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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12 /2011.08] 기획 _ The story of SUN(孫)’s Family: 인천화교손덕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3)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09 조회수 103

[Vol.12 /2011.08] 기획 _ The story of SUN()’s Family: 인천화교 손덕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3)

구술: 손덕준 _ 인천 중화루 사장 

채록: 송승석 _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

 

연재를 시작하며

인천대학교 HK 중국관행연구사업단은 화교연구의 일환으로 화교구술채록을 진행하고 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인천화교의 대표적 인물 손덕준(孫德俊)과 그의 가족이다. 어느 일개인의 가족사가 화교 전체의 기억과 역사를 온전히 담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화교 개인의 인생 궤적을 꼼꼼히 되짚어보는 것은 삶의 구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본 연재에서는 구술채록의 일부를 발췌해서 싣도록 하겠다.

 

*. 본 연재는 기본적으로 구술기록의 일부를 발췌해서 싣되, 지나치게 문맥이 어색한 부분은 임의로 수정을 가했다.

*. 문중에 말줄임표()가 있는 부분은 공개하기에 적절치 않은 부분이나 반복되는 내용으로, 구술대상자와 상의 하에 생략한 부분이다. 또한 지면의 한계로 인해 기본 내용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채록자 임의로 생략한 부분도 있다.

*. (???) 부분은 성명이나 상호명으로, 구술자가 한자표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추후에 조사를 해서 보충하도록 하겠다.

 

송승석(이하 송): 이제 사장님 얘기 좀 해주세요. 1956년생이시죠?

 

손덕준(이하 손): 1956년 양력으로 1 29일 태어났어요. 음력으로는 잘 모르겠어요.

 

: 그때 위로 누님이 계셨는데 돌아가셨다고 하셨잖아요?

 

: 자세한 얘기는 모르고 대충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아마 위에 하나 죽었어요. 옛날에는 애가 태어나도 전염병으로 잘 죽었나 봐요. 그렇게 해서 죽고 내가 태어났는데 1956년 양력 1 29, 음력으로는 잘 모르겠어요. 생일은 정확할 거예요. 우리 노인네가 글자, 공부 좀 한 사람이라…. 태어난 데가 지금 차이나타운 청관 맞은편에 만다복(萬多福)이라고 중국집이 하나 있는데 바로 그 옆으로 뒤쪽인데…. 아마 제가 태어난 데가 바로 거길 거예요. 우리 부모님이 신혼 초에 몇 년 그곳에 사신 것 같아요.

 

: 그때는 아버님이 가게를 운영하셨어요?

 

: 아니요. 직장 다녔을 거예요, 요리사로. 인천, 지방 이렇게 두루두루…. 어릴 때 부분은 잘 모르지만 아마 인천 부근에 있는 직장 다녔을 거예요. 우리 아버님 연세가 나보다 몇 살 더 많더라? 우리 어머니가 35년생이니까 21살에 나를 낳으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보다 세 살 더 많으니까 아버지 24살에 나를 낳았다는 건데…. 하여튼 그렇게 태어난 거지요. 아버지는 그렇게 직장 생활 죽 하다가 나중에 자기 장사도 몇 번 했어요. 내가 알기로는 여기 화교협회 밑에 옛날 오래된 집 있잖아요? 거기서도 식당을 한 기억이 있는 것 같아. 젊었을 때 말이야.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쯤에. 거기서도 장사하시고…. 나중에 우리 아버님은 송월동 쪽에서 장사를 두 번 더 했어요. 송월반점이란 간판으로. 신포동 거기서도 식당을 한 적이 있고. 근데 내가 알기로는 크게 성공을 못했죠. 그때 당시는 이 건물(차이나타운 내 태화원 건물, 손덕준사장의 영업점이자 자택)이 사합원(四合院)이라고 해서 아주 옛날 건물이었어요. 안에 들어가면 중간엔 비어있고 2층집이에요. 내 기억으로는 여기 태화원 자리에 열여섯 가구가 살았어요. 그중 우리 외할머니가 2층에 창가 있는데 살았고.

 

: 사합원이란 게 원래 중국 전통가옥이잖아요? 내부 구조가 어떻게 생긴 거예요?

 

: 물론 용도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내가 그 건물 헐고 지금의 태화원 건물 지을 때, 그때 이미 백년 넘은 건물이었어요. 용도는 그때 잘 모르지만 노인네들한테 물어보니까 중국 사람들 무역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어요. 사장들 뭐 이렇게…. 방 하나하고 부엌 하나요. 지금 말하면 원룸식이었지. 임시로 거주할 수 있는 방 하나, 주방 하나. 그 대신 화장실은 1층에 하나, 2층에 하나 있었어요. 공동화장실이지. 수돗가는 사합원 안에 비어있는 공터…. 아까도 말했지만 사합원은 가운데가 텅 빈 마당이야. 마당인데 하늘이 다 보여요. 수도 하나, 하수도 하나 있고. 열여섯 집이 살았어요.

 

: 외할머니와 같이 사신 거네요?

 

: 아니지. 우리 아버님은 여기서 안 살고, 우리 외갓집이 여기서 살았지.

 

: 그럼, 사장님은 여기 외할머니 댁에서 자라셨나 보죠?

 

: 그때만 해도 우리 외할머니 치매 안 걸리셨을 때니까. 우리 집이 원래 애가 많잖아요? 그래서 할머니가 애들 키워준 거죠. 우리 엄마 혼자 다 못 키우니까. 그러니까 나도 여기 할머니한테 맡겨서 자란 거지. 어느 정도 크면 우리 엄마한테 가고. 나머지 어린 것들도 다 그렇게 컸지. 어렸을 때 외할머니 정 많이 들었죠. 외할머니가 우릴 도와주신 거죠.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장사를 해야 하니까. 송월동 장사할 때 배가 불룩해서 배달통 들고…우리 엄마가. 그렇게 몇 년 하다가 돈 좀 벌면 다시 큰 데로 옮기고… 또 장사 안 되고…. 그 얘기하면 길죠. 차근차근 얘기해야죠.

 

: 62년에 화교소학을 입학하셨어요?

 

: 내가 아마 일곱 살에 들어갔을 거야.

 

: 학교는 지금 있는 곳이죠? 그때 학생들이 많았어요?

 

: . 그때는 갑, 을 두 반이나 있었지.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한 반에 보통 50여명이 있었어요. 학생 많았어요.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있었어요. 아마 학생 수가 제일 많을 때는 1200명까지 있었다고 알고 있는데. 지금이야 한 4, 5백 명 정도 되나? 그때는 학교에 기숙사까지 있었으니까. 지방에 있는 학생, 집이 먼 학생들. 지방에서도 많이 왔어요. 주안(朱安)엔 분교까지 있었어요. 초등학교까지만 분교가 있었고. 초등학교 나오면 중학교는 다시 인천(차이나타운을 말함)으로 왔었고. 그때 학생 수가 상당히 많았어요.

 

: 그 당시 학생 수가 많았다는 건 화교들도 굉장히 많았다는 거잖아요?

 

: 많았죠. 지금보다 훨씬 많았죠.

 

: 60년도 초반에 말이죠?

 

: 그렇죠. 제일 많이 없어졌을 때는 내 개인적인 생각에 박정희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쌀이 모자라니까 한국정부에서 쌀 아끼기 운동 했잖아요? 보리쌀 섞어 먹어라….

 

: 혼분식장려운동 같은 게 있었죠.

 

: 중국집에도 쌀밥 못 파는 날을 정해 놓았었어요. 그거 걸리면 벌금 나오고 그랬어요. 쌀밥 못 팔게…. 일주일에 아마 세 번인가 몇 번, 쌀밥 못 팔았어요.

 

: 그럼 영업이 되나?

 

: 볶음밥, 잡탕밥, 잡채밥도 못 팔게. 그때 당시 정책이 잘못된 게 뭐냐면, 중국집만 못 팔고 한국 식당은 그런 제도가 해당이 안 된다는 거예요. 중국집은 쌀밥에 보리쌀 4할인가 섞어야지. 근데 한국식당은 그런 거 없었어. 그때 당시 뭔가 잘못된 거지. 안 그래요? 외국 사람에 대한 제한이 심할 때야. 어렸을 때 기억이 좀 나는데, 그때 중국집에선 먹고살기 위해서 잡탕밥 대신 잡탕면을 해서 팔고 그랬어요. 근데 그게 나중에 왜 폐지가 됐냐면, 외국에 그런 게 소문이 좀 퍼졌나봐. 한국정부에서 중국 사람들 쌀밥 못 먹게 한다, 밀가루만 먹고 살아라 이런다,. 자존심도 강하고 뭐 좀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들 제3국으로 가는 길을 택했죠. 미국이나 캐나다 이민 많이 갔어요. 제일 많이는 간 곳은 미국, 캐나다. 호주도 많이 갔어요. 물론 대만으로 제일 많이 갔고. 그 당시 돈 좀 있는 사람들은 다 이민 많이 갔어요. 또 일부는 자기 재산 불릴 목적으로 부동산 좀 살라고 한국귀화도 많이 했고…. 농사짓는 사람도 그땐 많았거든. 그래 한국사람 명의 빌려다가 땅 사는 사람, 아예 한국 마누라 얻어서 마누라 이름으로 부동산 산 사람…그러다보니까 물론 다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재수 없어서 나쁜 사람 만나면 하루아침에 사기 당하고…. 그래서 아예 한국 국적으로 귀화한 사람도 많았죠.

 

: 귀화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 그때 당시는 공무원 보증만 있으면 가능했어요. 5급 공무원인가 보증만 서면 가능했어요. 두 사람 보증만 서면 가능해요. 한국에서 와이프 얻으면 사촌, 팔촌 다 있어. 또 기본 재산도 있어야죠. 옛날에 편한 게 주민등록증 말소된 사람들 신고할 때 한 번씩 끼어서…. 그런 기한 있잖아요? 하여튼 별별 방법을 다 써서 한국에서 살기 위해서…. 여기(중산학교) 옛날 학비 비쌌어요. 그래서 아예 아이들 한국학교 집어넣는 사람 많았어요. 한국에서 사는데 한국말 하면 되지, 뭐 그런 생각으로. 화교인데도 중국말 못하는 학생 많아. 특히 지방에서 더 했어. 그 사람들 귀화해야 살지. 굳이 중국사람 돼서 뭐하냐고. 뭐 암튼 그런 것도 많았고…. 그래도 요즘 차이나타운에 화교가 많아진 거예요. 옛날엔 차이나타운 거의 황폐화되었어요. 중국 사람들 속성이 있어요. 귀화하면 부끄러운 게 좀 있어서 쉬쉬하고 한국동네 가서 살고 그랬어요.

 

: 그러면 누가 귀화를 했다 하면 여기 사시는 분들이 별로 안 좋게 생각하고 그런 게 있었어요?

 

: 그런 게 있었어요. 화교들 옛날에 공무원을 할 수 있겠어요? 취직을 할 수 있었겠어요? 할 수 있는 거라곤 짜장면 장사밖에 없어.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는 한국대학교, 일반 대학교 나와도 외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취직이 안 되었어. 그러니 그 사람 선택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잖아? 원래 자기도 공무원도 하고 싶고 취직도 하고 싶고… 출세해보고 싶은 사람이 없었겠어? 그렇다고 대만 가면 하루아침에 다 출세하고 그러나? 대만에 있는 대학 나오면 몰라도. 한국대학 나온 애들 대만 가서 취직 할 수 있나요? 없어요. 솔직히 말해서 나도 기회가 있었으면 귀화했을 거예요. 우리 같은 사람은 멍청한 사람이고, 그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이에요. 화교신분으로 부동산취득법이 완화되기 전에… 1997 8월에 외국인 부동산취득법이 완화되었어요. 원래는 주거용 살림집은 200평 미만이고 영업점은 50평 미만이었어요. 그것도 다 내무부장관 허가를 받아야 되고. 인감증명? 외국 사람은 유효기간이 한 달이에요. 또 허가 받으려면 3개월이나 걸려. 그러니 외국 사람이 집을 사려고 해도 그건 한마디로 사지 말라는 얘기지. 메이빤파(沒辦法), 메이빤파! (방법이 없다는 말) 또 어떤 지 알아? 집 파는 사람, 조건을 붙여. 3개월 후에 인감증명 하나 떼어다오. 돈 좀 남겨놓고. 기한은 3개월이야. 그래야 겨우 집을 살 수 있었어요. 인천 화교협회 별 역할 다 했어요. 부동산 사는 거 다 협회에서 했어요. 공짜가 어디 있어? 다 돈 좀 찔러주고…. 또 특별히 중국사람 일 봐주는 사람 있었어. 다 그런 연결고리가 있었지. 옛날 세무서, 위생과 양반들 오면 다 돈 줬어. 손 벌리는데 줘야지, 어떻게 해? 세금 같은 것도 외국 사람이란 이유로 더 많았어요. 요즘 한국 나라 정책이 바뀌고 국제화 사회도 되고 외국인에 대한 제도도 사실 솔직히 말해서 엄청 좋아졌죠. 우리도 한국에 거주 자격 있어요. 근데 5년에 한 번씩 신청해야 돼. F5 영주권 나왔잖아요. 하지만 이젠 이중국적 법이 개정된데. 통과가 되었나? 통과되면 1998년 이후 태어난 화교는 한국사람 되는 거야. 남자들 군대 가야 해. 외국인등록증 안 줘. 한국 신분증 줘. 한국 아이야. 그게 바로 이중 국적이야. 1998년 이후에 태어나면 한국국민이야. 살기 싫으면 대만 가라는 거야. 미국식으로 된 거야. 미국에서 태어나면 미국국적 주는 것처럼. 싫으면 대만 국적 신청해. 화교들 중엔 대만 국적이라야 특혜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 경쟁이 수월하다는 거지. 그래 내가 그랬지. 아들보고. 너 애 낳으면 군대 보내. 한국 애들 갈 수 있는 대학 공부 열심히 해서 들어가야지. 우리 손녀딸 한국 애들처럼 살라고. 지금도 너 아들 나면 군대 보내.

 

: 다시 손 사장님 얘기로 돌아오죠

 

: 내가 소학교 들어갔을 때야. 우리 어머니는 참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야. 자식들 그렇게 많고 못살았어도 손재주 하나는 참 좋았어요. 집에 재봉틀이 있어서 어른들 옷 뜯어가지고 어렸을 때 나한테는 새 옷만 만들어 입혔어. 그럼, 우린 연년생이라서 아래로 물려서 가는 거야. 어머니가 깔끔했어. 날마다 제일 어린 것부터 대기상태야. 매일 목욕시켰어. 나는 그래도 제일 장남이니까 새 옷 입었어. 남이 보면 부러울 정도로. 그땐 집집마다 애들 다 많이 낳았어요. 형제자매가 열 명 되는 집도 있고. 보통 네다섯 명은 기본이에요. 애들 보면 겨울에 소매로 코를 닦잖아. 그게 얼면 딱딱해져. 그거 한 번 우구려 뜨려봐. 팍 부러지지. 그런 시절이었다고. 어려서 학교 갈 때 손수건 하나씩 달아주잖아. 그거 코 닦으라는 거야. 저녁에는 집집마다 애들 뭐하냐면 이 잡아. 그땐 이가 왜 그렇게 많았는지…

 

: 저도 그랬어요. 미국에서 온 DDT인가 하는 밀가루 같은 약을 머리에 하얗게 뿌리고 그랬잖아요?

 

: 맞아요. 그랬죠.

 

: 사장님, 학교생활은 재미있으셨어요?

 

: 내 기억에, 소학교 다니면서 이상하게 내가 키가 좀 컸던 것 같아. 소학교 졸업할 때 12살인가? 송월동에서 우리 아버지가 장사할 때 나한테 이상한 취미가 있었어요.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책가방 던져놓고 주방에 들어가 수타면 만졌거든요.

 

: 아버지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 우리 엄마, 아버지한테 혼도 많이 나고.

 

: 공부가 싫으셨구나?

 

: 그런 게 없지 않아 있었지. 내가 먹을 거? 그때 정말 잘 먹었어. 무조건 곱빼기야. 혼자 먹을 걸 내가 직접 다 뽑아 먹었어. 아버지는 처음 송월동에서 고생하다가 3년쯤 지나고부터는 돈 좀 버셨어. 집에 일할 사람, 배달도 두고 했다고. 그때가 송월반점 때야. 어렸을 때 생각나요. 수타면 연습 많이 했어요. 11살 때부터 장난삼아 하던 게 12살부터는 혼자 다 만들어 먹었으니까. 간짜장, 볶음밥도 혼자 만들어 먹고…. 물론 손님상에는 내놓을 수 없었지

 

: 아버님은 뭐라고 안하셨어요?

 

: 아버지는 뭐라고 안했어요. 일하는 사람 있는데도 혼자 음식 만들기 시작했죠. 원래 체질에 맞았나봐. 그러니까 그랬지. 이상하게 참 재미가 있었어요. 한두 번 뽑다보면 기술이란 건 느는 거야. 두 그릇, 세 그릇 뽑고…. 열서너 살 되니까 기술자가 다 된 기분이더라고요. 열세 살 때던가? 하루는 아버지 친구 황()씨라고 있어요. 화교 분인데. 둘 다 술 좋아했어요. 또 둘이 친해요. 지금 우리 자금성(紫金城) 주방장, 그 사람 아버지예요. 황씨 아저씨는 수타면 아주 고수요. A급이야. 사실 우리 아버지는 프라이팬이거든. 물론 수타면도 다 할 줄 알지만. 전천후지. 젊었을 때 우리 아버지가 어디 가면 주방장하고 그 양반은 부주방장 하던 사이지. 둘이 그런 연관이 있어. 왜 우리 집에 오냐 하면, 장사하다가 그만두고 우리 아버지 도와줄 겸. 심심하면 날 심부름시켰어. “야, 막걸리 한 주전자 받아와.” 황씨 아저씨는 막걸리 좋아해. 우리 아버지는 배갈인데. 면 뽑고 있으면 “내 심부름 갔다 오면 아저씨가 한 수 가르쳐 줄게.” “아저씨 나 안 가요.” “잔돈 너 줄게.” “알았어요.” 송월동 있을 때였는데 대포집이었어요. 지금 포자방 자리야, 그 자리가. 막걸리 심부름 가면 이 양반들 뭐 좋다고 이런 걸 먹지? 술 가져다주잖아? 그럼, 또 주전자 검사해. “잘 가져 와야지 임마, 다 쏟았잖아, 술 모자라잖아.” 당연하지. 내가 먹은 거야. 그렇게 해서 몇 수 배우고 그랬지. … 옛날엔 여기가 다 부둣가였어. 해물 같은 거. 아버지는 항상 자전거 밀고 나랑 같이 가. 갈 때는 나 태워 가. 전깃줄로 얽어서 만든 소쿠리 들고 가면 옛날에는 한국 사람들 복어, 아구 안 먹었어. 길가에 막 버려. 아버지가 나한테 뭘 시키냐면, 징그러운 아구는 놔두고 복어 이것만 주어. 풀어놓으면 이만해. 지금은 비싼 건데 말이야. 한 소쿠리 줍지. 자전거에 매놓고, 우리 아버지가 자전거 밀고 바로 기택이 바(bar)(한국인이 하는 벤뎅이집)로 가. 가마솥이 이따만 한 게 있어. 밖에다가 불 때고. 아구 지게꾼 있잖아. 씻지도 않고 고춧가루, 양념 넣고 지들이 끓여. 안주 값 안 받아. 누구든 와서 떠먹으면 돼. 약주, 잔술 술값만 내면 돼. 그게 기택이 바야. 옛날 그 사람 이름이 이기택씨야. 살아계셨으면 아직 백 살도 안 되었을 텐데. … 후대에서 다 팔아먹었어. 망한 거지. 한국 사람이야. 아무튼 난 기술, 요령 그런 게 좀 있었던 같아. 몇 수 가르쳐주면 금방 배웠으니까. 그러다가 중학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면도 뽑을 줄 알고, 볶음밥도 잘 볶고. 자장 소스 다 볶았어. 어리지만. 12살 되니까 내가 키가 170이야. 힘도 좋고 키도 컸어.

 

: 그럼, 그 후로 학교는 그만두고 그 길로 죽 가신 거예요?

 

: 중학교 들어가니까 우리 아버지가 술 너무 좋아하셨어. 학교 갔다 점심때 밥 먹으러 가면 우리 어머니가 배달 가는 거 보면 짠하기도 하고…. 그래 여차하면 면이나 뽑지 뭐, 이렇게 생각했지. 나중에 내가 “아버지 나, 학교 안다니고 차라리 이걸 할래요.” 했어. 그래서 14, 중학교 2학년 접어 들어가는 해에 그만두었지. “차라리 이걸 하고 말지.”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때 나보다 몇 살 더 먹은 아는 선배님들이 중국집 다닌다고 옷도 그때 당시 청바지 입고 그런 게 그렇게 부러운 거야. 어린 마음에. 날마다 우리 아버지가 점심때 집에 오면 저녁에 술 먹고 있으면 “야, 네가 가서 좀 해줘.” 그렇게 해서 요리 만드는 데 발을 집어넣었어. …그러다가 아버지한테 “아버지! 1, 2년만 여기서 일하고 그 다음엔 남의 집 가서 일할래요.” 그랬더니 “네가 어려서 어떻게 남의집살이를 하냐? 열여덟 살까지만 집에서 있다가 더 큰 기술자 되려면 친구들 다 주방장이니까 그때 서울 보내줄게.” 난 젊으니까 또 체질이 맞아. 파고들어가는 도전 욕심도 있어. 더 배우려고. 예를 들어 야끼만두 싸는 것부터 음식 만드는 것. 수타면은 15살 되니까 아주 수준급이었어. 점심시간 때에 밀가루를 몇 포 처리할 수 있는가 하는 게 중요해. 짧은 한 시간 동안에 몇 포 처리할 수 있는가 하는 거지. 그게 실력이야. 한포에 150그람 나왔어. 두포면 300그람이야. 그것에 따라서 월급을 매기는 거야. 15살 때 되니까 우리 아버지가 장사를 접었어. 송월반점은 동네장사인데 밑에 한집이 더 생겼거든. 마침 제주도에 있는 아주반점이라는 곳에서 아버지를 불렀어. 아버지가 기술이 좋으니까 주방장해달라고. 아주 파격적인 월급을 내놓고 말이야. 내 기억으로는 4만원인가, 6만원인가 했던 것 같아. “이제 우린 식구들도 많고 하니까 더 좀 잘 살아야 돼. 장사 해봤자 밥만 겨우 먹었지 큰 돈 못 번다. 아버지가 기술 있으니까 제주도 가서 돈 좀 벌 생각이다.” 그러니까 월급 좀 많이 준다고 해서 간 거야. 나는 어떡해? 아버지가 잘 아시는 분이 있어. 송도 가다가 인하대학교 쪽 동양화학 못 가서 중국집 하나 있어요. 동태관이라고. 주인이 장씨야. 그 집에서 나보고 월급 만원 준다고 오라고 했어. 그땐 큰돈이야. 내 거기 가서 수타면 뽑았지.

 

: 그때 아버님은 지방에 계시고?

 

: . 제주도 가시고. 그때 어디 살았는지 기억이 안 나네. 그렇게 취직 됐어요. 열다섯인가 열여섯에….

 

: 실력 좋으신데요?

 

: 수타면 뽑으면서 한 2년 정도 일을 잘 해줬어. 여름에 날씨가 더우면 반죽이 부풀어서 국수가 안 나와. 그래도 난 여름에도 국수를 잘 뽑았으니까.

 

: 비결이 뭐예요?

 

: 스승의 덕이죠. 우리 아버지도 가르쳐주었지만 황 사부님이 그 요령을 알려줬어.

 

: 그 비결이 뭔데요? 말씀 좀 해주세요.

 

: 얘기해도 이해 못할 거야. 그렇다고 비밀은 아니고. 월급 타면 청바지도 사 입고, 양복점, 그때는 잘 맞춰 입었어요. 나팔바지도 맞춰 입고. 2년 동안 재미 좋았어요. 근데 나중에 우리 아버님이 제주도에서 연락이 왔어요. 제주도로 오라고. 나보고. 그 양반이 실력이 좋았으니까. 아들도 남의 집에 있다고 하니까. 그래서 갔지. 처음 대한항공 비행을 타 본 거예요. 제주도 아버지한테 가니까 그 집 안주인 아주머니가 아주 친절하게 대해줬어요. 아주반점 규모도 꽤 크더라고. 아마 제주도 가면 아직 있을 거예요, 가게가. 칠성통인가 어디에….그때 내가 열여섯인가? 아버지가 너 홀에서 일 좀 해라. 웨이터지. 주인아줌마, 그 사장 와이프 밀이야. 그이도 주방 가면 힘드니까 홀에서 자기 심부름 좀 해주면 된다고 그러더라고. 그분들도 화교인데, 애들도 다 컸어. 지금 생각하면 그 사장님하고 사모님이 정말 잘 해줬던 것 같아. 그렇게 임시로 1년 반인가 했지. 근데 홀에서 일을 하다보면 팁도 좀 나오고, 멋을 부리고 하니까 우리 아버지가 안 되겠다 싶었나봐. 그러지 말고 너는 아무래도 서울 가서 기술 좀 더 배워야 할 것 같다. 홀에서 일하면 기술자가 못된다. 나하고 서울 가자. 그래서 그만 두고 서울 온 거지. 아버지가 찾아준 직장이 서울 종로3가 관수동인가, 유명한 국일관 옆에 대관원이란 중국집이 있었어. 그때 당시는 아주 유명했어요. 아서원, 대관원 손꼽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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