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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현장&공간
2월호
연구성과 소개 (1) _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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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1차 인도차이나전쟁 시기 베트남 난교(難僑)’ 문제-중월국경지역을 중심으로-, 중앙사론52, 중앙사학연구소, 202012월, 361쪽-405쪽.

 

본 논문은 중화민국 외교부 당안을 대만 국사관이 정리하여 편찬한 귀국난교반회월남안(歸國難僑返回越南案)을 활용하여, 1차 인도차이나전쟁 초기 베트남 난교문제에 대해 검토했다. 검토 결과 확인된 사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차 인도차이나전쟁 발발 전후 발생한 난교가운데 광시성과 윈난성으로 피난한 난교는 대부분 베트남 북부 출신 화교라는 점이었다. 이것은 베트남 북부와 광시성, 윈난성이 중월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리적 관계상 베트남 북부에서 두 개의 성으로 월경하여 피난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둘째, 광시성과 윈난성 피난 난교는 대부분 현지 생활의 기반이 없고, 2차 국공내전의 정치적 혼란과 그로 인한 물가앙등 등으로 베트남의 원 거주지로 복귀하기를 희망했다.

 

셋째, 중화민국 정부는 난교의 베트남 복귀 진정서를 접수하고, 다양한 외교적, 행정적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난교의 구제와 복귀업무에 관여한 정부 기관은 행정원 선후구제총서, 교무위원회, 외교부 및 주하노이총영사관과 주사이공총영사관, 사회부, 광시성 및 윈난성 정부 등이었다. 여기에 국제연합구제부흥사업국(UNRRA) 및 국제난민기구(IRO) 등의 국제연합기구도 참가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치열한 국공내전 중인데도 불구하고 난교구제와 복귀 업무에 주어진 조건 하에서 최선을 다하려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넷째, 베트남의 프랑스 식민당국은 프랑스군과 베트민군 간의 교전으로 피해를 입은 난교를 위해 구제금을 내는 한편, 양측의 교전이 진정되어 가는 1948년에 들어 여권 미소지 난교의 입국을 허가, 점차 베트남의 원 거주지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단지, 베트남 난교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각종 증명서의 제출을 요구했다.

 

본 논문은 중화민국 당안 자료에 근거하여 베트남 난교문제를 검토한 만큼, 중국측의 입장에서 난교문제를 검토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베트민측과 베트남 프랑스 식민당국 측의 자료도 참고해야만 난교발생의 원인과 문제해결 과정을 보다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본 논문은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양측의 자료가 발굴되어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난교의 역사상이 더욱 분명히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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