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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시사&테마
2월호
“중국”의 재구성? _ 김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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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역사연구의 대상이 되는 지역을 설정할 때, 우리는 지역 설정의 의미에 대해서는 그다지 고민하지 않는다. 예컨대 중국학이라고 하면 무엇이 중국인지에 대한 질문은 실제로는 중시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와 실제 연구자의 학문적 연구에 작동하는 다른 요소들 예컨대, 연구자에 전승된 문화기억의 유산, 학술적 연구를 진행하고 운영하는 데 영향을 끼치는 체제에 대한 것 등 역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다. 하지만 학문적 전통의 축적 과정에서, 거시적 혹은 개인적으로 연구자에 영향을 끼치는 연구 환경과 연구 성과가 유통되고 공유되는 체제가 미치는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지식이 형성되는 체제가 중요한데도 한국에서는 그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지 못했다. 우리가 중국이라고 부르는 지역명칭에도 이러한 문제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중국이라고 부르는 학문적 연구 대상은 누천년의 시간동안 전승된 “기억-민족(memory-nation) 단위”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시대에 따라 그 ‘장소성’을 재구성해야 할 대상으로 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위에서 지적한 현실과 관련되어있다. 우리가 현재 이해하는 중국이라는 지역명칭의 의미에 대해서 그다지 고민하거나 성찰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현존하는 실체로 ‘모두’가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방식은 우리들이 중국이라는 지역을 기억하는 전통 혹은 관행과 관련되어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연구자들에게 중국은 기억민족단위로만 존재할 것이다. 그래야 예컨대 중국이라는 연구영역이 연속성과 통합성을 가지고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집단 기억도 그러한 태도를 지지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중국이라는 장소에 대한 우리의 집단기억이 어떻게 우리의 중국이라는 연구 대상을 규정하는지와 관련하여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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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중국은 칭기즈칸의 능묘가 중국에 위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사진은 중국 내몽고 자치구에 위치한 칭기즈칸 관광지.

중국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영토 안에 존재하는 이민족의 역사를

중국(사실은 한족)의 역사에 통합시켜 간다.


중국이라는 공간을 특정의 장소로 전환시키는 한국에서의 집단기억의 전승은 무엇에 의존하고 있는가. 그것은 아마도 한국의 인문학적 전통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한 중국사 개척자의 지적처럼 “좌전, 사기, 한서 등에서 사통에 이르기까지”의 중국문헌을 읽는 것이 한국전통 사회에서 인문학적 지식체계의 형성과 관련하여 상식적인 현상이었을 것이다. 주류 사대부세계에서 중국역사를 공부하고 중국 경전을 이해하는 것은 일반적 현상이었고 그러한 토양 위에서 이해된 중국은 보다 원천적으로 우리의 인문학적 지식을 규정하는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중국이라는 장소에 대한 집단기억은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중국에 대한 인식을 규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중국이 ‘주체’가 구성한 ‘기억의 장소’라기 보다는 성찰없는 집단기억의 복제된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라는 데 있다. 그래서 중국사 연구는 타자의 공간을 자신의 공간으로 전화시킨 것을 그 연구 대상으로 삼게 되었고, 이러한 인식은 중국이라는 장소를 객관화하기 어려운 지점에 위치하게 만들었다.


한국에서의 중국사 연구의 전통은 기억의 기반, 연구대상의 장소성에 대한 인식 기반 등의 측면에서 여러 가지 근원적 제약과 대응하면서 전개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은 결코 일관된 기억-민족 단위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설정되어왔다.


한국에서의 중국 연구의 전통은 오랜 역사적 연원을 가지고 있다. 중국에 대한 지식이 지배와 정치적/문화적 판단의 인용준거로서 폭넓게 활용되어 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중국은 조선왕조 양반사회가 의탁하는 기억의 저장고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일부 선각자들을 제외하면 조선 사대부 사회에서 중국은 ‘외국’으로 인식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고, 중국이 객관적 탐구의 대상이 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조선이 식민지화되면서 학문적 권위를 제국주의 일본이 독점하고, 그들의 논리가 지배하는 교육체제 안에서 형성된 근대적 학문체계 역시 외국 연구로서의 중국 연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해방이후 한국에서의 주체적 중국연구를 시작했던 한 연구자는 그것을 “일본에 의한 중간소개로 전승된 지식”이라고 지적했다. 식민지 시대를 통해서 조선인이 중국에 대해서 갖고 있었던 이미지는 상당부분 일제의 ‘관리’ 하에 놓인 정보유통 체제를 통해서 형성되었고, 식민지 조선인들은 한국인이면서도 일본인이라는 기묘한 상황 하에서 중국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학문의 측면에서 보아도 일제의 대학교육 체제 하에서 육성된 학문은 보편성보다는 일제의 특수성에 의해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런 체제 하에서 교육받은 학생들 역시 근본적으로는 일본식 중국인식의 한계를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일제 치하에서 중국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만보산 사건을 비롯하여 각종 언론에 게재된 기사분량으로 보아도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으나 그것이 주체에 의한 학문적 관심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되어 있지 못하였다. 또한 대중적 인식 역시 우호적 중국관과 식민지적 중국관 사이에서 요동치고 있었으므로 일관성을 지닌 중국관이 유지되기는 어려웠다.


이러한 중국관의 혼란은 해방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냉전체제 하에서 대만의 중화민국과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의 병존은 중국에 대한 학문적 범주 설정에 장애가 되었다. 인문학적 전통 속에서 중국은 하나로 인식되었으나 현대사에서 경험한 현실로서의 중국은 두 개의 세계로 분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1950년대와 60년대에 대표적인 교양지로 알려져 있던 『사상계』에 수록된 기사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한 연구자에 따르면 사상계의 중국관은 “훌륭한 교양서적을 낳은 과거의 세련된 중국/비도덕적이고 무식한 공산당이 점령한 중공이라는 대비를 통해, ‘동양적인 것’을 되살려야 할 인문적 가치로 자리 매기려는 동양학자들의 전략”으로 설명된다. 즉 인문학적 중국과 정치적 중국을 구분함으로써 인문학적 전통의 중국적 가치를 재구성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사실은 주체(한국)의 재구성(식민사관의 극복)으로 나아가려했던 것이다.


우리 스스로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선배들이 소개하는 책자들은 대부분 중국의 고전들이었다. 중국은 우리와 등치될 수 없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일반 독서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한국어로 된 문헌이 부족한 상황에서 중국고전이 우리의 전통으로 치환되어 이용되는 경향은 널리 사회적 학문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은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적 정체성의 기반에 개입하는 수사학적 도구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Nation-State로서의 현실중국을 소급하여 연구대상을 설정한 중국 연구는 동양이라는 명칭 하에 그 한계성을 은폐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중국 연구는 “모호한 동양” 연구라는 명칭 아래에서 보편적 그 무엇을 매개하는 도구가 되었고, 그에 따라 전통 시대의 중국을 국민국가 중국의 영역으로 통합하는 과정에 대한 지적/학문적 성찰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전통시대 조선 사대부들의 인문학적 기반이었던 ‘세계로서의 중국’과 근대 이후 대립과 갈등 그리고 공존의 대상으로 전화한 ‘단위 국가로서의 중국’은 각각의 방향에서 해방 후 한국의 중국연구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자 즉 인문학적 기반으로서의 ‘중국문화’는 대체로 ‘동양’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지식인 세계의 일부와 문학, 철학, 역사 연구자들에 의해 ‘기억의 장소’로 받아들여졌고, 현존하는 중국은 ‘중공’ 혹은 ‘중화민국’으로 분리되어 각기 다른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역사연구 역시 20세기 말 이후 ‘역사분쟁’이 본격화되기 이전까지는 대체로 전자의 전통에 속해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후자는 사회과학이나 지식인 혹은 사회운동권 영역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연구되어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漢族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학문적 성찰없이 통합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이제는 변해야 하지 않을까? 거란족, 여진족, 만주족, 투르크족, 티베트족, 장족, 위구르족 등의 역사를 분리해서 동아시아 여러 민족들 간의 상호작용을 살피는 것이 올바른 길이 아닐까?


최근 한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프랑스 낭트 박물관에서 개최예정이던 칭기즈칸 시대 몽골제국 관련 전시회는 “칭기즈칸”, “몽골”, “제국”이라는 표현을 삭제하도록 요구한 현지 대사관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사실 중국 쪽의 역사기록은 그것이 존재해 온 이래로 끊임없이 그 영역을 확장시켜왔다. 그것은 진실된 기록이라기보다는 한족 중심주의적 관점에서의 지리적 세계관을 표출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한족 중심주의 관점에서 기록한 중국의 공간적 범주 설정은 매우 자의적인 측면이 있으므로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시아 동부 지역에서 역동적 역사를 만들어 온 다양한 역사주체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내/외몽골(몽골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이라는 기묘한 표기 등에 나타난 타민족 역사의 한족 역사에의 인위적 통합은 이제 소수민족 언어의 말살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우리의 관점이 전근대의 역사를 국민국가 성립 이후의 관점에서 소급하는 방식에 머물러있다면 우리는 현존하는 중국의 역사왜곡을 추인하는데 협력하는 꼴이 아닐까?


김태승의 六十五非 21


김태승 _ 아주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www.mafengwo.cn/photo/poi/5428005_2781811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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