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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15 /2011.11] 기획 _ 전통 중국의 상인 (10) 平陽의 亢家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10 조회수 59

[Vol.15 /2011.11] 기획 _ 전통 중국의 상인 (10)    平陽의 亢家

옌훙중(燕紅忠)ㆍ류청후(劉成虎) _ 중국 산시대학 진상학연구소 씀

박경석 _ 인천대학교 HK 교수 옮김

 

 

“위로는 蒼天이 있고, 아래로는 ‘亢百萬’이 있다. 3년을 비가 오지 않아도, 묵은 곡식이 1만 擔〔擔은 중량의 단위로, ‘一擔’은 100()이다. - 역주〕이나 된다.” 이는 淸代 山西 平陽 亢家堡의 거부 “亢百萬”이 한 말이다. 平陽은 지금의 臨汾이다. 淸代 孫靜安의《棲霞閣野乘》卷下〈季亢二家之富〉를 보면, 山西 平陽의 亢氏와 江南 泰興의 季氏가 부유함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亢氏 집안의 저택은 山西 平陽의 교외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둘레의 길이가 10里이고, 나무, , 연못, 누각의 깊고 그윽함이 그림 같고, 처첩과 계집종의 차림새 또한 매우 화려하였다. 康熙 中期 당시는 傳奇〔明淸代에 성행했던 장편 戱曲. - 역주〕《長生殿》이 막 세상에 나왔을 때인데, 亢家에서는 이것을 바로 공연했고, 비용이 무려 40여 만 량에 달했다. 徐珂의《稗類》에 따르면, “亢氏는 山西의 거부인데”, “재산이 수천만 량에 이르는 실로 최고의 부자”라고 하였다.

 

1 _ 亢氏 집안 최초 흥기의 전설

 

《中國經濟全書》를 보면, 明朝 말기에 山西 平陽의 亢氏 집안은 李自成이 남긴 돈으로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李闖王〔李自成 - 역주〕이 山西를 지나면서 金銀을 亢氏 집안에 맡겼고, 나중에 李自成이 패전하자, 財富를 모두 亢氏 집안이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 가치가 천만금에 달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이야기와 길은 다르지만 이르는 목적지는 같은 이야기도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李自成은 北京에서 敗退한 후, 河北에서 山西로 진입해 晉中과 臨汾을 거쳐 陝西로 물러났다고 한다. 다급히 철수하던 중이어서 자연히 뭔가를 휴대하는 것이 불편하였고, 그래서 京城에서 약탈한 금은보화를 땅에 묻어 두었는데, 나중에 농민들이 주워 가지고 갔다. 금은보화를 拾得한 농민들은 모두 상업에 종사하게 되었고, 더욱 더 큰 財富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렇게 이익을 얻은 농민들 중에는 臨汾 亢家堡의 亢氏 집안뿐만 아니라, 祁縣 孫家河 員氏 집안, 萬榮縣 榮河老城의 潘氏 집안 等等이 있었다.

 

그러나 자료에 따르면, 明末 崇禎 16(1644) 2월 농민기의군 수령 李自成이 백만 대군을 이끌고 북쪽에서 黃河를 건너, 平陽을 거쳐 포위 공격을 진행하였다. 이번 포위 공격이 亢氏 집안의 저택이 있는 곳을 직접 타깃으로 삼았기 때문에, 亢氏 집안은 가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總管을 李自成에게 보내 교섭하게 했는데, 어떤 조건이라도 모두 들어줘 안전을 확보하도록 했다. 최종적으로 李自成과 합의에 이르렀는데, 亢氏 집안이 起義軍에게 백만 량의 군비를 제공하기로 하고 平陽의 東關은 결국 전란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런 민간의 故事를 볼 때, 亢氏 집안이 백만 량 군비를 李自成에게 제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明末에 이미 집안의 재산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李自成이 남기고 간 금을 주워 부자가 되었더라도, 亢氏 집안이 이것만으로 수백 년에 이르는 巨富를 이룩할 수는 없다. 그 가운데에는 집안을 일으켜 부유하게 만든 상인 됨됨이의 길이 반드시 있었다

 

2 _ 소금을 팔아 부를 축적함

 

平陽 亢氏 가족의 致富는 明代에 시작되었다. “亢百萬”은 亢嗣鼎을 가리킨다. 明末初 사람으로 淸代 康熙 末年까지도 건재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온 맘을 다해 배움에 힘썼고, 극진한 효자여서 특히 어머니를 잘 섬기고 공경했다. 뿐만 아니라 조카를 돌봄에 있어서도 친아들처럼 대했다. 향촌에서 좋은 일을 많이 했고, 늘 공익사업에 앞장섰다. 그래서 일찍이《臨汾縣志》에 그의 “義行”이 기재되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亢百萬”이 부유함을 믿고 거만했으며 탐욕스럽기가 이를 데 없고, 부자가 되기 위해 온갖 나쁜 짓을 다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대규모 소금상인, 전당업자, 대금업자, 곡물상, 대지주로서, 집안에 있는 곡물창고가 수천에 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전술한 “위로는 蒼天이 있고, 아래로는 亢百萬이 있다”는 허튼 소리가 생겨났던 것이다.

 

朱元璋이 元나라 정권을 무너뜨린 후에도 북방은 여전히 불안했고, 元나라 정권의 잔존세력이 북방을 강점하고 있으면서 호시탐탐 침범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에 朱元璋은 어쩔 수 없이 북방에 “동쪽의 鴨綠江에서부터 서쪽으로 嘉에 이르기까지 萬里나 이어지는 방어용” 장성을 건설하였고, 전후로 遼東, 宣府, 大同, 延綏, 寧夏, 甘肅, 薊州, 太原, 固原 等의 邊防 重을 설치하였는데 통칭 이를 九邊이라고 한다. 이곳에 80萬의 邊防軍이 주둔하면서 이민족의 침입을 방어했다. 이런 방대한 군대를 유지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어갔다. 처음에는 군대가 주둔지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軍屯) 방법으로 군대의 식량 공급을 해결했다. 그러나 북방에는 서리가 내리지 않는 기간이 매우 짧고, 날씨는 차고 땅은 얼어 있어, 군대가 식량을 자급하기 매우 어려웠다. 이에 山西 行省이 황제에게 다름과 같은 방안을 건의하였다. 상인으로 하여금 大同倉에서 쌀 1石을 내고, 太原倉에서 쌀 1 3斗를 내게 하는 대신에 200斤에 상당하는 淮鹽 판매허가증을 발급하고, 상인이 변방에 쌀을 제출한 후 정부에서 발급한 소금판매허가증(鹽引)을 가지고 지정한 鹽場으로 가서 소금을 수령하여 팔게 하자는 것이었다. 朱元璋이 이 건의를 받아들였고, 山西 상인 중에 민첩한 사람이 먼저 식량을 방출하여 북쪽으로 올라갔다. 揚州의 兩淮 鹽場이 그 영업과 운행의 중심이 되었다.

 

平陽의 亢氏 집안은 당시 유명한 大鹽商이었다. 사료에 따르면, “康熙 때에 平陽의 亢氏와 泰興의 季氏는 모두 그 부유함이 나라에 匹敵하였고, 사치를 누림에 있어 王侯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泰興의 季氏는 季滄葦를 가리키는데, 初의 官僚地主로서 康熙 初年에 禦史를 지내다가 낙향한 후, 생활이 심히 호화로웠다. 호화로운 저택을 짓고, 몇 십 명의 호위대가 집안을 순찰하도록 했다. 그런데, 山西 臨汾의 亢氏의 경우,山西의 본가는 말할 것도 없고, 揚州의 사는 곳도 그 가옥이 말문이 막힐 정도로 웅장하였고, 게다가 揚州城 西北 방향 角虹橋 小秦淮河 부근에 “亢園”을 건축하였다. 亢園은 길이가 몇 里는 되고, 頭敵台에서 四敵台까지 하천 연안에 가옥 100칸을 지었는데, 현지인들은 이를 ‘百間房’이라고 불렀다. 亢氏 집안의 “亢園”은 지금 揚州 瘦西湖公園의 일부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밖에 亢氏는 小東門 밖에 “亢家花園”이라는 곳을 지어 揚州에서 가장 존귀한 인물이 되었다.

 

3 _ 금융을 경영하여 이 분야에서 최고로 군림하다

 

山西 平陽의 亢氏 집안은 大鹽商이었을 뿐만 아니라, 큰 대금업자이기도 했는데, 주로 전당포와 錢莊을 경영하였고, 전하는 바에 따르면 票號도 개설했다고 한다. 亢氏 집안이 금융업에 손을 댄 것은 전당포를 열면서부터인데, 전당포는 가장 빠르게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장사 중에 하나로, 소비품을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경영하였다. 이자율이 매우 높아 사람들은 이를 고리대라고 불렀다. 亢氏 집안이 몇 곳의 전당포를 개설했는지, 그 구체적인 숫자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실력과 세력의 강대함은 매우 놀랍다.

 

淸代 康熙 年間, 亢氏 집안이 平陽 城內에 전당포를 개설하자, 다른 상인들은 감히 이곳에 전당포를 열지 못하였다. 그런데 어떤 상인이 그리 여기지 않고 平陽 城內에 전당포를 개설하였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금으로 만든 金羅漢像을 가지고 와 白銀 1천량에 저당을 잡혔다. 다음 날 이 사람이 金羅漢像을 또 하나 가지고 와서 白銀 1천량을 빌려갔다. 또 그 다음 날 이 사람이 또 金羅漢像을 가져와서 白銀 1천량을 빌렸다. 그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  .............  연이어 3개월 동안 그치지 않고 99개의 金羅漢像을 가지고 와서 白銀 9 9천량을 빌렸다. 전당포의 주인은 그만 겁이 났고, 손님에게 어떤 상황인지를 물었다. 그 손님은 집에 500개의 金羅漢像이 있고, 이제까지 99개를 처분했으니 앞으로 401개가 남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전당포 주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훌쩍 떠나 버렸다. 이 전당포의 주인은 사방에 사람을 보내 무슨 사정인지를 알아보았고, 亢家堡의 “亢百萬”이 사람을 보내 한 일이고, 亢氏의 뜻이 경쟁자를 밀어내 平陽의 금융업을 독점하는 데에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전당포 주인은 급히 物主와 의논을 했고, 연후에 해당 지역의 명망 있는 사람에게 중개를 요청해 亢氏 집안에 저당 잡혔던 金羅漢像을 넘기고 서둘러 전당포의 문을 닫고 훌쩍 다른 곳으로 떠나 버렸다.

 

이 이야기는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亢氏가 전당업을 경영했던 부유한 大商이었음을 설명해 준다. “亢百萬”이 개설한 錢莊이 몇 곳이나 되었는지는 현재 명확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가 淸代 내내 山西, 山東, 北京 등에서 매우 큰 錢莊 세력을 가지고 있었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4 _ 곡물 경영이 한때 매우 융성했다

 

도시의 발전과 상품경제의 활기에 따라, 곡물 무역의 규모가 매우 커졌고, 亢氏 또한 당시 대규모 곡물상의 하나로서, 장거리 운송·판매와 곡물상점의 경영에 전력을 다했다. 당시의 北京은 수도권이었기 때문에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쌀을 사서 먹는 사람들이 다른 곳에 비해 훨씬 많았다.

 

亢氏의 원적지인 山西 平陽府(臨汾)는 汾河 유역에 위치해 있는 곡물산지였는데, 亢氏는 臨汾에서 “수천 곳에 이르는 곡물창고를” 가지고 있었고, 저장해 둔 미곡이 “萬石”에 이르렀다. 山西는 수도에서 가까운 곳이고, 亢氏는 京城에 곡물상점을 개설하고 있는 곡물 도매상이자 곡물 소매상이었다. 亢氏 집안의 곡물상점은 前門 밖 大柵欄 西口의 곡물상가에 있었는데, 이곳은 北京에서 가장 중요한 곡물시장이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亢氏는 山西 平陽에서 北京까지, 말이나 가마를 타고 30여 일에 이르는 여정을 소화하곤 했는데, 가는 길에 다른 곳에서는 자지 않고 매일 저녁 자기의 상점에서만 잠을 잤다고 한다. 稗類》第21冊의 기록에 따르면, “北京의 巨商 중에는 山西 사람이 많은데, 正陽門 밖 곡물상점의 주인 亢氏가 실로 거대한 재물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康熙 年間, 平陽府에 특별히 큰 가뭄이 발생했는데, 康熙 59 3월부터 康熙 60 6월까지 무려 15개월 동안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아, 2년 동안 수확을 전혀 거두지 못했고, 붉게 타버린 대지가 천리에 이르고, 굶어죽은 사람이 거리에 넘치고, 초근목피까지 모두 먹어 치웠다. 臨汾 知縣 魏星煜이 부호의 기부 식량을 바탕으로 남쪽과 북쪽에 두 곳의 죽 배급소(粥廠)를 설치하고 이재민 구호를 실시하였다. 이때 亢家堡의 “亢百萬”(亢嗣鼎가 영수)이 다른 부호 9개 집안과 함께 죽을 책임졌는데, 매일 죽을 먹으러 오는 이재민이 만 명을 넘었다.

 

“亢百萬”은 요긴한 시기에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능히 실행하였고, 이는 쉽지 않은 일을 해내어 매우 대견스러운 일에 속한다. 그러나 민간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亢百萬”은 자기의 부유함을 믿고 허튼 소리를 잘 했는데, 그는 뜻밖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위로는 蒼天이 있고, 아래로는 亢百萬이 있다. 3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도 묵은 곡식이 만석이나 있다.”고 하였다. 민간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亢百萬의 이런 허튼 소리가 하늘에 죄를 범하여, 어느 날 갑자기 폭우와 함께 우박이 쏟아졌는데, 亢氏 집안의 田地에 심어져 있던 모종은 모두 못쓰게 되었으나, 다른 사람들의 모종은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亢百萬’이 심은 대로 거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하늘의 인과응보는 비록 근거 없는 말이지만, 이런 말이 ‘亢百萬’의 명성을 크게 떨어뜨렸다. ‘亢百萬’의 재산은 천하에 비길 만했으나 명성은 그렇지 못하게 된 것이다.

 

5 _ 亢氏 집안의 쇠락

 

亢氏 집안은 정말 돈이 많았고 천하제일의 갑부였다. 이는 부패한 관원의 주의를 끌었다. 康熙 年間의 山西 巡撫 葛禮가 소송사건을 빌미로 “亢百萬”의 돈을 뜯어낸 일이 그 중에 하나이다.

 

康熙 38년부터 40년까지(1699-1701) 만주족 관리 葛禮가 山西省 巡撫를 역임했는데, 그는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全省에 “2냥 어치의 곡물마다 火耗銀 2錢을 추가로 거두라”고 명령하여, 省庫의 수입을 늘리고, 지출에 편리함을 도모하며, 또한 이 과정에서 떨어지는 떡고물을 챙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명령이 내려지자, 즉각적으로 全省 백성의 집단적인 반발이 일어났다. 지주와 상인의 반대는 더욱 강렬했다. 연명으로 上書를 올려 巡撫에게 명령을 거둘 것을 간청하였다. 火耗의 추가 징수는 납세액에 비례해 분담되므로 부자들의 부담이 가장 무거웠고, 그래서 富商이 앞장 서 집단 보이콧에 나섰다. 亢嗣鼎은 平陽의 제일가는 부자로서 자연스레 참여하였다. 巡撫 葛禮는 부하들이 보내온 보고서(呈狀)를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보이콧에 앞장 선 부호들을 체포해 오라고 명령하였고, 亢嗣鼎의 이름이 그들 중 맨 앞에 올랐다.

 

마침 이 때에 亢氏 집안의 山東 濟南 錢莊에 銀錢 분규가 발생해 있었는데, 亢嗣鼎이 직접 가서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臨汾縣 縣令이 山西省 巡撫의 명령에 따라 소환장을 몇 차례 하달하였고, 亢氏 집안 전체가 엎친 데 덮친 격이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거액의 뇌물을 사용하여 관료사회와 거래를 해 석방될 수 있었다. 이 때 臨汾、汾陽、長治 등의 부호들 대부분이 省都의 감옥에 구금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亢嗣鼎은 山東 濟南의 錢莊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省都의 감옥에 구금된 식구들은 돈으로 관리들과 내통하여 “萬金으로 벌을 대신하고” 석방될 수 있었다.

 

亢氏는 淸初 막 부자가 되었을 때 약 천만 량의 자산을 가지고 있었으나, 淸末 光緖 때에 이르러 수천만의 자산을 공언하게 되었다. 2백여 년이 지나면서 亢氏의 자산이 몇 배나 증가한 것인데, 이는 亢氏가 경영을 잘 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亢氏 집안은 淸末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대상인으로서의 명성을 떨쳤으나, 淸末 이후 가업이 날로 쇠락하였다. 亢氏는 山西省 안에서는 민국시기에 이르러 이미 몰락하였고, 省 밖의 北京 등에서는 1940년대까지 그럭저럭 유지되었다. 그 몰락의 원인과 궤적은 모든 山西 상인과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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