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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14 /2011.10] 기획 _ 전통 중국의 상인 (9) 晉商, 타이구(太谷)의상인 차오(曹)씨 가문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10 조회수 91

[Vol.14 /2011.10] 기획 _ 전통 중국의 상인 (9)    晉商, 타이구(太谷)의 상인 차오()씨 가문

옌훙중(燕紅忠)ㆍ류청후(劉成虎) _ 중국 산시대학 진상학연구소 씀

장호준 _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 옮김

 

타이구(太谷)의 거상 차오()씨 일가는 산시(山西)의 저명한 상업가문이다. 원래는 오늘날의 타이위안(太原)시 진위안(晋源)구에 해당하는 진위안(晋源)현 화타(花塔)촌에서 살았지만 명()대 홍무(洪武)제 때 타이구(太谷)현 베이왕(北汪)향 베이왕(北汪)촌으로 이전하여 정착하였다. 类钞』에 따르면 차오 가문의 자산은 은() 6-7백만 냥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은 차오산시(曹三喜) ()에 발흥하기 시작하여 차오커랑(曹克)()에 쇠락하기까지 24() 동안 널리 명성을 날렸다.

 

1 _ 차오 가문의 상업적 흥성

 

명말청초 시기에 차오산시는 생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을 따라 오늘날의 랴오닝(辽宁)성 차오양(朝阳)현에 해당하는 동북의 산줘타(三座塔)까지 가서 토지를 임대하여 채소와 콩을 경작하였다. 이후 현지인들과 동업하여 생산한 콩으로 두부를 만들어 판매하고, 또한 두부를 만들고 남은 콩 찌꺼기로 돼지를 사육하였다. 몇 년을 이렇게 노력함에 따라 사업이 점차 번성하였으며, 현지동업자의 제안에 따라 각자의 사업을 분리하여 서로 독립하였다. 차오산시는 이후 두부 생산과 양돈을 넘어 고량주를 판매하고 잡화점을 개업하였는데, 사업이 나날이 번창하여 나중에는 이전 동업자의 사업을 합병하기에 이르렀다.

 

산줘타 지방의 경제가 번영하고 인구가 증가하자 청() 정부는 차오양()현을 설립하였다. 차오 일가가 이미 그 전에 여러 점포들을 개점하여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지역 사람들은 “차오 일가의 집이 먼저 있었고 나중에 차오양현이 생겼다”고들 말한다. 그 이후 차오산시는 치펑(赤峰), 링위안(凌源), 지안창(建昌) 등에도 점포를 개설하고 잡화업, 전당업, 고량주 제조업 등에까지 경영범위를 확장하였다. 차오 일가는 이후 다시 션양(沈阳), 스핑(四平), 진저우(锦州) 등지에도 점포를 설립하면서, 산하이관(山海) 이북 지역의 대표적인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청의 군대가 산하이관에 주둔하게 되면서 차오산시의 사업은 산하이관 일대에까지 확장되었다. 그는 먼저 원적지인 타이구에, 그리고 이후 점차 화북과 서북 지방의 주요 도시에도 표호()를 설립하였다. 차오산시는 부를 축적한 후 가산을 일곱 명의 아들들에게 분배하였는데, 그의 아들들은 상업적으로는 여전히 합자경영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일곱 아들들은 각각 10만 냥씩을 출자하여 총관리처를 설립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를 “차오치허(曹七合)”라 일컬었다. 후에 이 중 하나가 다른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집을 떠남에 따라, 차오치허(曹七合)는 “류더공(六德公)”으로 바뀌었다. 여섯 집안은 각각 별도의 당명(堂名)으로 불렸는데, 화이이탕(怀义), 성이탕(馨宜堂), 류칭탕(), 산두어탕(三多堂), 우궤이탕(五桂堂) 이외에 이름이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 또 다른 당() 하나가 그것이다. 또한 이들의 대원은 “福,” “,” “寿,” “禧” 자형으로 지어진 스줘다위안(四座大院)의 대표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 중 다행스럽게도 “寿”자 형의 건축물은 여전히 보존되고 있는데, 이것은 차오 가문 중의 일개 지파의 당명이며, 관습적으로 많은 복과, 많은 수명, 그리고 많은 남자자손을 가리키는 산두어탕(三多堂)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건축물은 우아하게 높이 솟아있으며, 중후하면서도 수수하고 예스러운 특색을 지녀 여러 택원(宅院)들 중에서도 으뜸으로 간주된다. 이 택원은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있고 남과 북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동서 양쪽으로는 각각 세 개의 대청마루가 길게 늘어져 17미터 높이의 3층 건물 세 개를 연결해주고 있다. 이 택원 안에는 모두 15개의 작은 건물이 있으며 현재 남아있는 방만 해도 모두 277칸이나 된다

 

각 당의 합자경영에 의한 상업은 청 선종(宣宗)와 문종(文宗) 연간에 가장 번성하였다. 당시 차오 가문의 점포는 지난(), 쉬저우(徐州), 란저우(), 타이위안(太原), 톈진(天津), 베이징(北京), 션양(), 진저우(), 스핑(四平), 장지아커우(家口), 리청(黎城), 툰리우(屯留), 타이구(太谷), 장즈(), 위츠() 등 전국 각지에 편재해 있었으며, 신강성과 모스크바, 이르쿠츠크 등 그들의 점포가 없는 곳이 없었다. 그 경영 범위 또한 넓어서, 주단, 각종 포목, 모직물, 안료, 약재, 모피, 잡화, 양화, , 장좡(), 전당, 전포, 금융 등 매우 넓은 범위에 걸쳐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차오 가문의 점포는 약 640여 개 건물에 백은() 1200만 냥의 자산을 지녔으며 37천명을 고용했을 정도로 그 경영 규모가 방대하여, “무릇 참새가 날아간 적이 있는 지방에는 모두 차오 가문의 점포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후 이들은 해외에도 발길을 뻗쳐 동으로는 일본, 북으로는 모스크바, 서로는 파리와 런던 등에까지 중국산 차와 포목을 수출하고 일본의 강철과 고려의 인삼, 러시아의 금속제품 등을 수입하였다.

 

차오 가문은 합자와 공동관리 방식으로 상업을 경영했으며, 가정 경제는 원칙적으로 각기 자립적이었다. 이 가문 중에서도 산두어탕(三多堂)이 가장 번성하였는데, 차오페이이(曹培) 대에는 가산 규모가 약 300만 냥, 임금 지급액이 연 3천 냥 이상에 달했으며, 차오종메이(曹中美) 대에는 가산이 600만 냥, 연 임금 지급액이 2만 냥이나 되었다. 차오 가문의 여러 점포들 중에서도 리진더(金德), 용통우(用通五), 차이샤웨이(彩霞蔚), 진타이헝(泰亨), 진셩웨이(生蔚), 산푸촨(三晋川) 37곳이 매우 유명하였으며, 그 중 리진더 장좡()의 자본 규모는 건륭(乾隆)과 도광(道光) 연간에 약 1백만 냥에 달했다.

 

2 _ 차오 가문의 고용과 경영상의 특징

 

차오 가문의 점포들은 처음에는 차오 성씨를 가진 동족들을 주로 고용하였으나, 점점 상업이 발전하면서 그 고용 범위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그 범위는 여전히 산시(山西)에 적()을 둔 사람들로 한정되었다. 이들의 고용 방식에는 두 가지 특성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큰 점포의 경영책임자()가 추천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존 직원을 높은 직위로 진급시키는 것이었다. 추천을 받는 사람은 반드시 그 직위에 상응하는 업무 경험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진급하는 사람 역시 일정한 업무 실적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차오 가문의 점포들은 또한 까오졔천(高介臣) 양지푸(杨剂) 등과 같이 문장에 능하고 글을 잘 쓰는 우수한 인재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몇 가지 중요한 고용 규칙이 있었다. 예를 들면, 새로 고용된 경영책임자나 직원에게는 3년 동안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식사만을 해결해주곤 했는데, 이는 일종의 실습 기간에 해당하는 것이다. 3년 후, 실습 기간 중에 업무 성과가 좋지 못한 자나 내부 규범을 어긴 자, 경영책임자가 “어떻게 길러 볼 방법이 없는” 자 등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음력 정월 보름 이전에 사퇴를 통지하였다. 만약 계속해서 임용하고자 할 경우에는, 그 지위 고하와 책임의 중대함 정도에 따라 차별적인 임금을 지불하였다. 경영책임자의 임금은 보통 일년에 백은() 100-120냥 정도이며, 10년 후에는 업무 실적에 따라 (주식의 형태로) 점포에 대한 권리를 일정 부분 분배해주었기 때문에 맨몸으로 사업에 참여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했다. 각 점포들은 제1경영책임자, 2책임자, 3책임자 이외에도 관장(), 줘구이(), 란구이터우(栏柜头), 파오와이런(外人) 등을 고용하였다.

 

차오 가문의 점포에는 모든 직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매우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예를 들어, 어떤 직원이든지 아편이나 도박, 기방출입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고객을 접대하는 일도 지정된 전문 접대 책임자가 (보통은 제2 또는 제3책임자) 담당해야 하며, 접대 시에는 일체 거래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식사 후 적당한 기회를 살펴서 물품을 보여주거나 가격을 협상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책임자와 직원은 평일 점포 안에서 반드시 홑두루마기를 입었으며, 외출 시나 고객과 사업에 관하여 상담을 하는 경우에는 마고자를 입어 공경을 표시했다. 직원은 줘구이()와 잔구이()로 나뉜다. 잔구이는 갓 상점에 들어온 견습생을 말하며 흔히 7-8년이 지난 후에야 줘구이로 진급하였다. 또한 이미 줘구이가 된 자가 책임자를 보게 되면 반드시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점포에서 거주하는 직원은 평일에는 절대로 주머니가 달린 옷을 입어서는 안 되었다. 청대에는 동전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각각의 직원은 모두 작은 동전 꾸러미 주머니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머니를 이름 순서에 따라 방 안에 걸어 두어야 했으며, 머리를 깎거나 목욕을 하는 경우 등에 한해서만 그 돈을 꺼내 쓸 수 있었다. 휴일이 되어 집에 가는 것이 허락될 경우, 반드시 집에 가지고 갈 보자기를 잘 싸서 계산대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검사를 받을 용의가 있고 그 안에 가져가서는 안 될 물건이 없다는 점을 표시해야 했다. 또한 평일 날 점포 안에서 식사를 할 때 각 직원은 모두 임금을 높게 받는 사람부터 순서대로 앉아서 지위 서열이 문란해지지 않도록 하였다.

 

차오 가문은 또한 현명한 인재를 고용하는 것을 매우 중시하였는데, 일단 고용하면 절대적으로 신뢰하여 상당한 권한을 부여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션양의 푸셩쥔(富生峻) 전장()를 개업하면서 어떤 경영책임자를 초빙했다고 한다. 뜻밖에도 그 책임자는 채 몇 년도 지나지 않아 투자자(财东)가 출자한 돈을 모두 날려버렸다. 그러나 차오 가문의 투자자는 손실의 이유에 대한 그 책임자의 진술을 듣고 난 후, 그를 질책하기는커녕 오히려 계속 일할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 책임자는 나름대로의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계속 일하겠다고 답했다. 차오 일가로부터 다시 자본을 투자 받은 그는 션양으로 돌아가 사업을 지속했다. 내리 세 번을 이렇게 한 후, 그 책임자는 대량의 이윤을 획득하여 이전 두 번의 실패 과정에서 손해 본 금액은 물론 커다란 이윤을 차오 가문에 안겨주고, 푸셩취안(富盛泉), 푸셩청(富盛成), 푸셩장(富盛), 푸셩이(富盛)에 네 개의 분점을 설립하였다. 차오 가문은 이렇게 인재와 실력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그들 점포에는 유능한 인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외에도, 직원들에게 (주식의 형태로) 사업의 지분을 분배하는 규정으로 인해 전체 직원들의 적극성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차오 가의 점포들은 만 10년을 일한 자에게는 업적에 따라 일정량의 지분을 분배하였다. 직원들이 지분을 분배 받게 되면 상점 내에서의 지위는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져서 책임자와 함께 점포의 업무에 대해 의논할 수도 있었다이러한 유인제도 때문에 직원들은 보다 더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했다. 차오 가의 점포 책임자들 상당수는 직원에서 출발하여 승진한 사람들이었다.

 

각지 상점에 대한 차오 가의 관리는 그 당시의 다른 상점들과 비교하여 볼 때 뚜렷한 두 가지 특징이 있다:

(1) 장좡()을 통해 각 점포를 통솔하고 관련 조문을 바탕으로 혼란스럽지 않고 간단명료하게 관리하였는데, 이는 근대의 자회사-모회사와 유사한 성질의 것이다. 예를 들어, 리진더(金德)가 각 점포의 장좡()이라면 전문적으로 출자하여 분점을 설립하고, 위탁경영자로 하여금 타이위안(太原), 루안(潞安) 및 강남의 각 점포들을 관리하며 연말에 각 점포들의 사업 내용을 보고 받아 이를 다시 경영책임자에게 전달하는 형식이다.

(2) 일종의 흠차()와 같은 대표부를 설치하여 각지 점포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외지에 주재하는 대표부는 일반적으로 상급 점포에서 제2 또는 제3의 경영책임자를 선발하여 파견한다. 그들은 단지 개인적인 의견을 제안할 뿐 어떤 완고한 결정을 내리지는 않는다. 만일 대표부 점포의 책임경영자가 재물을 탐하거나 부정적인 행위 또는 기타 사업 발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위를 하게 되면 그들의 권한은 박탈된다

 

3 _ 차오 가문의 교육관

 

차오산시(曹三喜)는 원래 문맹으로 전혀 글자를 읽지 못했다. 차오 가의 가업이 발흥한 이후, 그는 아들들의 교육을 중시하였다. 차오 가에는 일종의 가정학교인 슈방위안(房院)이 없었다. 그러나 유명한 선생을 초빙하여 글을 가르치게 하고 매년 보수가 백 냥 이상이 될 정도로 후하게 대우했다. 돈으로 관직을 샀던 것 이외에도, 청대 말엽에 차오 가의 일부 후손들이 향시(乡试)에 급제하여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차오페이더(曹培德; 字는 )는 총명하고 유능하여 즈리(直隶)의 부지사를 역임하였다. 육법(六法)에 능하고 율시를 좋아했으며 작시에도 소질이 있어 『木石庵合刻』, 『木石庵文, 『木石庵随笔, 『傅文先生年』를 저술하였다. 또한 그는 경제 방면에도 재능이 풍부하여, 학업을 버리고 상업의 길로 들어섰는데, 차오 가의 점포들 중, 锦丰, , 锦丰焕, 锦丰, , , 泉和, 泉涌, 元懋, 隆德, 泰亨 등과 같이 “”자가 들어가는 점포는 대부분 차오페이더가 설립한 것이다.

 

차오종위(曹中裕)는 산시(山西) 순푸()였던 후핀(胡聘)과 동년배로 광서() 연간에 바오진공스(保晋公司)의 책임경영자를 역임했다. 차오커랑(曹克)은 쥐런()출신으로, 글과 그림을 좋아하고 수많은 유명 시인과 화가들의 시화를 소장하였는데, 그 가치가 대략 일백수십만 위안에 달한다. 1937년 일본군이 산시성에 침입했을 때 그 중 일부가 일본군에 의해 강탈당했다. 또한 나머지 대부분은 마약에 중독된 차오 가문의 어떤 후손이 몰래 팔아 버려 차오커랑이 수집했던 귀중한 서화는 전부 소실되었다.

 

4 _ 차오 가문 상업의 쇠락

 

차오 가문은 전통적인 자본경영방식으로 상업을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사회 발전과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따라, 차오 가의 사업은 청대 말엽부터 쇠락하기 시작했다. 신해혁명 이후, 백은()이 은원()으로, 그리고 다시 지폐로 바뀜에 따라 차오 가문 점포들의 자본과 채무 역시 수차례 다른 화폐로 환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약 은() 수십만 냥에 해당하는 금전적 손실이 발생했다. 1919년 차오 가문이 모스크바, 캬흐타, 이르쿠츠크, 울란바토르에 있던 상점들은 은 80여만 냥에 달하는 부채를 떠안게 되었다. 제정러시아 시대의 지폐 각 한 장당 은 한 냥씩을 저당 잡힌 상태에서 러시아 10월 혁명이 발생하자 지폐 가치가 백은 반 냥으로 줄어들어, 이 항목 하나만으로도 차오 가문은 은 37만 냥의 손실을 보게 되었다. 차오 가의 상업은 주로 동북 지역의 큰 도시에 집중되었는데, 북양군벌 시기 장쭤린(作霖)의 봉계(奉系)군벌은 대량으로 봉표(奉票)라는 채권을 발행하였다. 1922년 제1차 직봉(直奉)전쟁에서 봉계군벌이 패하자 봉표가 무용지물이 되고, 이에 따라 차오 가의 상점들은 다시 일백 수십만 원()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다. 1931 9-18사변 직후 일본군이 동북 3성에 침입하여 후에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군의 식민지경제 통제법에 따라 차오 일가는 랴오닝에 있던 5개의 은호(银号)를 합병하여 위청(玉城)은호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모두가 머지않아 모두 만주국 정부의 소유로 전환되었고 동북 지역에 있던 차오 가문의 모든 상점 역시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동북 지역은 원래 차오 가문의 발흥지였는데, 이 동북의 점포들이 무너짐에 따라 산해관 이남의 점포들 또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각각의 점포가 문을 닫기 전, 각 점포의 경영책임자()들은 혼란을 틈타 돈을 빼돌려 개인의 주머니를 채웠다. 또한 차오 가문의 후손들 상당수가 아편에 빠져있었던 데다 그다지 특출할 것 없이 범속하였기 때문에, 차오 가문은 결국 도산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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