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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12 /2011.08] 논단 _ 청말 한중 외교문서 왕래의 형식과 경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09 조회수 64

[Vol.12 /2011.08] 논단 _ 청말 한중 외교문서 왕래의 형식과 경로

김희신 _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

 

한중 양국이 각국과 근대적인 국제관계를 맺으면서 한중관계상에서 외교 문서 왕래의 격식도 바뀌었다. 기본적으로 외교문서의 양식은 照會와 信函으로 대별된다. 照會가 격식을 갖춘 공적 문서라면 信函은 약식 문서이다. 이러한 외교문서의 왕래 격식과 관련하여 照會와 信函 구별을 두고 초기 조선에 주재했던 外國 公館과 朝鮮 外衙門간에 논쟁이 발생하였다. 외국의 領事가 照會라는 문서 형식을 사용할 수 있는지를 둘러싸고 外衙門과 영국 公館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 조선 측의 기준은 교섭권의 유무에 있으며, 조회는 교섭권을 갖는 공사급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공사가 주재하지 않고 한성에 총영사관을 설치하여 이를 통해 외교업무를 대행하는 경우 총영사와는 照會할 수 없다는 인식이다. 다만 총영사는 外衙門이 아닌 지방관과의 문서왕래에는 照會 형식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처럼 조선이 중국뿐만 아니라 각국 상주사절의 한성 주재를 허용한 이후 각국 간에 여러 가지 의례상의 갈등을 겪게 되는데 이는 각국 외교관의 권한 범위와 관련되어 있다. 특히 이러한 의례상의 갈등에서 청이 속방체제를 명분으로 내세운 中國 商務委員의 위상과 대우 문제가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중국은 최초의 駐韓使官이었던 진수당의 직함이 ‘총판상무위원’이지만, 조선이 중국의 屬邦이므로 진수당의 위상은 다른 국가의 외교사절의 의례와는 차이가 있으며 조선관원보다도 높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더 나아가 황제의 승인을 받아 북양대신이 파견한 진수당은 각국 총영사와 직위가 같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별다른 문제제기가 없는 듯했지만 조선의 중국 관원에 대한 특별대우가 계속되자 결국 미국에서 재차 문제를 제기하였다.

 

진수당의 후임으로 파견된 원세개의 위상과 관련하여 駐中 미국공사 덴비(田貝, Charles Denby)는 미국 外部의 지시에 따라 원세개가 어느 등급의 職任에 해당되는지 따지고 있다. 이에 대해 이홍장은 속방 체제에서 책봉이라는 전통적인 한중관계가 조선에 주재하는 중국 관원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조선에 주재하는 청의 사절은 속방의 本分에 속하는 사무를 처리하므로 서양의 상주사절과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二等, 三等 公使 등의 등급으로 구분하지는 못하지만 교섭권을 갖는 각국의 공사대신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上國의 체제와 屬邦의 명분이라는 의례가 있으므로 국왕을 알현하는 의례에서도 서양의 사절과 구별되어야 함을 분명하게 주장하였다. 조선과의 전통적인 종번 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원세개에는 근대외교 관례상 공사대신과 동등한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교섭권을 갖는 외교사절로서의 위상을 부여하고 있다.

 

실제 파견된 진수당이나 원세개의 직함은 영사급 사절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외아문과는 平行의 照會 양식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된다. 조약체제하에서 駐韓상주사절의 위상을 정한 규정이 있었지만 청일전쟁 이전 한중 외교문서 왕래의 격식은 이러한 기준과는 차이가 있었다. 앞서 언급한 중국과 조선이 전통적으로 屬邦 관계에 있다는 인식의 연속선상에 있으며 이는 <무역장정>내에 명문화되어 있다. <무역장정>에 의하면 총판상무위원은 북양대신의 지휘 하에 있으며 총판상무위원과 분판위원이 조선 관원과 공문으로 왕래할 때 그 정부의 統理衙門(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통칭 外衙門) 이하는 모두 평행의 照會를 사용하도록 규정했다. 이 규정에 근거해서 청일전쟁 이전 파견된 진수당과 원세개는 한성 및 각 개항장의 상무위원을 지휘, 감독하고 청정부를 대표하는 교섭권을 가지며 조선 측에 대해 평행기관이었던 외아문 督辦과 照會로 문서를 왕래하였다.

 

한편 한성에서의 상무 및 분쟁 등 업무는 진수당 시기 총판상무위원이 겸관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총판상무위원과 평행기관의 직책인 외아문 督辦 양자 간에 조회 왕래를 통해 교섭 처리되었다. 1885년 원세개가 총리교섭통상사의에 임명된 이후에 한성의 사무는 商務總署에서 분리되어 새롭게 설치된 한성상무위원 및 용산상무위원에게 차례로 이관되었다. 한성에서의 업무를 전담했던 龍山分署는 한성부와 평행기관이 되어 역시 照會에 의해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 용산상무위원이 한성부 외에 조선의 지방관과 직접적으로 교섭을 행하는 흔적은 없다. 필요한 경우에는 원세개(총리교섭통상사의)에 의뢰해서 외아문을 통해 해당 지방관과 연락을 취했다.

한성 이외에 인천, 부산, 원산 등 각 개항장에서 발생한 안건에 대해서는 문서 처리의 경로가 달라진다. 개항장에서는 商務分署의 상무위원이 해당 지역 監理署의 監理와 협조하여 양자 간에 처리하였고 역시 평행의 照會 문서 형식을 사용하였다. 필요한 경우 각 개항장의 상무위원이 商務總署에 품을 올려 조선 外署에 조회를 전달하여 처리하였다.

 

이상 각 기관(관원)간 문서왕래의 경로 및 형식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무역장정’ 체제하에서 외교문서의 경로 및 형식 >

 

(A:진수당, B: 원세개 시기)

 

 

청일전쟁의 결과 한중간 <무역장정>은 폐기되어 효력을 상실하였고 중일 간에 체결된 <마관조약>에 조선은 자주국임이 명기되었다. 주한사관의 파견, 지위, 업무 범위 등에도 변화가 있었다. <무역장정>이 폐기된 후 화상 보호 및 조선의 국내외 정세를 探報하기 위해 ‘總商董’의 신분으로 파견되었던 당소의의 직함은 얼마 후 ‘총영사’로 변경되었다. 중국의 직함에는 큰 변화가 있었지만 한중간에 여전히 정식 조약관계가 형성되기 이전이었다는 점에서 조선 관원과의 직접적인 교섭 처리 권한이 없었다. 관련 교섭 업무는 모두 駐韓영국총영사를 통해 처리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주한사관의 파견과 지위, 업무 범위 등은 <한청통상조약> 2관에 비로소 명확히 규정되었다. 양국은 각기 상대국의 수도에 公使를 파견, 주재토록 하고 각 개항장에 영사 등의 관원을 설립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공사, 영사 파견이 가능했으며 양국 모두 영사재판권을 향유할 수 있게 하였다. 한중 양국이 평등한 상주 외교사절의 파견 가능한 근거가 비로소 마련되었던 셈이다. 이를 근거로 해서 수도인 한성에는 公使가 파견되어 公使館이 설치되었고, 한성 및 각 개항장에는 漢城總領事館 및 各口領事館이 분설되어 각 지역에서 관련 업무를 전담하였다. 이 때 외교 교섭의 경로와 교섭은 공사관에서 외부대신과의 照會를 통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성에서의 상무관련 업무는 한성총영사와 한성부 判尹이 평행기관으로 역시 照會 형식을 통해 왕래하였다. 각 개항장에서 발생한 각종 업무는 각 지역의 正ᆞ副 영사가 해당 지역 감리서의 감리와 조회 형식을 통해 처리했다.

 

 

‘한청통상조약’ 체제하에서의 외교문서 경로 및 형식 >

(A:진수당, B: 원세개 시기)

 

 

한편 1905년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고, 일본 천황의 직속기구인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통감부의 일차적인 권한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위임받아 대리 행사하는 것으로 이후 모든 대한제국에 주재하는 각국과의 인명 교섭 등 중대한 사안을 모두 통감부가 대신하게 되었다. 駐韓公使館은 폐쇄되었지만 한중간에 <한청통상조약>은 여전히 유효하게 작용되었다. <한청통상조약>의 영사 파견 근거에 의거해서 각 개항장 領事署의 업무를 통제하기 위해 총영사를 파견하고 總領事署를 한성에 설립하는 것은 가능했다. 1906년 이후 대한제국에는 새로운 권력기구로 등장한 통감부가 점차 위상을 강화하면서 전면에 부상해 가던 반면 대한제국정부와 고종이라는 국가권력이 여전히 존재하던 시기였다. 이로써 한중간 일체의 외교 관계는 <한청통상조약>을 근거로 중국, 대한제국정부 및 통감부와의 사이에 처리되었다. 실제 한중 외교문제에 대한 교섭 및 한성 상무와 관련된 분쟁은 통상적으로 중국 주한총영사서의 總領事와 일본이사청의 理事官 사이에 조회와 신함을 통해 처리했다.(위의 그림 B를 참조) 일본이사청은 통감부의 정책을 충실히 이행하는 기구였으며 과거 일본영사관이 맡았던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한중간의 문제라 하더라도 駐韓使館이 한국 관원에게 照會를 보내 직접 교섭할 수 없었다. 한중간 분쟁이 발생한 경우 중국 측에서 조회를 받은 일본이사청(이사관)에서 한성부(府尹)에 이를 전하여 해결하고 다시 일본 이사청을 통해 중국 측에 전달했다. 한성 외의 각 개항장에서 발생한 문제는 각 개항장을 관할하는 중국 領事館署의 영사(또는 부영사)가 해당 지역의 관할 理事廳 支廳의 理事官과 조회를 통해 처리하되 사항이 중요하다면 총영사에게 申文을 올려 상황을 보고하고 일본총독부와 협의 처리해야 했다. 이전에 각 개항장에 설치된 商務分署의 상무위원과 감리서의 감리간에 조회를 통해 직접적으로 처리했던 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감리서는 1906 10월 폐지령에 의해 폐지되었다. 주한사관이 理事廳에 照會를 보내 韓官에게 처리를 요청하는 것이 <을사늑약> 체결 이후 한중간의 교섭 처리 경로였다. 이처럼 일본은 대한제국에서의 중일간 분쟁뿐만 아니라 한중간 분쟁 처리절차상에서도 직접적으로 개입하였다.


이 글은 『中國近現代史硏究』 50(2011)에 실린 필자의 논문 <근대 한중관계의 변화와 외교당안의 생성>의 일부를 요약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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