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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8월호
근대의 주변, 다롄의 중국인마을 샤오강즈 _ 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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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사물은 미래의 유물이다. 하지만 그것이 유물로서 보존되느냐의 여부는 지금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미래의 관점에 의해 결정된다. 오늘날 우리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들은 과거가 우리에게 남겨준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과거로부터 선택한 일부라는 말이다. 가령, 1995년 구(舊)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 일은 당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당시 결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남아있다. 오늘날 우리가 근대시기 남겨진 건축물 등의 가치와 보존 여부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하게 된 것도 이로부터 얻은 교훈이리라. 


중국 다롄(大連) 중산(中山)광장의 화려한 건축군은 오늘날 다롄이 근대로부터 선택한 유산이다. 광장을 둘러싼 이 건축물들의 웅장하고도 이국적인 경관은 다롄을 대표하는 관광 상품이 되어 현대인들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하지만 다롄의 문화유산은 실제로 이것만은 아닐 것이다. 유산으로 선택받지 못한 것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웅장하지도, 그렇다고 충분히 이국적이지도 못하다는 이유로 선택에서 제외된 그것들이 지금 잊혀져가고 소멸될 위기에 처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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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롄 중산광장의 야경



아시아의 식민통치자들은 대부분의 식민도시에서 인종분리정책을 실시했다. 처음에는 자국민의 안전과 생활환경의 보장을 위해 거주공간에 엄격한 규제를 가했다면, 이러한 거주공간의 구분은 이후 도시 확장에 따른 인구 증가와 지가 및 물가의 상승으로 인해 자연스레 계급, 계층에 따라 거주구역이 나뉘는 양상으로 발전했다. 나중에는 중국인도 돈이 있으면 외국인거류지로의 진입이 가능했다. 그에 따라 기존의 중국인거류지에는 점점 더 가난한 중국인들이 모여들었다.


결국 식민통치자들이 자국민 위주의 도시건설을 주도하던 지역에는 선진적이고 이국적인 경관이 유산으로 남았다면, 분리정책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발전이 더뎠던 지역에는 식민이 들여온 선진문화가 아니라 자생적인 혹은 그것과 엇섞인 하층문화가 자리하게 되었다.


다롄도 예외는 아니다. 다롄을 통치한 러시아와 일본은 자국민과 중국인의 거주구역을 구분했다. 우선, 러시아는 다롄 시내를 행정구와 유럽구, 중국구 등의 구역으로 나누어 도시를 건설했다. 일본은 러시아의 도시계획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다만, 유럽구와 행정구에 일본인 구역을 설치한 것이 다르다면 다를 것이다. 여전히 중국인거류지는 러시아의 그것과 동일했지만, 새롭게 만든 일본인 구역에 살던 중국인들은 본래 자신의 구역인 중국구로 돌려보냈다. 그곳이 곧 지금의 시강구(西崗區) 내에 있는 샤오강즈(小崗子)이다. 당시에는 기차역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철도변에 위치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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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강즈 자유시장


중국인 이주정책에 따라 샤오강즈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했다. 그중에서도 동관가(東關街)가 가장 활기를 띠었다. 동관이라는 이름은 일본식민시기에 생겨났다고 한다. 당시 샤오강즈에 사는 중국인이 일본인 구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검문소를 통과해야 했다. 그런데 이 검문소가 샤오강즈 동쪽에 세워졌다 해서 ‘동관’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1930년대 초까지만 해도 샤오강즈는 중국인들만의 거리였다. 일본이 다롄을 점령한 이후 항구에서 거래되는 무역량이 신장되면서 인근 산동(山東)에서 건너오게 된 노동자들도 이곳에 거주했다. 이른바 하이난디우(海南丢)라고 불리는 이들 산동출신 노동자들은 주로 부두노동자나 인력거꾼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점차 인구가 늘게 되면서, 중국인의 생활에 필요한 두부공장, 자전거포, 잡화점 등 가내수공업자들은 물론, 중국인이 경영하는 주요 상점들도 대부분 이곳에 자리 잡았다. 중국인들이 이곳을 ‘다롄 민족자본의 발원지’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골목 사이사이로 아편굴과 사창가가 들어선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터이다. 여기저기서 모여든 이들이 한데 부대끼며 사는 곳이고 보니, 이곳엔 언제나 그들이 쏟아내는 다양한 무용담과 모험담이 넘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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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만든 그림엽서 속 샤오강즈의 상점들


샤오강즈의 오래된 상점들은 그 긴 세월만큼이나 많은 일상을 이곳에 사는 중국인들과 함께 했다. 가령, 용위안춘(永遠春)이란 소품대여점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당시 민간에서의 혼례는 종종 황제가 부마를 들이는 의식을 흉내 내곤 했다. 그래서 혼례식에 궁중의 의상과 소품이 필요했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이곳 용위안춘을 찾아 화려한 의상과 가마, 등, 북, 깃발 등을 빌려 썼다. 이외에도 이곳에는 사진관도 있었다고 한다. 이름부터 화려한 ‘화춘(華春)’이 바로 그것이다. 다롄 최초의 중국인 사진관이었다고 하는 이곳의 주인은 취우위제(邱玉階)란 사람이었다. 일본인 사진관 ‘쓰치다(土田)’에서 사진기술을 배운 그는 1907년 고향 진저우(金州)에서 처음 사진관을 열었다 얼마 안 있어 샤오강즈로 가게를 옮겼다. 샤오강즈 ‘화춘’의 쇼윈도에는 언제나 유명 영화배우들의 사진이 내걸려 있어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잡아놓곤 했다고 한다. 노동자와 소상인들의 팍팍한 삶에 조금은 색다른 활력을 더해주지 않았을까.


샤오강즈에서는 중국현대사에나 나올법한 인물들에 얽힌 이야기들도 들을 수 있다. 1885년 ‘캉지시잔康記西棧’ 약방이 이곳 샤오강즈에 문을 열었다. 다롄 최초의 약국이었다. 이 약방은 훗날 캉더지康德記로 이름을 바꾸고 인근 지역에 지점을 늘려가면서 꽤나 유명한 이들과 연을 맺기도 했다. 가령, 동북군벌 장줘린張作霖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던 장줘샹張作相이 진저우의 캉더지에서 보약을 지어 가는가 하면,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완링위阮玲玉가 광고모델로 등장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 당시 다롄의 가장 번화한 시장이었던 시강(西岡)시장 남문 앞에 자리한 ‘이지(益記)’필방도 숨겨진 중국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1927년 4월 처음 문을 연 ‘이지’는 겉보기에는 문방사우를 취급하는 여느 필방들과 다를 게 없었지만, 건물 2층은 조금은 은밀하고도 숭고한 공간이었다. 중국공산당 지하조직원들의 접선장소였던 것이다. 조직원들이 이곳을 잘 찾을 수 있도록 가게 문 옆에 커다란 붓을 걸어두었다고 하는 ‘이지’에는 초기 공산당 지도자 차이허썬(蔡和森)도 베이징으로 가던 길에 잠시 들른 적이 있고, 이밖에도 수많은 공산당원들이 거쳐 갔다. 그러나 ‘이지’의 수명은 1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1928년 3월 결국 일본당국에 발각되어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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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롄현대박물관에 재현된 이지필방


현재 이곳에서 그나마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과거의 건축물은 대부분 1920년대 지어진 2, 3층의 연립주택들이다. 주로 붉은색이나 검은색 벽돌로 지은 이 주택들은 대개 문밖에서 집안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정원이 나오는 구조로, 위에서 조감하면 전체적으로 회(回)자나 구(口)자 모양의 형태를 띠고 있다. 개중에는 경사진 지붕에 높낮이가 서로 다른 굴뚝들이 장난스럽게 솟아있는 건물도 보인다.


중산광장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들과 비교하면 소박하기 이를 데 없지만, 중국인들의 생활양식에 맞는 건축물에 새로 유입된 외래의 ‘멋’을 서투르게나마 조화시키고자 한 노력이 엿보인다. 유럽풍과 중국풍의 어설픈 공존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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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강즈의 옛 모습


지금의 샤오강즈는 그 오랜 역사를 뒤로 하고 퇴락한 생활환경을 끌어안은 채 도시발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저 발전이 늦었다기보다는 보존과 개발의 갈림길에서 적절한 발전방향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공동의 생활공간이었던 당시의 주거양식은 최근까지도 공동화장실과 공동수도, 공동전기 그리고 주로 석탄에 의지하는 개별난방 등 열악한 생활환경으로 남아있었다. 이곳에 살던 원주민들은 대부분 타지로 이주했고, 외지에서 유입된 또 다른 하층민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 일대를 보존하고 계승하는 데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도 어렵거니와 딱히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실정이다. 더구나 도시기능에 있어 중심상권과 인접해있다 보니 지역의 전체적인 발전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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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거를 앞둔 샤오강즈 주택가                문을 닫은 시강시장


결국, 화려한 근대의 식민유산을 지척에 둔 채 근대화의 맥락 속에서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며 자생적인 문화를 만들어온 이 독특한 생활공간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을 앞두고 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시강시장은 이미 문을 닫았다. 철거를 기다리는 건물들의 거죽만 남은 을씨년스러운 풍경 속에서 예전의 활기와 사연을 상상해보는 것조차 쉽지 않다. 앞으로 이곳이 어떤 모습으로 다시 등장할지, 다롄 사람들의 삶에 또 어떤 사연을 만들어줄 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앞으로 유산으로 남을 만한 것이기를 바란다. 현재와 가까운 미래에 샤오강즈에서 만들어질 사연들을 통해 과거의 사연들도 잊히지 않고 함께 전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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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롄현대박물관에 전시된 샤오강즈 미니어처
                  


【중국도시이야기 8】

 

김남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 이 글은 김지환·손승희 엮음, 『중국도시樂』, 학고방, 2017에 수록된 글임. 


참고문헌

嵇汝廣, 記憶·大連老街』, 大連出版社, 2014.

王軍·萬映辰,俄日占領時期的大連東關街,  大連大學學報』 第37卷 第1期, 2016.

王巍,以大連東關街爲例談歷史街區保護」, 『山西建築』 第41卷 第36期, 2015.


사진출처

李元奇 撮影, 李振榮 主編, 大連夢中來』, 人民美術出版社, 1996.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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