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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15 /2011.11] 기획 _ The Story of SUN(孫)’s Family: 인천화교손덕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6)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10 조회수 173

[Vol.15 /2011.11] 기획 _ The Story of SUN()’s Family: 인천화교 손덕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6)

(6) 아무리 기술이 좋더라도 쌀 없이는 밥을 지을 수 없어!

 

구술: 손덕준 _ 인천 중화루 사장 

채록: 송승석 _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

 

연재를 시작하며

인천대학교 HK 중국관행연구사업단은 화교연구의 일환으로 화교구술채록을 진행하고 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인천화교의 대표적 인물 손덕준(孫德俊)과 그의 가족이다. 어느 일개인의 가족사가 화교 전체의 기억과 역사를 온전히 담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화교 개인의 인생 궤적을 꼼꼼히 되짚어보는 것은 삶의 구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본 연재에서는 구술채록의 일부를 발췌해서 싣도록 하겠다.

 

*. 본 연재는 기본적으로 구술기록의 일부를 발췌해서 싣되, 지나치게 문맥이 어색한 부분은 임의로 수정을 가했다.

*. 문중에 말줄임표()가 있는 부분은 공개하기에 적절치 않은 부분이나 반복되는 내용으로, 구술대상자와 상의 하에 생략한 부분이다. 또한 지면의 한계로 인해 기본 내용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채록자 임의로 생략한 부분도 있다.

*. (???) 부분은 성명이나 상호명으로, 구술자가 한자표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추후에 조사를 해서 보충하도록 하겠다.

 

송승석(이하 송): 하림각 나오시고 나서, 그 이후 얘기를 좀 해 주세요.

 

손덕준(이하 손): 난 성격이 남한테 해코지하면서 안 살아봤어요. 그래서 그만둔 거지. 그런데 막상 거기서 나오니까 사실 막막하더라고. 그만둔다고 큰소리는 쳤지만…. 그러니 어떻게 해? 이젠 더 이상 갈 때도 없어요. 대한민국 제일 큰 데서 주방장 생활 한 거요. 최고로 한 거요. 요리사들 사이엔 이런 거 있어요. 100평에서 주방장 했는데 50평으로는 갈 수 없는 거야. 360만원 받았는데 150, 160 받을 수는 없잖아? 이건 자존심 문제야. 어쩔 수 없이 내 장사해야 된다. 이젠 정말 이 악물고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지독하게 장사에만 매달려야 한다. 그렇게 마음먹었지. 근데 그게 마음대로 안 돼. 우리 마누라 얘기했을 거야. 배달장사 이거? 짜장면 한 그릇 배달해 줬어. “고춧가루 가져왔어요?” “안 가져왔는데?” “그럼, 안 가져왔으면 돈 못 드려요.” 할 수 있어? “알았습니다.” 고춧가루 갖다 줘. 대 열빈 주방장이, 대 하림각 주방장이…! “아저씨, 단무지 좀 더 갖다 줘요.” 안 갖다 줬어. 열 받으니까. 그릇 찾으러 가니까, 단무지 갖다 달라는데 왜 안 가져 왔냐는 거야. “바빠서 그랬습니다.” “그럼, 다음에 와서 찾아가세요.” 정말 더러워서 못해먹겠더라고. 그대로 명색이 대 열빈 주방장이었는데…. 하하! 그래도 할 수 있어? 셋째 동생한테 그랬어. “우리 같이 장사하자. 난 도저히 배달 못가니까 배달은 네가 하고, 주방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 하림각 그만두시고 인천에 내려오셔서 처음 장사하실 때는 어디에서 하셨어요? 차이나타운은 아니었죠?

 

: 원래 열빈 다닐 때에도 중간 중간 주안 같은 데에서 장사했어요. 주안역 뒤에서. 근데 결론은 뭐냐? 돈 못 벌었어요. 장사는 기술만 가지고 하는 거 아니더라고요. 두어 번 장사 했었는데 다 실패했죠. 사실, 하림각에서 그만두고 좀 막막할 때, 내 생각은 그랬어. ‘이제 주방장생활, 직장 생활은 끝이다. 내가 만약 내 장사를 하면서도 주방장 생활 그리워한다면 아마 장사가 성공 못할 것이다. 주방장 그만 해야겠다. 내 장사 사업에 마음을 굳혀야겠다.’ 두 번 장사의 실패 원인을 찾아보니까, 나는 앞에서 굽실굽실 하는 걸 못해요. 내 자신을 더듬어보니까 그래. 그래서 그 다음에 장사할 땐, 우리 와이프가 앞에서 카운터 보고 나는 그냥 주방에서 일했어. 큰집 주방장이 아니잖아? 설거지든 뭐든 다 내가 할 각오를 가져야지. 그래서 그 생각만 했어. ‘내가 있을 곳은 주방뿐이다.’ 그래서 카운터는 와이프, 배달은 셋째동생, 주방은 나. 이렇게 해서 시작했지. 동생한테 그랬어. “돈은 내가 투자하마. 버는 건 나하고 반반씩 나누자. 그 대신 열심히 하자.” 어차피 동생이니까. 셋째는 원래 뭐 했냐 하면요? 영화식품 있잖아? 춘장 만드는 회사. 거기서 오래 근무했어요. “남의 집 생활 그만하고 너는 앞에서 뛰어라. 배달 담당하고. 음식은 내가 담당하마.” 앞에서 와이프하고 홀 보고, 나는 주방담당. 지금 중화루 카운터 있잖아? 우리 제수씨야. , 아까 물은 거…. 처음엔 차이나타운 아니었어요. 연구수 연수동 신도시 막 시작할 때야. 아파트 짓고 땅 파고 할 때요. 각오 되어 있었어. ‘다시는 주방장 않겠다. 장사에만 매진해야겠다.’ 마음 아주 굳게 먹었어요. 처음 시작할 때는, 그 자리가 어디냐면 연수동 동아·금호아파트 상가 2층이었어. 30평 되었을 거야, 분양평수가. 주방 꾸미고, 홀에 테이블 한 여섯 개인가 일곱 개인가 놓고…. 남이 하던 걸 인수했어요. 보증금, 권리금해서 그때 당시 4천만 원. 적은 돈은 아니었어요. 맨 처음 신도시다 보니까, 아파트 입주할 때 아파트 배달…. 운이 닿아서 그런지 시작하자마자 잘 되었어요.

 

: 상호명은 뭐였어요?

 

: 자금성이었어요. 간판이름은 원래 내가 만든 게 아니에요. 원래 그 가게 이름이 그거였어. 내가 인수한 거지. 사장이 복덕방 했는데, 사람 관리를 잘 못했나봐. 걸핏하면 주방장이 술 처먹고 안 나오고… 골치를 썩였나봐. 그걸 내가 인수한 거예요. 장사는 괜찮았는데 인력 관리를 도저히 못하겠다고 해서 나한테 넘긴 거죠. 내가 가서 제대로 하고 그러니까, 나중엔 배달하는 애들 대여섯을 써야 했어요. 많을 때는 열 명까지. 그러니까 오토바이가 열대인 거지. 보통 저녁에 계산하잖아? 평균 2, 30만원, 3, 40만원했어요. 배달 한사람 당 말이야. 대신 95% 이상이 배달이었어요. 배달장사는 위험하긴 하지만 수입은 좀 괜찮았어요. 그러다가 연수동 대동월드로 옮겼지.

 

: 바로 건너편이잖아요?

 

: 그때 당시는 대동월드 막 입주할 때야. 거기 분양사무실에 있는 사람 잘 알게 되었어, 장사하면서. 그래 내가 물었지. 상가 임대하는데 짜장면 장사도 주냐고? 그래서 거기 1층에다가 30평짜리 하나 얻었어요.

 

: 가게를 하나 더 새로 얻으신 거네요?

 

: 아리성이란 간판으로 2호점을 연 거죠. 대동월드 안에는 당시로는 인천에서 제일 큰 아이스링크도 있었고, 집세도 비쌌어요. 아마 월세로 180만원 줬을 거예요. 거기는 배달보다 가게 손님이 더 많았어요. 그 자금성을 3년인가 했을까? 하다보니까, 배달장사는 오토바이 사고가 많이 나요. 보험을 들기는 했지만…. 인도에서 남의 애를 치는 일도 있었어. 그렇게 한 번씩 사고가 나면 정이 팍팍 떨어져. 그래서 셋째동생한테 그랬지. 네가 둘 중에 하나 가져라. 동아·금호냐 아니면 대동월드냐? 네가 하나 선택해서 가져라. 사실, 아리성 차린 돈 다 자금성 운영해서 번 것이잖아? 자금성, 그때 장사 잘됐어요. 아리성은 배달꾼만 한 열 명 되었어. 열 명이면 한 사람당 4, 50만원 하니까 다 합치면 4, 500만원 하는 거야. 그렇지만 그 놈의 오토바이 사고에 하도 시달려가지고…. 우리 셋째 그 놈도 질렸고 나도 질렸어. 우리 동생 그러더라고. 아예 다 팔아버리자고. 형은 형대로 가고 나는 나대로 가겠다. 그래서 가게 둘 다 넘기고…. 돈 좀 벌었어요. 그리고 난 석바위에 18천 주고 56평짜리 단독주택 하나 샀어. 원래 내 소원이 뭐냐면, 마당 있는 큰 집에 나무도 심고…. 셋째도 똑같이 근처에 상가주택을 샀어요. 그때는 재산이 나랑 비슷했어. 똑같이 나누었으니까. 그 전까지는 송월아파트 살았는데, 20년 살았어요. 그렇게 가게 둘 다 처분하고 …. 그동안 하도 장사에 시달렸는데, 아주 팔고나서 단독집 사서 이사 가니까 정말 속이 후련하더라고. ‘그래 우리 이제 좀 쉬자. 일단 쉬고 나서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해보자.’ 난 사실, 내 소원 푼 거야. 원하는 집도 샀고. 와이프랑 대만도 놀러 가고, 중국도 가고. 우리 와이프 취미가 중국 장식품 있잖아? 동남동녀등(童男童女燈), 용등(龍燈) 같은 거 모으는 거야. 우리 가게 가면 그런 색깔 진해. 대만이나 중국 가면 그런 거 사오고 했지. 사실 그동안 우리 부부, 장사 몇 년 하면서 마음이 너무 힘들었어요. 생각했어. ‘지금은 준비기간이다. 2의 도전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다.’ 그렇게 좀 쉬고 있는데 옛날 신성 있잖아? 거기서 연락이 온 거야, 박 이사라고. “손 부장, 손 주방장이 신성 중국집 만리향 좀 맡아서 해보지?” “그 가게 지금도 해요?” 알고 보니까, 옛날 거기서 주방장 하던 친구가 지금 맡아서 하는데 하루 매출이 10만원, 20만원 한다는 거야. 와이프하고 같이 경영하는데 관리비, 월세 내면 남는 게 없다는 거야. 문 닫기도 그러니까 나보고 한 번 해보라고. “우리 손 주방장 맡아서 하면 괜찮을 거야. 이 친구는 장사 하면서 별로 신경도 안 쓰는 거 같아.” 보증금도 없이 그냥 하래. 내가 직접 가서 그 당사자를 만났어. 그 친구 말이, 그냥은 못 나간다는 거야. 얼마라도 달래. 그래 그럼 얼마 주면 되겠냐고, 말해보라고. 뭐 한 500이라도 줘야한다는 거야. 그럼, 그러지 말고 한 300줄게. 장사라도 되는 집이면 500이 아니라 1,000이라도 주지. 어차피 하루 십만 원 파는 집인데…. 이거 다 죽은 건데 그렇게 많이 달라고 하면 되냐? 그럼, 350 달래. 알았다고. 밑져봐야 본전이지, . 와이프랑 상의하고 인수했어. 분양평수가 108평이야. 실 평수는 60평일 거야. 매장이 70, 80석 돼. 가게는 참 괜찮아요. 게다가 냉방비, 전기세 같은 거 신경 안 써도 되고. 관리비 한 달에 80만원인가 내면 됐어요. 그래서 들어갔지. 푹 쉬고 나서.

 

: 어느 정도 쉬셨던 거예요?

 

: 2, 3개월 쉬었나? 그동안 고향도 가고. 그리고 다시 장사 시작했지. 마침 그때 와이프 아는 한국 아줌마 한 명 있었어. 그 사람하고 와이프가 홀에서 일하고. 건물 안에 사무실들 있잖아? 거기 배달 좀 하고. 밖에 배달 안 하는 거니까. 난 주방에서 주방일 하고. 지금 우리 중화루 주방장 있잖아? 우리 와이프 언니 아들이야. 군대 갔다 와서…. 군대에서 취사병 했어. 그 친구, 음식 만드는 취미 있어요. 그래서 내가 연수동에서 장사할 때부터 같이 데리고 있었어. 그 친구 다시 불렀지. 이렇게 네 명이서 시작했어. 맨 처음엔 정말 10만원, 20만원 팔았어. 나중에 점점 좋아진 거야. 거기서 1년 몇 개월 했나? 하루에 백만 원 이상 팔았어, 나중에. 잘 되는 달엔 월매출 3,500만원. 월급 다 줘도 한 달에 천만 원 넘게 가져갔어

 

: 그때가 1990년대잖아요?

 

: 90 몇 년도더라? 내 나이, 서른일곱인가 여덟인가 그랬어. 95, 96년도쯤. 내가 거기서 한 2년 가까이 했으니까. 그거 하면서 재미 좀 괜찮았어요. 주변에 선배님 한분 계셨어. 지금은 부천에서 장사하시는 분인데. 올 때마다 그 가게를 탐내는 거야. 배달도 안하지. 근처에 교회도 있지. 주안 무슨 장로교회인데. 교회 신도가 그렇게 많아요. 평소 가게에 별로 손님 없어도, 주말에만 교회 신도들이 와서 팔아주어도 매상을 다 받쳐주는 거야. 교회에서만 백만 원, 이백만 원 팔아줬으니까. 2년 가까이 아주 편하게 살았지. 아침에 일찍 갈 필요도 없고, 점심 때 한두 시간이면…. 손님 꽉꽉 찼어. 저녁엔 손님 없어요. 일찍 들어가면 돼. 배달도 신경 안 쓰고. 그 선배님이, “야, 나한테 넘겨.” “형님, 자꾸 왜 그러시냐?”고. 마침 그때 하인천에서 부동산 하는 내 친구 있었어. 그래도 친구라고 자기네 회식하면 우리 가게까지 와서 회식하고 그랬어. 의리 있는 친구지. 그 친구한테 차이나타운에 대한 정보도 많이 얻었어. 그때 중구청에서 차이나타운 중국동네 활성화 한다고…. 그때 당시 차이나타운에선 풍미가 장사 독점했었어. 엄청나게 장사도 됐고. 내가 차이나타운 오게 된 계기는 우리 대만 사는 막내 여동생 덕분이야. 우리 막내 여동생, 티는 안 내지만 사실 대만에서 재벌 집안이에요. 그 여동생이 시집가고 나서 한국에 한 번 들어왔었어. 그때 우리 식구는 주안 석바위 살았었잖아? 단독주택에. “오빠, 엄마가 쓸쓸해하시는 것 같아요. 엄마 친구 분들도 다 차이나타운에 계시잖아요? 제가 투자할 테니, 차이나타운에 건물 하나 사세요.” 원래는 거기에 건물 사서 엄마한테 불당 하나 차려드리려고 했던 거야. 난 원래 우리 어머니한테 동생들 집도 잘 못 가게 했어요. 무조건 내가 모시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고…. 내가 장남이잖아? 우리 애들도 장사하는 동안 우리 어머니가 다 키웠어요. “그래, 어디 한 번 알아보자.” 했지. 그때 마침 IMF 시절이야. 97, 98. 그때 한국 정부, 외국 자본 유치하려고 외국인부동산취득법 완화하려는 찰나였어. 그때 달러가 1,800, 1,900하던 시절이야. 대만에서 달러 가져오면 한국에선 엄청 큰돈이었어요. 내가 알아봤을 때, 어떤 건물 나왔느냐 하면 바로 이 태화원 건물하고 자금성 건물이었어.

 

: 그때 당시 자금성이나 태화원은 여전히 중국집 하고 있었어요?

 

: 아니지. 그냥 창고였어. 여기 태화원은 소파 공장이었어. 건물 전체가 다 창고였어. 자금성은 건물 보니까, 대지가 127평이야. 건물은 84. 1층은 80, 2층은 40. 그래서 내가 막내여동생한테 그랬어. “그러지 말고, 이건 오빠가 석바위 집 팔아서 살 테니, 넌 신경 쓰지 마라. 어머니는 내가 모셔야 하니까. 정 그러면 우선 네가 빌려주라. 집 팔리면 내가 돌려주마.” 여동생은 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 거야. “그냥 내가 사면되지, 오빠가 뭘 그리 신경 써? 그 석바위 집은 오빠가 좋아하는 집이라며? 정원도 있고, 마당도 있고. 돈도 이미 다 준비되어 있는데. 정 오빠가 사고 싶으면 딴 건물 또 사면 되잖아? 어쨌든 오빠가 어머니 모셔야 되니까. 너무 클 것 같으면 밑에다 다른 거 해. 이젠 편하게 살아요. 어렸을 때, 고생도 많이 했는데.” 그래서 지금 자금성 건물, 우리 여동생 건물이요, 막내 여동생. 사실, 우리 집, 우리 형제들 얘기하려고 하면 진짜 책 한권이 아니라 여러 권 쓸 거요. 얘기하면 길어요, 진짜….

 

: 자금성 건물 매입하셔서 바로 중국집 차리셨어요?

 

: 80평이 왜 그렇게 커보였는지…. 수리해도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 그래서 절반만 수리하고 나머지는 창고로 쓰려고 했었지, 처음엔. 일단 부동산 통해 매입하고 곧바로 수리 들어갔어요. 그땐 중구청에서 차이나타운 활성화 때문에 권장하는 부분도 있었고. 그때 내가 일부러 중구청장을 찾아가 만났어. “사실 제가 이 동네에서 태어났는데, 여태까지 주방장 생활 했는데, 주안에서 장사하던 사람인데 차이나타운 활성화한다고 해서 여기로 왔습니다.” 그랬더니 오픈할 때 연락하래. 마음으로라도 도와드리겠다고. 그 분 만나고 나니까 마음이 변했어. 정말 잘 되겠다는 느낌이 오더라고. 괜히 처음에 조그맣게 했다가 나중에 늘리려고 하면 돈이 더 드니까 일층 전체를 요릿집으로 꾸몄죠. 리모델링하는데 8000만원 들었어요. 2층은 여동생이 불당 만든다고 새로 지었고. 그렇게 장사를 시작했어. 그때 중구청장님도 우리 집 자주 왔어요. 음식도 잘 먹고, 참 서민적이야. 그때 이미 중한 수교되었을 때라, 중구청에서 중국하고 우호도시 추진했어요. 그때 나도 한 역할 했어요. 처음에 자금성을 오픈 하고 한 6개월은 잘 안되었어요. 그러다가 신동엽 있잖아, 개그맨? 그 신동엽의 <신장개업> 때문에 대박 타졌지.

 

: 그때 차이나타운 활성화 많이 되었어요?

 

: 처음엔 중국집이 딱 세집이었어요. 대청반점, 풍미, 자금성. 자금성이 세 번째 들어온 거야.

 

: 그 당시 화교들은 여기 차이나타운 활성화 되면서 대거 들어오신 건가요? 아니면 그래도 예전부터 많이 살고 계셨나요?

 

: 화교들은 대부분 송월아파트 근처에 분포해 있었어요. 또 인천역 뒤에 동인아파트에도 화교들 많이 살았어요. 박사님도 아시다시피, 그때 여기 차이나타운은 지금처럼 잘 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장사하는 화교들도 별로 없었고. 그런데도 사는 주거지는 대개 이 주변 송월아파트나 빌라 같은 데 많이 살았어요. 이유가 뭐냐 하면요? 애들 학교 보내기 위해서. 애들 여기 중산학교 보내려고. 지방에서 올라와 여기 송월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아파트 전세 얻어서. 다 학교 때문이야.

 

: 동인아파트나 송월아파트에 사시던 화교들은 대개 어떤 일 하셨어요?

 

: 물론 다 식당 했지. 여기 차이나타운 말고, 주안이나 부평에서.

 

: 직장은 다른 곳에 있어도 아이들 교육 때문에 이 주변을 떠나시지 못한 거네요?

 

: 그렇지. 애들 학교 때문에. 애들은 걸어서 학교 다녀야 하잖아? 설사 딴 데서 장사해도 그래서 자기는 출퇴근 하는 한이 있어도 집은 다 여기 뒀다고. 나 같은 경우에는, 왜 송월아파트에 오래 살았냐 하면, 애들 학교 걸어서 보내고 우리 집 노인네 때문에. 이 주변에 지금도 아직 수십 가구 살아요. 동인에도 한 2, 30가구 살고.

: 석바위 쪽에 단독 주택 얻어서 이사 가셨을 때는 애들 학교를 어떻게 보내셨어요?

 

: 다 버스 타고 다녔지. 나야 좋았지만. 어머니는 한국말 잘 못하는데 친구 한번 만나려면 버스 타고 가야 하니까…. 나한텐 괜히 미안해서 말 못하고 대신 딸한테 말한 거야. 차이나타운에 살았으면 좋겠다고. 막내딸이 효녀지. 엄마 생각해서 그렇게 투자해서…. 사실, 우리 여동생이야 한국에다 집을 사서 뭐하겠어? 그게 한편으론 다 오빠를 돕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거야.

 

: 이 태화원 건물은 언제 사신 거예요?

 

: 그것보다 먼저 내가 딴 얘기 좀 할게. 그때 자금성 시작하면서, 난 대외적인 일 많이 했어요. 차이나타운 패루 유치, 우호도시 맺는데 나도 한 역할 좀 했어요. 주로 중구청 지명 통역이야. 술 상무도 많이 했지. 그렇게 대외적인 부분을 하는 건 한편으로 나한테는 좋은 기회였어요. 사회활동도 하고 친구도 많이 사귀고. 물론 장사에도 도움이 많이 되었지. 옛날에 조그만 장사 할 때는 주방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어쩌다가 손님이 찾는다고 하면 “안녕하세요. 맛있게 드세요.” 그 정도 수준이었는데, 여기 자금성 하면서 대외관계가 슬슬 넓혀진 거죠. 구청장하고 술도 먹게 되고. 앞치마 매고 가는 게 아니라 앉아서 술도 먹고. 그때 그런 훈련 많이 했죠. 훈련이 되었어. 옛날엔 손님하고 말도 잘 안했어. 성격이 바뀐 거야. 옛날엔 술도 주로 혼자 먹었어. 혼자서 먹는 술? 그럼, 폭주야. 밥 먹을 때 혼자 소주 한두 병 까고 내쳐 자버리고. 그랬어. 주방생활이란 게 그래요. 근데 그런 계기로 중구청 통해 중국도 같이 가고.

 

: 그렇게 대외적인 일 많이 하시다 보면, 아무래도 영업에는 지장이 좀 있었을 것 같은데?

 

: 자금성에는 따로 사람 두었지. 우리 조카하고 우리 둘째 동생. 그때 셋째동생은 딴 데서 장사했었는데 걔도 데려왔지. 지금 자금성 여자 지배인도. 다 자금성 오픈할 때 멤버야. 장사가 바쁘니까 다 영입을 했죠. 다 창업공신이지. 하하!

 

: 그럼, 태화원은?

 

: 하다보니까 사람이 욕심이 생기는 거요. 자금성 살 때, 보아두었던 건물이 바로 태화원이거든. 그때 3억을 달라고 했어요. 주인이 아주 꼬장꼬장했어. 3억 안주면 안 판대. 처음엔 나도 튕겼어. 건물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근데 자금성 앞에 손님들이 자꾸 줄을 서는 거야. 자금성 규모로는 다 수용할 수 없었어. 한꺼번에 손님 4, 50명 정도 오면 좁아서 다 앉을 수도 없는 거야. 그래서 자존심도 좀 상하고. 한편으론 이상하게 열도 뻗치더라고.

 

: 그래서 결국 사셨어요?

 

: 그때 마침 우리 복덕방 친구 있다고 했잖아? 그 친구 전화 왔어. 그 해안성당 옆에 건물, 누가 계약을 했는데 아마 잘 안 될 것 같다고. “얼마에 계약했대? 2 3천에 계약했다는데 아무래도 계약이 해지될 것 같다고. 그 계약한 이가 바로 지금 시청 근처에서 시옌(喜宴)하는 내 친구야. 전화했지. “성당 그 옆에 건물, 네가 샀다며?” “취소했어.” 알아보니까, 원래 그 건물의 주인아들이 압류를 걸어놓았더라고. “그럼, 너 안 살 거지?” “나, 안 사.” “알았어.” 복덕방 내 친구한테 전화했어. “계약 해지했다는데 바로 우리가 계약하자.” 마누라 보고 은행가서 돈 싹싹 긁어오라고 했지. 통장에 2천 몇 만원 있더라고, 현찰이. “손 사장, 계약금 맞춰서 가져와. 주인이 이쪽으로 오니까.” 계약까지 했었는데 파기되니까, 그 사람도 김이 샌 거야. 복덕방에서 만났어. 그 노인네 하는 얘기가, 원래 계약한 사람이 화교사람인데, 우리 아들놈이 그 사람 찾아가서 안 팔겠다고 난리를 피웠었다고. 이걸 아들놈 혼자 다 먹으려고 그런다. 다른 자식도 있는데 하나같이 못 산대. 그래서 내가 죽기 전에 팔아서 나누어주려고 그런다. 그렇게 못하면 죽어도 눈 못 감을 것 같다고. 자기가 아들 설득할 테니 나보고 인내심 좀 가지래. 그래 알았다고, 좋다고. 계약 했어. 나중에 전화 왔어. 그 아버지가 건물 23천에 팔아서 그 절반 아들 주는 걸로 합의를 봤나봐. 그래서 인수하게 된 거지. 일단 사놓고 보니까, 이건 완전히 비둘기 집이야. 비둘기 똥 천지더라고. 처음엔 여기에 집을 지을 생각도 못했어. 완전히 무슨 귀신 나올 것 같은 집이야. 비둘기 욱실거리고. 완전히 창고야.

 

: 그 어르신은 한국분이셨어요?

 

: . 나이가 80 가까이 되었더라고. 법무사 통해서 깔끔하게 처리했어. 나중에 시옌 그 친구 술 먹으면서 그러는 거야. “난 당시 계약했을 때, 왠지 불안하더라. 그래서 파기한 건데, 넌 참 대단하다. 그런 걸 살 생각을 했다니 말이야.

 

: 그 다음엔 어떻게 하셨어요? 완전히 폐가였을 것 같은데.

 

: 몇 달 동안 고민 많이 했어요. 새로 지으려고 하니까, 이게 엄두가 안 나는 거야. 원래 이 건물이 백 년 이상 된 거잖아요? 물론 보수는 해야겠지만, 처음 내 생각은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견적 뽑아 보니까, 그냥 새로 짓는 거랑 500 밖에 차이가 안 나는 거야. 업자가 나한테 그래. “사장님, 뭘 고민하세요? 그냥 밀어버리고 새로 지으세요.” 날 완전 이상한 사람 취급하더라고. 그땐 문화재 관념이 없었어. 지금 생각하면, 참 후회스러워. 사실 난 이런 아이디어 있었어. 옛날식 사합원 그대로. 나무도 그대로 두고 마당은 마당대로 그냥 두고. 2층만 룸으로 개조하고. 그게 원래 다 대리석으로 된 건물이야. 옆에 천주교 성당 교육관 밑에 봤죠? 다 대리석 돌이야. 이렇게 두꺼워. 사합원은 입구()자 형식이야. 그거 사합원 그대로 복원했으면 정말 볼품 있었을 거야. 우리 와이프, 통이 나보다 커. 난 돈도 없어서 그냥 그렇게 리모델링해서 장사하려고 했는데, 우리 와이프가 그냥 밀어버리고 새로 건물 짓자는 거야. 그래 그냥 그렇게 해버렸지. 후회스러워.

 

: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땐 또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죠.

 

: 그 사합원 청소하고 치우는데 큰 트럭으로 40차 분량 폐기물 나오는 거야. 그 폐기물 한 차에 버리는데 40만원, 1,600만원 비용 들었어. 쓰레기만 치우는데 말이야. 그리고 결국 그거 사려고 석바위 내 집 팔아버렸어. 그걸 빌라 짓는 사람한테 팔고 이거 사는데 보태고 은행대출 받고 그래도 모자라. 그래서 우리 처남한테 돈 좀 빌렸어. 그러니까 이거 사서 건물 올리고 하는데 다 합해서 10억 들어갔어. 그땐 정말 큰돈이었어. 한국사람 같으면 이거 안했어. 현찰 10억이면 중소기업 하나 만들어. 하지만 자금성 장사가 정말 잘됐어. 술집 같은 데 가도 나쁜 짓 못해. 사람들 내 얼굴 다 알아. 저 아저씨 짜장면 장사라고. 태화원 오픈하니까, 직원 월급이 한 달에 2천 몇 백이 들어가. 오픈하면서는 장사가 안됐어요, 태화원이. 직원 월급으로 2,000만원 들어가면, 하루에 최하 200은 팔아줘야 현상 유지가 되는데. 첫 달에는 하루에 30만원, 50만원 팔았어. 그게 1년 되니까 3억이 그대로 깨지는 거야. 그러니까 자금성에서 팔아서 다 여기에 쑤셔 박은 거지. 그렇게 3년을 보냈어.

 

: 그게 감당이 되셨어요?

 

: 정말 잠도 안 오고. 그러면 사람이 긴장하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난 직원을 한명도 해고하지 않았어. ‘장사는 언젠가는 된다.’ 자신 있었어. 나중에 바빠지면 일손이 모자라면 안 돼. 그렇게 자금성에서 벌어서 태화원에 쑤셔 넣는 일을 3년 했어. 그때 내가 술 상무 역할 많이 했다고 그랬잖아? 손님들, 자금성 오면 일부러 태화원으로 끌고 와. “태화원으로 가자. 술은 내가 다 서비스 할게. 음식만 먹어라.” 그러면 소주, 맥주만 딱 먹고 휭 가버려. 그렇게 3년 고생을 했어요. 여기 태화원 오픈한 지, 11년 됐어요.

 

: 그럼, 2000년 쯤 시작하셨겠네요?

 

: 이거 시작하고 나서 그래도 자금성 장사가 받쳐 줬으니 다행이지. 3년 지나니까, 조금씩 태화원이 살아나는 거야. 매출이 자금성하고 막상막하였어. 그래서 빌려온 돈, 빚 다 금방 처리했어. 맨 처음엔 날개가 하나였는데, 태화원까지 살아나니까 이젠 날개가 둘이 달린 격이야. 그런데 하루는 그 복덕방 친구 전화 왔어. “자네 집 옆에 있는 상가가 매물로 나왔는데 네가 사라. 2억에 나왔는데 네가 사려면 한 천만 원 정도 더 써라. 그럼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바로 옆 중홍(中虹) 상점 건물이야. 이제 양쪽 집 다 잘 되고, 빚도 다 갚았겠다. 와이프한테, “은행에 돈 얼마 있냐? 돈 좀 찾아와. 뭐 하나 나온 게 있대.” 우리 와이프는 통이 커. 그런 거 반대 안 해. 그래서 이 옆 건물, 2 1천에 사게 된 거야. 대지가 53평이야.

 

: 특별히 건물 하나 더 구입하실 필요가 있었어요?

 

: 그거 내가 왜 샀냐면, 그땐 중국에서 오는 요리사들 많았어요. 그 사람들 잠자는 방을 얻어주어야 했으니까. 그 건물은 지하 1, 지상 2층이야. 지하실에 큰 방 하나, 작은 방 여섯 개 있었어. 그러니까 숙소로 지하실을 쓴 거지. 그 사람들 여기 와서 일하게 되면, 방을 얻어야 돼. 월세 방 하나에 20만원 하면, 본인이 10만원 내고 내가 10만원 내줘야 돼. 내가 주인, 사장이니까. 그래서 내가 차라리 건물 사서 숙소로 주면 되겠다 싶었던 거지. 사실, 중국에서 와서 여관방 같은 거 얻어 봐. 시끄러워서 자지도 못해. 그래, 숙소로 하자. 1층에는 뭐 했냐면, 정관장 있잖아? 홍삼 대리점. 그거 했어. 사람들이 주변에 그런 거 차이나타운에 있으면 괜찮겠다고 해서. 건물 낡아서 한 1억 정도 들여서 리모델링하고. 그 건물도 백년 된 거야. 그때 처남이 부산에 있는 조선소에서 명예퇴직을 했어. 대학 나와서 직장생활 하다가 명퇴당한 거지. 그 사람도 먹고 살아야 될 거 아니야? 그래서 내가 인천 올라와라. 여기 2층 비었으니까 여기서 살고 정관장 맡아서 해라. 거기서 나오는 수입은 처남 월급하고 직원들 월급으로 다 나갔어.

 

: 혹시 그 처남 되시는 분이 지금 옥련동 자금성 하시는 그 분?

 

: 맞아. 옥련동 배 카페. 그 건물주가 원래 내 친구야. 그 친구 말이, 자기 동생이 그 송도 배 카페를 맡아서 하고 있는데 장사가 잘 안 된다고. 나보고 거기에서 짜장면 팔라는 거야. 그래서 무심코 그렇게 하게 된 거야. 명의는 우리 처남 앞으로 했어. 처음엔 잘 안 되다가 지금은 월매출 4천만 원 정도 할 거야. 그러면 처남 식구들 살지 않겠어? 지금 몇 년째 하고 있는데, 큰돈은 못 벌지만 먹고 살만은 해. 주차장도 넓고 구조도 배 카페 형식이라.

 

: 맞아요. 근데 밤에 조명만 좀 환하게 하면 더 잘 될 것 같던데….

 

: 그래? 그거 한 번 좀 알아봐야겠는데?

 

: 그럼, 정관장은 접으시고?

 

: 사실, 그 정관장은 내 피난처야. 하도 사람들 많이 찾으니까. 걸핏하면, “사장, 오라고 해. 술 한 잔 하라고 해.” 나중엔 거기다가 중국 도자기 갖다놓고 팔았어. 도자기 7천만 원에 사다 2년 만에 다 팔았어.

 

: 그럼, 숙소는 어떻게 되었어요?

 

: 지하실? 우리 가게 직원들만 숙소로 썼지. 지금 숙소는, 우리 중화루 지하가 옛날 다방이었어. 중앙다방이라고. 거기다 숙소 새로 꾸몄어. 30 몇 평 돼.

 

: 중국서 와서 일하는 분들 대부분 여자들이죠?

 

: 태화원, 자금성, 중화루에서 일하는 중국 요리사 한 열 명 되요. 여자도 예닐곱 될 거야.

 

: 지금 자금성은 옛날 황씨 아저씨 아드님이 주방장 하시는 거죠? 그리고 그 밑에서 중국인 요리사들이 일하는 거죠? 태화원도 마찬가지로 그런 식이고..

 

: 태화원은 막내 처제하고 동서가 주방에서 일하고. 우리 가족들이 많아요. 중화루에는 외조카가 주방장이고. 여기 태화원 주방장은 셋째 남동생이….

 

: 그러니까 그 밑에 있는 보조 요리사들은 중국인 요리사들이고?

 

: 다 중국 호텔에서 요리사 하던 친구들이에요. 그 사람들 중국에서 일해 봤자 1년에 2천 얼마밖에 못 벌어요. 그래서 한국으로 나오는 거예요. 한국에서 일하는 게 중국보다는 좀 힘들지만 보수 측면에서는 훨씬 높거든. 4대 보험 다 들어주고. 여기서 한 달 일하면 중국에서 6개월 일하는 거나 마찬가지거든. , 우리 화교들도 옛날 일본 가서 돈 벌고 그랬잖아? 우리 친구들 중에도 그렇게 돈 벌러 갔던 사람 많았어.

 

: 대부분 산동에서 많이 와요?

 

: 그렇지. 주로 옌타이나 웨이하이에서 와요. 근데 그들도 여기 오면 한국식을 새로 배워야 돼요. 한국인 입맛에 맞게. 하지만 다들 기본이 있으니까. 지금은 그런 친구들 없으면 중국집 장사하기 힘들어요. 요즘 우리 화교 젊은 사람들, 한국서 요리사 안 하려고 해요. 옛날에 우리도 중국집 주방장이라면 딸도 안 줬어요. 요즘이야 요리사들 사회적 수준 많이 올라갔지만. 나도 옛날 우리 와이프 만날 때, 처음엔 주방장이라고 안 했어요. 그냥 여행사 직원이라고 했어. 물론 나중에 다 들통 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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