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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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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호
20세기 초 미국의 여성 참정권 승인을 견인한 메이블 핑후아 리(Mabel Pin-Hua Lee) _ 정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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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54일 뉴욕 5번가에서 시작된 여성 참정권 옹호 행진(1912 US Suffrage March)에서 만여 명의 군중을 선두에서 지휘하던 여성 중에는 여성정치연합(Women’s Politial Union)의 애니 렌슬리어 팅커(Annie Rensselaer Tinker)나 애나 하워드 쇼(Anna Howard Shaw) 같은 이들과 함께, 16세의 중국 이민 여성 메이블 핑후아 리(중국명 李彬华)도 있었다. 당시 귀화가 법적으로 금지된 중국인 이민자로서 자신은 여성 참정권 투쟁의 혜택을 누릴 수 없었으나 이후에도 메이블 리는 평생 여성의 평등권을 위해 활동했고 차이나타운 내 첫 중국인 침례교회를 세우고 중국계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힘썼다.

 

1896년 중국 광저우에서 태어난 메이블은 어린 시절 중국에서 선교사 학교에 다녀 영어를 익혔고, 19059세 때 어머니와 함께 도미하여 먼저 미국에 가서 목사로 일하던 아버지와 함께 뉴욕 차이나타운에서 성장했다. 중국인 배척법이 지속되던 당시에 배척법 면제 대상으로서 메이블의 가족은 뉴욕 중국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목사인 아버지와 교회 교사인 어머니는 중국 여성을 수세기 동안 억압해온 전통 관습을 거부하고 딸을 현대적으로 키웠다. 가정교육 뿐 아니라 메이블은 증가하는 이민자 자녀를 수용하기 위해 설립된 브룩클린의 공립학교에서 유태인, 이탈리아인 등 다양한 이민자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뉴욕의 진보적 환경에 영향을 받았고, YMCA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중국의 기근 피해자들을 위한 모금 활동을 벌이는 등 사회활동에 활발한 10대를 보냈다(Lee, 2021.3.19.).

 

메이블의 가족은 뉴욕에 살고 있었지만 중국에 있는 친지와 연락을 지속하던 터라 1911년 중국의 혁명 소식에 대해 선명히 알고 있었고, 새로운 중국이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준다는 소식은 해외의 중국인들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울림을 주었다. 미국의 경우, 여성 참정권 운동은 남북전쟁(1861-65) 전부터 시작됐으나 1911년 당시 고작 5개 주에서만 참정권이 주어진 상태였다. 1911년 뉴욕 주의회가 다시 참정권 수정 법안을 부결시키자, 뉴욕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은 같은 해 신해혁명을 통해 중국의 전제 왕정이 무너지면서 오랫동안 예속되어 있던 중국 여성 중 일부가 투표권을 얻었다는 소식에 주목하며 중국계 미국인 공동체에서 돌파 전략을 찾고자 했다. 191216세에 콜럼비아 대학의 자매 대학인 버나드 대학(Barnard College)1) 입학 허가를 받은 수재이자 이미 활발한 시민활동을 하고 있었던 메이블 리를 백인 참정권 회의에 초대했고, 메이블은 소수자 청년으로서 미국의 변화를 위해 싸우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19125월의 퍼레이드 이전부터 중국 소녀 투표를 원하다 Chinese Girl Wants Vote’라는 제하에 메이블에 대해 보도했던 뉴욕 트리뷴(New York Tribune, 1912. 4.13.) 지는 메이블이 여성 참정권 문제에 대해 침묵을 거부한 것은 중국계 미국인이 순종적이지 않은, 시민사회의 활발한 구성원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정치적 주장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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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1. 뉴욕 트리뷴지에 실린 메이블의 사진           사진 2. 1912년 퍼레이드를 보도한 뉴욕타임즈 헤드라인

  

메이블은 만 명 이상의 행진자들을 이끄는 50명 기마대의 일원으로서 시위대를 조직하고 이끄는 데 일조했으며 중국인 공동체의 여성들도 중국이 전하는 희망(Lights from China)”이라는 팻말과 새로운 중국 공화국의 국기를 들고 행진했다. 당시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 1912.5.4.)의 보도에 따르면, 참정권 행진에는 여성에게 투표권을(Votes for Women)”이라 적힌 배너 사이에 전미여성참정권협회는 중국을 따른다, NAWSA(National American Woman Suffrage Association), Catching up with China“는 배너2)와 함께 중국에서는 여성이 투표를 하는데 뉴욕에서는 범죄자나 가난뱅이와 함께 분류된다라는 글도 있었다. 퍼레이드는 동조자, 반대자가 모두 포함된 큰 사건을 만들었고, 뉴욕타임즈가 모든 여성들이 자유롭고 방해받지 않을 새로운 세대의 상징이라 묘사한 메이블은 그 사건의 중심에서 눈길을 끄는, 전국적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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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메이블을 포함 1912년 말을 타고 시위대를 이끈 여성들

  

당시는 배척법으로 인해 중국 이민자들에게 시민권 취득이 막혀 있던 때였지만, 이후에도 메이블은 대학 재학 중인 1914년 중국 학생 월간지에 여성 참정권의 의미(The Meaning of Woman Suffrage)’라는 글을 발표하고, 1915년 여성정치연합의 초청으로 참정권 센터에서 여성평등을 외치는 연설을 하는 등 지속적으로 미국의 여성 참정권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14년 글에서 리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은 여성 참정권을 포함한 기회의 평등”(Lee, 1914. 5)임을 주장했고, 1915년 뉴욕타임즈에 보도된 연설, “잠겨있는 반쪽 The Submerged Half” 에서는 미국 참정권론자들의 기대와 달리 여전히 억눌려 있던 중국 여성들의 동등한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며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취급되지 않으면 어떤 나라도 지속적인 발전을 이룰 수 없다. 여성이 남성과 동족으로 취급되지 않는 국가는 국가 간 치열한 생존 투쟁 속에서 지적, 도덕적 자원의 절반을 개발하지 못한 채 뒤쳐지는 심각한 장애를 안게 된다고 주장했다.

 

1915년과 1917년에도 메이블은 거리에 나서 참정권 투쟁을 위한 행진을 했고, 뉴욕은 1917116일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미국의 모든 여성이 투표권을 얻는 데는 다시 3년이 걸려 1919년 수정헌법 19조가 비준되고 1920년부터 시민으로서 모든 미국 여성이 참정권을 행사하게 됐다. 그러나 메이블과 중국 출신의 여성들은 1943년 중국인 배척법이 철폐될 때까지 시민이 될 수 있는 길이 막혀 투표권 역시 가질 수 없었다.

 

본인에게 혜택이 오지 않는 참정권 투쟁을 지속하는 와중에 메이블은 콜럼비아 교육대학의 석사과정을 거쳐 콜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으로 1921년 중국인 여성 최초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중국의 경제사라는 책을 출판한 후, 유럽에서의 박사후 과정 후 중국에 돌아가 중국의 경제와 여권을 위해 일하려는 청사진을 가지고 여러 차례 중국에 왕래했다. 그러나 1924년 아버지의 사망 후 어머니를 도와 뉴욕 차이나타운 공동체를 돌봐야했고 중일전쟁 이후에는 중국으로의 길이 완전히 좌절됐다. 중국에 돌아가 활동하고자 했던 계획이 좌절된 채 미국에서 평생을 보낸 리는 뉴욕시의 첫 번째 중국인 침례교회를 설립하고 중국인 커뮤니티 센터를 운영하며 중국인들에게 보건 진료, 보육, 직업훈련, 영어수업 등을 제공하면서 중국 공동체에 힘을 실어주는 한편, 중국 공동체를 넘어서서 여성의 권익을 위한 그리고 모두에게 평등한 사회를 위한 활동을 벌이며 여생을 보냈다.

 

2018, 뉴욕시는 니디아 벨라스케즈(Nydia M. Velasquez) 뉴욕 하원의원이 발의한 연방법에 따라 메이블 리의 공적을 기념하며 차이타나운 우체국의 명칭을 "메이블 리 기념 우체국"으로 공식 변경했다. 벨라스케즈는 메이블 리를 기리는 연설에서 그가 여성들이 집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던 시대에 유리천장을 잇달아 깨뜨렸다고 했다. “교실에서의 연설부터 중국계 미국인 여성들을 조직하여 투표권을 확보하는 것까지”, 의원의 말처럼 리의 비전은 오늘날 아시안아메리칸의 정치적 도전이나 여성 역량강화의 움직임에 여전히 살아있다.





【미국의 중국인 9


정은주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이 글은 2022년 졸고 중국계 미국인의 정치성 담론에 대한 검토: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 내 중국인의 시민적 저항 활동을 중심으로다문화사회연구』 제 15권 3호의 일부를 수정보완한 글이다.

 

1) 버나드 대학은 당시 콜럼비아 대학에 여학생의 입학이 허용되지 않아, 우수한 여학생을 수용하기 위해 설립한 자매 대학이다.

2) 미국이 중국을 따라야 한다는 캐치프레이즈는, 진보의 모범으로서 중국 이민 여성을 퍼레이드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도록 내세운 것과 더불어, 당시 중국을 멸시하던 미국 우익 혹은 대중 전반의 애국적 경쟁심을 자극한 참정권 운동의 전략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떤 마스터플랜에 의해서이건 메이블 리의 사상과 활동, 시민적 행보는 당시의 여느 미국 여성보다 앞서 있었음은 틀림이 없다.

 

** 참고자료

Lee, M., 2021, March 19, “The 16-Year-Old Chinese Immigrant Who Helped Lead a 1912 US Suffrage March: Mabel Ping-Hua Lee fought for the rights of women on two sides of the world”, History,com.

www.history.com/news/chinese-american-womens-suffrage-mabel-ping-hua-lee (검색일: 2022.8.1.)

Lee, M. P., 1914, May, “The Meaning of Woman Suffrage”, The Chinese Student Monthly. Barnard College, pp. 526-529. https://timtsengdotnet. files.wordpress.com/2013/12/mabel-lee-the-meaning-of-woman-suffrage-1914.pdf (검색일: 2022.8.15.)

New-York Times, May 4, 1912, “Vast Suffrage Host is on Parade Today”.

New-York Tribune, April 13, 1912, “Chinese Girl Wants Vote: Miss Lee, Ready to Enter Barnard, to Ride in Suffrage Parade”.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New-York Tribune, April 13, 1912, Page 3, Image 3, 미 의회 도서관 Chronicling America website.

https://chroniclingamerica.loc.gov/lccn/sn83030214/1912-04-13/ed-1/seq-3/

사진 2. https://theglindafactor.com/mabel-ping-hua-lee/

사진 3. https://theglindafactor.com/mabel-ping-hua-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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