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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131/2021.08/관행 톡톡] 조선화교배척사건과 하이퐁화교배척사건의 비교 _ 이정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8-03 조회수 71

[Vol.131/2021.08/관행 톡톡] 조선화교배척사건과 하이퐁화교배척사건의 비교 _ 이정희



2021년은 1931년 발생한 만보산사건조선화교배척사건 90주년이 되는 해이다두 사건은 1930년대 만주사변1차 상해사변만주국 건국그리고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동북아시아의 정치적 격변에 주요한 계기가 되는 사건이며동시에 조선화교의 사회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사건이었다.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우 1927년 12월과 1931년 7월 두 차례 발생했다. 19세기 중엽 이래 중국인의 해외 이주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이주지 및 이주국에서 화교에 대한 배척사건이 동남아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발생했다조선화교배척사건만을 검토해서는 화교배척사건의 보편성과 특성을 놓칠 우려가 있다이 사건을 보다 객관적으로 살펴보려면 타 국가 및 지역의 화교배척사건과 비교하는 것이 필요하다베트남 북부의 항구 도시이자 차이나타운이 있는 하이퐁에서 1927년 8월 17일부터 21일 사이에 발생한 화교배척사건은 조선화교배척사건의 비교 대상으로 매우 적절하다지금까지 필자가 진행한 두 화교배척사건 연구 성과에 근거하여 양자를 비교해 보고자 한다.

    

 하이퐁차이나타운(1920년경).PNG

사진 1. 1920년 경의 하이퐁 차이나타운


첫째두 사건의 발단의 문제이다. 1927년과 1931년 화교배척사건의 발단은 만보산사건이 신문을 통해 조선에 과장보도가 되면서 화교배척사건으로 이어졌다는 공통점이 있다하지만 하이퐁화교배척사건은 조선화교배척사건과 같은 외발적 발단이 아니라 베트남인 부녀자와 화교 부여자 간에 물 뜨는 과정에서 양 민족 간 충돌과 그 확대라고 하는 내발적 발단이라 할 수 있다이런 점에서 만주라는 공간에 60만 명의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둘째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우 1927년은 조선의 남부, 1931년은 전국적 규모로 전개되었지만베트남의 경우는 하이퐁 이외의 지역에서는 발생하지 않았다는 차이점이 있다이 점은 불령인도차이나 식민당국과 조선총독부의 사건 대응과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보여진다불령인도차이나 식민당국은 하이퐁사건이 타 지역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언론을 통제하고 화교사회를 철저히 감시 통제했다조선총독부는 1931년 화교배척사건의 경우 초기 대응을 신속하면서도 철저히 진압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그 이면에는 재만조선인에 대한 중국측의 구축과 탄압에 대한 일종의 보복심리’(물론 만주 침략을 위한 의도가 배후에 깔려있었지만)가 작용한 것이 조선총독부의 우가키 총독의 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화교배척사건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피해 규모는 하이퐁 차이나타운에 한해서 전개된 하이퐁화교배척사건에 비해 훨씬 컸다하이퐁사건의 피해는 사망자 15(이 가운데 1명은 베트남인), 부상자 60, 체포된 자는 201(이 가운데 17명은 화교), 이 가운데 기소된 자는 120명이었다. 1927년 화교배척사건은 사망 2중상 11경상 54폭행피해자 273재산손실액 9,567엔이었다. 1931년 화교배척사건은 화교(사망 119중상 45경상 150), 조선인(사망 3중상 3경상 28), 경찰(중상 9경상 78)이었다.

 

두 화교배척사건의 원인에는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먼저 화교인구의 급증을 들 수 있다조선화교의 인구는 1927년은 1920년에 비해 52%, 1930년은 65%가 증가했다하이퐁화교인구는 1923년은 10년 전에 비해 58.7%나 상승했고, 1929년은 6년 전인 1923년에 비해 49.1%나 증가했다. 1920년대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 이후 비교적 평화의 시대가 도래해 세계 경제도 1929년 세계대공황 발발 이전까지는 비교적 호경기가 지속되었다이러한 조건 하에서 중국의 농민과 노동자는 동남아와 조선 등지로 급속히 이주했다이러한 인구 급증이 원주민과의 갈등과 마찰 증가로 이어졌고화교배척사건으로 확대되었다.

 

또 하나는 화교의 경제력이다불령인도차이나 식민당국과 조선총독부는 외국인의 제조업 투자를 법률적으로 제약했기 때문에 이 분야는 프랑스와 일본 자본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하지만조선화교는 주단포목상점베트남화교는 미곡상의 분야에서 통치국 국민과 원주민을 압박하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이에 대한 베트남인과 조선인의 화교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았고그 불만이 화교배척사건으로 표출된 측면이 있다.

    

 사진2 인천내리사진.jpg

사진 2. 1931년 화교배척사건 직후의 인천 내리의 모습

 

다섯째조선과 베트남의 화교사회 및 남경국민정부는 화교배척사건이 식민지 당국의 방임과 방조로 더욱 확산되었다고 주장하고이에 대한 책임자 처벌과 배상을 요구했다베트남인과 조선인 경찰이 시위대를 지위하여 화교를 습격했다는 주장까지 제기했다.

 

여섯째남경국민정부와 화교사회의 화교배척사건에 대한 대응 방식에서 두 사건의 차이가 발견된다.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은 주경성총영사관과 각 지역 소재의 중화상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총독부 외사과와 교섭하여 문제를 처리하려 했다. 1931년 화교배척사건은 전국적인 규모로 발생했기 때문에 주경성총영사관과 부산신의주원산부산영사관진남포판사처인천판사처가 각각 지방정부와 교섭을 했고배상문제와 책임자 처벌과 관련해서는 남경국민정부외교부와 일본외무성이 협상을 진행했다하이퐁화교배척사건의 외교 교섭은 이와 달랐다불령인도차이나에는 남경국민정부의 영사관이 개설되어 있지 않아서 남경국민정부외교부가 주광저우프랑스영사관을 통해 이 사건과 관련하여 외교교섭을 했다프랑스정부는 남경국민정부와 교섭하는 것을 꺼렸고베이징정부를 외교적 파트너로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자 간의 외교적 교섭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베이징정부는 장제스의 북벌성공으로 당시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상태였다.

 

일곱째양국의 화교사회와 남경국민정부는 화교배척사건을 프랑스와 일본 제국주의가 원활한 통치를 위해 중국인과 베트남인중국인과 조선인을 이간질하려는 의도에서 일으킨 사건으로 인식했다두 제국주의 국가는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 중국국민혁명의 성공으로 중국의 민족주의가 최고조에 달하던 시기이고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세력과 식민지의 혁명가가 연대하는 것을 경계했다또한 화교가 그 중계역할을 맡지 못하도록 경찰을 동원해 막고 있었다이러한 제국주의 국가의 이간 의도가 화교배척사건과 어떻게 연관되었는지는 앞으로 조금 더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여덟째두 화교배척사건은 중화민국 및 중국국민당 및 중국공산당과 연대하여 독립을 쟁취하려던 조선인과 베트남인의 혁명단체를 상당히 곤란한 처지로 몰아넣었다베트남의 피압박민족연합회베트남지부’, ‘베트남혁명청년회’, ‘베트남혁명당중앙집행위원회는 하이퐁화교배척사건을 불령인도차이나 식민당국이 양 민족을 이간질시켜 혁명운동을 저지하려는 의도에서 일으킨 것으로 규정하고동포들이 그들의 의도에 말려들지 말 것을 호소했다대한민국인시정부도 이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면서 베트남의 혁명단체와 거의 똑 같은 내용의 호소를 했다.


한반도화교와 베트남화교 마주보기 14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참고문헌

이정희1927년 하이퐁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원인-조선화교배척사건과의 비교시점-만보산사건조선화교배척사건90주년국제웨비나논문집, 2021. pp. 1-20.

이정희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동양사학연구135, 동양사학회, 2016, p. 283-319.

李正熙1931年排華事件近因遠因朝鮮華僑近代東アジア京都大學學術出版社, 2012, pp. 417-477.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Bert Becker, The Haiphong Shipping Boycotts of 1907 and 19091910: Business interactions in the Haiphong-Hong Kong rice shipping trade, Modern Asian Studies, Vol. 54(3), May 2020, p. 947, Cambridge University Press

사진 2. 경성일보》 193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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