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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8월호
조상신이 된 춘추전국시기 역사인물들: 강태공, 문왕, 관중, 손빈 _ 박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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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신은 각 업종의 종사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어떻게 만들었을까? 간략히 말하자면, 종사자들이 자신의 필요와 일정한 근거를 바탕으로 자신들이 알고 있는 자료 중에서 하나의 대상을 선택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선택한 대상 중에는 사람도 있고 신령도 있다. 인물을 선택하는 경우에는 대개 신격화 과정을 통해 해당 역사인물에 신비주의적 요소를 덧씌우게 된다. 신격화 과정을 거치지만, 역사인물을 조상신으로 선택하는 경우 역사책에 일정한 근거와 이유가 기록되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신격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역사적 근거와 이유는 직접적인 경우도 있고 간접적인 경우도 있다. 확실할 때도 있고 견강부회(牽强附會)한 경우도 있다. 실제로 해당 업종에 커다란 공적이 있기도 하고 전설상으로만 그렇기도 하다. 아무튼 하나로 말할 수 없는데, 여기에서도 중국의 민간신앙에 두드러진 자의성(恣意性) 내지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호에서도 언급했듯이 각 업종의 종사자들은 자기 업종이 다른 업종보다 유래가 깊다는 것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예로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까닭과 내력이 깊고 오래된 인물 중에서 조상신을 찾으려고 했다. 따라서 역사상의 ‘위대한 인물’을 자신의 업종과 관련해 신격화하고, 이를 조상신으로 섬기는 과정이 많이 일어났다. 이미 다룬 바 있는 관우(關羽), 노반(魯班), 공자(孔子), 노자(老子), 유비(劉備), 장비(張飛), 제갈량(諸葛亮) 등이 모두 그런 경우이다. 이밖에도 수많은 역사상의 실존인물들이 조상신으로 선택되어 숭배되었다. 이하에서는 몇 차례에 걸쳐 이런 사례를 총정리해 보고자 한다. 가급적 우리가 들어 알만한 역사상의 인물들을 골라보았다.


• 강태공(姜太公)
강태공은 주(周)나라 초기를 살았던 인물로서, 위수(渭水)에서 빈 낚싯대로 세월을 낚았다는 고사로 유명하다. 이러한 고사에 어울리게 어민들의 조상신으로 숭배되었다. 어업의 경우 업무 자체로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특이하게도 조상신보다는 천후(天后), 마조(媽祖), 대우(大禹) 등의 수호신을 더욱 적극적으로 숭배했다. 그럼에도 조상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姜太公이다. 어민들이 姜太公을 조상신으로 삼은 이유는 전술했듯이 姜太公이 자신을 알아줄 周公을 기다리며 渭水에 빈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점을 치는 점술사들은 업무 자체가 신비주의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서 매우 다양한 신령을 섬겼는데, 강태공도 그 중에 하나이다. 점복업(占卜業)이 강태공을 조상신으로 섬긴 이유는 강태공이 점을 잘 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봉신연의(封神演義)』에 따르면, 강태공 스스로 “나는 풍수(風水)에 능하고 음양(陰陽)을 분별할 줄 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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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太公


• 주문왕(周文王)
주(周)나라 문왕(文王)은 50년간의 재위기간을 통해 주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왕으로서, 중국 역사상 첫 번째 명군(明君)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춘추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주대(周代)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펼쳤는데, 공자가 돌아가고자 했던 주대가 바로 주문왕의 시대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전술한 강태공을 스승으로 초빙하기도 했다.


베이징의 인력거 관련 종사자들, 즉 인력거꾼, 인력거 임대업자 및 관리자 등이 주문왕을 조상신으로 섬겼다. 인력거는 청말(淸末)에 일본에서 건너온 것으로 이를테면 신생 업종이었다. 이들이 신생 업종이기는 했으나 업계가 형성되자 다른 업종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조상신을 섬기게 되었던 것이다.


주문왕을 조상신으로 섬기게 된 이유는 문왕이 위수(渭水)에서 빈 낚싯대로 세월을 낚고 있던 강태공(姜太公)을 스승으로 초빙하기 위해 그를 수레에 태워 손수 끌었다(文王拉車)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이때 강태공은 주문왕에게 “당신이 나를 808 걸음 끌어주었으니, 내가 당신을 808년 보호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주나라가 808년간 이어졌다고 한다. 아무튼 사람을 수레에 태워 끌어주는 일이 인력거꾼의 일과 상통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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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文王의 ‘文王拉車’


• 관중(管仲)
관중은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유명한 제상으로 일찍이 바닷물을 졸여서 소금을 만드는 관청을 설치하였다. 또한 鹽鐵을 생산하는 관영기업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염업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고, 제나라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는 제나라 환공(桓公)이 천하를 제패하는 데에 물질적 기초를 제공했다. 이를 근거로 염업은 관중을 조상신(鹽神)으로 받들었다.


창기(娼妓)들도 관중을 조상신으로 섬겼다. 창기들은 ‘백미(白眉)’라 불리는 신령을 가장 널리 숭배하였다. ‘백미’란 주지하듯이 중국 촉한(蜀漢) 때에 마씨(馬氏) 다섯 형제 중에 눈썹에 흰 털이 난 마량(馬良)의 재주가 가장 뛰어났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이는 창기들이 재주로 먹고 살았다는 점에서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창기들이 ‘백미신(白眉神)’ 다음으로 제나라의 유명한 제상이었던 관중을 조상신으로 섬겼다는 것은 다소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그 유래는 『한비자(韓非子)』와 『전국책(戰國策)』이 분명히 전하고 있다. 관중은 제상으로서 궁중에 시장을 열어 여자들에게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국가의 수요에 따라 최초로 관기원(官妓院)을 개설하였다고 한다. 즉, 창기 자신들이 일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관중을 조상신으로 숭배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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管仲


• 손빈(孫臏)
손빈은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군사 전략가이다. 손빈의 지명도가 그리 높지 않음에도 그가 비교적 다양한 업종에서 숭배된 것은 아무래도 특이한 방연(龐涓)과의 고사(故事)로 유명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우선, 명청(明淸) 이래 장화를 만들고, 고치고, 판매하는 업종에서 일반적으로 손빈을 조상신으로 섬겼다. 손빈은 동료인 방연(龐涓)의 모함으로 월형(刖刑)을 받는다. 장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손빈을 조상신으로 섬기는 근거는 손빈이 일찍이 월형을 받는 것과 관련이 있다. 월형은 발꿈치를 베어 잘라내는 형벌이었고, 발꿈치에서 종아리까지는 장화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버전의 전설이 전해진다.


첫째, 손빈이 월형을 당한 후에 무릎을 보호할 수 있는 장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때 들짐승과 물고기 문양으로 장화를 장식했는데, 이는 문관의 장화와 무관의 장화를 구분하는 표식이 되었다.


둘째, 손빈을 섬기는 이유는 그가 발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그를 위해 장화를 발명하게 되었고, 비로소 장화 상점이 생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 두 종류의 장화가 만들어졌는데, 하나는 문관의 장화이고, 또 하나는 무관의 장화이다. 이것이 장화 상점의 유래이다.


셋째, 귀곡자(鬼谷子)가 하늘나라에 있던 병서(兵書)를 손빈에게 주었는데, 이를 시기하고 질투한 방연이 계략을 써서 손빈의 양쪽 발을 잘라냈다. 칼잡이가 손빈의 양 발을 하천에 버리자 하천에서 장화 모양의 큰 물고기가 튀어나왔는데, 이것을 화두어(靴頭魚)라고 불렀다. 손빈의 친구가 화두어를 잡아다가 손빈에게 보여주었다. 손빈이 물고기를 만지자 잘렸던 발이 위쪽으로 붙었다. 손빈이 일어나 걸었고, 걷기에 편안하였고 빨리 걸을 수도 있었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물고기 모양의 장화를 만들어 신었다.


넷째, 손빈이 방연으로부터 모함을 당해 무릎 뼈가 파헤쳐졌고, 나중에 무릎에 염증이 생겨 발이 문드러졌다. 손빈이 자단목(紫檀木)으로 의족을 만들었고, 소가죽을 이용해 장화를 만들자, 의족이 진짜 발이 되었다. 이후 원근의 주민들이 앞 다투어 손빈 부부로부터 장화 만드는 법을 배웠다.


이상은 전설상의 이야기이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생겨난 것이다. 손빈이 월형을 받은 것과 관련해, 『사기(史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따르면, 손빈은 일찍이 방연과 함께 병법을 공부했다고 한다. 이후 방연은 위(魏)나라를 섬겨 혜왕(惠王)의 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능력이 손빈에 미치지 못한다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은밀히 손빈을 불러들였고, 손빈이 도착하자, 손빈이 자기보다 현명한 것을 두려워하고 질시하여, 방연이 법률상의 형벌로 손빈의 양쪽 발을 잘랐고, 이마에 글자를 새기는 묵형(墨刑)에 처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다양한 전설이 유포되었고, 이를 근거로 다양한 업종에서 손빈을 조상신으로 삼았던 것이다.


북경의 가죽 상인들도 손빈을 조상신으로 섬겼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장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손빈을 조상신으로 섬기는 이유와 동일하였을 것이다.


발과 관련된 고사로 인해 일부 지역의 발 치료사(修脚匠)들도 손빈을 조상신으로 섬겼다. 수각(修脚)은 중국의 민간에서 전문적으로 발의 피부나 발톱에 생긴 질병을 치료하는 기술을 말한다. 중국의 전통 의술과 칼 다루는 법을 결합해 발에 생긴 질병을 치료한다. 중의(中醫)의 침술, 안마와 함께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유행하였다. 중국 여행을 가게 되면 자주 하게 되는 ‘발 마사지’의 조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이들이 손빈을 섬겼던 것은 그가 형벌로 발을 다쳤다가 회복된 것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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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脚하는 모습(民國時期)


무석(無錫)의 혜산(惠山)은 점토인형의 유명한 생산지인데, 여기에서 일하는 점토인형 수공예 장인들도 손빈을 조상신으로 섬겼다. 전설에 따르면, 손빈은 위(魏)나라 장수 방연(龐涓)의 모함에 빠져 오(吳)나라로 도망해 걸인 신세가 되었고, 이후 점토인형을 빚는 일로 생계를 유지한다. 방연을 물리치기 위해 점토로 만든 인형과 말로 진영을 짜보고 전술을 구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위나라를 대파하고 방연을 생포했다. 혜산에 점토인형이 전해져 내려왔고, 해당 장인들이 손빈을 조상신으로 섬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설은 일정한 역사적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손빈이 방연에게 모함을 당한 것, 방연을 대파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점토인형을 빚었다는 것은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대개 점토인형을 만드는 장인들은 자기의 손이 매우 정교하다고 여겨 무엇이든 빚으면 그것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손빈의 군사배치나 작전과 마찬가지로 정교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것에 빗대어 손빈이 점토인형을 빚었다는 전설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지역에 따라 두부 제조업자들도 손빈과 방연을 조상신으로 섬겼다. 전설에 따르면, 귀곡자(鬼谷子)가 손빈과 방연 두 제자를 시험하기 위해 병에 걸린 척했다. 이에 손빈은 스승에게 신선한 재료로 두유를 만들어 주었다. 그때 공교롭게도 깨끗한 소금에서 흘러나온 소금간수가 두유로 흘러들어가 두부가 만들어졌다. 방연은 손빈을 시샘하여 소금물을 석고(石膏) 물로 바꾸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두부가 되었다. 두 사람은 모두 두부를 발명하였지만, 동시에 좋은 두부와 나쁜 두부, 즉 선악(善惡)을 대표하고 있다. 종종 악한 신령도 조상신으로 숭배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악한 신령이 행업에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미리 뇌물을 바친다는 심리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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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臏 行路圖



【중국 행업신 이야기 동업자들의 세속화된 신성 12

 

박경석 _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
姜太公 : https://baike.baidu.com/item/%E5%A7%9C%E5%AD%90%E7%89%99/131150?fromtitle=%E5%A7%9C%E5%A4%AA%E5%85%AC&fromid=131073&fr=aladdin
周文王 : https://baike.baidu.com/item/%E6%96%87%E7%8E%8B%E6%8B%89%E8%BD%A6
管仲 : https://baike.baidu.com/item/%E7%AE%A1%E4%BB%B2/11281
修脚 : http://baijiahao.baidu.com/s?id=1556015975463362&wfr=spider&for=pc
孫臏 : 李喬, 『行業神崇拜 : 中國民衆造神史硏究』, 北京出版社, 2013.8, 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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