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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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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
1958년 이후 북한화교학교의 로컬화 _ 송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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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7월 한국전쟁 휴전 조인 이후 북한에서 각 산업에 대한 협동조합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북한화교도 이 운동에 참가하게 되면서 조선인과 함께하는 공동 작업이 많아졌다. 그런데 이 시기 화교는 조선어를 잘 몰라 노동현장의 의사소통에 적지 않은 애로가 있었고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북한정부는 화교에게 조선어를 가르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화교학교에 대한 조선어교육을 강조했다. 따라서 북한정부는 1950년과 1955년에 두 번 화교학교에 대한 조선어 수업의 증가를 위주로 한 교육 관리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1957년까지 중국어 교육을 중심으로 한다는 화교학교의 근본 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한편, 한국전쟁 시기 북한화교의 70% 이상이 귀국했기 때문에 전쟁 이후 화교학교의 학생수는 급감한 상황이었다. 예를 들면, 해방 후 화교 학생 인원이 가장 많았던 1949년에 비하면 1957년의 학생 인원은 약4천명이나 감소된 2,858명에 불과했다. 중국인 교원도 168명으로 반감되었다. 또한 1956년부터 화교학교에서 조선어 수업이 늘어나면서 1957년에는 조선인 교원이 58명으로 증가했다.


1958년은 해방 후 중조관계가 가장 친밀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 해 중국정부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북한에 임시적으로 체류하고 있던 중국인민지원군을 전원 철수시켰다. 북한정부는 북한화교에 대해 관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진행한다는 방침을 전달했다. 그 결과 화교는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에 동원 되었을 뿐 아니라 화교학교의 로컬화가 급속히 진전되었다.


특히, 19597월 김일성이 평양 대성협동조합(大成合作社)의 화교 채소작업반을 시찰했다. 이 시찰은 북한 화교사회를 급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주조선중국대사관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의 시찰 이후 화교사회에서는 정치, 경제, 문화생활 등의 분야에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조선어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계몽 운동이 더욱 활발히 전개 되었다고 지적했다.


같은 시기 조선정부는 화교학교에 대해, 우선 학생을 북한의 사회건설에 참가시켜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북한사회의 일원이라는 자각성을 높였다. 195979일 북한 로동신문에는 평양중국인고등중학교 학생들의 창조적 노동으로 부설된 릉라도윤환도로 개통이라는 제목으로 평양화교학생들이 평양 도로공사에 참가하여 초기 목표를 기일 전에 완수했다고 보도했다. 화교학생이 맡은 이 도로공사는 1959518일부터 625일까지 지속되었다. 3m, 길이 4m의 도로를 포장하는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공사를 기일 내에 완수하기 위해 화교학교에서는 매일 500여명의 학생과 교원이 투입되었다.


도로 개통식에서 화교학생 대표는 우리가 공사 기간에 달성한 모든 성과는 조선노동당과 김일성 주석의 지도와 김일성종합대학을 비롯한 평양시 각급 학교 형제들의 물질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교육과 노동의 결합에 대한 조선노동당의 교육정책을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며, 자신을 붉은 정신으로 무장하겠다라고 발언했다. 이 발언에는 조선노동당의 지시를 관철시키겠다는 화교학생의 결심이 담겨져 있다. 북한 정부는 화교학교에도 천리마반’(千里馬班)의 칭호를 수여하는 등 학생들의 사상의식을 고양해 나갔다.


한편 해방 후 중국에서 파견된 중국인 교원들은 각각 국내로 소환되었다. 19618월 평양중국인고등중학교 교장인 왕항민(王恒敏)도 귀국했다. 화교학교의 교육내용은 1962년부터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감지된다. 그 절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9622월 화교연합회가 조선 교육성에 중국인학교에 대한 조선어수업의 강화를 신청했다. 조선노동당과의 협의를 거쳐, 1962년 봄 교육성은 화교학교에 대한 신과정안’(新課程案)을 제정했다.


이 과정안의 목표는 중국인소학교를 졸업하는 화교학생들의 조선어 수준을 조선인민학교(초등학교) 졸업생들과 동일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북한정부는 전국 중국인학교 중 학생 인원이 적은 학교에 대해 주변 조선인학교로 학생들을 전학시키고, 학생 인원이 많은 중국인학교는 조선학교의 교과서를 사용하도록 하고, 중국어 이외의 수업용어를 모두 조선어로 하도록 규정했다.


신과정안의 실시를 철저히 하기 위해 1962520일부터 2일간 함흥에서 각급 중국인학교 교장 회의가 조직되었다. 전국 화교학교 교장 41명과 각지 화교연합회 간부들이 참가했다. 회의는 참가자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일반회의와 과정안에 소극적인 교장들에 대한 개별담화의 두 가지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모두가 과정안의 실시를 수용하게 되었다. 19638신과정안은 조선교육성 제17호령으로 정식 발표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학생 인원이 적은 중국인학교는 학생을 조선인민학교에 편입시키며 조선인민학교는 중국인반을 신설한다. 그리고 학생 인원이 비교적 많은 중국인학교는 학교 명칭의 보류를 인정한다.

둘째, 전국 중국인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는 모두 조선 교육성이 편집한 것이어야 하며, 수업 용어는 조선어로 해야 한다.

셋째, 다만 중국인학교에서 과외시간을 이용하여 중국어 수업을 할 수 있으며, 그 회수는 매주 5번에서 10번으로 늘릴 수 있다.

넷째, 화교학교의 교장은 조선인이 맡는다.

다섯째, 학생들의 졸업 및 진학시험의 용어는 중국어 사용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의 화교학교는 교과서 및 강의 언어가 조선어로 변경되었으며, 1966년까지 많은 화교학생들이 조선인민학교에 편입되었다.


사진 평양시 대성(大聖) 구역 화교 근로자학교 학습 총화(196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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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화교연합회 기관지 華訊1960.7.5


사진 2  평양중국인고급중학교 음악대 기념사진(1960.7.30)

송우창2.JPG



【북한화교와 한반도 9】

 

송우창(宋伍强) _ 중국 광동외어외무대학(廣東外語外貿大學)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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