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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16 /2011.12] 기획 _ The Story of SUN(孫)’s Family: 인천화교손덕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7)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10 조회수 115

[Vol.16 /2011.12] 기획 _ The Story of SUN()’s Family: 인천화교 손덕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7)

(7) 장사든 뭐든 자신감이 있어야 성공하는 거야!

 

구술: 손덕준 _ 인천 중화루 사장 

채록: 송승석 _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

 

연재를 시작하며

인천대학교 HK 중국관행연구사업단은 화교연구의 일환으로 화교구술채록을 진행하고 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인천화교의 대표적 인물 손덕준(孫德俊)과 그의 가족이다. 어느 일개인의 가족사가 화교 전체의 기억과 역사를 온전히 담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화교 개인의 인생 궤적을 꼼꼼히 되짚어보는 것은 삶의 구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본 연재에서는 구술채록의 일부를 발췌해서 싣도록 하겠다.

 

*. 본 연재는 기본적으로 구술기록의 일부를 발췌해서 싣되, 지나치게 문맥이 어색한 부분은 임의로 수정을 가했다.

*. 문중에 말줄임표()가 있는 부분은 공개하기에 적절치 않은 부분이나 반복되는 내용으로, 구술대상자와 상의 하에 생략한 부분이다. 또한 지면의 한계로 인해 기본 내용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채록자 임의로 생략한 부분도 있다.

*. (???) 부분은 성명이나 상호명으로, 구술자가 한자표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추후에 조사를 해서 보충하도록 하겠다.

 

송승석(이하 송):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하나 궁금한 점이 있어요. 아버님도 당신 가게를 직접 하셨잖아요? 근데 아버지 때 가게를 하던 방식과 지금 사장님이 가게를 운영하시는 방식이 좀 다를 것 같아요. 창업하는 데 있어서도 방식이 다를 것 같고, 또 그걸 운영하고 경영하는 데 있어서도 방식이 좀 다를 것 같고. 그래서 그런 얘기를 중심으로 해서 한번 말씀을 듣고 싶어요. 아버님도 평화각, 중화루에서 주방장하셨지만, 그게 다 월급쟁이 아니에요, 그렇죠? 월급을 받으면서 일하시다가 또 이제 가게를 차리고 나오셨는데…. 그때 가게를 차리는데 돈은 많이 들지 않았어요?

 

손덕준(이하 손): 우리 아버님 장사하는 거하고, 제가 한 거하고는 차이가 좀 있었어요. 우리 아버님은 태어난 데가 중국이잖아요?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양반은 이산가족이었어요. 그 마음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양반도 물론 돈 벌려고 장사하기는 했죠. 또 한 부분은 애들이 자꾸 많아지니까 직장생활해가지고는, 월급쟁이 해가지고는…. 그 양반도 물론 마음속으로는 애들 위해서…, 좋은 학교도 보내고 싶고…. 그러려고 했겠죠. 그런데 제가 짐작해보면, 한편으로는 ‘언젠가는 고향 가야 된다.’ 항상 그런 생각 있었던 것 같아요. 이산가족이니까. 실향민이니까. 그래서 늘 그런 마음 갖고 있는 양반이었어요. 돈을 좀 벌면, 돈이 좀 모아지면, 보통 사람이면 좀 더 투자해가지고 더 좀 잘 하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 양반, 그게 없었어요. 그냥 고향 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투자도 거의 안 하고. 그때 당시 아버님 생각으로는, 언젠가 고향 가야되기 때문에, 돈 좀 벌리면 그걸 현찰로 좀 만들어서 어떻게든 금이라도 좀 사놓으려고. 늘 그런 생각 갖고 있던 양반이에요.

 

: 처음 아버지가 가게를 여셨을 때는 가게를 열 만한 자금은 충분하셨던 거예요?

 

: 그렇지 않죠. 왜냐하면요? 자기 고향 등지고 객지 나왔는데…. 그렇다고 친척들이 도와주지도 않는 상황에서 자기 월급 몇 년 좀 모아가지고 그게 되겠어요? 그래서 가게도 조그맣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 다른 데서 돈을 빌린다거나 그런 식으로 하시고?

 

: 친구들하고 계 조그마한 거 했어요. 중국 사람들은 칭훼이(請會)라고 있어요. 계도 작은 거지. 돈이 없으니까. 그렇게 가게 조그맣게 열고…. 매출도 크지 않았어요. 겨우 먹고 살 정도지. 우리 아버지, 장사를 열한 번인가 했어요. 열한 번. 그런데 결국은 자기 집 한 채도 살 수 없는 그런 열한 번이죠. 물론 그게 아니라도 외국인이 집을 산다는 것 자체가 힘들기도 했지만. 결론은 뭐냐? 장사에서는 성공을 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냥 겨우 겨우 처자식 밥 굶기지 않을 정도? 그 정도를 하신 거예요.

 

: 혹시 맨 처음에 아버님이 가게를 여셨을 때 기억하세요?

 

: 저는 기억이 잘 안 나고요. 어머니한테 들은 얘기로는, 맨 처음엔 짜장면 장사 하지 못했대요. 지금 얘기로 하면, 겨우 테이블 두세 개 정도 놓고 하는 왕만두 가게, 그거 했대요. 바로 여기 하인천역 앞 주변에서. 내가 재미난 얘기 하나 할까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에요. 이거 다 우리 부모님한테 들은 얘기요. 내가 아마 막 걸음마 띠고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였을 거예요. 우리 부모님이 왕만두 싸가지고 쪄서 파는데 언제부터 계속 왕만두 속이 비더래요. 왕만두 팔려고 손으로 집으면 안에 속이 없는 거예요. 만두 안이 터져 있는 거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가 그 만두 뜯어가지고 속에 고기만 발라먹고 도로 덮어놓고 그러더래요.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 그걸 보고 혼을 낸 거지. “이 놈의 자식! 먹고 싶으면 하나 통째로 들고 먹지. 어린놈이 벌써부터 남 속이기나 하고.

 

: 그래서 매를 맞으셨어요?

 

: 혼을 내니까 놀래가지고 우는 바람에 얹혀버린 거지. 그래서 어릴 땐 음식 먹을 때 야단치면 안 되는 거예요. 나 지금도 왕만두에 고기 들어있으면 안 먹어요. 돼지고기는 아직도 구운 것만 먹어요. 왕만두에 싼 고기만두는 절대 안 먹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가 중요한 거예요.

 

: 사장님 때문에 왕만두 가게 잘 안 되었겠네?

 

: 그때 당시 만두장사해서 무슨 큰돈 벌겠어요? 안 그래

 

: 그 왕만두 가게 이름이 뭐였어요?

 

: 아마 대중화(大中華). 그 만두집 이름이 대중화로 알고 있어요. 그때 우리 아버님, 지금 우리들처럼 이렇게 한국말 못했어요. 그때 온 지 몇 년 안 되었기 때문에. 지금 중국 한족(漢族)들 한국에 온 거랑 똑같지. 겨우 몇 마디만 할 줄 알았기 때문에…. 이건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친구 분하고 얘기하는 말 들은 건데…. 옛날 통행금지 같은 거 있었을 때예요. 술 먹고 순경한테 걸려서 하인천파출소 있잖아요? 거기에 잡혀들어 갔었나봐. 집이 어디냐고 해서, 대중화라고 바로 옆집이다. 중국말로 “따쭝화, 따쭝화!” 한 거지. 경찰이 그 말 알아들어? 하도 못 알아들으니까, 한자로 써 줬대. 대중화라고. 그런 에피소드도 있었어요. 좌우지간 이렇게 저렇게 장사를 하시긴 하셨지만 결국 성공을 못했어요. 그리고 중풍 걸려서 돌아가신 거지. 한마디로 마음을 두지 못했어, 여기에. 그리고 자기 기술을 너무 믿었어요. 장사 망하면, “그래도 난 기술 있으니까 취직하면 어떻게든 밥 먹고 산다.” 그러니까 그런 마음으로 장사를 했으니, 잘 되었겠어요? 뒤에다가 뭘 남겨놓으면, 마음을 한 곳에 쏟을 수 없는 거야. “난 그래도 인천에서 이 요리계통에서 최고다!” 아버지의 그런 마음이 오히려 내가 장사를 하는데 엄청 교훈이 된 거예요. 난 그러지 말아야지.

 

: 아버님은 사장님처럼 장사하시는데 전부를 걸지 않으셨다 그거군요?

 

: 거 있잖아요? 원래 중국집 주방장 출신은 있잖아요? 자기가 가게하면 자기 실력이 최고인 줄 알아요. 예를 들어서, 나 옛날에 명색이 공화춘 주방장 한 사람인데, 손님이 자기 가게 와서 음식이 맛없다 그래보세요. 그러면 단번에 “너 먹지 마! 그냥 가!” 해버려. 그게 주방장들 자존심이에요. 그래서 주방장 출신은 있잖아요? 장사해서 돈 버는 사람 별로 없어요. 돈 버는 사람 드물었어요. 중국집에선 누가 돈 버는지 알아요? 홀에 있던 사람이 돈 벌어. ? 손님이 맛이 없다고 하면, “아, 죄송합니다. 다시 해서 드릴게요. 오늘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럴 수 있거든. 근데 이 주방장 출신들은 자기 자존심이 엄청…. 자기가 정말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아. “내가 해줬는데 맛이 없다고 해? 그럼 오지 마!” 이런 부분 있어요. 저도 사실 그런 거 많이 느껴요. 저도 주방 출신이라 성격이 이상하게 안 좋아. 진짜 그런 면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옛날 주방장 출신들 있잖아요? 문제가 뭐냐면, 자기 기술을 너무 믿는 거예요. 중국 속담에 이런 말 있어요. “天大的手藝, 做不出來無米飯.” 아무리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쌀 없이는 밥을 지을 수 없다는 뜻이에요.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재료를 제대로 써야 좋은 음식이 나오는 법인데, 이 기술 있는 사람들은 자기 기술만 믿고 장사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러면 쓸데없는 기술만 늘어요. 나도 그거 느꼈어요.

 

: 어떤 기술이요?

 

: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면 이거예요. 이거 설명 좀 드려야겠어. 탕수육 만들잖아요? 원래 탕수육 1인분이면 고기 300g 가지고 해야 정상이에요. 그런데 그런 기술 좋은 사람은 200g 밖에 안 써요. ? 200g 가지고 같은 양 만들 수 있거든. 그럼 어떻게 하겠어요? 고기 대신에 밀가루랑 전분 가루를 많이 넣는 거야. 원래 탕수육 만드는데 고기를 이 정도 굵기로 썰어야 되는데 그 절반만 썰어요. 그리고 거기에다 전분 가루를 더 묻히는 거야. 그게 내가 말하는 기술 부리는 거예요. 그거 기술 있는 거 아니야. 기술 부리는 거지. 그럼, 먹는 사람은 바보인가? 자주 먹는 사람은 식감이라는 게 있거든. 그래서 장사가 될 수 없어요. 그러니까 기술 좋으면 다 돈 벌 것 같은데 그게 아니거든요. 사실, 저도 그런 기술 좋은 사람이에요. 그렇지만 제가 장사하는 스타일은…. 첫 번째는 우리 아버님하고 완전히 달라요. ? 사실 옛날에 내가 장사할 때는, 초창기 때는 나도 우리 아버지랑 똑같았어요. 막말로 말해서, 그 아버지에 그 자식이에요. 내가 총각 때였어요. , 거기 동천홍 주방장하면서 내가 가게 하나를 열었어요, 바로 동인천 뉴코아 그 뒤쪽이었는데. 2층인데 조그만 가게였어요. 10평 될까 말까 했어요. 그때 동천홍 주방장하고 있었지만, 좀 여유가 있으니까 나도 한번 내 장사 해보자 해서 시작한 거예요. 내가 동천홍 주방장으로 있으면서 보니까 매출이 엄청난 거예요. 사실, 배가 아팠던 거지. 그거 내가 다 벌어주는 건데, 내거 직접 하면 그만큼을 못 벌까? 했던 거지. 좀 나쁜 생각이었지. 우리 둘째여동생 카운터 앉히고, 우리 둘째남동생 주방 보게 하고. 내가 그랬지. “우리도 가게 하나 하자. 투자는 내가 할게.” 난 동천홍에 있으면서 점심시간 바쁜 거 지나면 가서 도와주고. 그런데 이런 일 있었어요. 손님 하나가 와서 탕수육 하나에 우동인가 뭐를 시켰어요. , 지금도 그 일 안 잊어먹어요. 내가 직접 해줬는데 이 사람이 맛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물었어. “왜 맛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 뭐라는 줄 알아? 동천홍 것은 이렇지 않다는 거야. 내 속으로 그랬죠? ‘내가 동천홍 주방장이야, 이 양반아.’ “있잖아요, 아저씨? 나중에 있잖아요? 여기 오지 마시고 동천홍 가서 드세요.” 그래 버렸지. 그게 바로 우리 아버님 가는 길 그대로 내가 가는 거예요. 물론 우리 아버님뿐만 아니라 그때 당시 조그만 장사 하는 사람들 다 그렇게 했어요. 주방 출신은 큰돈 못 벌어요. 결국 얼마 안 되어서 문 닫았지. 진짜 누구 말마따나 몇 개월 치 월급을 그냥 날린 거예요. ‘에잇, 그까지 것 나중에 다시 큰 데 주방장하면서 벌지, .’ 그러면 안 돼요.

 

: 이왕 말씀 나오신 김에, 인천에서 중간 중간 조그만 장사하실 때 얘기 좀 해주세요.

 

: 두 번째로 내가 장사한 거는 주안역 바로 뒤, 공단 옆 2층이었어요. 승리원(勝利園)이라고. 이겼다는 승리. 그때 당시는 우리 와이프가 우리 홍이 임신하고 있을 때요. 결혼식은 안올리고 그냥 동거생활 할 때지. 2층에 방 조그만 거 2개하고, 테이블 한 4개 있었어요. 배달장사지. 그때 난 오토바이 탈 줄도 몰랐어요. 지금도 안 잊어먹는데, 그때 짜장면 한 그릇에 500원 했어요. 그때 당시 내가 열빈 주방장 하다가 내 장사 한다고 그만두고 그걸 한 거예요. 사실, 돈도 별로 없었어요. 그냥 조그맣게 했어요. 그때 당시 보증금이 3백인가? 가게 밑에는 집주인이 고깃집을 하고 있었어. 월세가 그때 10만 원인가? 아마 그랬을 거예요. 우리 마누라 홀 보고, 나는 주방에서. 근데 손님들이 짜장면이고 짬뽕이고 다 맛이 없다는 거야. 이거 진짜 환장할 노릇이더라고. 난 정말 그 이유를 잘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배달만 갖다 오면, “저, 사장님. 다 맛이 없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야, 이건 아니다.’ 싶었지. 근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통 모르겠는 거야. 그래서 할 수 없이 조그만 가게 주방장 하던 사람을 일당으로 하나 써봤어요. 도대체 조그만 집에선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더라고. 그 일당벌이 주방장이 딱 오자마자, 내가 볶은 짜장 소스를 손가락 딱 찍어먹어 보더라고. 그러더니 소금을 탁 집어넣고 척척 젓는 거야. “그래, 이 맛이야.” 하면서. 서울에 있는 대 열빈 주방장이 졸지에…. “저, 사장님. 면은 수타하지 마시고 기계로 뽑으세요. 사장님, 이건 너무 싱거워서 안 됩니다. 이렇게 해가지고는 안 팔려요.” 사실, 큰 요릿집에서 나오는 요리는 대개가 싱거워요. 짜면 안 되거든. 그렇게 해서 내가 한 수 배웠다니까, 그 친구한테.

 

: 그 사람이 하는 음식이 오히려 일반 한국 서민들한테는 맞는 거였군요? 짭짤한 게.

 

: 우리가 만드는 고급요리하고는 차이가 있는 거지. 내가 그래서 알았다니까? ‘아, 그렇구나.’ 하하!

 

: 그런데 어떻게 일당을 쓰실 생각을 하셨을까?

 

: 왜냐하면요? 그게 참 답답한 거라. 내가 암만 잘해도 이거 안 맞는 거야, 이게. 조그만 집의 짜장, 짬뽕, 탕수육은 달라. 어떻게 다르냐 하면, 조그만 집 탕수육 같은 경우는 고급 전분을 안 써. 다 옥수수 전분을 쓰는 거야, 그게. 밀가루도 싼 것만 쓰는 거야. 그렇지만 손님들은 그 조그만 음식점 음식이 입에 밴 거야. 사실, 난 더 좋은 재료로 더 맛있게 한 거라고. 그런데 손님들은 자기 입맛에 안 맞는 거지. 자기 먹던 게 아니니까. 그래서 원인을 찾은 거지. 나 진짜 졸지에 조그만 집 주방장한테 배운 거야. 깨달은 것 많았지. 고집 좀 꺾어야겠다. 하지만 난 지금도 그렇게 안 해. 그렇게 하다가 얼마 안 돼서 접었어. 매출도 시원찮고…. 무엇보다 내가 못 견디겠는 거야. 옛날엔 주방에 내 밑으로 수십 명이 있고, 나 거기 대장인데. 내가 딱 들어가면, 앉아 있던 친구들 다 일어서가지고 꾸벅 인사하고. 밥 먹을 때도 아줌마들이 탁 챙겨주고, 내 사무실까지 있었는데. 아니, 여긴 내가 주방에서 혼자 다 해야 하고, 설거지까지. 혹시나 배달하던 애가 그만 두면 그거 누가 배달해. 할 수 없이 내가 가야죠. 그때 당시는 다 자전거 배달이었어요. 자전거에 배달통 딱 들어가게 틀 짜고. 다른 사람은 자전거 잘 탔어요. 한손에 배달통 딱 들고 자전거 쫙 몰고 가는데. 난 그게 안 돼. 자전거 잘 못 타. 큰 차 지나가면 겁나서 섰다가…. 그래서 겨우 겨우 아파트 도착하면, 왜 이렇게 늦게 가져왔냐고 혼나고. 짜장면 다 불고…. “아저씨 지금 가져오면 어떻게 해요? 다 불었잖아요? 도로 가져가세요.” 그거 한 1년 넘게 한 것 같은데, 더 이상은 못하겠더라고. 참는 데도 한계가 있어. 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요? 택시회사에 배달 갔었어. 배달 가면 택시 기사들 있잖아요? “아저씨, 볶음밥 하나 더 가져와.” 또 갔다 오면 음식 시킨 사람 어디로 없어졌어. 누가 알아? 그렇게 허탕치고 떼어먹히고…. 내가 그 경리 아가씨한테 그랬어. “아가씨, 안 먹고 가버리면 난 돈 어떻게 받으라는 거예요? 아가씨가 전화로 주문을 했으면 누가 시킨 지 알 거 아니에요?” “아저씨, 저도 몰라요. 그냥 시켜 달래서 시켜준 거예요.” 마침, 그 옆에 사장 아들이란 놈이 있었어. “사장님, 죄송한데요? 돈 좀 받아주면 안돼요?” “이 양반아. 내가 왜 돈을 받아줘?” 에이, 시팔! 나도 성격 한 가닥 하거든? 배달통 확 집어던지면서, “야, 새끼야! 너 내가 배달통 들고 다니니까 우스워? 내가 사람같이 안 보여?” 그러면서 있는 쌍소리 없는 쌍소리 다 해버렸지. “너희들, 앞으로 시켜 먹지 마. 내 정말 더러워서 못 해먹겠다.” 그리고 그냥 자전거 타고 집에 왔지. 얼마 있다가 그 택시회사 진짜 사장, 그 노인네가 오신 거야. 그 사람은 항상 오면 울면 먹어. “사장, 이리로 와봐.” “예, 사장님 오셨어요?” “젊은 사람이 말이야, 성질 그러면 장사 하겠어? 나 얘기 다 들었어. 다음에 배달시키면 그냥 갖다 줘. 내가 경리한테 얘기해 놓았어. 젊은 사람이 좀 참으면서 장사해.” 그 노인, 참 사람 됐더라고. “알겠습니다, 어르신.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배달은 내 생리에 안 맞아. 이거 정말 자존심 상해서 못 해먹겠더라고. 난 배달하기 싫으면 전화기 뽑아버려. “야, 배달 안 한다고 해!” 그러면, 우리 마누라 하나라도 더 팔려고 자기가 갖다 준다는 거야. 우리 와이프는 그러지. “여보, 자존심이 밥 먹여줘?” 그러면 더 짜증나더라고. 에이, 시팔! 배달하지 말자고. “야, 우리 접자. 가게 접자. 그만하자. 내가 다시는 장사 안한다.” 그렇지 않아도 그때 열빈에 사람 딸릴 때야. 지배인 통해서 열빈 사장이 자꾸 오라고. 그래서 다 접고 다시 열빈 갔지.

 

: 그래도 결국 나중엔 다시 장사를 하셨잖아요? 그렇죠?

 

: 그때 우리 진짜 그 가게 옆방에서 마누라하고 같이 살았어. 그러다 가게 접고 홍이 낳고 해서 송월아파트 간 거야, 열빈 다닐 때. 사실, 난 주방장이 편해. 월급 많이 받고, 솔직히 부수입도 잘 들어오고. 그래서 다시는 장사 안한다고, 장사할 마음을 접어버렸던 거예요. 그렇지만 하림각에서 마지막으로 접고는 또 생각이 바뀌더라고. , 그때 반성 많이 했어. 내가 왜 실패했을까? 세 번째 까지는 분명히 나도 우리 아버지처럼 한 거야. 그렇지만 이제 마지막 기회다. 나 혼자 스스로를 위로한 거야. 사실 장사에 대한 유혹은 버릴 수 없어. 왜냐면, 내 밑에서 일하던 애들, 동료들 있지? 다들 나가서 장사 잘 해서 돈 잘 벌어. 그것도 홀에서 웨이터 하던 친구들 말이야. 근데 ‘난 도대체 왜 안 되는 걸까? 난 기술도 있는데. 오히려 이 사람들은 실력도 없는 사람들인데.’ 사실, 속으로 얼마나 열 받겠어? 나도 내가 성질 안 좋은 거 알아요. 그 성격도 고쳐야 되고. 솔직히 내 그 더러운 성질 때문에 우리 와이프 나한테 욕 엄청 먹었어.

: 그림이 그려집니다.

 

: 아마 다른 여자 같았으면 벌써 나하고 안 살았을 거예요. 자존심 엄청 세지. 성격 급하지.

 

: 산동따한(山東大漢)의 성격 나오는 거지. 그럼, 결국 그때까지는 사업이 잘 안 된 게 아버님이랑 비슷하셔서…. 성격도 그렇고 가게 운영 방식도 그렇고? 또 요리사로서의 자존심도 그렇고?

 

: 그렇다고 봐요. 사실, 장사는 우리 와이프가 잘해. 난 조금만 바쁘면 짜증나서 전화기 뽑고 그러거든. 혼자 일하니까. 예를 들어, 손님 여섯 명 왔어. 짬뽕 하나, 우동 하나, 볶음밥 하나, 간짜장 하나, 울면 하나…. 이런 식으로 시켰어. 우리 마누라 전표 가져와. “빨리 해 달래요.” “에이, 시팔! 네가 와서 해.” 그럼, 손님 옆에서 듣고 있다가, “아저씨, 그럼 천천히 해주세요.” 그럼, 또 미안해가지고…. 전화기 뽑아 놓았다가는 또 좀 있다 궁금하면 다시 가서 꼽아. 주방장 출신들 하나같이 그래. 마지막으로 하림각 나왔을 때는 더 이상 갈 때가 없더라고. 그보다 작은 집에서 다시 일하는 건, 자존심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서울에 있는 요리사 출신 동료들한테 소문 다 퍼진다고. 손덕준, 하림각에서 똥 폼 잡더니 지금은 갈 데가 없어서 하꼬방에서…. 하하! 그래서 전에도 얘기했지만, 우리 셋째동생네 부부하고 회의를 했어요. 둘째동생, 걔는 솔직히 말해서 성격이 나보다 더 급해. 우리 셋째동생은 성격이 온순해. 내 말도 잘 따르고. 형이 뭐 하자고 하면 말도 잘 들어. 그래서 선택을 했지. “야, 셋째야. 너 형하고 같이 장사 좀 해 볼래? 그 대신 우리 계를 하자.

 

: 식구들끼리 계를 하신 거예요?

 

: 아니, 그건 아니고. 아는 친구들 몇몇 하고. 200만 원 짜리 20명 모으면 그때 돈 4천이야. 그래서 연수동 간 거야. 자금성. 그 대신 장사하면서 계를 갚자. 매달 200만 원씩. 20개월 하면 4천만 원 다 갚아요. 배달은 셋째동생이 맡았어. 배달하는 한두 명 데리고. 배달하고 홀은 내 동생이 맡고, 대신 난 면 뽑는 사람 두 사람 데리고 주방을 책임졌지. 난 솔직히 말해, 도저히 못하겠는 게 배달이야. 오토바이 탈 줄도 모르고. 아니, 오토바이 안타고 걸어가는 것도, 배달통 들면 대문 열고 안 나가져. 서울의 열빈, 하림각에서 똥 폼 잡던 주방장 놈인데…. 배달 갔다가도 도로 와버려. 내가 그랬어. 난 그거 하면서 이게 마지막이다 생각했어. 내 마음하고 싸우는 거예요. 내 자존심하고 말이야. 만약 이번에 또 망하면 나는 어디 가든 끝이다. 장사는 더 이상 하면 안 된다. 내가 거기서 아주 마음을 굳게 먹었어요. 이거 죽기 아니면 살기다. 주방장은 아무리 월급 많이 받아도 정해진 돈을 버는 수밖에 없는 거야. ‘난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더 큰돈을 벌어야 한다.’ 다행히 우리 셋째놈도 협조를 잘 해줬어. 주방은 정말 내 뼈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다 책임졌어. 하루는 내가 주방에서 발을 데였어, 튀김하다가. 팅팅 부어도 그냥 붕대 싸가면서…. 진짜 설거지부터 다 했어. 난 사실 설거지에 ‘설’자도 모르는 놈이었어. 그 데인 발 쩔뚝거리면서 새벽 다섯 시에 봉고차 몰고 연수동 근처 아파트 스티커 다 돌렸어. 그건 우리 와이프도 몰라, 내가 그렇게 한 걸. 정말 장사 안 될까봐 노심초사하면서. 이게 나한테 마지막인데. 그런 생각하면서. 다행히 잘 되었어. 1년 동안 내가 진짜 치고 박고…. 우리 셋째놈도 배달 착실히 하고. 아주 열심히 했지. 그땐 그릇도 일회용 썼잖아? 그릇 찾아올 필요도 없어. 잘될 땐 배달꾼 열 명도 썼어. 오토바이가 열대야. 머리에는 빨간 천 두르고…. 주방에도 나 말고 네 명인가 다섯 명 더 썼어. 홀에도 열 명 쓰고. 하루에 4, 5백 벌었어.

 

: 자금성도 작은 건 아니었네요?

 

: 아냐. 30평 밖에 안 되는 조그만 2층 상가야. 그것도 주방이 절반쯤 차지하고. 완전 배달 전문이지. 그렇게 잘 되었는데 내가 그만 뒀어. 전에도 말했지만, 그 놈의 오토바이 배달 때문이야. 오토바이 사고가 너무 나는 거야. 지금 내 친구가 연수동 홍보석 하고 있어. 근데 그 집 배달하는 애가 화교인데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어. 그것에 내가 충격을 받은 거지. ‘야, 이게 계속할 짓이 아니다.’ 진짜 그 배달 있잖아요? 돈은 많이 벌어요. 근데 진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어. 배달 가는 애들 있잖아요? 조금만 늦어도, ‘야, 이거 혹시 사고 난 거 아니야?’ 긴장의 연속이야. 너무 불안해.

 

: 앞에서 말씀하셨지만, 그때 잠시 쉬면서 제2의 도전을 준비하겠다고 하신 것 같은데 어떤 것이었어요?

 

: 내가 그때 2차 목표를 세운 게 뭐냐 하면, ‘배달은 하지 않겠다. 홀에서만 파는데 매출은 더도 덜도 말고 하루 100만 원만 하자.’ 그러니까 월매출 3천 하자는 얘기지. 그때 당시 그거 작은 돈 아니에요. 그 대신 투자를 좀 해야겠다. 나도 열빈이나 하림각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아담하게 배달 안하고 내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룸도 있고 원탁도 좀 있고.

 

: 그러니까 일종의 고급스러운 요릿집? 한 단계 높은 그런 가게

 

: 그런 걸로 가야된다. 근데 이건 내가 느낀 건데, 장사도 다 운이 좀 닿아야 돼. 내가 그때 사주팔자 점 보러 갔는데, 그러는 거야. 손덕준은 나이 마흔 되면 ‘바람 부르면 바람 오고, 비 부르면 비 온다.’ 하하!

 

: 그 점집 어디에요? 나도 좀 가 보게.

 

: 그건 좀 거시기하고…. 때마침 ‘아다리’가 맞은 게, 바로 그 신성쇼핑 안에 있는 만리향이에요. , 그거 얘기했잖아요? 우리가 전번에 얘기하던 거. 그 만리향 인수한 게 나한테 충분한 시간을 준 거예요. 자신감을 심어준 거예요. 이거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에요. 잘하면, 열심히 하면 된다. 내 실력 발휘하면 손님 호응 얻을 수 있다. 그게 자신감이에요. 장사든 뭐든 할 때는 자신 없으면 하면 안 돼. 자신감 있어야 성공하는 거야.

 

: 그거 참, 중요한 말씀이시네요?

 

: 그런 부분이에요. 나머진 전번에 얘기한 거 참고하면 되고…. 물론 중간 중간 더 할 얘기는 있지만, 이 부분은 아마 이렇게 얘기하면 될 거예요.

 

: 그럼, 사장님이 연수동이나 신성쇼핑에서 영업하셨을 때는, 여기 차이나타운은 어땠어요?

 

: 그때만 해도 풍미하고 대창반점밖에 없었어요. 원래 풍미는 호떡 장사했어요. 왕만두 장사

 

: , 그럼 처음부터 짜장면 판 것은 아니었군요? 제가 듣기로는, 100년쯤 되었다고 하던데?

 

: 사실, 풍미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게 그렇게 많지 않고…. 원래 그 집은 할아버지가 큰 무역업을 하셨을 거예요. 청나라 때부터인가 큰 무역상이었어요. 아주 오래 되었어요. 짜장면 장사한 지는 한 10년 되었나? 지금 자금성보다 2년 더 되었을 거예요. 옛날엔 공갈빵, 호떡, 왕만두 팔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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