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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16 /2011.12] 관행기획 _ 율리우스 디트마의 중국여행기 『새로운 중국에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10 조회수 63

[Vol.16 /2011.12] 관행기획 _ 율리우스 디트마의 중국여행기 『새로운 중국에서』

목승숙 _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 옮김 

 

 

이 글은 독일인 율리우스 디트마(Julius Dittmar)의 중국여행기 『새로운 중국에서(Im neuen China)(1912)의 일부를 발췌 번역한 것이다.

  저자는 세계 일주를 하던 도중 1910년 늦가을에 일본, 한국, 만주를 거쳐 중국을 방문했고, 당시 중국 여행에서 받은 인상들을 이 책에 기록하였다. 이 책에는 다수의 사진들과 함께 그가 방문한 도시, 진기한 볼거리, 그리고 새로운 중국의 특징적인 모습들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 저자와 함께 여행한 일행들로는, 러시아 스파이인 v. Z.(v. Z.) , 미국 시카고 출신으로 아시아 여행 안내서를 쓰는 루이스(Lewis) , 중국 전문가로서 영국 런던 출신의 무어(Moore) 여사, 독일 슈투트가르트 출신의 팔케(Falke) 양이 있었다.

 본 발췌 부분은 톈진(天津)과 베이징(北京)으로 가는 도중에 거친 만주에서, 저자가 보고 들은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저자는 유럽인인 자신의 눈에 처음으로 비친 중국 여성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유럽 여성에 대한 당대 중국 여성들의 견해를 엿볼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한다. 이 대목은 유럽인과 비유럽인의 만남, 유럽인과 중국인의 시선이 마주치는 지점에서 드러나는 유럽과 중국의 시각차를 보여주고, 쌍방적으로 전도된 시각을 통해 각기 유럽과 중국의 입장에서 타자화된 이국의 모습을 엿보게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_ 산맥을 통과하며

 

다음날 아침 나는 이상야릇한 음악소리에 잠을 깼다. 유럽이었다면 나는 그런 소리를 음악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크게 질러대는 날카로운 비명소리는 일본의 연극공연과 사원들에서 들었던 절규하는 듯한 음악 소리와 정말 흡사했다. 더 이상 잠을 잔다는 것이 불가능해진 탓에 나는 일어나 몰래 연주자들을 보려고 했다. 방안은 칠흑 같이 깜깜했다. 하지만 곧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이 미쳐 몇 번을 더듬거리다가 덧창을 찾아냈다. 서늘한 아침공기와 함께 새롭게 시작된 하루의 휘황찬란한 붉은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서늘하고 매서운 바람이 내게 불어왔다. 이것은 일본의 더위 탓에 여전히 데워진 상태의 내 몸을 이루 말할 수 없이 좋게 하였다. 우아하고 환상적인 일본 집들을 본 뒤여서, 아래에 내려다보이는 마을의 소박하고 각진 집들은 솔직히 마치 고향의 인사인 양 나를 기쁘게 했다. 그런데 음악 소리는? 음악 소리 역시 예상 밖이었다. 왜냐하면 사실 그것은 내가 두려워했던 음악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유럽에서처럼 기름칠이 잘 안된 축 주위를 바퀴가 돌아갈 때 나는 소리였다. 그런데 그 바퀴들은 노동자들이 일렬종대로 끌고 지나가는 끝없는 손수레 행렬의 일부였다. 손수레와 노동자들 둘 다 똑같이 나의 이목을 끌었다. 그 이유는 손수레 바퀴가 독일 수레보다 훨씬 더 컸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바퀴가 손수레의 끝이 아닌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레에 실은 기와들은 바퀴의 좌우에 붙여서 만든 널빤지 위에 놓여 있었다. 한데 노동자들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큰 키에 건장한 체격, 옆으로 퍼진 정직한 얼굴에 생기 있게 번득이는 옆으로 째진 눈, 머리 주위를 휘감을 수 있도록 길게 땋은 머리를 한 파란 옷의 사내들은 중국인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중국에 와있고 내 여행체험기의 새로운 장을 시작할 수 있는 게 맞구나!

 

물론 우리는 여전히 일본 주인에게 먼저 돈을 지불해야만 했다. 그가 사기꾼임은 이미 증명되었다. 그는 우리에게 초라한 잠자리와 그보다 더 초라한 아침 식사비용으로 각각 현금 십이 마르크씩을 받아갔다. 하지만 루이스씨는 이 사실을 자신의 여행 안내서에 적어 그의 행동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일본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일본인 안내자는 마을을 통과해, 일본 공무원들이 차표를 팔고 일본 군인들이 승강장을 지키고 있는 역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그 결과 우리는 재차 일본 열차에 몸을 맡겨야만 했다. 러시아인도 또 다시 벌써부터 열심히 염탐하며, 내게 역 위쪽 언덕에 지어진 육중한 기와 건축물들을 보았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그것들은 관공서와 물품창고들이라고 말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전쟁 시에 일본인들이 철도 노선을 보호하기 위해서 설치한 보루란다! 일단 그것은 나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막 그것보다 더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특이한 외모를 한 사람이 대합실에서 절뚝거리며 왔는데, 나는 그 모습에 웃어야 할지 놀래야 할지 몰랐다. 혹시 중국 여자인가? 그녀는 머리에 모자 대신 온갖 번쩍이는 작은 구슬이 가득 달린 철사로 만든 반달 모양의 군악기 같은 것을 쓰고 있었다. 걸어갈 때 얼굴은 균형을 잡느라 어딘지 모르게 경직되고 긴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입술과 뺨을 붉은 색으로 야하게 화장했지만 그렇다고 더 예뻐 보이지도 않았다. 그 다음은 볼품없이 넓은 일종의 덧옷 같은 것이었는데, 진짜 믿을 수 없게 오른쪽 어깨 위에서 단추를 채우도록 되어 있었다.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마찬가지로 볼품없는 바지였다. 아니, 마지막으로 아주 다른 그 무엇인가가 더 있었다! 그녀는 젖먹이 아기의 발을 빌린 것 같았다. 왜냐하면 멀쩡한 사지로 걸어가는 대신에 그녀는 이해가 안 되게 두 개의 꽉 끼는 작은 아이 슬리퍼를 신고 절뚝거리며 왔기 때문이었다. 이미 중국에 관한 책을 한 권 써서 무엇이든 다 잘 알고 있는 무어 여사가 내게 그것에 관해 설명해주려고 다가왔다. 유럽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개미허리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듯이 중국인들은 작은 발을 예쁘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그들은 여자 발을 젖먹이 아기의 발 크기로 작게 만드는 기술을 하나 고안해 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소녀들의 발가락을 발바닥 아래로 누르고 더욱이 발이 자라는 것을 막기 위해 밤마다 아주 꽉 끼는 잠자리 신을 신긴다. 그 방식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원했던 것 이상의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즉 다리 역시 무릎부터 성장이 중지되어 두 개의 힘없는 그루터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더욱 아름다워진 중국 여인은 제대로 걷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도 없다. 평생 그녀는 다리 대신에 마치 두 개의 나무 의족을 끼워놓은 것처럼 절뚝거려야만 한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작은 발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어서 심지어 절뚝거리는 것조차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절뚝거리는 여인들을 보고는 바람에 우아하게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뭇가지와도 같다고 말한다. 그들은 가엾게도 불구가 되다시피 한 작은 발을 “황금 백합”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는 약혼할 때 신랑 신부 중 그 누구도 나타나지 않는다. 약혼이라는 사안은 오로지 양측 부모들에 의해 정해진다. 하지만 신부의 정확한 발 길이는 신랑에게 전달되고, 발 길이가 짧으면 짧을수록 신랑의 기쁨은 더욱 더 커진다!

 

  차장이 호루라기를 불었고, 우리가 탄 기차는 산 속으로 들어갔다. 심지어 일본식 개념으로도 협궤철도는 작은 철도를 의미한다. 그 말 속에는 정말 무엇인가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우리가 앉아있던 열차 칸이 너무 작아서 기차가 달리는 동안 다들 머리를 박아 혹이 생겼다. 물론 그 점만 빼면 그 협궤철도는 상당히 유명한 철도였다. 그것은 일본 군대들이 러시아인에 대항할 수 있도록, 일본 개척자들이 지난 전쟁 때 몹시 서둘러 산을 뚫어 만든, 안동(安東)에서 봉천(奉天)으로 가는  철도였다. 일본인들은 전쟁 후에도 철도가 남아 한국과 만주 사이의 대중교통에 기여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작품을 정말 잘 만들었다. 물론 승리의 월계관을 소유하고도 안주하지 않는 일본인들은 전쟁 후에 곧 협궤철도를 광궤철도로 변경시키는 데 착수했다. 그들의 철도는 많은 기술적, 외교적인 어려움 끝에 1911 11 1일에 완공되었고, 최초의 급행열차가 굉음을 내며 일본 치하의 한국에서 출발해 중국의 만주로 향하는 압록강 다리 위를 달렸다. 그 당시에 우리는 이미 새 철도의 선로들이 거리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매번 우리 열차 구간의 지척에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러시아인은 자신의 스케치북에 새 철도의 대략적인 노선을 그리느라 바빴다. 그밖에 우리는 장난감같이 작은 옛날 기차로 여행할 수 있어서 기뻤다. 왜냐하면 우리 기차는 마차처럼 천천히 아름다운 지역을 기어가듯이 통과해 지나갔고, 오늘날 세 개의 어두운 터널들을 통과해서 지나가야하는 곳을 산 고갯길을 타고 올라가면서 우리에게 저 멀리까지 나라 안 장관을 모두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대부분 창가에 바짝 붙어 앉아서 밖을 내다보느라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푸짐한 점심 식사가 비로소 우리를 다시 열차 내 사교 모임으로 결집시켰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우리의 새로운 여행 동료인 통(Tong) 역시도 행동에 들어갔다. 그는 러시아인의 중국인 하인이었는데, 이제까지 내국인용 칸에 타고 다녔었다. 러시아인은 그에게 많은 돈을 주고 있었다. 왜냐하면 v. Z. 씨가 알고 싶은 것을 중국인 하인이 같은 나라 사람들에게 물어서 알아내 염탐할 때 도움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젊은이가 자신의 주인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살짝 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다지 정직해 보이지도 않았고 황인들은 백인들에게 귀찮게 달라붙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통이 우리에게 알코올 불에 올려 준비해준 차는 정말 훌륭했다. 우리는 거기에 곁들여 우리가 가져온 젤리 육즙에 담긴 통조림 생선을 먹은 다음 바삭바삭한 케이크를 먹었다. 다들 만족스러웠고 기분이 좋았다. 심지어 후식으로 재미난 이야기들이 식탁에 올라왔다. 그 중에서 무어 여사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녀가 말했다. “최근 몇몇 중국 여인들이 유럽의 일부일처제의 원인을 알아냈답니다. 얘기하자면, 전도사인 제 친구가 중국 청나라 고관 -이곳에서는 고위직에 있는 공무원들을 그렇게 부릅니다- 집에 차 초대를 받아 갔었습니다. 그 청나라인의 여덟 명의 부인들이 그녀에게 상당한 흥미를 보였지요. 그들은 그녀를 만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놀라서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옷, 그 다음에는 머리카락, 치아, , 특히나 중국 여인들이 그들만의 견해를 갖고 있는 발을요. ‘당신은 남자처럼 걷고 달릴 수 있겠군요.’ 첫 번째 부인이 전도사인 제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물론 그럴 수 있지요.’ ‘말도 타고 수영도 할 수 있나요?’ 두 번째 부인이 물었지요. ‘심지어 아주 잘 하지요’라고 전도사가 대답했답니다. ‘그러면 당신은 남자만큼 힘이 세겠군요’라고 세 번째 부인이 말했습니다. ‘그렇기도 하지요.’ ‘그러면 당신은 아마도 남자한테 맞고 살지 않겠지요? 남편한테서도?’ ‘당연하죠’라고 제 친구가 힘껏 대답했지요. 청나라 고관의 여덟 부인들이 놀라서 서로 쳐다보더니 여덟 번째 부인이 말했답니다. ‘이제야 왜 외국 도깨비들이 부인을 한 명 이상 두지 않으려고 하는지 이해가 되는군요 ? 무서워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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