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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Vol.11 /2011.07] 기획 _ 전통 중국의 상인 (6) 세습황상(皇商)_介休範家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09 조회수 73

[Vol.11 /2011.07] 기획 _ 전통 중국의 상인 (6)    세습황상(皇商)_介休範家

옌훙중(燕紅忠)ㆍ류청후(劉成虎) _ 중국 산시대학 진상학연구소 씀

김수한 _ 인천대학교 HK 연구교수 옮김

 

역사학자들은 진상(晉商:산시 상인) 가운데 “대외무역을 가업으로 삼았던 집단”을 타방(駝幫)과 선방()의 두 무리로 나눈다. 타방은 낙타를 운송 수단으로 삼아 몽골과 러시아 등지를 종횡하며 장거리 운송과 판매에 종사했던 산시 상인을 일컬으며, 선방은 목선을 장거리 운송의 수단으로 삼았는데, 판씨 가문이 바로 이 선방의 대표적 예이다.

 

1 _ 황은(皇恩)을 받으며 삼대에 걸쳐 창업을 하다.

 

판씨 가문을 일으킨 인물은 판융더우(範永)로서 만리장성 일대의 무역을 통해 큰 재산을 모은 한족(漢族) 대부호이다. 만주족(滿洲族)은 중원 진출 이전 변방무역을 매우 중시했다. 랴오동(遼東)의 인삼, 수달가죽, 동주(東珠)등의 특산품과 중원의 양식, 면직물 그리고 금은 장식품을 교환하였다. 만주족이 명조와 대치하며 중원을 도모하고 있을 때, 판융더우를 비롯한 일부 상인들은 변경무역의 중심이였던 장쟈커우(張家口)를 통하여 청군을 위해 군비물자 일부를 해결해 주었다. 판융더우는 이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올렸음은 물론 만청 측과 안정적인 인맥을 형성할 수 있었다. 만청은 중원 진출 이후 옛정을 잊지 않고 판융더우를 수도로 불러 내무부(內務府) 황상(皇商)에 임명하고 장쟈커우에서 가업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렇게 청 왕조의 주목을 받아 “황마고자(黃馬)”를 하사 받은 판씨 가문은 장자커우 무역의 중심이 되었고, 매년 내무부를 위해 물자를 모아 들이는 황상이 되었다.

 

판융더우와 더불어 왕덩쿠(王登庫), 진량위(良玉), 왕다위(王大宇), 량쟈빈(梁嘉賓), 톈성란(田生蘭), 디탕(翟堂), 황윈파(黃雲發) 7명도 이와 같은 영예를 누릴 수 있었다.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는 명말·청초 산시 상인의 자부심인 8대 황상(八大皇商)이 바로 이들이며, 이 가운데 판융더우는 세 번째에 자리 잡고 있다.

 

8대 황상은 중원을 넘나들며 저마다의 전문 영역을 통해 매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복잡한 원인으로 인해 판씨 가문을 제외하고 다른 일곱 가문은 쇠락하여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줄곧 부친의 곁에서 사업을 도왔던 판융더우의 아들인 판싼뱌(範三拔)가 판씨 가문의 가업을 계승하였다. 그는 일가를 새로운 발전단계로 이끌어 내부무 황상 가운데 가장 힘있고 총애를 받는 가문으로 일구어 내었다. 판샨바가 변경무역에 종사한 시간이 짧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무부직을 맡은 시간 역시 그다지 길지 않았다. 그는 중풍에 걸려 귀향하게 되었고 20여 세에 불과했던 그의 삼남 판위빈(範毓)이 가업을 이어받게 되었다.

 

자가 즈엔(芝岩)과 샤오원(紹文)이었던 판위빈은 소년 시절부터 학문적 재능이 있었다. 어릴 적 부친을 따라 변경지역을 돌아다니며 마음먹은 바가 있어 몽골을 포함 현지의 인문풍습, 지리를 익혔다.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심성이 선량하였으며 일처리가 꼼꼼하고 친구를 사귐에 있어 진정성 있고 열정적이었다. 비록 나이가 많지는 않았지만 널리 인맥을 형성하여 몽골 부족의 우두머리마저도 그에게 감탄하여 몽골 귀족들에게 ‘준재’로 불렸다. 판위빈은 판씨 가문의 가업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특히 군량운송과 일본과의 무역에서 그 재능을 발휘하였다.

 

강희(康熙)59(1720),청나라 군대가 중가르부(准噶爾丹部)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원정에 나섰다. 원정길이 사막이고 인적이 드문 곳이였기 때문에 군량 공급은 원정의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가 되었다. 그러나 군량 운송은 간단치 않았고 이를 담당한 관료층 곳곳에 폐단이 쌓여 있어 한 석() 쌀을 운반하는데 백은(白銀) 120()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이 역시 정해진 시간에 공급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벽지의 지리에 익숙한 판위빈은 이 소식을 듣고, 면밀히 검토한 후 그의 넷째 동생인 판위탄(範毓覃)과 함께 자비로 군량 운송을 맡아보겠다는 상소를 올렸다. 강희제는 기뻐하며 이를 윤허하였다. 판위빈의 계산에 따르면 한 석 쌀을 옮기는데 관리들이 책정한 운반비의 삼분의 일인 백은 42냥이면 충분했다.

 

10여년의 원정에서 판씨 가문은 맡은 바 책임을 다하여 100여 만 석의 양식을 운송했을 뿐 아니라 운반비를 한 석당 백은 42냥이라는 당초의 계획에 맞추어 냈다. 이를 통해 국고 600여 만 냥을 절약하였다. 안정적인 군량 보급 속에서 청조의 대장인 푸안주(富安寧)가 투르판(吐魯番)에 군사를 이끌고 진입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달라이라마 6세를 칭하이(靑海)에서 티벳으로 호송할 수 있었다. 이 시기 판위빈 형제는 호부(戶部)사무를 관리하는 이친(怡親)왕 왕윈샹(王允祥)의 추천을 받아 북로(北路)군량 운송의 중임을 맡았다. 판위빈 형제는 사막을 종횡하며 여러 차례 적의 공격을 받았지만 그 맡은 바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옹정(雍正) 9년 판위빈은 군량운송 중 매복공격을 받아 전군이 몰살을 당하고 곡식 13만 석을 잃었지만, 옹정제의 “실제가격으로 보상”하도록 하라는 조치를 사절하고 백은 144만 냥으로 그 손실을 스스로 보전함으로써 조정을 전력을 다해 보필하였다.

 

청 조정은 판씨 형제가 서정평반(西征平叛)중 세운 혁혁한 공에 대한 보상으로 판위빈에게 태부사경(寺卿), 판위탄에게는 포정사참정(布政司參政)을 각각 제수하였고, 판위핀의 아들들에게도 벼슬을 내렸다. 이로써 판씨 가문은 황상과 고위직 관직을 겸하게 되었고 그 이름을 세상에 널리 떨치게 되었다. 이는 청조 200년에 걸쳐 매우 드문 사례였다.   

 

2 _ 황상(皇商)의 반열에 들고, 소금 판매(販鹽)의 거족(巨族)이 되다.

 

판씨 가문은 8대 황상의 반열에 올랐으며 또한 반란 진압 과정에서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을 만천하에 드러내 판씨가의 자손들이 공명(功名)을 얻게 되었다. 이는 판씨 일족이 재부를 쌓는데 있어 튼실한 토대로 작용하였다.

 

판씨 가문의 주요 사업은 소금의 운송판매였다. 청대에 전국에는 량화이(兩淮), 산동(山東), 허동(河東) 10대 소금 산지가 있었다. 판싼뱌는 소금의 생산과 판매를 시작하여 매년 많은 소금세(鹽稅)를 납세하는 것 이외에도 내무부에 백은 2만 냥 이상을 납부하였다. 산시(山西) 사람으로서 판씨는 허둥 소금 산지의 대주주 가운데 하나였는데, 허둥 소금 산지는 진난(晉南)의 졔저우(解州)와 안이(安邑)의 두 현()에 걸쳐 있었다. 판씨 가문의 소금 주요 판매처는 루안(潞安: 지금의 장즈(長治))와 졔저우(澤州:지금의 진청(晉城))였다. 루안은 비단과 철로 유명했고 졔저우는 목재와 약재 그리고 양식 등 자원이 풍부했다. 판씨 가문은 소금을 가져와 루안과 졔저우에서 판매하는 한편, 동시에 현지의 특산품을 구매하여 허둥에 판매하였다. 이런 장거리 운송을 이용한 무역을 일구어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였다

 

판씨 가문의 염업 경영의 진정한 최고조는 창루(長蘆)소금 산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판씨가의 소금 판매는 주로 허베이(河北), 베이징(北京), 톈진(天津), 허난(河南) 20개 지역에 집중되었고 약 천만 명이 먹을 수 있는 소금을 공급하였다. 판씨가는 톈진과 창저우(滄州) 등지에 소금을 쌓아놓는 거대한 창고를 구축하였다. 강희제 제위기간 동안 량화이 염무총상(鹽務總商) ()씨와 산시(山西) 핑양(平陽)의 캉()씨 등의 몇몇 소금 상인만이 판씨 일가와 그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이윤이 막대했기 때문에 소금 상인 간에는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베이징 가까이에 있는 허베이(河北) 여덟 현의 소금 판매는 원래 “리톈푸(李天馥)”라는 이가 맡고 있었다. 그는 자금운용이 순조롭지 않아, 염세 30여만 냥을 못 내고 있었다. 내무부의 추세가 가중되는 등 리톈푸는 안팎으로 어려움에 처해 파산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에 결국 판싼뱌에게 자금을 융통하고자 하였다. 판샨바는 이를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청 조정에 리톈푸가 맡았던 소금 판매 지역을 인수하기를 원하며 밀린 세금 납부를 돕겠다고 알렸다. 내무부는 결국 리톈푸를 내치게 되었는데, 이로써 판씨 가문은 베이징, 톈진 일대에 대한 소금 판매의 독점을 이루게 되었다.

 

3 _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구리 부족(銅荒)을 해결하다.

 

청조 강희제와 건륭제 제위 기간 동안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하였으며 민간 무역이 나날이 성행하였다. 상업 발달은 화폐 수요 급증을 야기하여 윈난(雲南)의 구리()생산만으로는 경제 발전에 따른 화폐 주조 수요를 충당할 수 없었다. 구리광산(銅鑛) 개발은 청조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청조는 유명한 구리 산지인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를 주목하여, “해금(海禁)”을 완화하고 중일무역을 통하여 구리 부족으로 인한 일련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하였다.

 

이때 판씨 가문을 비롯한 대대로 황은을 입은 산시 “황상”들이 이 일에 앞장서게 되었다. 당시에 내무부에 속해 있던 판씨 가문과 장자커우의 향방(鄉幫)인 청칭(呈請)이 나서서 이 일을 담당하였고, 자발적으로 구리의 공급가격을 낮추어 “중용된(知遇)”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청 조정은 1년에 백은 5만 냥의 지출을 아낄 수 있었다. 청 정부는 판위빈 등에게 1699, 1701, 1712년에 걸쳐 우후(蕪湖), 후수(滸墅), 후커우(湖口), 화이안(淮安), 베이신(北新), 양저우(揚州), 징정우(荊州), 펑양(鳳陽), 타이핑챠오(太平橋), 롱쟝(龍江), 시신(西新), 난신(南新), 간관(贛關)에 있는 보원국(寶源局:청조의 화폐 주조 관청)에 대한 구리 공급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구리 부족(銅荒)”문제를 해결하여 연일 앙등하는 화폐 가격을 진정시키고자 하였다.

 

판위핀은 구리 공급의 명을 받은 이후 즉각 인력을 동원하여 숙련된 이들이 거선(巨船)을 조종하여 일본으로 건너가도록 하였다. 판씨 가문의 선박은 연 2회 중국과 일본을 왕복하며 비단, 찻잎, 붓과 먹, 서적 및 뤼안(潞安)의 당삼(黨參), 옌베이(雁北)의 황기(黃芪)를 나가사키로 실어 날라 일본의 구리와 교환하였다. 18세기 중엽 15척의 구리 운반 선박 가운데 판씨 가문 소유가 5척이었고 이후 2척이 더 늘었으며 매년 운송한 구리는 55 5천여 근에 달했다.

 

판씨 일가는 부자간, 그리고 형제간에 업무를 승계하며 70여 년간 일본산 구리 수입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이렇게 수입한 구리의 양은 청조가 매년 필요로 하는 700여 근에 한참 모자랐고 민간에서의 화폐 희귀 현상은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18세기 중엽 이후 일본 역시 구리가 고갈되기 시작, 이에 보호무역 정책을 취했다. 이에 따라 구리 무역을 위한 상업 활동이 어려움에 처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시기 청조가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비단과 누에고치의 수출을 통제하기 시작, () 일본 무역의 주력 상품이 제한됨으로써 구리 부족을 해결하고자 했던 무역 활동의 전망이 불투명해졌다. 1781년부터 1782년 사이, 판씨 가문의 일본 왕래 선박 가운데 풍랑을 만나 화물을 잃는 경우가 부지기수로 늘어났다. 선박이 침몰하고 선원이 사망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판다청(範大成)의 선박이 침몰하여 사람과 화물 모두 가라앉아 6만 냥의 손실을 입었고”,   “파도가 들이닥쳐 3만 포의  소금이 쓸려가 3만 냥의 손실을 입었다 ……”

 

이러한 원인으로 인해 판씨 가문는 거의 파산에 이르게 되었다. 청 조정은 판씨 가문에 대한 쥐어짜기와 이용에 틈을 주지 않았다. 건륭 48(1783)에 이르러 앞길이 막막했던 판씨 가문은 천재와 인재의 틈바구니 속에서 철저하게 몰락하였고 부흥을 꿈꾸었던 희망은 완전히 사라졌다. 건륭황제는 더 이상 판씨 가문의 이용가치가 없다고 여기고 그들이 4대에 걸쳐 조정에 바쳤던 충군(忠君)의 공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1873년 판씨 일가의 재산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빚을 변제하기 위하여 이를 몰수하였다.

 

지난 날 장자커우에서 솟아올랐던 상업계의 큰 별은 파란만장한 역사의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판씨 일가를 대표로 하던 삼진선방(三晉船)은 점차 쇠락하여 해운을 통한 구리 무역의 역사 무대에서 퇴출되었다. 판씨 가문은 그 재산이 몰수되어 건륭시기에 몰락하였고 오래지 않아 그 흔적마저 없어졌다. 졔티현(介體縣)의 지방지에 따르면,판씨 일가의 원적지인 장위안촌(張原村)에는 당시 백 미터에 달하는 판가거리(範家街)가 있었고 그 서쪽 끝에 저택이 있었는데 “작은 금 궁전”이라고 불렸다 하니 당시 건물의 풍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판씨 사당은 장위안촌 동남쪽에 있었는데 그 건축물은 이미 없어졌고 단지 기와 파편만이 굴러다니고 있다. 판씨 가문의 묘지에는 현재 판유치(範毓奇)의 묘만 남아 있는데 돌로 만든 화표(華表:묘 앞에 장식용으로 세우던 돌기둥) 한 쌍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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