에서 기원한 모든 신()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들을 죽이거나 쫓아내는 것은 별문제로 하고, 불교에서는 그러한 존재들을 개종시킨다는 부가적인 선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천태종(天台宗)과 선종(禪宗)에서 중요한 오늘날 호북성(湖北省)에 있는 옥천사(玉泉寺) 근처에 살았던 관우(關羽)라는 원래 귀()적인 인물은 이 절을 세운 주지(住持)에 의해 개종된다. 뒤 이은 수 세기에 있어서, 관우는 지역에 현신(顯身)해서 채식(菜食) 제물을 계속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그는 늘 일반적인 육류 제물을 요구하는 무인(武人)으로 숭배되고 있다. 그는 야만족의 침입과 반도(叛徒)들에 대항해 무력으로 민족을 보호하며, 귀신의 공격들을 몰아낸다. 비록 우리는 그러한 신()들의 개종(改宗)이나 구마(驅魔)에 대한 더 많은 예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대다수의 지방적인 신앙집단들(cults)은 그들의 폭력적인 기원과 제사 관행들에 대해 불교나 도교 측에서 승인하지 않는다고 해서 영향을 받지 않았다(Ter Haar, 2001, 130-132).


치료적인 운동과 驅魔 관행의 世紀에 걸친 전통과 탁발 승려의 자기방어술의 필요에서, 무술 전통들이 불교 및 도교 각각의 맥락에서 발전되었다. 맨손과 무기를 갖고 싸우는 少林이라는 불교적 전통은 승려의 지팡이를 갖고 싸우는 것에서 발전했는데, 도교의 전통은 을 갖고 싸우는 것을 발전시켰다. 두 전통 유형들은 정신적 및 육체적 목적들을 결합시켰는데, 後者는 치료적인 것은 물론 武的 차원들을 갖고 있었다. 少林寺 승려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少林 拳法 출신의 승려들은 때때로, 杭州上海 근처의 海岸 지역에서 16세기 중엽 海賊들과의 전투와 같은 군사적 전투에서 싸웠다. 이것은 아주 흔한 것은 아니었으나, 廟會(temple festivals)에서 종교적 儀式 수행자 무술 전문가들의 출현은 그런대로 빈번했음에 틀림없다(Shahar, passim).


3.4 _ 종교적으로 고무된 사건들과 반란들

질병과 유사한 것들을 일으키는 귀()이것들에 대해서는 폭력적 수단으로 싸웠다에 대한 두려움과 나란히, 우리는 또한 메시아적인 변형을 발견한다. 이러한 유형의 전통에서, 종말기(終末期)의 재앙들이 본질에 있어서 귀()적이며 폭력적이라고 상상되어, 폭력적인 대응조치들을 요구한다. 자료들을 이용할 수 있는 덕분에, 이러한 전통들은 중세 시기(5세기-9세기) 동안 그리고 다시 16세기 말 이래로 특히 잘 문서화되어 있다(Mollier, 1992, passim; ter Haar, 1998, 224-262). 이들 구세주적인 전통들은 종종 폭력 사건들이나 반란들을 고무하기도 했는데, 그러한 사건들의 因果的 기원은, 단순히 종교 신앙 탓이라고만 하기에는 훨씬 더 복잡하다.


이들 귀신론적인 구세주 전통들(demonological messianic traditions)에서 하나의 결정적 요소는 구원은 오직 실제적일 뿐만 아니라 귀()적인 군대(음병[陰兵], 귀병[鬼兵] 또는 천병[天兵]이라 불린다)의 도움을 받는 지도자의 도래로부터만 나온다. 우연히, 정확히 같은 유형의 鬼兵들이 역시 驅魔的 儀式에서 소환되었고 지역 공동체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그들을 (병적부에) 등록시킬 수 있었다. 敵鬼들을 전투에서 패퇴시키고 죽인 후에, 선택된 사람들을 위해 영원히 지속될 태평의 완전한 세계가 등장할 것이다. 동시에, 이 신앙은 왕조 통치자에 대한 폭력적 도전과 새로은 天命에 대한 요구를 위한 토대로 작용할 수 있었다. 帝國의 모든 통치자들에게 요구된 천명의 소유에 대한 믿음 때문에 정치적 통치의 모든 (보통 폭력적인) 변화들에는 강한 종교적 차원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구세주적인 전통들에 있어서, 이러한 종교적 차원은 훨씬 더 컸다(Ter Haar, 1998, 306-364).


청대(淸代 1644-1911)에 이러한 예언들을 수반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는데, 대부분의 종교적으로 고무된 반란들을 포함하고 있다. 1774년 왕륜(王倫)의 난, 1796-1804년의 소위 백련교의 난, 1813년 팔괘교(八卦敎)의 난 그리고 1851-1864년의 태평천국의 난은 모두 최소한 부분적으로 이들 신앙(최소한도로), 마귀적인 적()의 확인과 그것을 다루기 위한 구마(驅魔)적인 폭력에의 호소에 의해 고무되었다. 우리는 또 소문들 사이에서 떠돌아다니는 이들 신앙들을 발견하는데, 그것들은 1900년 의화단의 난에 선행했던 긴장된 분위기를 야기시켰다. 폭력으로 대항해 싸우고 부적(符籍)에 의해 보호받을 종말과 귀()들의 도래에 대한 소문이 있었다. 신장(神將)들에 홀려 총탄에도 상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무당들의 관행 역시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러한 신앙은 의화단원들이 폭력적인 공격을 하는데 힘을 북돋는 작용을 했다(ter Haar, 2006, 172-177).


4 _ 계약(contracts)과 규범(norms)의 집행

전근대 중국은 일찍부터 정교한 법 체계를 도입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제국(帝國)의 법과 사법 기관들 외에, 법적 구속력이 있는 합의와 도덕적 가치들에 대한 代案的인 집행체제가, 종종 강한 종교적 맥락 속에서, 계속 존재해 왔다. 아직 그러한 관행들(practices)에 많은 조직적인 관심이 기울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귀()들을 구축(驅逐)하는 것은 종교적인 관행일 뿐만 아니라, 집단 내의 갈등을 포함한 다양한 지역의 문제들을 다루는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폭력이 이러한 유형의 구마(驅魔)에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가 폭력이 역시 정규적인 법적 체제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인식할 때, 보다 의미가 있다.


4.1 _ 맹서(盟誓 Covenants)

피를 궁극적인 생명력으로 여기는 신앙 역시 맹서의식(盟誓儀式)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들을 증인으로 한 그러한 맹서는 작고 큰 집단들 사이에서 합의를 맺기 위한 강력하고 다소 일반적인 의식(儀式) 관행들(practices)이었다. 그 의식은 신에게 동물과 술을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明淸) 시대에는 그 신()들은 천지(天地)일 수도 있고 성황신(城隍神)과 관우(關羽)와 같은 어떠한 도덕적 이거나 법적 지위의 신들일 수 있었다. 그러므로, 맹서 당사자들은 저주들과 악담들을 표명했다. 이들에 수반해서, 맹서하는 자들은 땅바닥에 사발을 깨뜨리거나 보다 구체적으로 위협을 나타내기 위해 어린 수탉의 목을 베면서, 상호부조(相互扶助)의 약속이나 진리만을 말하겠다는 약속을 깨뜨렸을 때 이와 유사한 운명에 그들이 떨어질 것임을 언명했다. (明淸) 시대에 사용된 저주들은 놀랍게도 3세기 경 이래 초기 도교(道敎)의 규율들에 사용된 그것들과 유사해서,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동일한 의식(儀式)적 전통에서 유래했음을 시사하고 있다(Katz, passim).


()적 처벌의 효험에 대한 믿음은 위의 경우에서처럼, 자신들의 맹서를 깨뜨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부터, 도덕 규칙들과 세속적 합의들을 어긴 모든 사람들에게로 확대되었다. 처벌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았으나 효를 어긴 것에 대해 번개를 친 것으로부터 광범위하게 다양한 치명적인 질병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는데, 그 질병들은 아주 가시(可視)적인 것으로서, 궤양, 종기, 몸의 떨림 같은 것들이 있었다. 더욱이, 그러한 처벌들은 빠른 사망(이것은 일반적으로 신의 축복으로 여겨졌다)을 초래하지 않고 오랜 시간을 끌었다. 고통, 고름과 피, 몸의 떨림, 이들 모두는 아주 그림과 같이 묘사되어서 처벌의 성격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남기지 않았다(ter Haar, 2008, passim).


4.2 _ 지하(地下)에서 사람의 행위에 대한 보상(報償)

고문과 체벌의 사용은 세속적인 법 이론과 관행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세속적 고문과 처벌을 위해 사용된 언어는 구마(驅魔) 관행의 언어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지하(地下)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는 여전히 지옥(地獄)으로, 그곳에서는 귀()(환생[還生]하지 못한 사자[死者])이 감금되고, 심문되고 처형되었다. 지하세계의 최고의 신()들은 제국(帝國)의 관리들로 여겨져서 합법적으로 고문과 처벌을 위해 폭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Eberhard, passim; Teiser, passim).


이 지하세계는 실제로는 늦게 중세 때에야 고안된 것이었고, 관료제도의 흥기(興起) 그리고 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잡아두는 장소로서 감옥을 만들어낸 것과 관련되어 있다. A.D. 3세기 후까지만 해도, 사자(死者)는 지하(地下)에서 살았는데,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exciting) 곳이 아니었다. 환생 신앙이 없었고, 보상이나 처벌도 없었다. 늘 사후(死後) 세계의 관료체제가 있었으나, 그 주된 기능은 사자(死者)를 처리하고 그들이 묻힐 땅의 구매를 조정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무런 도덕적인 차원도 갖고 있지 않았고 폭력적인 처벌에 대한 언급도 없다. 사후(死後)의 삶을 생각함에 있어서 두 번째 단계는 불교적인 지하세계의 도입이었는데, 그것은 훨씬 더 절망적이어서, 이 새로운 세계는 빠져 나올 후 있는 희망이 없는 처벌의 장소로 인식되었다. 기원후 7세기 언제부터인가, 연옥(煉獄 purgatory)의 개념이, 범죄자들과 다른 유형의 원고(原告)들이 지방장관들(지현 知縣)들에 의해 처리된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사자(死者)을 처리한, 십왕(十王)으로 이루어진 관료체제의 형태로 도입되었다. 지옥에 머무는 것은 이제 일시적일 수 있었다(Teiser, passim).


지하세계의 폭력은 난폭성에 있어서, 현세의 법정에서 고문과 체벌보다 맹세의식에서의 저주하기와 더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지하세계에서는 현세 인간에 대한 법정에서와는 달리, 사람을 잠재적인 노동력으로 유지시키는데 관심이 없었다. 역설적이지만, 불교적 관행은 지하세계의 폭력으로 위협을 하거나, 그에 대해 공포를 느끼도록 하는 것을 필요로 했는데, 이는 신자(信者)들과 잠재적인 개종자들에게 사원(寺院) 공동체에서의 회개(悔改)와 그 공동체에 대한 지원의 필요를 고취하기 위해서였다(사원 공동체는 그 때 정규적인 의식(儀式)의 수행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들의 도덕적인 범죄들을 보상하는 것을 도울 수 있었다). 최소한 명(明淸) 시대에, 그러나 더 이른 시기에도 대부분 마찬가지로, 종국적으로 불성(佛性)이 보장된 서방정토(西方淨土)에서의 환생은 불교에서만이 아니라 도교에서의 장례의식들에서의 정점(頂点)으로 보았다. 이 의식(儀式) 중에서 민중적이며 매우 희곡(戱曲)적인 부분글자 뜻 그대로 타성(打城 지옥을 때려 부수기)”라고 제목이 붙여져 있다, 모형으로 된 지옥이라는 요새(要塞)를 불태운 뒤에, 사자(死者)의 영혼은, 이상적(理想的)으로 서방정토(西方淨土)에서 환생한 준비가 되어 있다(ter Haar, fieldwork).


지하세계의 폭력은 장례의식 동안 지역 사람들에게 아주 잘 감지될 수 있었는데, 10개의 지옥을 묘사하는 족자들이 핵심적인 의식이 수행된 무대를 둘러쌓다. 이들 족자들과 유사한 그림들이 명청시대에 인쇄된 문헌에서 발견될 수 있다. 장례의식 동안 그리고 7(중원절 中元節: 역자주) 때에 특별한 연희(演戱)는 사람들이 지하세계의 폭력적인 처벌들과 친숙해지고 경고를 받는 또 다른 수단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북송(北宋) 이래로 동악대제(東嶽大帝)나 성황신(城隍神)과 같은 전형적인 지하세계의 신()들을 위한 행진은 자칭 죄인들의 행렬을 포함했는데, 그들은 처벌도구들을 들고 감으로써 그들이 그렇지 않을 경우 사후(死後)에 벌 받을 수도 있는 죄들을 미리 보상하였다. 이들 매우 유사한 신()들은, 악귀들을 쫓아내고자 했던 토착의 도사(道士)들에 의해 불러모아졌는데, 또한 수사(搜査) 도구들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ter Haar, fieldwork; Idema, passim).


사람의 행위를 보상하는 또 다른 방법은 물론 종교적 예배이다. 불교는 어떤 다른 종교 문화 이상으로 몇몇 행위들이 너무 폭력적이며 나쁘다고 해서, 그로 인한 죄와 회한(悔恨)의 감정이 이러한 죄악을 보상하기 위해 정교한 불교 관행들에 반영되었다. 사람들은 생명을 죽이는 것이 폭력적이며 나쁘다고 하는 관념은 불교에 의해 최초로 도입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양쯔강 하류지역에서, 특히 양잠 농가에서 관음(觀音) 순례 집단의 대단한 인기는, 매년 비단을 얻기 위해 수백만 마리의 누에를 죽임으로 인한 엄청난 업보(業報)적 부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순례집단에 대해서는 Yu Chun-fang, passim을 보라).


5 _ 제물(祭物)

고기와 술을 함께하는 것은 중국 문화에서 인간적 관계와 유대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주요한 수단이다. 그래서, 제사를 통해 신적(神的)인 세계와 관계를 확립하는데 유사한 언어가 사용된 것은 놀랍지 않다. 이것 옆에서 우리는 또한 자발적인 자살을 발견하는데, 이것인 상대(商代)의 무덤들에서 입증되고, 또한 더 뒤의 시대에는 불교적 전통에서 발견되는데, 거기에서는 자신에 대한 더 넓은 범위의 행위들의 일부분으로서 실행되었다. 자살이나 자기 상해(傷害)라는 것은 신()들이나 귀()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며, 사자(死者)에 가담하거나 궁극적인 구원에의 장애물로서 신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5.1 _ 일상적인 제물과 대응담론(對應談論 counterdiscourses)

우리는 상대(商代) (기원전 1200-1045년경)에 나온 갑골(甲骨)과 서주(西周 기원전 1045-771)의 청동기에서 나온 명문(銘文)에서 제사 관행들에 대한 풍부한 증거를 갖고 있다. 상대(商代) 무덤들은 동물과 인간의 대규모 제물의 중요성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갑골문은 소의 어깨뼈와 거북이 등껍질에 쓰여졌다. 상대(商代) 무덤들의 발굴은, 장례의식 동안 몇몇 개별 인간들의 죽음은 다소 자발적이었지만, 많은 수의 사람들은 비자발적으로 그리고 잔혹한 참수(斬首)(Bagley, 191-194ff)를 통해 죽었다. 인간 제물은, 비록 그 관행의 정확한 역사와 그것이 없어진 뒤에 그것을 둘러싼 두려움은 여전히 서술되어야 할 필요가 있지만, 결국 중요성이 감소했다.


동물을 죽이는 것을 거부했던 도교 및 불교적 대응담론(對應談論 counterdiscourses)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고기와 술이라는 제물은 중국 역사를 통해 만연된 채로 남아 있었다. 지역 공동체와 최고의 엘리트들은 많은 관심을 적절한 제물에 쏟았는데, 그것은 거의 늘 고기와 알콜 음료를 뜻했다. 공동체 제사 때의 고기를 나누는 것은 사실 한 사람이 현재 공동체의 일원임을 결정적으로 상징하는 것이었다. 정당한 몫을 받지 못하는 것은 지역이나 종족 내 분규의 원인이 될 수 있었다. 이 고기는 푸주간에서 산 것이 아니고, 제사를 포함한 전체 축제 기간 동안 잡은 것이었다. 몇 가지 유형의 고기들에 대해서는 금기(禁忌)가 있을 수 있었으니, 교육받은 엘리트들 사이에서 쇠고기를 먹는 것이나 남부(南部)의 사산(祠山) 숭배에서 돼지고기 제물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신들에게 혈식(血食)을 제공하는 산제물은 일반적인 것이었다(Goossaert, passim; Hansen, 157).


도교 및 불교의 종교 관행들은 고기를 의식(儀式)에 사용하는 것에 대해 현저하게 제물 반대문화를 형성했다(Kleeman, 185-211). 기원후 2세기 후에, 천사(天師)의 아주 오래된 도교 운동은 막 잡은 고기를 나누는 것(아직 피가 남아 있었으므로, ‘혈식이라 한 것이다)과 알콜 음료로 취()하게 하는 제사 관행을 거부한 대항문화로서 사회의 엘리트들 사이에 아주 많이 퍼졌다. 또 다른 도전은 불교 관행에서 나왔는데, 끊임없는 윤회라는 새로운 전제를 도입했고 불교는 그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생명을 죽이는 것은 나쁜 환생의 원인들 중의 하나였다. 불교에서 제물에 대한 대응담론(對應談論 counterdiscourses)은 결코 주류(主流)의 관행이 되지 못하고, 대부분 공동체에 완전히 입회한 회원들, 즉 승니(僧尼)들로 제한되어 있었다. 불교 평신도들은 특별한 의식(儀式) 행사들과 해마다 고정된 날에 육식을 자제할 것이 기대되었는데, 그러한 관행은 10세기까지 잘 문서화되어 있다. 그 뒤에, 매일 채식하고 금주(禁酒)를 실행하는 불교 평신도 운동들은 인기있게 되었지만, 사원과 국가에 의해 재인(齋人)”들이라고 맹렬하게 거부되었다. 고기와 술에 대한 제물로서의 언설은 여전히 압도적인 채로 남아 있었으며, 대응담론(對應談論 counterdiscourses)은 종교 전문가들이나 개별 평신도들에게만 용인되었다. 채식과 금주의 생활방식을 행하는 조직적인 평신도 운동은 반란적이라 의심을 받았다.


5.2 _ 자살과 자해(自害 self-mutilation)

무덤들에 상()의 통치자와 함께 묻힌 사람들의 육체는 폭력적인 죽음을 했다는 외적 흔적이 없고 그들에게는 풍부한 부장품들이 함께 묻혀 있다. 우리는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그들은 자발적으로 죽으러 갔다고 가정한다 비록 우리는 역시 이러한 유형의 행동에 대한 상당한 사회적 압력의 존재를 가정한다. 더 뒤의 시기에도 그 관행을 알았고 그것을 순()이라 꼬리표를 붙였다. 그 의식(儀式)적 맥락에 대해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명백하게, 고위관리가 죽은 통치자를 수행하는 것이든, (앞에서 논의된) ()이라 불린 자발적인 죽음으로 위협을 하는 것이든 부정적인 형태의 폭력이라기보다는 공물을 바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제국시기를 통해서 종교적 맥락에서 자살의 가장 중요한 형태가 불교의 종교적 인물이 자신을 태우는 것이었다. 그것은 부처에의 제물로서 겁()마다 자신을 태웠던 약왕(藥王)의 설화에 의한 연경(蓮經)에 있는 이야기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또한 비를 얻기 위한 자기 희생과 위에서의 고위관리들에 의한 의식(儀式)적인 자살의 전통들에 의존했다. 불교도의 자살은 더 넓은 목록들 중여러 유형들의 자해(自害)로부터 불태워 자살하는 것에 걸쳐 있었다의 일부였다. 자해(自害)불교에서 사자(死者)를 화장(火葬)하는 관행 역시는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를 온전하게 유지한다는 고전적인 이상(理想)과 직접적으로 충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맹세를 뒷받침하기 위해 손가락이나 훨씬 더 큰 신체 부분들을 잘라낸 불교의 인물들은 그들이 추종자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끌어내었다(Benn, passim; Jimmy Yu, passim). 보통 승인되지 않은 육체의 제물은 위반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아마도, 인정된 제물은 훨씬 더 많았다.


6 _ 결론

폭력에 대한 정의(定義)를 일반적인 서구적 또는 보다 분명한 중국적 이해를 넘어서 확대시킴으로써, ()과 무() 같은 용어들에 의해 표현된 후자의 경우에서, 필자는 폭력 자체가 중국 종교문화의 중심적 요소였음을 보였다. 동시에, 또한 어떠한 문화에서 우리가 폭력이라 부르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문화를 접근하는 가치체계들우리 자신의 것과 우리 자료들을 쓴 엘리트들에 의해 늘 함께 결정되어진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 용어와 그 용어의 아마도 중국에서 상응하는 것들은 객관적인 문화적 범주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넓게 정의된 폭력이 놀랍게도 중국 종교문화에서 일반적이었다고 주장하겠다.


이 짧은 논문에서, 중국에서의 종교문화와 폭력 간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모든 차원들과 뉘앙스들을 공정하게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했고 많은 작업이 여전히 이루어져야 한다. 종교권(宗敎圈) 과 다소 세속권(世俗圈)에서의 폭력의 역할에서의 차이나, 이러한 관계 내에서의 변화에 훨씬 덜 관심이 기울여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세속적 정의(定義)와 종교적 정의는 폭력을 요구했는데, 고문의 사용은 세속적 체제에서 훨씬 더 정규화되었고 기민한 지현(知縣)들은 너무 심한 고문은 다만 믿을 수 없는 자백만을 초래함을 잘 알고 있었다. 지하세계만이 아니라, 의식(儀式)적 맹서의 폭력은 훨씬 덜 규제되었다.


폭력적인 행위들의 합법성과 적합함에 의거해서, ()이라는 꼬리표(label)나 다른 용어가 붙여지거나 그렇지 않을 수 있었다. 더욱이, 불교적 및 도교적으로 고무된 대응담론(對應談論 counterdiscourses)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것들은 생명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고 횡사(橫死)한 자들에 대한 숭배를 강하게 혐오했다. 전적으로 유럽중심적인 채로 남아 있지 않으면서 중국적 맥락에서 폭력이라는 개념의 적용을 정당화하는 것은 바로 이들 대응담론들이다. 다른 한편으로, 불교도들은 자살과 자해(自害)를 실행했고, 깨어 있기 위해서나 벌과 경고로서 크리켓 방망이 같이 생긴 몽둥이로 때리는 것은 선() 관행에서는 아주 일반적인 것이었다(ter Haar, 2009, passim).


위에서 언급된 주제 중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필자가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최종적인 문제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계속성의 문제이다. 분명히, 많은 전통 종교 신앙들과 관행들은, 비록 다른 맥락과 형태들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중국에 여전히 살아 있다. 동시에, 종교에 대한 수십 년에 걸친 탄압은 그 자체가, 필자의 의견으로서는 종교적 함축을 갖고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이유는 공산주의 체제(그리고 그 앞에 있었던 국민당 체제)가 과거에는 물론 지금도 여전히 종교적 전통들이 하는 것과 꼭 같이 자신들만이 진리라고 절대적으로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통 중국은 마녀사냥을 했으며 국가는 때때로 과도한 폭력을 써서 종교집단들을 박해했으나, 진정 대규모로 종교와 종교집단들을 억압한 것은 오직 근대 중국의 그리고 아마도 세속의 국가이다. 명백하게, 종교문화에서 폭력의 중심성(中心性)은 여기에서 무슨 인과적(因果的)인 요소가 아니었고, 피상적으로 관용적인 기독교의 메시지와 아주 똑 같은 방식으로, 이단이라고 인정된 것들에 대한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박해들과 대안적(代案的)인 형태들의 종교문화에 대한 탄압을 지원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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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번역문에서 제32절까지는 장호준 교수가 번역하였다. 나머지는 송요후 교수가 번역하고 전체를 일관되게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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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몇몇의 언급들은 필자가 읽은 원사료만이 아니라 1992년부터 1994년 사이에 필자가 주로 천주(泉州), 타이완, 홍콩 및 싱가폴에서 수행한 현지조사를 근거로 한 것이다. 주석들은 붙일 수 없었고 다만 시사하는데 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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