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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11 /2011.07] 기획 _ The story of SUN(孫)’s Family: 인천화교손덕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2)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09 조회수 156

[Vol.11 /2011.07] 기획 _ The story of SUN()’s Family: 인천화교 손덕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구술: 손덕준 _ 인천 중화루 사장 

채록: 송승석 _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

 

연재를 시작하며

인천대학교 HK 중국관행연구사업단은 화교연구의 일환으로 화교구술채록을 진행하고 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인천화교의 대표적 인물 손덕준(孫德俊)과 그의 가족이다. 어느 일개인의 가족사가 화교 전체의 기억과 역사를 온전히 담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화교 개인의 인생 궤적을 꼼꼼히 되짚어보는 것은 삶의 구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본 연재에서는 구술채록의 일부를 발췌해서 싣도록 하겠다.

 

*. 본 연재는 기본적으로 구술기록의 일부를 발췌해서 싣되, 지나치게 문맥이 어색한 부분은 임의로 수정을 가했다.

*. 문중에 말줄임표()가 있는 부분은 공개하기에 적절치 않은 부분이나 반복되는 내용으로, 구술대상자와 상의 하에 생략한 부분이다. 또한 지면의 한계로 인해 기본 내용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채록자 임의로 생략한 부분도 있다.

*. (???) 부분은 성명이나 상호명으로, 구술자가 한자표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추후에 조사를 해서 보충하도록 하겠다.

 

송승석(이하 송): 말씀 나오신 김에 아버님 얘기도 좀 해주세요. 아버님은 무핑(牟平) 분이시죠? 그럼, 아버님은 처음에 어떻게 이곳에 오시게 된 거예요?

 

손덕준(이하 손): . 지금 우리 아버님 정확한 주소는 이미 다 없어 졌어요, 원래 산동성 무핑현 초가진 순쟈탄(孫家灘)이 우리 주소인데 지금은 바뀌었어요. 뭐냐면 지금 산동성 옌타이시(烟台市) 라이산취(萊山區)예요. 지금은 여기도 아파트 다 지었어요. 이젠 도시가 다 된 거지. 옌타이시가 된 거예요. 그래서 물론 그게 그렇지만 우리 아버님은 사실 그때 당시는 …

 

: 처음에 어떻게 오신 거예요?

 

: 우리 할아버지 있잖아요. 형제가 4형제예요. 큰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는 둘째요. 셋째 있고 넷째 있어, 형제가. 그런데 우리 큰할아버지는 아들이 없었어요. 딸 하나 밖에 없어요. 이 사람이 아주 딸만 낳고 돌아가신 거야. 아들도 없는데. 그래가지고 우리 큰 엄마 있지? 아들이 없으니깐…. 우리 할아버지가 둘째 아니요. 첫째는 이미 죽었고…. 그래가지고 한국은 어쨌는지 모르지만, 큰집에 아들 없으니깐 큰집에 우리 아버지를 줘 버린 거야. 양자로 간 거죠. … 그 재산은 다 우리 아버지 주게 되어 있는 거예요.

 

: 그러면 아버님이 양자로 가게 되신 거네요?

 

: . 우리 아버지가 장남이니까.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둘째 집에 장남이야. 큰 아버지한테 준 거요. 우리 할아버지는 그때 당시 그 동네에서 뭐 했냐면 촌장, 순쟈탄촌의 촌장. 그런 역할 좀 하셨어요. 공부 좀 하신 분이지, 이 양반이. 그리고 셋째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수산업을 한 거요. 건해삼, 해산물 그런 거요. 그런 거 해가지고 또 중국에다가 판매하고 이렇게 했다고.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 삼촌 아니에요? … 큰아버지가 아들이 없고 딸 하나밖에 없는데, 재산은 좀 있고…그래서 우리 아버지 공부 좀 했어요. 아무튼 우리 아버지가 그때부터 순()씨 집 장손이 된 거요. 제사도 다 지내고. 뭐 얘기 안 해도 잘 아시겠지만. 그렇게 공부도 좀 하고, 약혼까지 했어요.

 

: 중국에서 말이지요.

 

: . 이건 우리 어머니도 다 아는 일이야. 약혼한 거. 그런데 왜 그때 중국은 내란, 내전 할 때요. 어지러울 때거든. 그래서 딴 사람은 몰라도 집안의 장손이니까, 한국에 있는 셋째 삼촌한테 보낸다고…

 

: , . 셋째 할아버지는 그때 이미 한국에 와 계셨고?

 

: 그때 당시 한국에서 수산물 무역을 했어요. 새우 살 말린 거, 해삼 말린 거 그거 해가지고 또 중국에다가 판매하고 이렇게 했다고.

 

: 그러니까 한국에서 나는 해삼을 중국으로 파는 거네요?

 

: 그렇지. 한국 해삼 그때 정말 쌌어요. 한국 사람들 해삼탕 같은 거 잘 안 먹거든. 그래서 한국에 있는 중국 요릿집에도 팔고 중국에 있는 현지 요릿집에도 팔고 그런 업을 했어요. …암튼 우리 아버지가 자기 조카지. 우리 아버지가 한국에 왔을 땐 마침 학교가 방학 때였어요. 그래서 방학 기간에만 한국 네 삼촌 집에, 작은 아버지 집에 좀 있어라…

 

: 그러니까 중국의 내란을 피해서 한국에 있는 작은 아버지 댁에 오게 된 거네요?

 

: 작은 아버지 찾으러 온 거죠. 피난 겸 또 한국 가서 거시기 좀 해봐라.

 

: 그때 당시 아버님 나이가 어떻게?

 

: 우리 아버지 그때 당시 몇 살이었냐면 열아홉 살이요. 열아홉 살 청년.

 

: 정혼한 분은 중국에 그대로 있었고, 약혼자는…

 

: 그때 이미 약혼자가 중국에 정해져 있었지. 혼자 한국에 왔어요. 자기 삼촌은…사실 이건 여태까지 한 번도 얘기 안 했는데… 그 할아버지도 이미 돌아가셨어요. 할머니도 다 돌아가셨는데… 나한테는 셋째 작은 할아버지 할머니요. 자기 삼촌한테 왔는데, 열아홉 살 때. 오니까, 거 젊은 놈이고… 그때 그 집도 무역으로 장사를 하기는 했지만 그 집에도 식구가 많았어요. 아들 둘에다가 딸이 몇이야? 넷인가 다섯이요. 두 내외가 부양하기가 좀 힘들었겠어요? 또 그때 당시가 먹고 살기 힘들 때니까.

 

: 인천에 계신 거죠?

 

: 인천이에요. 바로 이 차이나타운에 있었어요. 한마디로 말해서, 조카가 왔으니까, 조카도 자식인데 같이 지냈죠. 그렇게 지냈는데 6.25전쟁, 한전(韓戰)이 터진 거예요. 1.4후퇴 딱 되니깐 못 들어 간 거야 중국에. 그럼 어떻게 해? 젊은 놈이 먹고 살아야 될 거 아니요그때 당시 그 집도 전쟁 겪고 참 먹고 살기도 힘들었어. 젊은 사람이니까 어떻게 해? 자기 밑으로 사촌동생들 쭉 있고…자기가 그거 다 어떻게 해?

 

: 사실, 눈치도 좀 보였겠네요?

 

: 그게 좀 그렇지. …옛날 중화루(中華樓) 있잖아? 거기서 요리사 보조. 그냥 놀고먹을 수는 없으니까 가서 취직을 한 거죠, 요리사 보조로. 거기서 기술 배워서 월급 탄 것 자기 삼촌한테 다 줬지. 삼촌이 어렵게 사는데 먹고 살기도 힘든데.

 

: 월급 받은 거 전부 다?

 

: 그랬어요. 그때 자기 삼촌 하는 얘기가, “야, 젊은 놈이 돈 허투루 쓰면 안 돼. 월급타면 나한테 다 가져와. 내가 모아서 나중에 줄게. 너도 장가가야 될 거 아니야.” 이렇게 된 거에요. 그렇게 한 몇 년 동안 일을 한 거요. 열아홉에 왔으니까 한 5, 6년 일을 한 거요. 여기저기 안 다닌데 없지. 대구에 있는 큰 중국집에도 다니고 요릿집 여기저기 다녔지. 그러다가 나중에 중화루에서 우리 외할아버지 만난 거요.

 

: 그러니까 중화루에 계시기 전에 대구에도 계신 거네요?

 

: 그렇지. 그러다가 나중에 중화루로 가서 우리 외할아버지하고 같이 일을 하게 된 거요.

 

: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 그게 우리 외할아버지가 보니까…, 젊었을 때 우리 아버님도 인물 좀 괜찮았어요. 보니까 젊은 사람이…. 이건 우리 외할아버지 얘기요. 우리 외할머니가 얘기해 준 거지. 보니까 젊은 청년인데 아주 사람 충실하고 생긴 것도 좋고 배운 것도 아주 많고… 그때 당시로는 이렇게 막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생각했던 거지. 우리 아버지 필체도 좋았어요. 명필이에요, 옛날에. 필체도 좋고 하니까 우리 외할아버지가 마음에 들었던 거예요. 이건 우리 외할머니한테 들은 거야. “야, 그 중화루에서 일하는 그 청년 그 순씨라는 청년이 참 내가 암만 봐도 괜찮더라. , 그 친구 아주 공부도 많이 했고 인물도 괜찮고… 다만 한 가지 돈이 없다. 하지만 뭐 돈이란 게 대수이겠냐? 돈이야 나중에 살아가면서 또 벌면 되는 거지.” 우리 외할머니는, 그러면 뭐 제일 중요한건 둘이, 우리 어머니하고 한번 보게 해 줘라 한 거지. 보고 맘에 들 수도 있고 안 들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지금 말하면 선을 보게 된 거지. 그 선이란 거 있잖아요? 요즘처럼 선보는 게 아니에요. 그냥 몰래 우리 어머니가 중화루 한 번 놀러가는 척 해가지고 그렇게 해 가지고…그렇게 만난 거지. 그때 우리 어머니가 솔직히 말해 맘에 드셨던 거야. 그 양반(어머니), 딴 데 암만 소개해줘도 우리 노인네(어머니) 아주 눈이 높아. 그게 다 사람 인연인 거죠. 그게 다 인연이 되려고 맘에 들었던 거야. 그래가지고 맘에 든다고 하니까 얘기가 오가고 그런 거죠.

 

: 제가 생각할 때는 외할아버님이 참 대단하신 것 같아요. 아버님 장래만 딱 보고, 당장은 돈이 없다 하더라도 딸을 딱 주신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 재주를 다 못 피우고 가셨으니….

 

: 사실 그 양반, 한국에 오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에요, 우리 아버님이. 중국 옌타이에서도 체격도 좋고, 참 뭐라고 할까? 지금 좋게 말하면 수재야. 필체도 좋고. 중국에 있을 땐 소문났어. 필체도 좋고. 원래 해군 사관학교 갈려고 했어요. 있잖아, 생도. 우리 아버님이 그랬어요. 자기 친구들 지금 다 대만(臺灣) 있어요. 함장을 하는 친구들도 많았어요. 같은 동기들.

 

: , 그러셨구나.

 

: 그 양반 무핑에서, 수영 있잖아요? 수영대회하면 1등 하는 사람이에요. 체력도 좋고, 그런 양반이에요. 그런데 한국 와서 요리 배우게 되니까…참, 그런 사람들 좀 그럴 거예요. 적성도 안 맞고. (중략)… 우리 아버지 공화춘 주방장까지 했어요. 일류 집에서 말이야.

 

: 그럼 요리도 아주 잘하셨겠네요?

 

: A급이에요. 유명한 사람이요. 공화춘 주방장, 평화각(平和閣) 주방장, 옛날 유명하던 요리사계에서는 인천 최고였었어요. 장사도 여러 번 했어요, 식당. 그러던 양반인데…그 양반 이상하게 운이 없었어. 참 재물 운이 없어. 게다가 연년생으로 애들을 해마다 낳지…

 

: 여덟을 낳으셨으니까…

 

: 원래는 10명이요. 둘이 죽어서 그렇지.

 

: 그럼, 사장님 위로 두 분이 더?

 

: 위로 누나가 하나 있었어. 돌아가셨지. 중간에 또 하나 죽었는데…그렇게 애는 해마다 낳지… 내가 나중에 그 양반 한 서른 후반 되었을 때 보니까, 약주를 좋아하셨어. 술만 먹으면 시를 써요, 그 양반이. 이산가족이요. 그렇게 그…(한동안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거 참 얘기하면…(또 다시 울먹거리며)…그래가지고 난 장남이니까 나를 훈련을 많이 시켰어요. 술만 먹으면 나를 그렇게 앉혀놓고 뭘 가르치나하면, 뭐 솔직해 말해 우리 집안, 조상이야기라던가 뭐 그런 거 있잖아? 형제가 많다 보니까…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양반 참 지리지 복도 없는 사람이야. 그 양반이 쉰 네 살 때인가? 쉰 세 살인가 돌아가셨어.

 

: 쉰 세 살이요.

 

: , 그런가? , 내 아버님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참 재주가 좋으셨어. 말씀하시는 거나…참, 나중에 참 불쌍하더라고. 생각해 봐. 중풍 걸려가지고…우리 어머니가 8년인가 9년 동안 병수발을 했어. , 그 양반 보면 나중에 있잖아요? 병수발하면 뭐해? 나중엔 당신이 아예 가시려고 아주 마음먹은 사람이에요. 왜 그때 있잖아요? 우리 막내 있잖아 그거? 걔한테 자꾸 술 담배 심부름 시켰어. 중풍 걸린 사람이. 그래 내가 그랬지. “아버지. 약을 드셔야지요. 운동도 하시고. 술 담배 그렇게 하시면 되겠냐?”고. 그러니까 우리 아버님 하시는 말씀이, “야, 아들아. 너 나한테 그런 얘기 할 것 없다. 내가 이런 몸으로 오래 살아서 뭣하겠냐? 그냥 네 애비 하고 싶은 데로 놔둬라. 그게 효자다. 네가 자꾸 나보고 담배 피지 마라, 술 먹지 마라, 그러면 그거 필요 없다. 어차피 사람 한 번 가는 건데. 내 하고픈 데로 놔둬라.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하고 가게.

 

: 이산가족이시라 더 그러시겠어요? 고향 생각, 부모 생각도 많이 나고….

 

: 그 양반 어느 정도 자기 부모님을 보고 싶어 했냐면… 참, 그 사람 참…. 그때 당시만 해도 물론 갈 수는 없었지만…. 조금만 좀 더 버텼다면 아마 자기 고향 갔을 거야. 이산가족? 그거 내가 잘 알아요. 왜냐면, 그 술 먹는 이유도 다 그런 부분이 있어요. 진짜 누구 말마따나 고향 그리운… 그 부분은…(또 다시 울먹거리며)… 아주 참 그래…. , 그 사람 팔자라는 게 뭐냐면… 아, 지금 살아계시면 얼마야? 지금 80밖에 안됐어, 살아계시면. 그 양반, 거 태어나서 진짜 한국에 열아홉 살 때 와가지고, 그 진짜 몇 년 동안은 그 자기 작은 아버지 위해서 살았고, 또 장가를 가게 되니까… 그래서 우리 어머님도 원망을 많이 하는 거야. 시집가가지고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었어. 경제적인 것도 그랬고. 결론은 뭐냐면, 그거 해가지고 자식들 먹이고 살라고 그냥 주방장 생활해가지고 그러다가 마흔 넷, 다섯 때 중풍 걸려가지고, 젊은 나이에…. 그래가지고 그게 그 양반 인생이야. 고생만 죽도록…. 열아홉 쌀 때까지는 자기 부모한테 사랑 받고 컸지만. 그 이후로는 그 사람 쫒기는 인생이야, 죽을 때까지. 그것도 그 사람 한평생 인생이야. 운명이라는 건 그런가봐. 그래서 나는 그래. 나한테는 솔직히 말해서 오히려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면, 참 그 양반은 가실 때도 가실 때도 나한테 뭘 남겨 주고 가셨구나. 그게 뭔 줄 알아요? 빛을 남겨 주고 갔어, ! 그렇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고맙게 생각해. 그 사람 나를 사람 만들었어. 그 이유가 뭐냐면, 만약에 나한테 풍요롭게 해줬으면 나 오늘날 없어요. 우리 형제가 이렇게까지 의리가 좋아진 것도 다 그 양반이 심어 준거요. 그 양반이 예를 들어서 집이라도 한 칸 남겨 줬으면 그 집하나 때문에 형제 의리 다 깨졌을 것 아니에요? 그거, 한편으로 진짜 내 아버님이지만 내 스승이요. 요리 쪽에서도 유명하셨고, 나를 요리계로 걷게 해주셨고, 고생하는 걸 가르쳐준 분이야. 사람 고생 안 해가지고는 모든 일에 성공 할 수 없어. 특히, 이런 계통에서는. 돌아가셨지만 나중에 내가 중한수교 되었을 때, 웨이하이(威海)하고 인천 배 딱 뜨잖아요? 내가 그 첫배를 탔어요. 첫배를 타가지고 웨이하이까지 가서 배에서 내려가지고 고향, 그 양반 대신에 가본 거요, 내가. …사실, 우리 집 얘기 하려고 하면 아니, 내 얘기 하려면요? 진짜 책 한권이 아니라 책 여러 권 써요, 얘기 하면 길어요, 진짜. … 지독한 사람이야. 우리 작은 할아버지 말이야. 솔직히 말해 이거 다 얘기하자면 길어요, …머리 이발소 보내면 거 돈 몇 푼 든다고, 그거 머리 길어가지고, 면도칼 뭐 이발, 이거 자르는 거 돈 드니깐 대머리 깎으라고. … 그거 얘기해서 뭐하겠어, 다 돌아가셨는데, 얘기 하다보니깐 나온 거지만.

 

: 그렇게나 고향에 가고 싶어 하셨는데…

 

: 술 먹고 울고 말이야. 사나이가 운다는 그게 있잖아요? 아프니깐 더한 거예요. 반신불수죠. 움직이지도 못하면 얼마나 괴롭겠냐고? 술 한 잔 먹으면서…. 그 심정 모르는 사람은 정말 몰라요. 그거예요. 형제, 부모 다 이국에…다 거기에 있고. 작은 아버지만 믿고 왔는데. 실컷 부려먹고 말이야. 친척이라고 뭐 누구 있어. 마누라 있지. 애는 많지. 돈은 없지. (중략)…그거 다 얘기해서 뭐하겠어? 이미 돌아가셨는데…. 얘기 하다보니깐 나온 거지만. 그게 우리 아버님 그거요. , 그 사람 살아가면서 참 불쌍한 인생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진짜 한국에 와가지고 여유롭게 살아보지 못한 사람이에요. 그렇게 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 그러니까 그게 또 생각나면 괴롭겠지. 자기도 후회스럽겠지. 내가 왜 여기 와서…, 중국에 있으면 그래도 장손이고 말이야. 하기야 중국에 있어도 고생했겠지. 공산당 때문에 말이야. 그렇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런 거 생각하나? 부모 생각이 얼마나 났겠느냐고? 아마 중국에 계셨으면…. 어쩌면 대만으로 건너 오셨을 지도 모르지. 자기 친구들처럼.

 

: 그러니까 잠깐 한국에 있다 다시 돌아가리라 생각하셨는데 결국에는 전쟁 나고 해가지고 못가시게 된 거네요?

 

: 그 양반 아마 지금 생각해보면, 중국에 남아 있었으면 뭘 해도 했을 거예요. 중국에서 한국으로 안 왔으면 아마 해군 쪽에서 뭘 해도 하셨어. 지금 그때 당시만 해도 젊었을 때 대만의 해군 함장 자기 동창이야. 둘이나 있었어요. 해군 함장까지 하는. 중풍 앓았을 때, 한국까지 왔었어요. 생도들까지 데리고… 그렇게 둘이 만나고 우리 집까지 찾아오고 그랬다고. 그런데 우리 집 양반 보니까, 친구도 어이없어 하더라고. 방에서 누워있으니까 어이가 없는 가봐. 뭔가 하실 분인데…. 그래서 사람 운명이라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내가 첫 번째 중국 갔을 때만 해도 아버지가 옛날에 살던 집에 가서 보니까 글자가 쓰여 있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가 써 놓은 거더라고. 우리 아버지 필적이야. , 그때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걸 좀 남겨놨어야 되는데….

 

: 사진이라도 좀 찍어 오시지….

 

: 그땐 뭘 알아? 관심이 없었지.

 

: 그럼 지금은 다 없어졌고요?

 

: 없어졌어. 옛날 나한테 요리에 관한 거 노트에 메모 해준 것도 있는데 그런 것도 다 없애 버렸어. 이사하면서 다 없어졌어.

 

: 그게 대대로 이어지면 가보일 텐데. 그럼, 지금 고향가도 아버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겠네요?

 

: 집 다 헐고 아파트 다 지어 버렸는데, . 순쟈탄은 벌써 다 없어졌어요. 그래서 내가 이번에 거기다가 아파트 하나 샀지. 바로 그 고향에다 말이요. 거기에 산 이유는 뭐냐면 솔직히 말해서 내가 당장 가서 살 건 아니고, 생각해보니깐 만승(萬勝, 孫德俊의 외아들)이 이름으로 해주려고 그래. 만승이 이름으로 해서 열쇠 여러 개 해가지고 형제들 다 많으니까 가끔 마다 가서 교대해서 너희들 가고 싶으면 가서 좀 지내다가 와. 이렇게 하려고. 모르지, 나중에 내가 나이 먹으면 가서 좀 지낼 지도. 거기서 계속 살 수는 없고.

 

: 말씀이 나오셨으니까 말인데, 여기 사시던 노인 분들 가운데에서 아예 산동 쪽으로 이사 가신 분들도 많지요?

 

: 많아요. 지금 그래서 여기 차이나타운에는 연세 아주 많은 사람 별로 없어요. 다 중국 갔어요. 왜 중국에 가나면, 연세 많은 분들 같은 경우에는 중국에 가면 양로원 같은데 가도 싸요. 한국 보다 싸다고. 또 고향이니까. 또 뭐 얘기 들어보니깐, 이제 화교들도 1998년도서부터 태어나는 애들, 남자애들 다 군대 가야돼. 옛날엔 외국인들 주민등록증 안 나왔고 만 18세 되면 선택권 있는데 그거 없어 졌어요.

 

: 국적 선택권 말씀이시지요?

 

: 그렇지.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뭐냐면 서울 화교들 있잖아요? 이중국적 다 준데요.

 

: 서울 화교들만요?

 

: 이젠 다 되겠지, 이중국적. 이제 한국도 미국식으로 되는 거예요. 한국에서 태어나잖아요? 애들 태어나면 한국사람 되는 거예요 이제.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이 자리를 양보해줘야지, 중국 본토에서 오는 사람들한테. 우리가 좀 어정쩡해. 중간에 끼어 가지고. 내가 보니까 차라리 한국사람 되면 또 어떻고 중국사람 되면 또 어때?

 

: 저도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요.

 

: 나도 그래. 우리 솔직히 말해서 우리 손자 태어나면 군대 가야지. 갔다 오라고 그러지 뭐. 난 우리 와이프한테 그래요. 또 여기 학교 뭐, 한국 대학교 무슨 뭐, 외국사람 우대? 아니 한국 애들 그 대학 다 어떻게 가? 다들 열심히 공부해서 가는 거 아냐? 다 공부해서 가야지. 난 뭐 그런 거 필요 없다. 손자 태어나면 다 한국사람 되는 거야. 물론 다른 사람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해.

 

: 나도 젊었을 때는 살기가 바빴고. 진짜 밑바닥서부터 해왔는데. 웬만한 사람한텐 이런 얘기 잘 안 하는데…. 나 어렸을 때, 그 양반 짜장면 장사할 때에요. 내가 학교 다녔을 때였는데, 점심때면 집에 밥 먹으로 왔어요. 그 조그만 가게 하는데 주방에서 아버진 요리하고 우리 어머니도 그때 먹고 살라고 같이 거들고 했거든. 애가 많으니까. 송월동에서 송월반점(松月飯店)이라고 장사했을 때에요. 내가 그때 어릴 때지. 중학교 1학년 때였던가? 그때 마침 어머니가 임신을 했었어. 배달통 들고 배달 가는 거야. 그걸 어떻게 그냥 두고 봐? 내가 뺏어가지고 배달해주고. 배달해주다 보면 어느새 점심시간 다 지나간 거야. 할 수 없이 그냥 굶고 다시 학교 가는 거지, . 참 어렵게 사셨어, 그때 당시만 해도. 그렇지만 난 거기서 얻어진 거 많았지. 우리 어머니도 고생 많이 했어요. 우리 어머닌 그런 얘기 안 하시려고 하죠? 임신하고 배달통 들고 그것도 나무 배달통이야. 그땐 지금 같은 배달통이 아니야. 다 나무 배달통이지. 비라도 한 번 와봐. 배달통 비에 젖으면 그게 천근이야. 얼마나 무거웠다고. 내가 왜 공부 때려 쳤느냐 하면, 사는 게 힘들어서야. 동생들은 많고, 아버진 혼자서 짜장면 만들고 마누란 배달 보내고, 자식들 점심때 밥 먹으러 오면 가게는 바쁘고 어떻게 밥을 먹어? 그래서 내가 “에이, 나 공부 그만 둔다.” 했던 거지. 우리 아버지가 “넌 임마, 왜 학교 안 가려고 그러냐?” 하면, “에이, 아빠! 난 차라리 이거 배워서 이것 가지고 먹고 살래요.” 했지. 그렇게 해서 내가 사실 이 요리계에 뛰어든 거지. 그런데 이 양반은 남의 집 주방장 할 때는 그렇게 남의 집 장사 잘 되게 해주었는데, 정작 자기 장사할 때는 이상하게 잘 안 되는 거야. 그것도 여러 번 했는데 매번…. 그래 어떻게 해? 그 양반 마흔 몇 살에 중풍 걸리면서 내가 학교 그만두고 이 일 시작했지. 주방장 역할을 한 거지. 그땐 월급 잘 받았어, 내가. 그나마 우리집안에 동생들 그걸로 다 밥 먹고 키웠지.

 

: 전쟁 났을 때 아버님은 인천에 계셨어요? 아니면 피난을 갔어요?

 

: 피난을 갔죠.

 

: 할머니 말씀으로는 덕적도로 피난을 가셨었다고 하던데…

 

: 그렇지. 우리 외할아버지 쪽은 거기로 피난을 갔었지. 하지만 그땐 우리 아버지 장가가기 전이에요. 그러니까 따로따로 갔을 거예요, 따로따로. 그땐 결혼 안했고. 외할아버지하고는 피난 갔다 와서, 6.25 지나고 나서 중화루에서 만난 거예요, 그게. 6.25전쟁이 벌써 60년 넘었잖아요?

 

: 그렇죠. 제가 착각을 했네요. 사장님이 55년생이시잖아요? 53년에 전쟁이 끝났으니까 피난 갔다 와서 54년이나 55년에 결혼 하시고…. 아마 아버님이 54년에 결혼하셨을 가능성이 있네. 왜냐면 사장님 위로도 또 한분이 계셨으니까.

 

: 그렇죠. 6.25 때는 아직 결혼 안했어요. 6.25 끝나고 결혼했어요. 그러니까 우리 아버님한테 얘기 들은 거로는, 피난 갈 때 무슨 가방도 있고 옷도 있고 뭐도 다 있었는데…. 그 짐차 있잖아요? 도라꾸라고.

 

: 지금 말하면 트럭이죠.

 

: 그걸 여러 사람이 돈 몇 푼 주고 빌려서…. 뭐 그런 얘기 한적 있었어요. 피난 갈 때 그 어디까지 가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갔다가 다시 돌아왔을 거예요, 아마. 다시 인천에 왔다가 내가 알기로는 내가 태어나고 다시 대구에서도 한 몇 년 사신 거 같아. 그 대구 가서 우리 그 외할아버지 동생 있잖아요, 사촌 외할아버지? 거기도 딸 하고, 딸들 커요. 같이 좀 지냈었던 같아. 대구에선 직장생활을 했는지…. 암튼 뭐 했어요.

 

: 외할아버지 동생 분들 아니, 동생 분들의 자식들, 그 분들은 아직도 다 대구에 계세요?

 

: 원래 동생이 셋인데, 둘은 다 대만에 갔고, 하나는 미국에. 지금은 다 돌아가셨지. 외할아버지 막내 동생네 자식들은 지금 대만에 있고. 이모님도 돌아가셨어. 지금 이모 아들이 대구에서 한의원 의사를 해요. 근데 그 친구가 별로 왕래가 없어요. 왜냐면 나하고는 같이 만나보지를 못했으니까. 다들 바쁘게 사니까. 대구에서 한의대 나와 가지고, 자기 아버지도 한의사 했거든. 그러니까 우리 이모부가 한의였어요. 지금은 다 돌아가시고…

 

: 사실 그 후손들이 미국에도 계시고 대만에도 계시고 하지만 연락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 그렇죠. 후손들은 많이 퍼졌는데…. 옛날에는 우리 막내 외삼촌 할아버지가 가끔가다 오시기도 했었는데. 그 분도 대만에서 학교 선생님 했어요. 애들은 다 미국에 있고 박사학위다 뭐다 해서 어쩌고저쩌고…. 지금은 왕래도 별로 없어요. 가끔 가다 우리 어머니 보러 누나뻘 되는 사람이 오기도 했었는데.

 

: 그러니까 다들 여기 사시다가 대만으로 가시고 미국으로 가시고…?

 

: 옛날 우리 막내 이모, 수원에서 이런 요릿집 크게 했어요. 그런데 다 팔고 대만으로 가신거지. 친척 외갓집은 이모 한분이고, 나머지는 아까 내가 말한 셋째 할아버지. 하지만 그쪽은 왕래가 큰 거시기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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