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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13 /2011.09] 기획 _ 전통 중국의 상인 (8) 晉商 介休冀家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09 조회수 42

[Vol.13 /2011.09] 기획 _ 전통 중국의 상인 (8)    晉商 介休冀家

옌훙중(燕紅忠)ㆍ류청후(劉成虎) _ 중국 산시대학 진상학연구소 씀

손승희 _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 옮김

 

졔슈(介休)는 춘추전국시대 진국(晋國) 현신(賢臣) 졔즈(介子)가 현내 진산(錦山)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졔슈시 北辛武鄕 北辛武村은 졔슈성 동북 18km에 위치하고 있고 핑야오(平遙)와는 13km 떨어져 있다. 현재 거주민은 약 7000명으로 졔슈에서 제일 큰 촌()이다. 이 촌락에 진상(晋商) 부호 지()씨의 고거가 위치하고 있다. 문루(門樓), 정루(正樓)와 양옆의 측루(側樓)가 아직 남아 있는데, 비록 잡초가 무성하고 문창(門窓)은 낡아 빠졌지만 오래된 정원과 건물의 돌, 나무, 벽돌 등에 조각되어 있는 예술적인 면모는 당년의 호화로움을 어렴풋하게나마 엿볼 수 있다. 촌 가운데 곳곳이 끊어져 무너진 담벼락이나 풍파의 세월을 견딘 낡은 정원과 가옥도 백 년 전 지()씨 가문의 영광스럽고 눈부신 찬란한 기세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지씨 가족의 원적(原籍)은 진현(晋縣)에 면해 있고, 그 원조(遠祖)가 송대(宋代)에 졔슈시 오성점촌(城店村)에 이주했다. 가족 상업은 대략 명() 정덕년간(正德年間: 1506-1521)에 시작하였으니, 산서 부호 중 상업을 비교적 일찍 시작한 가족 중의 하나이다. 지가(冀家)의 상업은 명청(明淸) 양대의 경제 번영에 따라 왕성해졌고 청 건륭시대에 이르러서는 전당업(典當業)과 포목잡화업(綢布雜貨業)이 신속하게 발전했다. 가장 찬란했던 도광년간(道光年間: 1821-1850)에 지씨 가문은 전국 각지에 지점을 100개 이상 설립했고 자산은 약 300량 백은(白銀)에 달하여 당시 명성 있는 대자본주(大財東)가 되었다.

 

지씨 가족은 동치(同治) 초년 표호(票號)를 열고 삼진표호(三晋票號) 거장의 반열에 올랐으며 졔슈에서 베이구 허우씨(北賈侯氏) 다음의 제2의 부호(富豪) 가문이 되었다.

 

1 _ 원말(元末)에 좋은 곳으로 이주하여 명대(明代)에 상업을 섭렵하다.

 

졔슈 지씨 가족의 시조는 지종(冀宗)으로, 처음에는 졔슈현성 동북 15km의 오성점촌(城店村)에 정주하였는데 후에 지파가 번영하여 7() ‘희()’자 세대의 형제 세 명이 원대 말년쯤 서쪽으로 이주하여 신무촌에 이르렀다. 명대 중기, 9() 지여우(冀佑)에게 지중(冀忠), 지카이(冀愷) 두 아들이 있었다. 정덕년간(正德年間) 10() 지중이 장사를 시작했는데 잡화를 위주로 경영했다. 그 후 약 200년간 정권이 바뀌었지만 지중 집안의 상업은 11() 지원린(冀文林), 12() 지량샹(冀良享), 13() 지광허우(冀光厚), 14() 지저우성(冀州升) 4대 수중에 있었고 착실하게 발전하여 명말 청초의 전란 중에서도 건재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15() 지즈위(冀之瑜)는 자()가 종옥(鐘玉), ()는 탁옹(琢翁)인데 옹정 6년에 태어났다. 그는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계획이 있었다. 또한 정과 의리를 중시했으며 사람들에게 솔직하고 성실했다. 지즈위가 가족을 통솔하게 되었을 때는 마침 건륭시대로 천하가 태평하고 상품경제가 발달했다. 지가의 가족상업도 湖北 漢水 일대에서 번창했고 그 후에 각지로 확장되었다. 졔슈, 핑야오(平遙), 치시엔(祁縣), 타이위안(太原) 등 山西省 일부 지방에서 상점을 개설한 것 말고도 점차 베이징(北京), 티엔진(天津), 상하이(上海), 허난(河南), 산둥(山東), 심지어는 멀리 스촨(四川), 윈난(云南) 등지까지 확장했다. 경영범위도 점차 비단 포필(布疋), () 관련 상품, 남북 상품의 유통 등으로 확대되어 진상 중 실력이 출중한 일가가 되었다. 또한 지가의 전당포(當鋪)와 전장(錢庄)은 전국 상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지씨 17() 지궈딩(冀國定) 시기에 지가의 상업은 이미 상당히 훌륭했다.『청패류초(淸稗類)』에 제슈 지씨의 자산이 30만 량이었다고 쓰여 있다. 도광(道光) 초 지씨는 湖北 樊城, 襄陽 등지에 점포가 70여 개였는데 주로 전당포가 많았고 그 다음은 기름가게(油房), 잡화점(雜貨鋪)이었다. 그 중 자본 10만 량 이상의 상호는 鐘盛, 增盛, 世盛, 恒盛, 永盛 當鋪와 平遙 謙盛亨布庄이었다. 당시 지씨 집안은 자산이 만 은량(銀兩)에 달했다. 그러나 지씨 집안은 부유해진 후에도 부()를 드러내지 않았는데, 지궈딩(冀國定)은 그 부를 감추고 대련(對聯)에 다음과 같이 썼다. “처세에 재주가 없어 오직 우직함을 지키며, 땅이 있어 의탁하나 풍요로움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2 _ 여장부가 집안을 관장하고 내외를 능통하게 다스리다.

 

지궈딩은 지씨 집안 독자인데 궈딩이 40세가 넘도록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계속해서 4() 마잉셴(馬瑛仙)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후대 사람들이 마타이부인(馬太夫人)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이공(以公) 등 다섯 아들을 낳았다. 궈딩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제일 큰 아들이 17세였고 막내가 겨우 네 살이어서 모두 지씨 집안을 일으켜야 하는 막중함을 감당하기에 부족했다. 그러므로 지가를 관리하는 중임이 4방 부인 마씨에게 주어졌다.

 

지가의 상업의 반은 荊楚에 있고 京師, 山西 등지에 있어 지궈딩이 왔다 갔다 하면서 보살폈고 집안일은 전부 마씨에게 맡겨졌다. 지궈딩은 스스로 생활이 매우 검약했고, 하루 두 끼 먹는 식사는 언제나 변변치 않은 조촐한 음식이었다. 마씨도 생활은 검소하고 소박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족인(族人), 친척 혹은 향리에 헐벗고 굶주린 자가 있으면 몇 집이 되었든 마씨는 그들 모두에게 의복과 양식을 보내주었다.

 

지궈딩의 다섯 아들은 마씨의 친생자도 있었고 측실 소생도 있었다. 그녀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했다. 아들들은 높은 벼슬에 녹봉도 많이 받았지만 마씨의 엄격한 가정교육으로 마을에서 부유한 생활을 과시하지 않았다.

 

지궈딩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내외의 일들은 모두 마씨 부인이 처리했다. 남북 무역상업 수십 곳의 字號는 마씨 부인이 남북의 상무를 대조하여 남북방 字號를 등기하고 立規를 등록하여 엄격하게 관리했다. 그녀는 신중하고 꼼꼼하며 통찰력이 있었다. 상점의 점원이 보고한 장부에 조금이라도 착오나 누락이 있을 때 그녀가 한번 보면 발견되었다. 지가에서 아래로는 (점원)에서부터 위로는 掌櫃(지배인)에 이르기까지 마타이부인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하고 심복했다. 그들은 商務나 家務를 관장하는 그녀의 조리 정연한 재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청나라 사람 쉬지위(徐繼)는『冀母馬太夫人七十壽』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정공(贈公: 즉 지궈딩)이 죽었지만 마타이부인은 아들들에게 일을 넘겨주지 않고 내외의 모든 일을 직접 경영했다. 남북무역 상업 字號가 수십 곳이었고 점원이 올린 장부가 허술하고 누락되어도 즉시 지적해 내니 말이 막힐 정도로 놀라고 두려워했다. 집안에 앉아서도 고삐와 재갈을 손에 쥐고 있었을 정도로 세심하게 총괄하니 정공이 있을 때에 못지않았다. 또 점원을 대하기를 후하게 했기 때문에 모두 기꺼이 진력을 다했다........

 

함풍(咸豊) 초년, 태평군(太平軍)이 군을 이끌고 북상하자 湖南, 湖北은 동란에 빠졌는데 지가 상호도 10여 곳이 파괴되었고 가산의 반이 손실을 입었다. 마타이부인은 신속하게 자금을 북방으로 옮겼고 은 5, 60만 량을 회수하여 天津에 文盛, 廣盛, 星盛, 益盛의 4대 당포를 신설했다. 동시에 각 상호에 자본을 기부하여 손해를 도와주도록 호소했다. 산서상인의 기부는 여섯, 일곱 차례 계속되었는데 모두 합해서 수십만 량이었다.

 

마타이부인은 집권 근 20년 동안 지가의 풍부한 자산, 많은 상호, 그녀의 총명한 능력에 힘입어 상업계에서 혁혁한 명성을 얻은 위세 당당한 인물이 되었다. 듣건대 핑야오현에서 입찰을 할 때 만일 마타이부인이 도착하지 않으면 입찰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녀가 포기할지 수용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니 그 경영 재간을 여기서 알 수 있다.

 

대략 함풍 6, 7년간 마타이부인은 다섯 아들을 분가시켜 각각의 문호(門戶)를 세우도록 했다. 이때부터 지가는 “五信堂”이라 불렸다. 지씨가 경영하던 상업은 平遙 謙盛亨布庄(나중에 票號로 고침)을 五堂 공유로 하고 그 나머지는 각 門에게 균분했는데 그들은 분가한 후 또 자신의 상호를 신설했다. 각 아들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以公(悅信堂): 增盛, 廣盛當鋪의 가산을 분할 받고, 후에 直隸 大名府에 當鋪, 顔料庄 여러 점포를 개설하고, 졔슈 張蘭鎭에 悅盛昌, 悅來號錢庄을 설치했다. 湖北에서 당포를 통해 돈을 빌려주고 토지 일부를 겸병했다.

 

以兼(篤信堂): 鐘盛, 益盛當鋪의 가산을 분할 받고, 후에 졔슈 장란진에 또 謙盛晋錢庄과 平遙縣寶興成 綢緞庄(포목점)을 설치했다.

 

以中(立信堂): 恒盛, 文盛當鋪의 가산을 분할 받고, 후에 졔슈 장란진에 恒盛茂 상호를 설치했다.

 

以和(敦信堂): 永盛, 星盛當鋪의 가산을 분할 받고, 후에 湖北 樊城에 鼎順, 永順 두 당포를 개설했다. 북경에 仁盛當鋪를 개설하고 庫倫(울란바토르)에 喇廟와 張家口 등지에 恒順發 등 皮毛商號를 개설했다. 또 졔슈 萬戶堡의 토지 2頃 남짓과 洪山의 논 1경 남짓을 구입했다.

 

以正(有容堂): 마타이부인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世盛當鋪만을 가산분할 받고 現銀 10만 량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 후에 祁縣에 天聚和茶庄을 개설했다. 이정은 秀才였는데 들리는 바에 의하면, 과거시험자의 편의를 위하여 핑야오에 其德昌 票號를 설치하고(포목점 영업도 겸했음) 太原에 其昌水 포목점을 설치했으며 진쓰(晋祠)에 其世昌, 其昌泰 잡화점을 설치하여 상호를 “四杆旗()”라 했다고 한다. 진쓰에 논 4경을 구입했다.

 

그들의 分家는 지가의 상업발전을 촉진시켰다. 다섯 형제가 모두 독립적인 상호를 소유하고 있었고 새로 개설된 상호 역시 지가의 상업을 눈부시게 발전시켰다.

 

3 _ 표호 경영이 흥했다가 쇠퇴하다.

 

지이허(冀以和: 1831-1900)는 자가 達堂이고 호는 藹一이다. 마타이부인의 넷째 아들로 제18대 主東이다. 그는 지가 상업자본의 발전을 가장 흥성한 시기로 발전시켰지만 또한 쇠망을 맞이했던 중요 인물 중의 하나이다.

 

가산은 그 모친 마씨가 관장하다가 함풍 초년에 가서야 아들들을 분가시켰다. 그러나 핑야오현에 설립된 乾盛亨布庄, 介休 張蘭鎭의 乾盛晋錢庄, 祁縣城의 天全茶庄 및 전국 각지에 개설한 그 分庄은 분할하지 않고 형제가 동업 경영하게 했다. 당시 지이허는 나이 겨우 20세였지만 가장 총명하고 능력 있으며 사람들과의 교제에 능하고 재정관리 기술이 다른 형제보다 우월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씨 공동 상업경영의 主東이 되었고 그의 주재 하에 몇 년이 되지 않아 상업자본에 다시 새로운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는 당시 이미 성행하고 있던 산서표호의 이윤이 상당히 많은 것은 보고 표호영업을 도모하는 것이 유리하겠다고 생각하여 同治 3(1864) 乾盛亨布庄을 표호로 바꾸었다. 그는 환어음과 저축, 대부 업무를 전문으로 했고 總號를 핑야오현성 내에 두고 北京, 天津, 漢口, 上海, 西安, 昆明 등 대도시와 四川, 河南, 山東, 湖南 등지에 分庄을 설치했다. 조직과 무역, 금융활동의 지휘를 편리하게 하기 위해 그 자신은 북경 분장에 상주하고 북경에 공관(公館)을 설치했으며, 경성과 각지의 거상(巨商), 청정부의 일부 관료와 교류함으로써 표호 발전의 지주로 삼았다. 그러므로 상당히 단시간 내에 전장 표호의 환어음, 저축, 대부 업무가 크게 일어났고 다른 상업 무역도 이에 따라 발전할 수 있었다. 그의 명성을 고양시키고 상업 금융활동을 더욱 확대시키기 위해 그는 대관료들과의 사교를 통해 일부 은량을 관가에 기부하여 軍功議敍府參將, 軍功議敍知府一品이 되었고, 榮祿大夫賞戴花翎候選道臺에 봉해졌다. 이 관직은 비록 실직은 아니었지만 이에 힘입어 그의 활동역량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었고 거액의 이윤으로 많은 자본을 모으기에 더 유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동치 말년 광서 전기, 지가의 상업자본은 더욱 발전하여 극성시기에 이르렀다. 특히 전장표호 업무는 “匯通天下(송금으로 천하와 통한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외국 자본주의의 침략이 점점 심해짐에 따라 청 정부는 점차 부패몰락의 길을 걷었고 중국 민족 자본주의 상업도 여러 가지 위기에 직면했다. 광서 8, 9년간(1882-1883) 乾盛亨票號가 우선 공안(公案)의 영향을 받아 거의 도산에 이르게 되었다. 이 공안은 태상사(太常寺) 관리 주루이칭(周瑞淸)이 운남의 결산을 독점하고 운남 몇몇 관리와 결탁하여 공금을 횡령하고 돈을 경성으로 송금하여 찾아 썼던 사건이다. 乾盛亨票號 운남과 북경 분장은 마침 이 자금이 지나간 분점이었기 때문에 그 명예에 큰 손실을 입었다. 게다가 당시 기타 표호도 비슷한 안건이 발생했다. 이에 지이허는 전망이 매우 위태롭다는 것을 예감하고 광서 11, 12년간(1885-1886)에 표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금과 대출이 여러 官僚大戶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저축은 찾아갔지만 대출은 회수할 수 없었다. 따라서 결국 대부해준 돈을 핑야오 총호 장부에 올리기로 결정했고 외부에서 빌린 돈 20여 만 량의 은도 모두 핑야오 총호에서 인출하도록 했다. 그러나 총호는 그렇게 많은 돈을 지불할 수가 없었고 일순간 지불 청구가 쇄도하여 지가는 집안의 경제 기반을 모두 사용하여 채무를 상환해야 했다.

 

이번 파란곡절 후에도 각지에서 계속해서 경영을 했지만 그 영업은 이전 같지 않았다. 게다가 지이허 본인도 노년에 접어들었고 젊은 시절의 패기는 이미 줄어들었다. 정력도 점차 家鄕의 주택건설 방면으로 옮겨갔고 상무금융활동은 각 상호 경리가 경영하고 본인은 점차 관심을 덜 가지게 되었다. 가향의 주택과 정원을 낙성한 후에 그는 새로운 거주지에 살게 되었고 안락을 누렸다. 광서 26(1900) 3월 지이허의 나이 70세 연회 때, 그가 경영하던 전국 각지의 상호와 원근 대소의 관료들이 축하연에 왔다. 그 즐거움이 끝이 없었지만 이것은 이미 지가의 표면적인 번영과 몰락 전 잠시 ‘반짝’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흥성함이 다하면 슬픔이 오는 법, 생일 후 얼마 되지 않아 지이허가 병으로 눕게 되었고 병은 점점 깊어져 6 2일 세상을 떠났다.

 

광서 26(1900) 庚子事變(, 의화단운동-역자) , 어떤 상호는 완전히 불타버렸고 어떤 것은 강탈당해 남은 것이 없으니 失落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결국은 저축양이 많은 사람들의 핍박으로 지씨 집안은 가산을 쏟아 부어 채무를 상환했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지이허는 늙어서 귀향한 후 선한 일을 많이 베풀었고 지방 건설방면에도 공적이 있었다. 자신의 집 화원에 사숙을 열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름을 ‘登瀛文社’라고 하여 수재들을 모아 무료로 입학시키고 인재들을 배양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바 있다. 北辛武村에 있는 7개의 묘우(廟宇)도 보수했다. 가장 특출한 것은 진무묘(眞武廟)를 보수할 때 뜰 안 축대 위에 유리패방을 새로 세웠는데 기세가 웅장하고 채색이 화려하며 공예가 정교하다는 것이다. 당시 졔슈의 특산인 유리를 모아 녹여서 예술품으로 만든 것으로 지금까지 삼진의 희귀한 문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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