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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137/2022.02/현장&공간] 연구성과소개 _ 이정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2-10 조회수 41

[Vol.137/2022.02/현장&공간] 연구성과소개 _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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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942년 경 촬영된 중화루(앞쪽)와 송죽루(뒤쪽중화요리점


이정희현대 인천 중화요리점 역사 속의 중화루중화루의 얼굴-간판(인천광역시립박물관 소장 유물 자료집), 2021.12, pp.100-126.

 

본 논문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호텔인 대불호텔의 건물을 호텔로서의 역사와 중화루 중화요리점으로서의 역사로 나눠특히 중화루의 역사를 근현대 인천 중화요리점의 역사 속에서 검토한 것이다검토 결과 확인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대불호텔이 호텔로서 문을 닫은 시기가 선행연구에서 1907년경으로 알려져 왔지만이번의 검토로 오사카부 사카이시 소재 다쿠합명회사의 인천지점이 1906년 7월에 대불호텔 건물에 입주한 것을 근거로 볼 때 1906년 7월 혹은 그 이전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둘째중화루 중화요리점이 대불호텔 건물에서 개업을 시작한 시기가 기존에는 인천부사의 자료에 근거해서 1918년으로 여겨져 왔지만인천화상상회가 1935년 조사한 자료에 의해 1915년이라는 것이 새로 밝혀졌다이전보다 3년 더 빨리 개업한 것이 된다.


셋째뇌문조가 1922년 일본인 호리 리키타로로부터 대불호텔 대지와 건물을 매입하고 그해 음력 2월 신장개업을 했다는 사실은 이번에 최초로 밝혀졌다호리 리키타로에게 세를 얻어 중화루 영업을 하다 이제는 그 건물을 매입하여 영업을 시작한 것이다.


넷째근대 인천을 대표하는 3대 중화요리점은 동흥루(뒤에 송죽루로 바뀜), 공화춘중화루였다중화루는 개업시기가 동흥루와 공화춘보다 늦었지만자본금의 규모와 종업원 수판매액 등의 면에서 동흥루와 공화춘을 능가했다는 점을 각종 자료를 통해 밝혀냈다이러한 사실은 인천 중화요리점 역사가 공화춘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을 재고하게 한다.


다섯째중화루 중화요리점이 2개의 전화를 개설하고 있었고신문에 낸 광고를 통해 고급 베이징요리를 특색으로 요리배달과 연회 장소를 제공하는 고급 중화요리점으로서 인천지역사회에서 지역 유지의 각종 모임 장소로 기능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여섯째, 1942년 당시 중화루는 물론이고 공화춘과 송죽루의 종업원의 성명나이본적을 완전히 파악하였고종업원 수에서도 중화루가 두 개의 중화요리점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그리고 이들 중화요리점의 경영자 고향인 산둥성의 푸산현과 무핑현 출신의 종업원이 많다는 것도 파악했다.


일곱째해방 이후 중화루의 발자취와 관련해서는 1949년경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사진을 통해 외부 간판을 철저히 분석공화춘과 동흥루의 외부 간판과 문구 등에서 유사한 점을 확인했다.


이러한 새로운 사실 발굴에도 불구하고 중화루와 관련하여 아직 새로 밝혀져야 할 부분이 적지 않게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중화루의 주주는 어떤 화교와 화상(華商)으로 구성되어 있었는지주요한 메뉴가 무엇이었는지수익구조와 영업이익의 배당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졌는지, 1958년 소유권 소송이 어떤 경위로 이뤄졌는지 등이 과제라 할 수 있다간판과 편액뿐 아니라 공화춘의 만금장과 같은 장부와 주권(株券등의 자료 발굴과 관련자 인터뷰 작업이 향후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아카이빙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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